“스타크다.” 네드의 말에 수업을 듣던 피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좋냐?” 아닌척 하고 있었지만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수는 없었는지 옆에 앉은 네드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조용히 하라며 네드를 나무랐지만 배실배실 흘러나오는 웃음에 오히려 놀림거리를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소란스러운 뒷자리에 주변 학생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피터는 주먹을 꼭 쥐었다. 솔솔 졸음만 오던 교수님의 목소리가 신나는 음악 소리로 바뀌어 절로 흥이 났다. 비록 마지막 5분이 죽어라 가지 않아서 조금 좋아졌던 교수님이 다시 미워졌지만 어쨌든 수업은 끝이 나기 마련이니 피터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잘가 네드.”


 

수업 내내 집중하지 못 하던 주제에 막상 수업이 끝나니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싹 바꾸는 피터의 모습에 네드가 웃음을 참으며 인사를 했다. 대학교에 당당하게 교복을 입고 들어와 있으면서도 당당한 모습의 토니를 슬쩍 보고 토니의 주변에 몰린 사람들에 인상이 찌뿌려진 피터를 한번 보고 네드는 킬킬 웃으며 다음 수업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피터 파커 또 빡치겠네.” 작게 중얼거린 네드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피터 파커는 지금 제대로 빡쳤다. 도대체 신은 어떤 작자길래 한 인간에게 좋은 유전자를 몰빨 해주실 수 있는지. 적어도 얼굴을 줬으면 다른거 하나 정도는 부족해도 되련만 토니 스타크는 부족한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 천재적인 머리에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의 후계자라는 타이틀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토니.”

“형!”


 

주변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사람들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더니 자신의 목소리에 내내 스마트폰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환히 웃는 얼굴에 피터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저렇게 대단한 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이 우월감이 느껴졌다. “가자.”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숨기고 등을 돌려 한발짝 먼저 걸어가면 저 애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을 잡으며 자신과 걸음을 맞춰 걸었다.


 

“형 점심 먹었어요? 맛있는거 사줄까요?”

“먹었지 시간이 몇신데. 너 오늘 왜이렇게 일찍 끝났어?”

“오늘 회사 안 가도 되는 날이라서요. 형 보려고 왔지.”

“지이-? 요새 자꾸 말이 짧아진다.”

“..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의 토니가 짧게 뒷 말을 이으자 피터가 뿌듯하게 웃으며 결 좋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토니의 입이 쏙 들어가며 커다란 품에 피터를 가득 안았다. 피터는 항상 자신이 안아준다고 생각했지만 토니는 맞춘 듯 자신의 품에 안기는 피터가 귀여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온 힘을 다해 가득 안았다.

 


“이 앞에 새로운 커리집 생겼는데 갈래?”

“좋아요.”

 

 


***

 

 


토니와 피터는 소위 말하는 소꿉 친구와 비슷한 관계이다. 다만 피터가 토니보다 4살 더 많고, 생글생글 잘 웃으며 순하던 피터가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고와 사망으로 인해 이사를 가게 되며 조금 냉정해졌다는 것 빼곤 다 괜찮았다. 달라진 동네도 직접 찾아갈 수 있을만큼 컸고, 피터의 상황을 한번에 이해할 만큼 똑똑했으니 말이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수석 과학자였던 리차드 파커가 그의 부인인 메리 파커와 함께 사고로 사망한 뒤로 피터는 삼촌과 숙모가 있는 퀸즈로 가게 되었고 하워드의 일에 따라 계속해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게된 토니로 인해 두 사람은 그렇게 멀어지는 듯 했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던 스타크가 사람들이 맨해튼에 정착한 것은 토니의 고등학교 졸업이 1년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조기졸업을 위해 내내 방에 처박혀 있던 토니가 이사 오자마자 한 것은 퀸즈로 가는 것이었다. 피터가 이사가고 몇 달 동안은 연락을 주고 받았기에 토니는 피터가 알려줬던 주소로 달려간 것이다. 비록 피터는 없고 그의 삼촌도 없었지만 숙모를 만나 피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피터가 MIT에 입학해 기숙사로 들었갔다는 소식이나, 피터가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토니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만은 웃음을 보였다는 이야기 등 말이다. 그 후로 토니는 종종 피터의 집에 갔다. 가끔은 그의 숙모인 메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오지 않을 피터를 기다리며 피터네 집 계단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토니가 퀸즈로 찾아온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토니..?”

