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의 비교적 큰 스포일러가 담겨있을 것 같지만 쓰고 싶어서 쓴 글. 그리고 당해도 별로 타격 없는 스포일 터이니***




01


뱀 요괴로서의, 혹은 그 전신인 뱀으로서의 제일 오래된 기억. 천천히 눈을 뜨자 함박웃음을 머금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사[靈蛇]님.


노래라도 부를 듯 기쁨에 벅찬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다가온다. 그때는 몰랐으나, 반짝이는 은비늘에 자연과 어우러질 녹색 빛이 감돌던 그의 모습이 어지간히 아름다웠는지 그들에게는 제법 영험하게 비춰진 모양이었다. 한동안 집으로 지내게 되었던 사당에서 가만히 낮잠을 자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올리곤 했으니.

그렇게 절하고 공물마저 바쳐와도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영산[靈山]에서 내려온 하늘신의 사자[使者]로서, 정성 들여 주칠된 제상과 화려하게 수놓인 방석 위에 편안히 얹혀져 있다가 가끔씩 머리를 들거나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줄 뿐이었다. 그 뒤는 그들이 알아서 풀이한다.



아무 감흥이 없어도 괜찮았다.



——혼자 쓸쓸했는데, 영사님이 와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드려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영안이 뛰어난 편이라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술법과 굿을 펼치며 마을의 최고이자 유일한 무당직을 맡게 된 소녀였다. 어느날 언뜻 신성한 기운이 느껴져 그것을 따라 산을 올랐더니 영사님을 발견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기쁘게 이야기하던 아이였다.



그렇게 혼자 외로이 지키던 사당에 자리잡고 앉아, 도톰한 방석 위로 똬리 틀고 머리만 올린 그를 지긋이 바라본다.



——영사님, 전쟁이 났어요.

——적군은 지나가는 곳 어디든 식량을 약탈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살해한 뒤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어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자들이래요.

——이길 가능성도, 심지어 도망칠 수 있는 가망도 거의 없으니 차라리 모두 맞서 싸우겠다고 결론이 났어요.

——영사님.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에요. 제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지켜온 마을이니까, 정성을 다해 제사도 올리고 굿도 하면서 모두를 뒷바라지할 거에요.

——그러니, 영사님.


조용조용 읊조리던 소녀가 결심을 굳힌 얼굴로 일어서더니, 사당 측면의 창을 열었다. 밖은 이미 고함소리와 쇳덩이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붉게 오염된 하늘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치세요.

——영사님은 여기서 운을 다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이제 자유롭게 밖으로, 어서 가세요.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영사님.


평소처럼, 아니 여느 때보다 더욱 환하게 웃어보인 후 소녀는 옷매무시를 다듬곤 부채와 방울을 바로잡았다.



열을 넘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나이의 소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춤추며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단 맞춰주는 악기도 음을 읊어주는 사람도 없었으나 그 어느때보다 장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그는 소리없이 움직여 소녀가 열어준 창을 통해 사당을 나와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영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다 문득 뒤돌아본, 그가 몇 개월동안 지내온 마을의 마지막 모습이 일렁이는 화염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그가 집으로 생활해온 사당도.



묵묵히 산속 깊숙이 들어간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이 영산 중 가장 거대한 고목나무 앞. 그 밑동 뿌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똬리를 틀고 머리를 얹으며 잠시 생각한다. 이제는 볼 수 없을 마을사람들의 얼굴을. 와주셔서 고맙다며 순박하게, 때로는 호탕하게 웃던 그들. 그리고 언제나 영사님 하고 부르며 환한 미소로 자신을 보살펴주던 소녀.


어딘가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그래서인지 냉랭한 기운이 몸을 맴도는 듯한 이름 모를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린 뱀은 스르르 눈을 감고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다.




02


언제나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산을 올라 나무를 하러 왔을 뿐이었다.


자기 또래, 혹은 조금 더 어릴 법한 소년이 수풀 속에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본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그의 마을에는 같은 나이대가 없는 데다가 제일 가까운 이웃 마을도 말만 이웃이지 걸어서 적어도 이틀은 허비될 거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린 소년의 외모도 평범하지 않았다.


“야, 너 거기서 뭐 하냐?”


아무리 머리카락이 처음 보는 연녹색이고 옷이라기보단 이상한 누더기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해도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또래에 대한 호기심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혹시라도 무슨 변을 당하고 와서 지쳐 앉아있는 것이라면 점심으로 먹으려 가져온 주먹밥 반 개 정도는 나눠줄 수 있었다.



그의 질문이 들리긴 했는지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동자마저 녹색이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평범한 검은색이었다.



