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한 뒤 태형은 미련없이 방을 나갔다. 혜원은 멍하니 태형이 나간 방 문을 쳐다보았다. 


“.......” 


내가 들어오니까 남자애가 너 앞에 서 있다가 나가던데?


......남자친구 아니에요


아니라고? 우성알파가 널 가만히 두는것도 모자라서 약까지 먹여준다니....신기한 일이네


...걔가 저한테 약을...먹였어요?


약 기운이 도니까 너가 지금 제정신일수 있겠지? 그 애가 먹여준거 아니야? 스스로 먹었을리는 없을텐데


그럼...나한테 약을 먹여준게...김태형이였다는거야? 날 그 애한테서 구해주고? 


김태형이 왜...날 도와줘? 날 싫어했잖아. 아니, 싫어하잖아...여태껏 서로 신경끄고 무시하고 잘 살았으면서...


왜 이제와서 날 도와준건데. 대체 무슨 생각이야?


고마운 마음보단 갑자기 태도가 변한것 같은 태형이 혜원은 혼란스러웠다. 


*


평소의 혜원과는 다르게 화장을 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물론 이렇게 입은것은 혜원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빠가 직접 인류 디자이너들을 집으로 불러 손재주가 없는 혜원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치장하게 했다. 완성된 혜원의 모습은 어떤 누구라도 반할만큼 눈부셨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본인에겐 이 모든게 거추장스러웠다. 화장은 답답하고 굽슬 굽슬 웨이브 진 머리는 자꾸만 얼굴을 간지럽히는것만 같고 보석이 달린 귀걸이와 목걸이는 무겁고 드레스는 자꾸 밟히고, 하이힐은 너무 높았다. 


이 모든게 혜원에겐 거추장스러웠으나 둔해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차에 탔다. 


혜원과 달리 여유롭게 준비한 태형은 먼저 차에 타 있었다. 제 옆에 탄 혜원을 슥 보더니 곧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두는 태형이다. 아깐 저에게 키스하고 혼란스럽게 만들더니 또 이렇게 언제나처럼 무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실 혜원에겐 이 모습이 가장 익숙했다. 가장 많이 봤고 가장 잘 아는 태형의 모습이니까. 그래서 더욱 태형을 알수 없었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차로 이동하는 내내 둘은 아무말이 없었다. 




곧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때쯤 저택에 도착했다. 역시 총리가 사는 집이라 그런건지 커다란 대문이 열리자 열댓명 정도 되 보이는 경호원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태형이 먼저 내렸고 그 뒤로 혜원이 차에서 내린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엔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역시나 구두가 문제인것인지 아니면 적응이 되지 않는것인지 휘청거리며 걸었다. 아빠는 어느새 다른 기업인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태형은 먼저 저 앞으로 걸어간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야속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원래 그랬는데 뭐...


다른 여자들을 보면 저보다 높은 구두를 신고도 잘만 걸어다니는데. 혜원은 어색한 자신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이런 모습이 혹시라도 아빠한테 누가 될까 염려되어 다시 꼿꼿하게 걸어가려는데 그만 드레스 밑단에 걸려 삐끗하게 된다. 앞으로 넘어질것 같던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데...


그때 누군가가 단단한 팔로 혜원의 허리를 감쌌다. 그 덕에 혜원은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안겨있는 꼴이 돼 버렸다. 


“.........”


먼저 걸어간 태형은 걸어오는건지 기어오는건지 도무지 따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 혜원을 보려 고개를 돌리는데, 지민이 혜원의 허리를 감싸 안은 모습을 보게됬다. 무의식적으로 태형의 표정이 구겨졌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순간 누군가 태형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치워.”

“안녕! 아버지 따라서 억지로 온건데...이렇게 보다니...오길 잘했네?“

“니가 누군데.” 

“이름은 몰라도 내 얼굴은 알 줄 알았는데...하긴, 새학기 시작한지 이주? 정도 밖에 안됐으니까 그럴수도 있겠다 아, 내 이름은 정세림이야.”


같은 반 알파 여자였다. 물론 태형은 이름조차 모르지만...게다가 태형은 막무가내로 자신에게 치대는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대로 무시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럼 호석이랑 지민이도 왔겠네? 걔네한테도 인사 해야겠다. 이미 안에 들어갔나?” 


여자애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데 여기서 뒤를 돌면 지민과 마주하게 된다. 아니 지민을 마주하는건 상관없다. 혜원을 보게 되는게 문제지. 학교에선 아예 남인 관계인 태형과 혜원이 가족이라는게 알려지면 태형도 혜원도 곤란해진다. 이러나 저러나 해도 둘은 남매니까. 집도 같고 성도 같고 아버지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학교에선 철저한 남이었다. 어느 누구도 서로에 존재를 밝히지 않았다. 사실 태형은 남이라는 이 관계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이 알파년이 천혜원을 알아보고, 아버지를 보고....우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물론 계집애 한명 입 막는 방법이야 여러가지지만, 그래봤자 서로 피곤해지기만 할 뿐이다. 


야 그거 들었어? 세림이가 총리 10주년 기념 파티에 갔는데 거기서 김태형이랑 김혜원을 봤대. 근데 걔네 아빠가 같더래...그게 뭐겠어? 둘이 남매라는거지!! 


헐? 진짜? 야 잠깐만...근데 김혜원 걔는....베타잖아?


어떻게 걔네가 남매가 될수 있어? 우성알파와 베타...우성알파 집안에서 베타는 나올수가 없다. 유전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이 남매라는건 성립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들이 배다른 남매라고 생각할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알파가 아무런 이득이 없는 베타를 첩으로 들일까? 그것도 우성알파가? 