“형..?”

“네가 왜 여기 있어?”

“..형 보고싶어서요.”

 


중간고사를 마치고 돌아온 피터와 10년 하고도 3개월동안 피터를 기다리던 토니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집 전화번호 밖에 모르던 코 찔찔이들은 서로의 스마트폰 번호를 교환했고, 부모님 뒤만 졸졸 쫓아 다녀야 했던 어린 아이는 본인 소유의 차를 운전해 메사추세추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하교 후 회사에 나가 업무를 배우던 토니는 시간이 나는 날이면 메사추세추로 가 피터를 만났다. 가끔은 저녁을 함께 먹고 캠퍼스를 걷기도 했고, 가끔은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다. 피터는 고등학생인 토니가 자신보다 자신의 전공에 더 해박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시험 결과를 받아든 순간 자존심 없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동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고, 어쩌다 한번 포옹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식으로 연인이 되자고 한 적이 없었기에 서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었는데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토니는 인기가 많았고 맨해튼으로 돌아오기 전 다양한 사람은 만났었다. 피터를 잊은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화려한 파티에 빠져살던 토니는 원나잇을 일삼았고, 피터를 다시 만난 이후로도 몇몇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체로 피터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날이면 굳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피터를 만나러 가는 일을 반복했는데, 아무 미련없이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등을 돌리는 피터를 보고 토니는 한참을 바라 보다가 함께 온 사람을 보내곤 몇 날 며칠을 랩실에 박혀 있었다. 피터는 토니가 함께 온 사람과 밤을 보냈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이는 피터의 착각이다.

 


-형, 저 오늘은 못 갈 것 같아요. 다음주에 봐요.

“못 온다고..?”

 


수업 중 몰래 메시지를 확인하던 피터가 밝기를 줄인 네모난 액정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리니 옆에 앉은 네드와 미쉘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 받았다.

 


M 왜저래? 스타크 꼬맹이 애인 생겼데?

N 그건 모르겠는데 스타크랑 관련된 건 맞는 것 같아.

N 스타크가 오늘 못 온다는데?

M 껌딱지가 왠일이래?

 


노트의 빈공간 위로 빠르게 움직이던 볼펜들이 멈추더니 손의 주인들은 서로를 보곤 동시에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두 사람이 소란스럽게 굴고 있을 때에도 토니에게서 온 메시지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피터가 입술을 꽉 물더니 스마트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교수님만 멍하니 바라보는 피터에 옆에서 기웃거리던 네드와 미쉘은 조용히 수업을 들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수업이 완전히 끝나고 말 없이 짐을 챙기고 있는 피터를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던 미쉘이 팔짱을 끼고 피터를 불렀다.

 


“너 걔 좋아하는거 아니야?”

“뭐?”

“그 꼬맹이 말이야. 맨날 보면 좋아 죽더만.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왜 만나고 다녀?”

“난 걔 안좋아해. 어렸을때부터 친한 동생이라 친하게 지내는거야.”

“너는 그냥 친한 사람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냐? 그럼 얘는 왜 그렇게 안 쳐다봐 멍청아.”

 