“왜 혼자 여기 있어? 너 우리 마을 사람 아니잖아.”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인 지게를 내려 옆의 나무에 기대어 놓은 뒤, 그는 수풀을 헤치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곧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약간 길고 뾰족하게 생긴 귀. 그리고 가까이 가서야 누더기 밑으로 뻗어 있던 은녹색 꼬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 요, 요……요괴……?”


목소리가 절로 떨린다. 소년을 가리키는 손끝과 함께.



귀신, 도깨비, 요괴 등등. 마을의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을 겁주려고 손짓발짓 섞어가며 들려주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다. 어쩌다가 두어 번 들었다지만 아직 양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햇수 밖에 살지 않은 그도 인간과 다르게 생겼다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잡아먹힌다는 둥, 홀리면 헛것이 보인다는 둥.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이런 것들이었으니.



가위에 눌린 것처럼 굳어있던 그의 모습에 요괴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습에 퍼뜩 놀란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가, 바로 뒤돌아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쳤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평소 절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산속까지 와버린 모양이었다. 마을로 돌아갈 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잡아먹히지 않고 도망쳐 왔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나무에 기대어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옆으로부터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인해 몸이 빳빳이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아, 어쩐지 오늘은 아침부터 물도 시원하고 엽전도 줍고 운수가 좋더니. 마신 물은 뱉을 수 없지만 주운 돈은 저 멀리 던져버릴 테니 누가 나 좀 살려주이소.


공포에 질려 북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배경음으로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확인한다. 역시나.


살아생전 처음 보는, 말로만 듣고 아주 가끔씩 가죽으로만 봤던 살아있는 호랑이다.



“으, 아……”


이미 꽤 먼 거리를 질주해온 뒤였던 것도 한 몫 했는지 다리가 꼬이면서 뒤로 풀썩 넘어졌다. 비명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의 눈에 점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제길, 내가 뭘 잘못했다고 반나절만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들 중 둘이나 만나는데. 부모 없어 제대로 된 집도 없어 배라도 채우려고 매일같이 뒷산 올라 나뭇가지 주워 삯 받아먹은게 그리 큰 죄냐고.


별의 별 생각과 억울함과 분노에 이를 꽉 무는 그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거대한 호랑이가 빤히 쳐다보면서 천천히 다가오더니.


한 번의 우렁찬 고함과 함께 확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두 팔을 앞으로 교차하며 고개를 돌린 그였으나.

한참 지나도 예상한 고통이 오지 않았다.



무서워도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슬그머니 눈을 뜨고 앞을 보니까 바로 코앞까지 커다랗게 벌린 호랑이의 입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움찔 놀라면서도 어쩐지 거친 숨소리랑 뜨거운 입김이 느껴지더라 하고 그다지 좋지 않았던 호랑이의 입냄새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떡 벌려진 입과 그 자신 사이로, 쫙 벌려진 작은 손바닥이 가로막고 있었다.



호랑이만큼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입도 벌려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손바닥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정작 상대방은 그에게 등돌리고 서 호랑이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지나가고. 드디어 호랑이가 입을 다물며 뒤로 조금 물러난다. 거대한 포식자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만 먹이사슬을 끊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는 작은 손바닥이었다. 그러더니 옆에 가만히 있던 왼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으로 숲 속 어딘가를 가리킨다.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호랑이는 결국 몸도 돌려 어슬렁어슬렁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이해하기 어렵고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인지 얼마 동안 넋 놓고 주저앉아 있기만 했다. 흘러나가던 영혼을 잡아와 원위치로 돌려놓고 나서야 그는 생명의 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작은 요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후닥닥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작은 손으로 다른 한 켠을 가리킨다. 따라가보니 그가 내팽개치고 줄행랑 쳤던 지게가 나무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뭐야, 저거 돌려주려고 따라온 거야?”

끄덕.


절로 하핫 실소가 터져나온다.



겨우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선 그는 지게로 다가가 묶여있던 조그마한 보자기를 풀었다.


“아——저기, 아까는 갑자기 도망쳐서 미안해.”


어색하게 말문을 열면서 뒤돌아 손을 내민다. 그 위에는 주먹밥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두 개 가져왔으니까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


“주먹밥, 먹을래?”



여태껏 변화 하나 없는 표정을 일관하던 작은 요괴의 몸이 꼿꼿이 세워진다. 배가 고플지도 모른다는 최초의 추측이 맞았는지 눈이 주먹밥에 완전히 꽂혀있다. 들고 공중에서 빙빙 돌리니까 시선이 계속 따라온다.


결국 씨익 웃으면서 다른 손으로 그를 부른다.


