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 권력? 명예?

이것은 꿈을 먹고 사는 남자와 

그를 사랑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태양을 쏘아 죽인 남자

#1





공연 시작을 삼십 분 남긴 시간. 정국은 양손으로 꼭 쥔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꽉 막힌 도로 상황에 초조해하던 재희가 조수석을 힐끗 보고는 혀를 찬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티켓에 적힌 이름에서 눈을 못 떼는 게 영락없는 덕후다. 돈 많은 애 중에서 얘만큼 순진한 애가 또 없을 거야.


“그렇게 좋아?”

“응.”

“쉬운 길 두고 어렵게도 간다….”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정국은 답하지 않았다. 마침 신호가 바뀌고 재희는 액셀을 밟았다. 차량은 머지않아 송화아트센터 내부로 진입했다. 주차를 마치자마자 조수석에서 내린 정국은 뒤도 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야, 전정국 같이 가. 구두로 바꿔 신은 재희가 허겁지겁 뒤따랐다.


예술에 별 흥미 없는 그녀가 빠짐없이 창작집단 ‘새봄’의 연극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이 가여운 친구를 위해서였다. 재벌가에서 딸로 태어나 그나마 숨통 트고 사는 자신과 달리 정국은 아들이다. 막내지만 어쨌든 유일하게 달고 태어난 놈. 그런 정국을 전 부회장이 얼마나 아낄지는 뻔했다. 귀한 아들 사고라도 낼까 봐 스물셋 먹고 면허도 못 따게 한 것만 봐도 답 나오지.


여하간 유난이신 정국의 아버지 탓에 웬만큼 그럴싸한 이유를 대지 않고서는 최 비서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재희가 본의 아니게 데이트를 빙자한 친구의 덕질에 동참하게 된 이유다. 벌써 햇수로 3년째.


“두 장이요.”


요즘 핫한 팀인 새봄의 공연답게 티켓교환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초대권을 입장권으로 바꾸고 브로슈어를 집어든 정국이 활짝 웃는다. 천진한 그 미소에 재희가 못내 따라 웃었다. 아, 시작하겠다. 정국이 서둘렀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자 객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둘은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늘은 많이 나와?”

“응. 주연이야.”

“아. 축하할 일이네.”


나한테도. 그 사람은 그나마 잘생겨서 눈이 즐겁거든. 애써 뒷말은 삼킨 재희가 브로슈어를 펄럭였다. 이젠 하도 봐서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출 하나에 배우 다섯. 소규모 극만 올리는데 이렇다 할 무대 장치 없이도 그냥 연기로 다 씹어 먹는다고. 뭐랬더라? 정국이 하도 극성이라 재희는 그냥 외웠다. 연극 좀 본다면서 새봄 모르면 그 사람 연극 보는 거 아님. 문외한인 재희로서는 ‘뭐 그렇게 잘하나?’ 싶었지만 말이다.


“시작한다.”


조명이 꺼졌다. 소란이던 관객석에 적막이 깔린다. 이윽고 중앙에 핀 조명 하나가 떨어졌을 때, 무대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정국의 입술이 작게 벌어진다. 남자는 순식간에 정국의 정신을 사로잡아 버렸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그의 존재만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첫 대사부터 재희는 직감했다. 이 연극이 존나게 따분할 것이란 사실을. 정국이 반드시 공연 막바지에 눈물을 펑펑 쏟아 내리란 것도. 


극은 인터미션 없이 한 시간을 달렸다. 시작 십 분 만에 까무룩 잠들었던 재희는 엄청난 굉음에 눈을 번쩍 떴다. 무대를 바라보니 예의 그 남자가 시체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재희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국에게 건넸다. 혹여 소리가 샐세라, 입술을 질끈 깨문 정국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휴 저렇게 울어서 뭐가 보이긴 할까. 손수건을 도로 넣은 재희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남자의 텅 빈 눈동자가 허공을 향하고… 그는 또다시 독백을 시작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두 사람은 코를 흥 먹었다. 자든지 울든지 하나만 해도 창피한 일을, 둘 다 해버린 탓에 민망해진 재희가 얼른 가자며 정국을 채근했다. 그러나 정국은 좌석에서 엉덩이를 뗄 줄 몰랐다.