한심하다는 듯한 미쉘의 말에 피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안 좋아해.” 억지로 뱉어내듯 말하곤 홱 등을 돌려 나가는 피터에 미쉘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몇 날 며칠 옆에서 답답하게 굴고 있으니 남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도 짜증이 났다. 재미없는 쌍방 짝사랑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한편, 씩씩거리며 강의실을 나온 피터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단 한번도 토니를 연애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미쉘이 알려준 자신의 마음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토니를 좋아한다고? 그 코찔찔이를?’빠른 속도로 캠퍼스를 가로지르던 피터가 우뚝 멈춰섰다. 빠르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당황함에 눈을 꿈뻑이던 피터가 그대로 주저 앉았다. 머릿속으로 토니의 얼굴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상상하니 심장이 절로 빠르게 쿵덕쿵덕 뛰었다. 잔디밭 한가운데 주저 앉아 자신의 심장께에 손을 올리고 심장의 빠르기를 세어보던 피터가 혼란스러움에 아침에 잘 정리한 머리를 헤집곤 그대로 뒤로 누워버렸다. 푸른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하얀 구름들이 토니의 얼굴로 뭉게뭉게 모양을 바꿨다.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이 보였고, 눈을 떠도 그가 보였다.

 


“형!”

“토니..?”

 


하얀색 일색이던 토니의 얼굴이 아닌 진짜 그의 얼굴이 있다. 피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부르는 토니를 보며 다시끔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그런다고 사라질 얼굴은 아니었것만 피터는 그렇게라도 했다. ‘아, 나 얘 좋아하나봐.’ 피터는 토니의 얼굴을 보자 조금 잔잔해졌던 심장의 박동이 다시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피터 파커는 토니 스타크를 좋아한다고.

 


“형! 괜찮아요? 피터!”

“..반말하지 말아라.”

“왜 여기 누워있어요? 얼굴은 왜이렇게 빨갛고! 어디 아픈거에요?”

“아니야. 더위 먹었나봐.”

 

벌떡 일어나 자신을 걱정하는 토니를 지나쳐 걸어가며 피터는 딱딱하게만 나가는 말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토니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니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다. 빠르게 걸어가는 자신의 옆으로 따라와 이것저것 물어보는 토니에게 대충 대답하고 있으니 문득 그가 오늘은 오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너 오늘 못 온다며?”그제서야 자신과 눈을 맞춘 피터에 하루종일 보지 못했던 얼굴을 제대로 보게되니 토니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피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면 피터는 다시 데록데록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형 보고싶어서요.” 술래잡기를 하듯 도망가는 피터의 눈을 쫓아 배실배실 웃는 토니에게 얼른 대답하라는 듯 재촉하니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대답을 뱉었다.

 

“어..?”

“형 보고싶어서 왔다고요.”

 


예상치 못한 토니의 답에 피터가 멈춰서니 도망가던 것을 잡았다는 듯 시선을 맞춘 토니가 바보처럼 배실배실 웃었다. 심장이 머릿속에서 쿵덕쿵덕 뛰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왜 보고싶었는데?”

“형 좋아하니까요.”

 


설마 했던 말을 직접 들으니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름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고 고백한 것인데 고개를 푹 숙이고 서서 눈만 꾹 감고 있는 피터의 반응에 안절부절 못하던 토니가 망설이다 그를 꼭 안아버렸다. 늘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던 토니의 품은 넓었고, 자신보다 더욱 어른스러운 향이 났다.

 


“형, 좋아해요.”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

 


품에 안겨 웅얼웅얼 차갑게 대답하는 피터에 입술을 꽉 문 토니가 품에 안은 피터를 놓아주려고 할 때, 뻣뻣하게 올라온 팔이 자신의 허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비실비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니 가만히 있으라며 피터가 그의 옆구리를 살짝 때렸다. 본인도 웃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면서 계속해서 얼굴을 숨기는 피터에 토니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진짜진짜 좋아해 피터.”

“..이게 자꾸 맞먹으려고 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하는 것에 토니가 시무룩해졌다. 연애에 있어선 항상 우위에 있던 토니이기에 피터의 반응은 신선하면서도 어려웠다. 쿨하게 반응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그때 피터가 꼬물꼬물 작은 손을 움직여 자신의 손에 겹쳐왔다. 피터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마음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나도 좋아해..” 손을 겹쳐잡고 수줍게 같은 대답을 하는 피터에 토니는 참지 못하고 그를 꼭 안아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럽다며 자신의 등을 때리는 피터를 내려주고 나서도 토니는 꼭 안아 힘을 준 팔을 풀지 않았다.

 


“답답해-”

“그래도 조금만 더요.”

“그래.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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