“여기 와서 같이 먹자.”



머뭇머뭇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작은 요괴.

여느 때처럼 나무 하러 왔다가 평범하지 않은 친구가 생겨버린 소년.


그들의, 특히 소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버린 작은 첫만남이었다.




03


“여어.”


요즘 산에 오르면 제일 먼저 하는 일. 수풀을 헤치고 정해진 장소로 고개를 내밀어 간단한 인사를 할 겸 요괴 친구를 부른다. 그러면 상대방도 반갑다는 듯 손을 작게 흔들면서 이쪽으로 온다. 참고로 표정 변화는 여전히 없다.



초봄이라 쌀쌀한 날씨인데도 쓸만한 나뭇가지를 같이 주워주고, 여차하면 산 곳곳 안내도 해주는 새 친구 덕분에 요즘 품삯이 조금씩 오르는 중이다.



신바람 나서 또 하나의 바쁜 하루를 시작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있잖아, 나 만날 너보고 야 하고 부르는데 혹시 이름 따로 있어?”



언젠가 마을의 이야기꾼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인간과는 달리 요괴 같은 존재들은 이름을 굉장히 중요시해서 웬만해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했다.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하잖아?



“아니 뭐, 억지로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골똘히 생각하는 작은 요괴의 모습에 그냥 얼버무리며 넘기려 했다. 불편해도 어쩔 수 없지.



“으응, 없……나?”

“뭐?”

“예에전에, 는, 영사라고 불렀……던 것 같, 아.”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요괴 친구는 요 수백 년 동안 잠만 자느라 제대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했다. 그나마 점점 나아지는 추세이다.


“영사? 이름이야? 이상하네.”

“뱀, 이라는 뜻……같은, 데.”

“뱀?”

“나, 뱀.”


나아지는 추세라 해도 말 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곤 한다.


“아아~네가 원래는 뱀이라고?”

끄덕.

“그래서 왜 영사라고 불렸는데?”


이 질문에 눈이 약간 동그래지더니 점점 측은함이 담기기 시작한다. 잠깐, 뭐땜시!?


“영험하다는, 영. 뱀, 이라는, 사.”

“……그래 나 못 배웠다 어쩔래.”

“괜찮, 아.”

“위로하지 말라고!”


소리 높여 투덜거리다가 으응? 하고 고개를 기울인다.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응.”

“결국 이름 없다는 거야?”

“응.”

“너 사실 더 말하기 귀찮아서 대답만 응응 하고 있지?”

“응.”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대화하면서 주운 장작들을 지게 위로 얹었다. 옆으로 다가온 요괴는 보기보다 무서운 괴력을 발동하여 자신의 3배를 지게 위로 올리고 있다.



“좀 늦었는데, 내 이름은 ‘가호’야.”

“가호.”

“날 낳으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떻게든 좋은 가호를 받고 잘 살으라고 지어준 이름이래. 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지만 뭐,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썩 마음에 든다고도 못 하겠지만.”


손을 탁탁 털면서 가호가 요괴 친구를 바라보았다.

“부르기 편하면 되니까, 너도 이름 하나 생각해봐. 계속 야 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그의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나무?”

“으응?”

“자, 잠자리……”

“야 잠깐.”

“멧돼지……”

“그런 것들은 이름이 아니잖아!”

“……멧나리……”

“합친다고 해결되지 않거든!?”


이마를 짚는 가호의 모습에 조금 더 골똘히 생각해보던 작은 요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야, 이 손은?”

“이름, 네가 줘.”


뜻밖의 말에 펼쳐진 손바닥과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는 요괴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나는 모르겠, 으니까.”

“으으음——”



솔직히 말해서 뭐를 골라도 요괴 친구가 내뱉은 것들보다는 좋은 이름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 지어주는 이름, 좋은 뜻이 담겨 있다던가 특별한 이름을 주고 싶었다.



뭐 괜찮은 것 없을까 고민에 빠져서 한참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그 사이 주위의 나뭇가지를 주워왔는지 꺾어왔는지 요괴 친구 덕분에 지게는 풍년이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은초라고 하면 안돼?”

“은초?”

“녹색인데 잎이 부드럽고 약간 은색 느낌도 나면서 꽃이 하얗거든. 그래서 은초라고 부른다 들었어. 네 꼬리 은색이랑 녹색이잖아?”


어느새 삐져나온 꼬리를 가리키니까 앗 하고 양손을 뒤로 가져가더니 꼬리를 다시 숨긴다. 아직 여러모로 익숙치 않아서 인간 형태를 장기간 유지하는 연습 중이라 했었다.