“뭐해? 안 가?”


정국은 여전히 무대만 보고 있었다. 그때 꺼졌던 조명이 다시 켜지며 환하게 무대를 밝혔다.


“관객 여러분 즐거운 관람 되셨나요?”


그럼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재희는 정국에게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예. 사회를 맡은 해리, 김석진입니다. 정말 많이 기다리셨죠? 저도 이날을 기다렸는데요. 오늘은 바로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날입니다. 귀한 관객 여러분의 시간을 저희가 오래 뺏을 순 없으니, 지체 없이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그 속에서 정국은 누구보다 힘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화답하듯 차례로 등장한 배우들이 무대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다. 석진은 큐 카드를 넘겼다.


관객과의 대화는 사전 질문과 현장 질문 중에 몇 가지를 골라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석진은 판넬에 붙은 포스트잇을 살폈다. 대다수가 연기와 연출에 관련된 질문이었다. 석진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자 정국은 집중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재희는 비집고 나오는 하품을 숨기지 않았다.


극장 안에 화기애애한 공기가 퍼진다. 물 흐르듯 행사를 진행하는 석진의 화법은 적당히 화려했고, 또 적당히 담백했다. 그의 말에는 마에스트로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좌중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연극은 끝이 났지만 관객은 여전히 그의 한마디에 울고 또 웃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초연 때는 해리가 루시의 시체를 조용히 묻어줬는데, 이번에 바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하고 유송이 연출님 앞으로 이렇게 질문이 와 있네요.”


‘저거 내 질문이다.’ 정국이 묻지도 않은 것을 기쁜 듯 속삭였다. 재희는 선심 써서 끄덕여 주었다.


“황야 초연이 벌써 3년 전이죠? 이 관객 분은 정말 저희를 오래 좋아하신 것 같아요. 여기 와 계신가요?”


어, 어떡해. 정국은 씰룩이기 시작한 광대를 간신히 잠재웠다. 소심하게 옆구리 쿡 찌르는 손길에 재희가 대신 손을 들었다. 석진이 정말 감사드린다며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재희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 예에.


“그러면 자, 유송이 연출님.”


석진이 연출인 송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는다. 정국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피어난다.


“예, 이 부분은… 제가 아니라 김석진 배우가 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이 제가 바꿨습니다.”


그의 능청에 또다시 관객석에 웃음이 터진다. 


“사실 그 연출이 원작의 정서와는 맞지 않죠. 하지만 제가 해리를 벌써 세 번째 연기하면서, 그의 해묵은 감정을 한 번은 터트려주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제정신일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여러분도 알고 계시듯 해리는 지극히 절제적인 인물입니다만, 제가 느낀 해리는 분명 한 번쯤은 다 내려놓고 목놓아 울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흔쾌히 이해해 준 연출님, 배우들 그리고 관객 여러분께도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정국과 재희가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였다. 재희로선 예상치 못했던 관객과의 대화까지, 도합 네 시간을 탕진해 버린 셈이다. 정국이 너만 아니었어도 퇴근하고 씻고 루이 뱃살 만지면서 미드 볼 시간인데. 친구의 불평에 정국이 멋쩍게 웃으며 대신 운전대를 잡는다. 물론 전정국은 면허가 없다. 없어도 운전을 너무 잘해서 무면허 무사고에 빛날 뿐. 


조수석에 앉자마자 신발을 훌훌 벗어 뒷좌석에 던진 재희가 종아리가 주물렀다. 정국은 음악을 틀었다. 차분한 피아노 연주곡이 흐른다. 이제 정국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으로 데이트는 끝이 난다.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운전 중인 정국의 손목을 가만 보던 재희가 불쑥 말을 꺼내놓기 전까지는.


