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시작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이 문구는 하루에도 백 번, 이백 번은 볼 수 있는 문구지만 05년 당시의 엑토르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진 문구였다. 정말 소중한 문구, 내 인생보다도 더 소중한 문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랬으니, 지금 이 순간의 엑토르가 부딪힌 상황은 커다란 비극이었다.

엑토르 입장에서는 비극이라는 소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지만 말이다.

"고물! 깡통!"

엑토르는 컴퓨터를 쾅쾅 치고, 머리로 들이받고, 자판으로 컴퓨터를 내리치려 시도하기까지 한다.

"아아, 망했어...망했어...어떻게 이런 일이."

엑토르는 자신이 파리에 살고 있다는 게 이렇게나 저주스러운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실감한다. 예술의 도시고 빛의 도시고 사랑의 도시고 어쩌고 하는 건 다 모르겠고, 전기의 도시로나 제발 한 번 만들어주면 안 되는 거냐? 망할 전기가 끊겼잖아, 전기가!

사실 빛의 도시라고 하려고 해도, 빛이 나야 빛의 도시인데 도시 전체가 정전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기절 직전이었다. 암흑이 된 파리라, 말은 낭만적이다. 별도 참 잘 보일 것 같고 어둠을 틈타서 연인들끼리 입술도 쪽쪽 빨아댈 것 같지, 응? 빌어먹을 내 연인은 지금 도쿄에 가 있는데!

엑토르는 좋게 말하자면 연인의 껌딱지고 나쁘게 말하자면 의존증에 분리불안이다. 지금 2년째 연애중인 그의 남자친구는 참 성격 좋은 안정형이라서 신기하게도 엑토르를 참 잘 버텨주고 있고 말이다. 엑토르가 분리불안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식사 중 3분 정도 펠릭스가 업무차 전화를 받으러 갈 일이 있었는데, 그 3분 동안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사실 몇 분 이상인 거 아닐까?' '이 틈에 나를 버리려는 거 아니야?' 아, 놀랍게도 그 와중에 바람피는 건 아닌가 고민은 단 한 순간도 해 본 적 없었다. 펠릭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엑토르가 불안한 건 펠릭스의 변덕뿐이다. 엑토르랑 펠릭스도 동화 속 왕자님 공주님이 아닌 덕분에 감정이 피레네 산맥마냥 위아래로 요동쳤고 관계도 마찬가지로 파국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세상에 둘도 없는 끈끈한 관계로 변했다. 펠릭스는 엑토르랑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는 구석이 없다. 2년을 견딘 게 용할 정도로 맞는 구석이 없다. 바그너와는 둘 다 날카로운 톱니가 있지만 어느 정도 애매하게 대충 끼워맞출 수는 있을 정도로 들어맞는다면, 펠릭스와는-그냥 안 맞는다. 맞추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 맞는다. 원과 삼각형 같은 정도로 안 맞는 거다. 둘의 관계 설명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지금은 파리 시간 기준으로 저녁 열 시이다. 도쿄 기준으론 오전 여섯 시. 펠릭스는 원래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났지만 엑토르와의 통화를 위해 (한 번 통화를 시작하면 두 시간 정도는 놓아 주지를 않으니까) 한 시간을 일찍 일어났다. 그럼 정신머리는 몽롱-한 채로 펠릭스가 화면 앞에서 머리를 빗고, 스킨로션을 바르고, 아침을 먹고 출근할 수 있는 시간의 마지노선까지 열심히 통화를 하다가 출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전이 벌써 한 시간 째 이어지고 있었다. 펠릭스의 출근 시간은 최대로 늦어도 오전 여덟 시다. 여유가 한 시간도 안 남았다.

엑토르는 절박하게 컴퓨터 본체를 툭툭 치고, 그 위에 쌓인 먼지를 후 불어 보고, 울면서 컴퓨터 앞에 무릎도 꿇어 보고 성모 마리아도 찾아 보지만 영 소용이 없었다. 하루에 단 한 시간도 붙어 있을 수 없는 내 사랑하는 연인과, 이제 한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절로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엑토르는 컴퓨터 의자에 뒤로 눕는다. 펠릭스가 하지 말라던, 척추에 아주 좋지 않은 자세를 하고서 발은 책상 위에 걸친다. 기분이 몹시 우울했다. 펠릭스가 있는 하루와 펠릭스가 없는 하루는 차원이 달랐다. 질적으로 아주 다르다. 카페인 중독자들이 카페인이 없는 하루는 하루가 시작했다고 느끼지도 못한다고 말하듯이, 펠릭스 중독자인 엑토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하루를 살아갈 힘이 없으며, 나를 든든하게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도 잃었고, 채워야 하는 일일 사랑분도 부족하고, 기강을 다잡아줄 사람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수준의 하루를 보내게 된다. 사랑도 친절도 다정도 이성도 감정도 뭣도 없는, 도난당한 모나리자 액자 같은 하루.

그 때 갑자기 머리 위의 전등이 지직, 지지직거리더니 반-짝. 하고 불이 들어온다. 최고로 야속한 건, 열두 시 정각이라는 점이었다. 십 분만이라도 더 일찍 들어오지, 십 분만이라도...

컴퓨터를 켜자 '컴퓨터를 시작합니다.' 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아마 컴퓨터는 의식이 없어서 엑토르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모를 것이다. 

엑토르는 본인이 지지리도 운 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운이 없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엑토르는 서러운 마음에 괜히 방구석 쿠션을 집어던지고 마우스를 딸깍거려본다. 펠릭스가 남긴 메시지라도 남아 있겠지, 100%는 아니어도 20% 정도는 충전될지도.

그런데, 펠릭스가 '온라인' 이라는 것 아닌가!

엑토르는 시계를 본다. 도쿄 시각으로 오전 여덟 시 칠 분이었다. 엑토르는 뭘 잘못 먹은 개처럼 돌아버려 화상통화를 연결한다.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고, 화질 나쁜 화면으로 펠릭스가 보인다.

"펠릭스! 내 깜찍한 고슴도치!"

"어휴, 진짜 큰일 난 줄 알았네요.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엑토르, 진짜 미안한데 나 이제 끊어야 해요. 서운할 거 알지만 지금 택시 타도 좀 늦어요."

"알아, 알아! 여기 정전 나서 늦었어, 사랑해!"

"알아요, 엑토르.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오늘 점심시간에라도 한 번 전화 걸까요? 자고 있으려나요? 어쨌든 사랑해요. 몸조심하고. 건강해야 해요."

"응, 하루 좋은 일만 있어. 나 새벽에 일어나서 전화 받을게. 걱정하지 말고. 망할 인터넷, 망할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고 화면 너머의 펠릭스가 사라진다. 짜증은 짜증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진 것은 좋아진 것이었다.

내일 이 시각에는 정상적으로 펠릭스와 통화를 할 수 있겠지.

내일의 '컴퓨터를 시작합니다' 는 이렇게까지 야속한 문구는 아닐 거야! 

클래식 작곡가 RPF/RPS 연성을 합니다. 간혹 작곡가 관련 개인적 사담+ 작곡가 편지 자료+ 작곡가 TMI 자료 등등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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