“잎 모양도 이렇~게 삐죽삐죽해서 너의 녹색 머리카락 같아.”



짧게 뒤덮인 연녹색 머리카락과 은색 꼬리를 보면서 무심코 은초가 생각났기에 얼떨결에 가져온 것이었다. 게다가 뱀한테 물렸을 때 사용하면 독이 빠진다 했으니 어딘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본체가 뱀이라는 사실은 방금 전에 알았지만.



“그래도 역시 이름으로는 좀 아니지? 뭐가 좋으려나.”

“은초, 괜찮아.”

“하?”


눈이 절로 커져서 “진심이야?” 라고 무심코 묻기까지 했으나 요괴 친구는 변함없이 진지하다랄까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좋, 은, 이름이……나올 것 같지, 않아.”

“야 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점점 신랄해지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야?”

“은초……”

“안 듣고 있네.”



작은 뱀에게 이름이 생기고, 둘이 서로의 이름을 기억 속에 적어둔 날이었다.




04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평상시처럼 수풀을 헤치고 친구의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길래 주위를 찾아보다가 겨우 목표물을 발견한 가호는 입이 떡 벌어졌다. 놀라서도 맞지만 주로 어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 하고 있어?”


허탈감에 내뱉었더니 은초는 쉿 하고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갈 뿐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온 몸으로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버티고 있는 생물은 두꺼비다.


“혹시 저 두꺼비도 요괴?”

보기에는 작은 두꺼비여도 누가 알까, 수백 수천 년을 살아왔을지도……!


“아니.”

아니었다.


“뭐야 그럼!”


살짝 무안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더니 두꺼비가 풀쩍 한 번 뛰었다.

그리고 더욱 큰 동작으로 은초가 뒤로 풀쩍 뛰어 빠르게 물러나더니 나무 뒤로 숨는다.


“……”


순간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변한 가호는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그 끝으로 두꺼비를 유인하고 밀면서 건너편으로 몰아낸 뒤 친구를 쳐다보니까 굉장히 안심했다는 분위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신나게 폭소를 터트렸다.



“무, 푸훕, 무섭냐?”


웃느라 힘들어서 헉헉 숨을 몰아쉰다. 은초는 주워온 나뭇가지들을 지게로 올리는 한 편 쓸모 없는 작은 것들을 그에게 던지고 있었다. 묘한 화풀이지만 그다지 아프지는 않다.


“커다란 두꺼비는, 뱀도 먹는단 말이다.”

처음보다 훨씬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그는 어딘가 부루퉁해 보인다.



“이야~그래도 조금은 안심했어.”


겨우 웃음을 멈춘 가호가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말했다.


“뭐가?”

“너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게 있어서.”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지금까지 나만 쪽팔리는 모습 보여줘왔던 것 같잖아. 그건 불공평하니까, 나도 네가 못 하는 거라던가 무서워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알고 싶었거든.”

“……별로 상관 없었는데.”

“걱정 마! 이제부턴 이 형님이 지켜주마!”

“……안 그래도 되는데.”

“이런 때는 ‘고마워’ 라고 하는 거야.”

“……안 해도 되는데.”

“야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잖아.”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05


땀을 훔치면서 나무그늘 아래에 털썩 앉아 보자기를 펼쳤다. 이제는 완전히 습관이 되어서 주먹밥 하나를 자연스레 은초에게 건넨다.


잠시 동안 우걱우걱 먹다가 문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호였다.



“너는 꼭 산에서 살아야 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시선이 옆으로부터 전해져온다.


“아직 완전히 평범한 인간 모습으로 변하지 못해서 산에서 살겠다 했잖아. 너한테는 더 편하다고도 했고. 그럼 나중에 완전히 인간 모습으로, 머리도 검고 꼬리도 안 나오게 변할 수 있게 되면 산을 나갈 수 있어?”

“……나갈 수야 있는데, 왜?”


은초의 대답에 가호가 고개를 획 돌렸다. 크게 뜬 눈이 반짝이면서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이 표정, 아직 뱀이었을 때 본 적 있는 것 같다.



환희.



“우와, 걱정했잖아! 뱀이니까 산을 나갈 수 없어! 라고 말할까봐.”

“하아.”


애매한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가호는 여전히 흥분해서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잘 들어. 난 말이야, 계속 조금씩이라도 돈을 모아두고 있거든. 언젠가 마을을 나가서 여행하려고.”

“응.”

“계속 장작이나 팔면서 살다 죽고 싶지 않다고. 가끔씩 지나가는 여행자들 이야기 들어보면 신기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응.”