결국 아이들은 혜원을 의심할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확인하려 들 것이다. 어차피 혜원이 우성이라는것은 우성알파, 곧 태형만이 알아볼수 있다. 하지만 혜원이 오메가라는것이 밝혀진다면? 혜원은 지금처럼 평범한 생활을 할수도 없을 뿐더러 이미 다 소문이 퍼져 더 이상 베타로 지낼수 없을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야.” 

“응?”

“따라 와.”


*


“아. 감사합...”


혜원은 넘어질뻔한 자신을 받쳐준 상대를 보자 굳어버렸다. 박지민, 정호석...둘 다 김태형의 친구들이었다.


“괜찮아?”

“어...고마워.” 

“왜 혼자야? 김태형은?” 

“아...먼저 들어간것 같은데.”

“너무하네. 이런 자리에선 동생을 에스코트 해줘야지.”



“야 김태형이 언제는 얘 챙겼냐? 뭘 새삼스럽게 그래.”

“그건 학교에서나 그러는거고, 여긴 가족으로 온거잖아. 그럼 당연히 챙겨줘야지.”

“베타 챙길게 뭐 있다고 챙겨 줘. 지 앞가림 못하는 오메가라면 또 모를까.” 


분명 호석이 방금 한 말은 혜원을 겨냥하는게 아니였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심장이 뛰었다. 지민이 호석의 말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베타라도 여자얘인데, 위험하잖아. 그치?”

“.......” 

“너 웃기는거 아냐?...너가 언제부터 김혜원을 그렇게 신경썼다고.”

“같은반 됐으니까 이제부터라도 친해져야지.”

“하-“ 


지민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올라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호석이다. 우리도 들어가자는 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얼마 되지 않는 계단을 올라간다. 그때 혜원보다 먼저 올라가던 지민이 멈춰서선 혜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줄까?” 

“....어?”

“구두, 꽤 불편해보이는데.” 

“아...아니, 괜찮은데...안 불편해.”

“경계하지 말라고 했던것 같은데...또 그러네.” 

“.....” 

“왜? 잡히면 내가 안 놔줄까봐?”

“.....아니.”

“그런 표정 지으면 놀리고 싶어지는데.”

“.......” 

“호의는 호의로 받아드려줘.”

“넌...나에 대해서 다 알면서, 왜 계속 모르는척 해주는거야?...” 

“음, 아직까진 너한테 크게 흥미가 없어서?”

“너희 알파들은 오메가라면 물불 안가리잖아...”

“오메가는 굳이 너 아니더라도 깔렸잖아?” 

“.......” 

“그리고 너가 잘못 알고 있는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알파도 가려. 자기 취향대로 먹는다고.”

“.......” 

“뭐...너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널 건드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아무리 반쪽짜리 남매라고 해도 넌 김태형 동생이라는 사실이지.”

“저기...혹시...”

“?” 

“너도...김태형이 무서워?” 


혜원의 물음에 올라가있던 입꼬리가 내려간다. 곧 웃는 얼굴은 무표정이 되었고 굳은 얼굴로 혜원을 바라보다 혜원의 얼굴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댄다. 볼을 가볍게 문지르다가 혜원의 턱 끝을 잡아 세웠다. 


“방금 그 발언은...상당히 기분이 더럽네.”

“........” 

“김태형이 무섭냐고?”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수 있는거지. 오메가 따위가 감히...


“왜, 우성이 아닌 알파는 만만하게 보여?” 

“아, 아니...난.” 


그렇다. 혜원은 말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지민이 말하고자 했던것은 혜원이 태형의 동생. 즉, 친구의 동생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태형이 무서워서 그런것이냐고 묻는 순진 무구한 혜원의 질문에 어이가 없으면서도..자신을 무시하는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원체 자기 잘난맛에 사는 알파는 대체적으로 자존심이 굉장히 세다. 특히나 우성은 아니라지만 알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최상위 급 페로몬을 가진 지민에겐 더욱 이였다. 또한 그렇게 뛰어나기에 친구이자 저보다 더 뛰어난 우성알파 태형을 보면 알게 모르게 열등감 따위를 느낀적도 분명 있었을 터, 그렇기에 혜원의 발언은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걸지도 모른다. 


“너야 말로 무서운걸 모르는것 같은데...난 지금 당장 널 내 차로 데려가서 내 밑에 깔리게 할수도 있어.” 

“........” 

“아니 당장이라도 내 페로몬을 풀어서 널 내 위에 있게 할수도 있지. 어때, 해볼까?”


그는 진심이었다. 그의 표정이 말해주었으니까. 혜원은 지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턱끝을 받치고 있던 지민의 손이 떨어졌다. 


“못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거야. 근데 우성알파가 무서워서 여태까지 널 냅뒀다고 생각하면...좀 억울하잖아?”

“미안...내가, 말을...잘못한것 같아. 미안해.” 



“이렇게 된거, 그냥 건드려볼까...김태형 반응도 그렇고 너한테 나는 페로몬은 어떨지도 궁금한데.”


혜원은 벙찐 표정으로 지민을 올려다본다. 혜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그런 혜원을 표정없이 빤히 보다가 이내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웃음이 터졌다. 


“푸흐, 귀엽네 왜 그렇게 겁을 먹어, 나 그렇게 쓰레기 아니야.” 

“.......” 

“아. 그래도 되도록이면 정호석한텐 들키지 않는게 좋아. 걘 좀 또라이같은 구석이 있어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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