“정국아.”


왜. 정국은 건성으로 답했다. 그러나 뒤이은 질문은 건성으로 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석진도 게이일까?”

“갑자기?”

“잘생겼지 키 크지 몸 좋지. 게이가 아니면 억울할 수준인데.”

“음… 아마 아닐걸.”

“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 게이일 리가.”

“그래? 표본이 문제인가. 내 주변엔 게이는 잘생겼다는 편견에 힘을 싣는 사람이 너무 많아.”


대표적으로 너. 정국은 쓰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여자친구 있어.”

“와. 깨끗한 척하더니 언제 뒷조사했어?”

“관객과의 대화 때 연출 기억해? 그 사람이야.”

“아~ 아.”


김석진이 아깝다. 정국은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너 이러다 결혼하고도 김석진 쫓아다니겠다.”

“은퇴만 안 하면.”

“자꾸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스폰 하라고 벌써 오만 번 말했다. 이딴 극장 말고 빵빵한 스크린으로 봐.”


금방 김석진 여자친구 있다고 했는데 한다는 말이 저래. 정국은 인상을 찌푸렸다. 돈 많은 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고방식이 똑같다. 사람 위에 사람 있다고 믿는 거.


“싫어. 절대 안 해.”

“대체 왜? 그 외모면 제의 많이 받았을 걸? 네가 안 해도 김석진이 다른 스폰 구하면 그만이야. 뜨는 것도 시간문제고.”


그건 또 싫은지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고작 이 정도 말에 저런 얼굴 할 거면, 맴돌지만 말고 뭐라도 해 보겠다. 재희는 정국이 영 한심스러웠다. 무명배우 김석진은 돈이 필요할 테고 재벌3세 전정국은 돈이 아주 많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뻔히 있다. 그걸 두고 불필요한 수고를 하는 정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신호를 받으며 정국이 액셀을 밟았다. 입안에서 혀를 굴리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그냥, 무대 위에 있는 배우 김석진을 보는 게 좋아.”


지독한 순정에 재희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 돈 많은 애 치고 이렇게 순진한 애가 또 없다니까.







대개 연극쟁이는 두 부류로 나뉜다. 공연 내내 술을 들이 붓는 팀과 일절 하지 않는 팀. 새봄은 어느 쪽이냐 하면 회색분자다. 다수결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오늘은 만장일치였다. 마시자.


“위하여!”


짠. 맥주잔이 공중에서 부딪힌다. 연출과 배우 나부랭이들, 그리고 귀하신 스태프 님들까지. 막공을 무사히 마치고 긴장이 풀린 그들은 술이 아닌 분위기에 취한 듯했다. 소위 공연 뽕이 빠지지 않은 배우들은 오늘 공연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댔다. 그 중심에는 주연인 석진이 있었다.


왁자지껄했던 술자리 분위기가 차분해질 즈음 석진은 자리를 옮겼다. 맨 끝에 앉아있던 송이가 옆자리에 놓아둔 가방을 치웠다. 빈자리를 채운 석진이 새 잔을 꺼내 들었다. 아이고 우리 고생하신 연출님, 한 잔 받으시죠. 송이는 웃으며 목덜미가 벌게진 남자친구가 주는 잔을 받았다.


“배우님은 적당히 좀 드시죠.”

“오늘 같은 날은 좀 봐 주시죠.”


배우 아니랄까 봐 반쯤 취해서도 말투를 곧잘 따라 한다. 송이가 석진의 볼살을 가볍게 꼬집었다.


“오늘 좀 감동이었다.”

“뭐가?”

“그 허접했던 황야 초연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아.”


석진이 제 앞에 놓인 잔을 털어내며 대꾸했다. 