“도성으로 가면 우리 마을의 몇 십 배는 될 커다란 시장도 있고, 듣도 보도 못한 먹거리나 물건들도 많대. 돈이 별로 없으니까 살 수 없을지 몰라도 구경거리가 많다는 뜻이잖아!”

“응. 그렇겠네.”

“너 그거 알아? 저쪽 길을 따라서 쭉 가다보면, 굉~장히 많은 물이 모인 곳이 나온대. 강들이 다 거기로 흘러가는데, 바다라고 부른다 하더라. 그리고 그 강들이 흘러나르는 소금이 전부 모이기 때문에 마시면 어엄청 짜다고 했어. 신기하지 않아?”

“응. 아, 아니, 신기해.”

“그러니까 말이야.”


온 몸으로 설명하던 가호가 양 손으로 땅을 턱 짚었다.


“네가 인간으로 더 잘 둔갑하게 되면, 우리 같이 가보자! 난 바다라는 곳에 특히 가보고 싶거든!”

“나도.”

“그렇지?”


기쁘게 웃는 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은초는 어째서인지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도 붕 뜨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게 무엇인지도, 이유도 알지 못하였다.



가호에게 말한 적은 없으나 그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터. 은초에게는 ‘감정’ 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조금 미안할지도 모른다.



“그럼 약속이다?”

“응?”

“같이 여행 가자는 약속.”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은초는 예전에 가호가 가르쳐준 대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어린 소년과 작은 요괴의, 꿈과 약속의 이야기다.




06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 주, 두 주가 한 달에 이어 두 달이 되어가자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지금 가호가 짚신이 닳도록 죽어라 뛰고 있는 이유와 연관성 있는 얘기다.



“은초! 여기 있어!?”


구르듯 나타난 그의 모습에 친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랑곳 않고 달려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여기 있으면 안돼. 도망가. 아니, 여행 가자! 예상보다 많이 이르지만 괜찮을 거야! 아직 머리도 녹색이지만 두루마기라던가 천으로 가리면 되고. 꼬리는 이제 웬만해선 안 나오니까 조심하면 돼. 이 산을 넘어갈까? 아니면 반대쪽 길로 가볼까. 그 길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떻게 생각해?”


불안하게 주위를 계속 둘러보면서 쉴 새 없이 말하는 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은초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진정해.”


무언가 시원한 기운이 전해지는 느낌과 함께 소년의 흥분이 점차 가라앉았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도 푹 숙여버린 그로부터 훨씬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비가 안 오는게 뒷산의 요괴 때문이래. 산신령님이 기를 못 편다고, 그래서 비가 안 온다고. 내가 아니라 했는데, 무당 불러서 굿도 하겠다고……요괴도 쫓아낸다 했어.”

“나?”

“이 산에 너 말고 다른 요괴 있어?”

“있기야 있지만……”

“어라 금시초문인데.”


순간 당황한 가호는 뒷전으로, 가만히 생각하던 은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럴 리가 없잖아!”


즉각 불만 가득한 외침이 가호로부터 터져나온다.


“네가 비를 막은 것도 아니잖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중얼중얼 불평을 터트리며 고뇌하는 인간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뱀이었던 시절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 했다. 아무리 영사라고 불렸어도 그저 평범한 뱀이었으니까.

지금은 어느 정도 힘이 있다.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도 싫다. 평온한 일상이 어지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혼란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나뭇가지 줍고 주먹밥을 나눠먹는 나날로 돌아가려면.



“……비는 내려.”

“어?”

“먹구름이 조금씩 모이고 있어. 얼마 안 가서 비가 올 거야.”

“저, 정말!? 언제? 오늘 오후에는 오려나?”

“그건……”


말문이 막혔다. 오는 것은 확실해도 그렇게 빨리는 무리다. 머뭇거리는 그의 태도에 가호도 그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안되는구나.”


다시금 풀 죽은 그의 모습을 보고 눈동자를 굴리다가, 은초는 끝내 결심을 굳혔다.



두 세 걸음 뒤로 물러선 후, 그의 작은 두 손이 포개어지며 왼쪽 눈을 가린다. 갑작스런 동작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가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엷은 푸른빛이 은초의 손가락 사이로부터 새어나오기 시작해서였다.



“뭐……”

“자.”


불쑥 내밀어진 푸른색 구슬을 무심코 받아들었다. 주먹을 꼭 쥐면 손 안에 딱 맞게 들어갈 크기다.


“이게 뭐야?”

“내 눈.”

“뭣.”


생각지도 못한 답변의 충격에 하마터면 구슬을 떨어트릴 뻔 했다.


“미쳤냐!?……어? 눈 그대로잖아.”

