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금사에서 도로 영녕에게 연락이 오기까지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거리가 온통 눈으로 덮인 겨울이었다. 두 사람을 마중 나온 단선과 함께 영녕과 융롱은 소복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금 순금사의 문턱을 넘었다. 잡혀온 것은 묘하게 이질적인 인상의 여자로, 겨울날 여러 겹의 옷으로 몸을 둘둘 만 흔한 서민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말씀해 주신 정보에 기초하여 추적하니 길모퉁이의 작은 민가에서 이 이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소저께서는 그날 쫓으시던 사람이 맞는지 대조해 주시지요."


"맞습니다!" 하고 단선은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외쳤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이 자는 지금까지 붙잡혀 와서 한 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으니 저희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 하고 단선이 앞으로 쓱 나섰다. "보아라. 너는 어느 집의 누구이고 어제 방화에 관여한 것은 어째서이냐?" 그러자 열리지 않았다던 여자의 입술이 툭 하고 내뱉었다. 


"소저와 나는 어젯밤 서로 쫓고 쫓긴 것 외에 내가 방화에 관여하였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 어찌 벌써부터 사람을 죄인 취급하신단 말이오."

"그건……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사람들이 모두 다관 앞으로 모여 있는데 그 옆에서 홀로 빠져나와 도망치고, 또 그와 함께 그을음과 같은 냄새가 있은 후에 다관에 불이 올랐단 말이냐? 실제로 아무 잘못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 멈춰서 해명하면 되었을 터, 이것이 정황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여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계속 우겼다. "정황 외에 확실한 것이 없잖소이까. 모르는 일이외다."


이렇단 말입니다, 하고 신언해가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일행을 마주보았다. 영녕이 나섰다. 


"순금사가 아이들 도사 지사 놀이 하는 집 앞마당인 줄 아느냐.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지엄한 곳이다. 네가 실제로 불을 냈든 그렇지 않든 마땅히 수사에 협조하여 신원을 밝히고 당시 정황을 알려야 할 터인데 이리 구는 것은 필시 숨겨 놓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렸다."

"……."

"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내 친히 너를 형부로 넘겨 심문하고 말 것이야."


군주의 목소리는 그 나이답지 않게 한기가 서려 서슬퍼런 기색이 있었다. 여자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지못해 한 가지 이야기했다.


"본인 성은 모(暮)가에 이름은 용(容)이요."

"모용? 잠시만, 그것은……."


영녕은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보통 사람들보다 단단하고 큼직한 체격에 튀어나온 눈썹뼈, 짙은 눈매는 필시…….


"너는 모황이라는 자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


그 말에 모용이 눈을 뜨고 영녕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오만."


"내 너와 같은 인상에 같은 성씨를 쓰는 이를 이미 보았는데도 말이냐."

"모르겠소. 비슷한 인상의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겠소."

"맹랑하구나. 여보게 정랑. 이 자를 그대로 둘 수 없겠네. 단선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 자를 방화 사건의 용의자로 넘기고, 화약 밀거래를 한 일당과도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혀지기까지 놓아줄 수 없음이야. 조서를 꾸며 형부로 넘기겠다." 


영녕이 그를 지나쳐 순금사 안으로 걸어들어가려는데 문득 모용이 꿇은 채로 달려가 영녕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잠깐, 화약 밀거래라니 그 무슨 말씀이시오?" 


"모황이라는 자가 화약을 거래하는 일당들 사이에서 물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네가 실제로 불을 놓았는지 어떤지, 그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인물인지 밝혀진 것이 없으니 마땅히 전말을 알아야만 할 터."

"화약이라면 죄 가운데서도 대죄가 아닙니까. 맹세코 그런 일과는 관련된 적이 없소이다!" 


"하면 방화는 관련된 적이 있고?" 영녕은 멈춰섰다. "그것은……." 


"다시 말하건대 아는 것을 사실대로 고하라. 여기서 위증을 하면 형부로 넘어갔을 때 죄가 배가 된다."


뜰에 가느다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녕군주의 발자국과, 모용이 무릎걸음으로 계단까지 쫓아가 쓸린 흔적이 바닥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하오. 불은 내가 냈소."

"어째서?"


모용은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으리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틀림이 없이 내가 아는 사실이니 곧이들어 주셔야 하오." "그것은 나와 순금사의 관리들이 듣고 판단할 일이다. 바른대로 고하라."


"…각다관 지하에는 투전판이며 나라에서 허락하지 않는 암거래와 유흥이 성행하는 장소가 있소이다. 당일 다관의 진청루에 도둑이 들었다 하여 관병들이 다관을 둘러싸고, 드나드는 이를 모두 확인하며 출입을 통제하니 이 모든 일이 탄로날까 두려웠소. 불을 일으켜 소란을 내면 주변이 혼란한 틈을 타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으리라 여겼지. 불은 1층 부엌이 아닌 1층에서부터 나오는 환풍구에서 냈으므로 불이 번진 것은 2층부터일 테요. 어찌, 나으리들께서 조사하신 것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영녕은 정랑을 바라보았다. 신언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군주."


"너는 그들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그들을 위해 행동한 것이냐?"

"그 치들에게 일수떼기를 합니다만 오래 보면 아무래도 서로 사정을 알 수밖에 없어…… 종종 밥도 날라다 주고, 징글맞지만 가족 같은 사이요. 세간에서는 건달에 사기꾼이라고들 하나 거기도 죄다 사람 사는 이치라."