불과 3년 전, 맨땅에 헤딩으로 선생님 한 분 없이 우리끼리 극단을 만들었다. 대단한 백그라운드도 이렇다 할 노하우도 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과 뜻 하나로 뭉쳤다. 매일같이 다투는 게 일이었고 뭐 하나를 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 그랬던 우리가, 우리만으로 송화아트센터를 채우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새봄이 연극판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고작 6인으로 구성된 작은 팀인 새봄은 뛰어난 연기력과 특색 있는 연출로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좁디좁은 연극판에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들의 공연은 연일 빠른 속도로 매진되었다. 팀뿐만 아니라 연출 송이를 비롯한 배우 개개인의 인지도도 상당히 올라, 소수지만 연습실 건물 앞에서 죽치고 있는 팬까지 생길 정도였다. 에이스를 꼽자면 단연 석진이다. 사람들은 김석진 얼굴 보고 입덕하면 연기로 탈덕문을 닫아 버린다며 떠들어댔다. 그 여자 관객분도 그런 케이스 아니었을지? 송이가 느물거리며 비행기를 태운다. 석진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나 잠시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양해를 구한 석진이 조용히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밤공기가 차가웠다. 그는 벌어진 코트를 여미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이윽고 막다른 골목길, 석진은 시끄러운 도시 소음 사이에 적막이 엉킨 곳을 발견했다. 그 한가운데 멈춰 선 석진이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서울의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렁이며 까만 밤을 담던 눈이 스륵 감겼다. 공연을 끝내면 어김없이 밀려오는 짙은 허무가 서서히 몸을 잠식한다. 


석진은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리던 라이터 대신 낡은 폴더 폰을 꺼내 들었다. 2011년 11월 10일. 어느새 날이 이렇게.


“하아….”


석진은 생각했다. 내 인생은 허상과 실제의 어디쯤을 달리고 있지 않은가. 능선을 오르내리는 일이 그에겐 평지를 걷는 것보다 익숙했다. 이런 삶에서 현실 감각을 유지하기란 이따금씩 버거운 일이었다.


또다시 긴 한숨이 직선을 그린다. 아직 해리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 한다. 틈틈이 돈도 벌어야 한다. 안주하지 않기 위해 연기에 대한 고민을 멈춰서도 안 되었다. 감상에 빠져 한숨 돌리는 것 또한, 지금뿐이어야 했다. 석진은 자조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 위해 직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당위 명제뿐인 것이다.


감정을 갈무리한 석진이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펴고 섰다. 훅 끼친 한기에 목도리를 꽁꽁 싸매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정지당해 있는 줄 알았는데. 미납요금이 언제 납부되었나. 공연에 파묻혀 사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네 할머니.”


유일하게 아직까지 연이 닿아있는 피붙이다. 석진은 지친 기색을 감추고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언제나와 같이 조모의 애정 어린 타박이 이어진다. 석진은 꾸중에는 애교로, 걱정에는 감사로 답했다. 할머니와의 대화는 항상 “너희 아빠는 언제 만나 줄 거니.” 라는 말로 끝이 났다. 그 화제만큼은 석진도 웃음으로 대충 무마해 넘길 수밖에 없었다.


통화를 마친 석진은 다시 호프집으로 돌아왔다. 하나 둘 쓰러져있는 만취자 사이를 비집고 앉은 그가 물었다. 송이는? 먼저 들어간다던데요. 지민의 말에 석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앉은 재필이 안주를 뒤적거리던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요즘 배우들은 헝그리, 헝그리 정신이 없어. 감정도 씨발, 간절해야 나오는 거라고. 하여튼 빠져가지고…”


선재필은 깡패 같은 경력만큼 연기력도 뛰어나지만 꼰대 기질이 있는 배우였다. 말마따나 본인이 정말 극단에서 바닥부터 닦던 시절 사람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같은 세대면서. 그래도 그것만 빼면 쓸 만 한 사람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지민이 그의 말을 받아치면 석진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유하게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헝그리는 개뿔. 형님, 돈이 재능입니다. 돈이.”