“그야, 너한테 준 건 요괴의 눈이니까.”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가호를 쳐다보면서 은초가 필요한 설명을 이어간다.



“요괴의 힘이 들어있는 눈이야. 없으면 그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 앞은 그대로 보여.”

“뭔가 잘 모르겠는데……그래서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나한테는 눈이 두 개 있어.”

“나도 둘이거든.”

“네 눈은 그다지 쓸모가 없잖아.”

“야.”

“내 오른쪽 눈에는 ‘화[禍]를 쫓아내는 힘’이, 왼쪽 눈에는 ‘복[福]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거든.”

“엄청 능력 있잖아!?”

“말은 그래도 사실 그냥 일종의 부적이야. 있으면 좋을 정도일 뿐이니까. 아직 나 자신의 힘도 약해서 별 기능은 없어.”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가호로부터 시선을 내리깔며 계속한다.


“그걸 가지고 간절히 빌면 운이 조금 좋아질 정도야. 예를 들어——”

비가 조금 더 빨리 찾아온다던가.




07


발바닥에 불이 날 것 같다. 그래도 한시 빨리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쉴 틈 없이 달린다. 산을 오를 때와 달리 기분이 들떠있다. 힘이 많이 들지 않는 내리막길이라는 점이 전부가 아닐 터였다.


빨리, 더 빨리 가서 마을 사람들한테 알려야 한다. 굿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비가 곧 올 것이라고.



우리를 도와주는 착한 요괴도 있다고.



그렇게 신나게 뛰어 마을 입구를 지나갈 때였다.


이 길은 평소 그와 같은 나무꾼이나 발을 디딜 법한 길이다. 짐승들이 더 많이 다닐 정도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도 산속 깊이 들어갈 뿐이라 여행자들도 상인들도 산을 비잉 돌아가는 외측 도로를 사용한다.


그런데 맞은편, 즉 마을로부터 장신의 남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본 적 없는 의복에 눈은 두건처럼 머리에 둘러진 비단 천으로 가려져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것 같으면서도 축지법을 쓰고 있지 않을까 착각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별 생각 없던 가호는 지나치는 한 순간만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 한 순간, 왠지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느낌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금세 방금 전의 기묘한 느낌을 저 뒤로 넘겨버리곤 갈 길을 재촉하는 가호였다.



남자도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그를 지나쳐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산속으로 사라졌다.




08


이미 굿판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막 마을 광장에 도착한 가호가 입을 열려던 찰나, 마을 사람들이 먼저 그를 발견하곤 한 마디 두 마디 던져온다.


——어디 갔었니, 걱정 했잖아.

——또 산속으로 놀러라도 간 줄 알았단다.

——이제 굿도 하고, 요괴 퇴치 해주는 도사님도 와주셨으니 다 좋아질 게야.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든 가호가 되짚었다.

“도사님이라뇨?”



——마침 지나가던 도사님이 우리 이야기를 들으시고 산속의 요괴를 퇴치해주겠다 하셨단다.

——그래서 길을 가르쳐 주었지.

——너도 이제 걱정 없이 산을 오르겠구나.


“잠깐만요! 왜 굳이 그런 부탁까지 했습니까!? 산에, 요괴가 있는지 확실치도 않고——”


있다 해도 우리한테 해를 끼친 적은 없잖아!

주먹을, 그 안의 푸른 구슬을 꼭 쥔 채 크게 외쳤다.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주위로부터 쏟아지는 시선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무슨 말이야? 요괴는 해악일 뿐이야. 도사님도 그리 말하셨어.

——당연히 없는게 낫잖아.




09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예상은 하고 있었다.



가호가 가끔씩 전전긍긍하며 다른 사람한테 요괴인 것을 들키지 말라 할 때, 인간 모습으로의 둔갑술을 완성하는 날을 학수고대할 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결코 환대 받지 못할 존재라는 현실을.



그래도 가호가 계속 친구로서 옆에 있어주었기 때문에, 항상 밝게 웃는 얼굴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아직 여기 있어도 된다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산속으로 들어온 자, 요괴를 죽이러 오고 있다. 이미 잡귀들 대부분이 소멸당한 상태다.



은초는 언제나 두르고 있는 망토를 탈탈 털고 일어섰다. 쥐었다 폈다 하는 작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들어 작은 한숨을 흘린다.


정말, 도망칠 걸 그랬나.


가호의 황급한 발언을 따라 다른 터전을 찾으러 갈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요괴인 자신이야 산이든 강이든 어디에서 살아도 상관없었다. 특히 자연에 녹아들기 쉬운 은초였다. 허나 가호는 인간이다. 그것도 아직 어리다. 옛날에 만났던 소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요괴와 달리 어린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뚜렷한 인간들은, 어린아이로 지낼 수 있을 때 마음껏 그 시절을 누려야 한다고.