하고는,


"어찌, 현명하신 군주께 좀 답이 되었습니까?"


도로 불손한 눈빛으로 영녕군주를 올려다보았다.


"……되었다." 영녕은 답하고는, 


"그러나 이 자와 닮은 모황이라는 인물에 관한 의혹은 내 이미 눈으로 확인한 바라, 그를 잡아들여 둘을 대질하기 전까지 풀어놓을 수는 없겠다. 신 정랑, 모쪼록 마땅히 조치하시게." 

"군주!" 


모용이 큰 소리로 불렀으나 영녕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순금사 안으로 들어가서 화재에 관해 조사한 문서들을 읽었다. 문서들에 쓰여 있는 내용은 조금 전 들은 증언과 일치했으되 여전히 석연찮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지하에 있던 시정잡배들 때문에 일어난 방화란 말인가? 화약 사건과는 개별로 일어난 것인, 저 자의 단독 행동일 뿐이고? 지나치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건을 덮으려는 이들이 있는 것 같아 어딘가 불편한 기분마저 들었다. 


"차를 좀 가져다 주게. 잠시만 이에 관한 문서들을 더 읽으며 생각을 해 봐야겠어." 


영녕은 순금사의 속관에게 부탁하고서 눈 내리는 뜰을 바라보았다. 다관 또한 불에 탄 채 방치되어 있다면 이 폭폭 내리는 눈에 그 잔해가 희게 덮여 갈까.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도 그대로 지나가게 되는 것일까……. 죄인을 끌고 나가 도로 고요해진 하얀 바깥풍경을 보며 영녕은 잠시간의 상념에 빠졌다가,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식은 차에 입술을 가져갔다.





때는 정월이 넘어, 왕부로 돌아가 설을 맞았던 영녕군주도 도로 대장군저에 내려와 있는 참이었다. 집을 하나 구해도 좋고, 너랑 같이 있어도 좋고, 하고 말하던 영녕은 새로이 살림을 꾸리기도 번거롭다는 이유로 융롱과 함께 있기를 택했는데, 왕부의 군주라 하더라도 영녕은 모시기 까다로운 손님이 아니어서 가솔들도 별다른 일 없이 잘 지냈다. 설이 지나고 눈 젖은 거리에 사람들 발걸음도 도로 드물어져, 수도의 저택 사이사이를 잇는 골목들도 조용해질 때쯤에 심부름하는 하인 하나가 영녕이 묵는 처소로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군주 앞으로 온 편지가 있으십니다, 하고 전했다.


"편지?" 


대장군저에 있으면서는 별달리 거처를 옮긴 사실을 알리지 않아 이리로 오는 연통이 없었던 영녕이 무엇인가 하며 받아들었다. 안에 적힌 것은 정갈한 글씨체로 써내려간 인사로 시작하는 내용으로서 영녕과는 초면인 인물이었다.


'시하(時下)* 정월도 초일을 지나 산천이 고요히 잦아드는 겨울이옵니다. 두루 평안하옵시며…

…이번에 각다관의 방화 사건을 조사하시며 풀리지 않은 의혹을 안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이에 미욱하나마 도움이 되는 말씀을 삼가 올리고자 하오니 지정하신 날, 시에 모 거리의 모 건물 2층으로 찾아뵈어 주실런지요.'


무엇보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아,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모두 갖추었으나 결국 마지막 대목은 양식에 맞지 않도록 되고 말았다. 


"학식 있는 이가 쓴 것 같은데." 선과 융롱을 불러 같이 서신을 보여준 영녕의 첫 평은 그러했다. "필체도 막힘이 없고 단어 사용도 능숙해. 필시 저잣거리의 잡배는 아닐 것이다." 


"이 거리라면 음식점들이 있는 평범한 거리인데……." 단선이 장소를 보고 한 마디 얹었다. "왜, 지난번 다관 사건도 평범한 다관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융롱은 무슨 일이든 있을 수 있다는 투로 진지하게 말했다. "가겠니?" 영녕은 간명하게 물었다. "가지요." 융롱은 곧장 대답했다.


"이 서신을 쓴 사람이 누구든 저희의 고충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굳이 이렇게 불러내는 것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을 듯합니다. 일단은 나가서 들어 보지요. 저와 선이 동행한다면 웬만한 위협에서는 안전하실 테고요."

"오늘 가서 어떤 곳인지 미리 보고 와 둘까?"

"그것도 좋지."


의기투합하는 소녀 무사들을 보면서 "너희들이 있으니 든든하여 마음이 놓이는구나." 영녕이 웃음지었다. 


"아무렴 걱정 마세요, 언니. 다관에 불을 낸 놈은 제가 이 손으로 꼭 잡아야겠습니다." 

"그건 이미 잡힌 것 아닌가?" 

"아, 그렇지? 그런데 저 편지가 말하는 것처럼 어딘가 석연찮잖냐."

"그건 동감이다만……."


단선이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이건 내 직감인데, 얼굴을 드러내고 곧바로 찾아오지 않고 편지를 보내는 이들에게는 항상 무슨 술수가 있기 마련이야. 완전히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가는 게 좋겠다."



시하(時下) : 지금, 요즘, ~를 맞아. 계절 인사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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