소주를 원샷한 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돈만 준다면 재능이고 뭐고 다 팔겠다, 하고 석진이 반쯤 진심인 말을 더한다. 야, 야 저기 금수저 새끼들 나온다. 아니 금수저가 아니라 금수야 금수. 재필이 턱짓으로 TV를 가리켰다. 지민과 석진이 나란히 몸을 틀어 커다란 화면을 바라본다. ‘연이은 재벌 갑질 논란, 이대로 괜찮은가?’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지난여름 전해숙 전무가 레스토랑 갑질 사건을 일으킨 데 이어, 벌써 올해만 두 번째죠? 아주 이 집안사람들 사고뭉치예요. 네, 이번 갑질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전해인 씨는 송화그룹 전정욱 부회장의 막내딸이라고 합니다. 승무원이 자신을 째려봤다며 멀쩡히 이륙 준비 중인 여객기를 멈추고 전 승객을 내리게 했다는데요.」


돈 많은 놈들의 또라이 짓 이야기였다. 에이 씨발. 걸하게 욕을 뱉으며 지민이 고개를 원위치했다. 석진은 물끄러미 화면을 응시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익숙한 기업 로고와 함께 송화그룹 전 씨 일가의 신상이 나열된다. 순간 석진이 눈을 크게 떴다. 자료화면 구석에 있는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어서.


“…….”


아니 착각이겠지. 돌아앉은 석진이 잔을 비웠다. 끝맛이 씁쓸했다.





정국은 모처럼의 휴일을 망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사고는 전해인이 쳤는데 왜 나예요. 왜!”


최 비서가 능숙하게 과자 봉지를 뜯어 대령했다. 분기탱천한 와중에도 정국은 와삭와삭 전투적으로 과자를 씹어 먹었다. 새로 온 기사가 상석을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쾅! 기어이 화를 참지 못한 도련님의 힘찬 발길질에 시트가 진동한다.


“기자 얼마나 와요.”

“많이는 안 불렀는데 포털 메인에 올라가긴 할 겁니다.”

“허, 나보고 총알받이 하라고?”

“겸사겸사 사진 업데이트도 좀 하라고 합시다. 어제 TV보니까 도련님은 무슨 고딩 때 사진을 박아 놨더만.”

“개빡쳐….”


정국은 이가 갈렸다.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전해인이 쳐놓은 깽판을 자신이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에.


“보도 안 막은 거 전해인 버릇 고치려는 거잖아. 그럼 이것도 걔가 해야지 왜 내가 해요.”


정국과 해인은 송화전자 전정욱 부회장이 늦은 나이에 본 쌍둥이다. 전 부회장은 후계자로 유력한 정국과 달리 해인은 비교적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정국이 ‘바르게’ 자란 딱 그만큼 해인은 훌륭한 망나니로 자랐다. 이번 건만 해도 해인은 평소처럼 개같이 살았을 뿐인데, 하필 전파를 타 버린 게 문제였다. 안에서 새던 바가지가 밖에서까지 새 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룹 전체에 대한 여론까지 실시간으로 악화 중이었다. 오늘 정국이 참석하게 된 행사는 그걸 잠재울 목적으로 급히 당겨진 것. 쉽게 말해 언론플레이 용이다.


“도련님 외람되지만, 봄날재단은 도련님이 스무 살 되자마자 만들어달라고 조른 것이지요?”

“…….”

“물론 이사장도 전정국 도련님이겠지요?”

“…….”


우수수 쏟아지는 맞는 말에 말문이 막힌 정국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억울해만 하지 말고 할 일 한다 생각하세요. 오늘 행사 진행 멋있게 잘하면 또 아버님이 칭찬해 주실 거 아닙니까. 최 비서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정국은 가까스로 화를 삭였다.


“그건 그렇고 좀 늦겠는데.”


최 비서가 도로 상황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광화문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린 모양이다. 차량 통제의 여파로 길이 다소 막혔다. 그냥 이대로 늦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국이 차창 밖에 시선을 던진 그때.


“어.”


한 남자가 정국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슬로우 모션처럼, 절대 착각하거나 헷갈릴 수 없는 그의 얼굴이 망막에 남았다. 또다시 사로잡혀 버린 정국은 잠시 넋을 놓았다.