원대한 꿈을 세워 이야기하고, 활발하게 뛰놀아야 더 행복해질 것 같다고.



그래서 가호의 일을 도와주어 짐을 덜어주고, 친구로 같이 지내면서 미래에 대한 약속도 했다. 물론 그 약속에 거짓은 없다. 할 수 있으면 함께 여행, 가보고 싶다.

그렇다고 ‘도망자’의 딱지를 붙일 수는 없었다. 그것도 요괴와 인간 사이의 싸움에 휘말리는 최악의 꼬리표를 소중한 친구가 달고 다니게 둘 수 없었다.



……소중한.



아아, 그렇구나. 이제야 소녀의 마지막 행동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나의, 우리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은초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날을 마주한다.




10


“……마을로 돌아가.”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넌 평범한 인간이니까 표적이 아닐 텐데.”

“네가 표적 중의 표적이잖아!”

“그러니까 너 혼자……”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뛰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무조건 달리고 보는 중이었다. 위협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앞서가는 가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은초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꼭 쥐어져있는 푸른 구슬로.

아마 한 번 효력이 발휘된 것 같다. 방금 전,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하던 은초를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할 때. ‘운 좋게도’ 가까운 곳으로부터 맹수의 울음소리가 돌연 울려퍼졌고,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다가 비행 궤도를 바꾸어 상대방의 방해가 되었으며 아주 잠깐 동안이어도 산속의 기가 흐트러졌다. 덕분에 둘은 무사히 그 장소를 빠져나와 도망치는 중이다.



허나 이러한 ‘작은 행운’으로 떨쳐낼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강자의 기운에 더해, 어디 숨어있었는지 추적자들이 여러 명 더 늘어났다.


못 빠져나가겠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아무리 제의해도 가호는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가뭄이 요괴 탓으로 완전히 인식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하려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은초가 추적자들을 떨쳐낼 때까지만이라도, 혹은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든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그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을 텐데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같이 여행가기로, 약속했잖아.”

“응.”

“그러니까, 잔말 말, 고, 뛰어……!”


끊임없이 달리느라 한 글자 한 글자 끊길 정도로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은초는 결국 꼬리를 내렸다.


“……응.”




11


이 구슬 행운 불러오는 거 맞아?


가호는 무심코 속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아무리 이토록 깊은 산중으로 와본 적 없다지만 왜 폭포 위까지 올라오게 된 거야. 경치가 좋아도 지금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몰렸구나.”

“뭐?”

“고의적으로, 우리들을 여기로 몰아넣었어.”

“앗 그렇다면 어쩔 수 없긴 하지.”

“응?”

“아무것도 아니야.”


빠른 태세 변환도 중요하다.


“아래, 물이니까 안 죽을 것 같은데.”

“맨땅에 떨어지는 것보단 나을지도.”


동의하는 은초의 말에 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정신없이 산을 오르락 내리락 몇 번이고 달렸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니라면 아닌 거다.


“좋아 가자——”



작게 속삭이는 찰나.



그를 따라 폭포 쪽으로 뒷걸음치던 은초가 갑자기 앞으로 튕겨나갔다. 당황해서 잡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어린 소년의 손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언가에 의해 잡아당겨지고 있었다.


은초의 목을 칭칭 감고 있는 기다란 천이 그를 추적자들 측으로 끌어당긴다. 도사의 퇴마 술법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가호로서는 언제 이런게 감겼는지 당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끝을 붙잡고 있는 ‘맹인’ 도사를 겨우 눈으로 쫓았을 때 은초의 몸이 다른 도사들 사이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 손으로 괴상한 손동작을 하자 몸을 일으키려던 은초를 중심으로 꾸불꾸불 글자가 빠르게 쓰여지며 순식간에 원이 그려졌다.


동시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은초를 엄습했다.



“으,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참지 못하고 내지르는 그의 비명이 새파랗게 질려있던 가호의 귓가를 강타했다.

모든 잡생각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일 가까운 위치에 서있던 도사 한 명에게 온 몸의 힘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결계의 한 축을 깨트린 셈이었다. 덕분에 은초를 향한 고문이 중단되었으나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던, 실제로 여기저기 그을린 상태의 은초는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떻게든 일어서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시야 한 켠에 검은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그 다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검은 옷을 펄럭이는 ‘맹인’ 도사의 번뜩이는 칼날과 공중에 흩뿌려지는 붉은 피.

그리고 뒤로 기울어지는 가호였다.