“자, 잠시만요. 기사님.”


아, 빨리. 빨리 세워요! 정국은 막무가내였다. 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 남자를 쫓았다. 그런데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지, 전속력으로 달려도 남자와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턱 까지 차올랐다. 결국 따라잡기를 포기한 정국이 길 한복판에 멈춰 서 외쳤다. 


“저기요 김석진 씨!”


한참 앞에서 걷던 석진이 몸을 돌렸다. 마주 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힌다. 그 순간 정국은 생각했다. 스쳐 지나가는 이 찰나가 영원이었으면 좋겠다고. 


“…?”


사람을 불러 세워놓고 답이 없는 정국에, 석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제야 민망해진 정국이 얼굴을 붉힌다.


“지, 지금 가야 할 데 있지 않아요?”

“예?”


석진이 반문했다. 아, 아. 저, 그게. 정국이 박 터지는 소리를 내는 사이 석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히 받아 든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석진을 놓친 정국은 멀리 사라지는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허. 허탈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제정신이 돌아왔다. 정국은 터질 듯 붉어진 볼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잠깐 미쳤었나.





재단법인 ‘봄날’은 청년 예술인을 후원하기 위해 정국이 설립한 재단이다. 돈은 아버지 것이고 업무야 직원들이 다 한다. 그러나 정국의 의지가 없었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단체인 점을 고려하면, 설립했다는 표현이 아예 틀리지는 않은 것이다. 후원 방식은 다양했다. 팀에게 창작준비금 명목으로 주는 것부터 개인에게 생활보조금 형식으로 지급하는 것까지.


「예술인 여러분의 왕성한 활동을 위하여 앞으로도 송화그룹은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을 마친 정국에게 박수갈채와 플래시 세례가 터진다. 정국은 경직된 입가를 다시금 끌어올렸다. 온종일 억지로 웃어댄 탓에 안면경련이 올 지경이다. 그래서 조금 울고 싶어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정작 나의 부를 이용해 얼굴 구경이나마 하고 싶었던 김석진이 참석 안 했는데.


지루했던 행사가 끝이 나고, 녹초가 된 정국은 사무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생했다며 최 비서가 믹스커피와 코코아가 담긴 쟁반을 들이밀었다.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정국은 코코아를 집어 들어 바로 입가에 가져갔다가, 앗뜨뜨뜨, 그대로 혀를 데였다. 질색하며 종이컵을 내려놓은 그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원래 이런 행사 참여 안 해도 불이익 같은 거 없나?”

“그럴 리가. 다음부턴 지원금 못 받는다고 봐야죠.”


뭐야. 그런데 왜 안 왔지?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느라고.


“최 비서님. 저, 후원받는 사람들 리스트 볼 수 있을까요?”


최 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아까부터 뻑적지근한 얼굴인가 했더니 본인 덕질 대상만 쏙 빠져서 그런 거였다.


“김석진 씨라면 3분기 때부터 안 받았는데. 잊었는지 자격 미달인지, 본인이 신청을 안 하면 재단에서 줄 방법 없어요.”

“그게 누구죠?”

“도련님 최애 배우요.”

“저는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새 연기력이 많이… 녹스셨습니다.”


그 말에 정국이 눈을 희게 뜨고 최 비서를 노려봤다. 아, 연기는 도련님의 역린이었지. 큼큼. 괜한 헛기침을 한 최 비서가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본 배우 중에 또 맘에 드는 사람 없었느냐며. 정국은 골몰히 생각이 잠긴 듯했지만 이내 담백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멋있어요. 꿈을 향해 달리는 사람은 다.”


선망 혹은 동경. 가지지 못한 건 언제나 그래서 더 아름다운 법이다.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은 정국이 말없이 바닥을 응시했다. 아직도 그의 볼에는 사라지지 않은 흉터가 미련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최 비서는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새장 안에 사는 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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