몸 안의 무언가가 폭발한 느낌을 받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적의 칼날을 손으로 쳐내고 나서야 수백 년 동안 비축되어 있던 자신의 요력을 사용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뱀으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사당에 모셔져 지냈으며, 그 뒤로는 영산[靈山]의 기운을 받으며 잠만 잤고, 깨어나서도 가호와 함께 장작이나 주우러 돌아다닐 뿐이었던 은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찌 되었건 기회였다.


가호는 왼쪽 반신이 특히 피로 젖어있었어도 아직 의식은 말짱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과하게 흥분상태여서 버티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여하튼 서로 밀다시피 하며 처음 예정대로 폭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목이 죄어오는 동시에 자신의 몸만 뒤로 끌렸다.



즉시 요력을 두른 손으로 포박을 끊고 다른 손을 뻗었다. 이미 공중에서 낙하하려는,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가호에게.


그러나 등을 내리누르는 중압감과 함께 도사의 발에 밟히며 땅으로 거세게 들이박아졌다.


폭포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가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도사가 그에게 내던지듯 붙인 부적을 통하여 다시금 전해지는 고통에 이어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뿐인 친구가 살아있기를, 살아가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12


한동안 날아갔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잊고 있었던 통증마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절하기 직전의 사태가 생각나자마자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어이 애송이. 어차피 죽을 목숨, 가만히 있는게 편할 거야.


머릿속을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온몸을 때린다. 한 쪽밖에 떠지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려던 그였지만 필요가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 다섯 명은 족히 세로로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동굴을 꽉 차지하고 앉아있는 여우였다.



——갑자기 폭포 위가 소란스럽더니 너덜너덜해진 인간 아이가 떨어졌구나. 네가 사라져서 위도 잠잠해진 게냐?


여우의 맞은편에 출구로 보이는 빛이 있다.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팔을 사용해 기어가려 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위로부터 휘둘러져 그의 몸을 내리쳐도.


——무례한 놈. 누군가의 가호를 두른 네가 그대로 물 밑으로 가라앉을까봐 이곳으로 꺼내주었더니,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이 도망가려 하느냐?


흔들리는 가호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며 목소리가 호통친다. 하지만 이미 제대로 대화할 여유 따위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거대한 여우의 말처럼 목숨이 꺼져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자신을 내리누르는 여우를 비키게 하기 위해선 무언가 대답이라는 것을 해야했다.



더듬더듬, 희미하면서도 묘하게 힘이 숨어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난, 도망가지 않을 거야.”

“죽지도 않을 거야.”

“은초도 죽지 않았어.”

“죽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나도 살아서, 도와주러 갈 거야.”

“그리고 같이 도성에도 가고.”

“바다도 보러 갈 거야.”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바보같이, 두꺼비도 무섭다 한다고.”

“그래서 지켜주겠다 했는데, 그랬는데……!”


결국 도사들한테 잡혀 고통받는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오히려 도움만 받았다.


호랑이로부터 구해줬다. 기댈 곳 없어 홀로 밝게 살려 발버둥치던 자신의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같은 꿈을 꾸면서 함께 일해주었다.

고작 몇 개월이었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즐거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끝까지. 결국 도움만 받았다.



온 몸이 성한 곳 하나 없는 느낌이었으나 흘러나오는 눈물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분했다. 요괴를 해악으로만 보는 도사들, 그 도사들의 말만 믿고 조용히 살고 있던 은초를 내쫓으려던 마을 사람들. 그리고 아무것도 못한 자신한테 화가 나고 분해서 미칠 것 같다.



점점 격양되는 목소리가 물기에 젖으며 떨린다.


“내가 이름까지 지어준, 하나뿐인 친구란 말이다……!”



그나마 감각이 있는 손을 꼭 쥐었다.  그 사이로 푸른 구슬이 엷게 빛을 발한다.



——호오.


굉장히 흥미롭다는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런 게냐, 그 정도로 분하고 원통해서 죽고 싶지 않다는 게냐.

——그래서 네가 여기로 오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가호를 내리누르고 있던 거대한 꼬리가 스르륵 옆으로 물러났다.


——우리는 서로 이용할 수 있겠구나.

——너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나는 죽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내 목숨과 힘을 네게 주어 너를 살려주마.



어느덧 귀를 기울이던 가호가 여우를 노려본다.


“서로, 이용한다며?”


——그렇다. 내가 애송이 너한테 모든걸 주면 나는 드디어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천 년 동안 바라고 바라던, 인간으로의 환생이 가능해지는 게다.

——뭐, 이 문제는 네게 중요하지 않아.



여우가 꼬리를 한 번 바닥에 찰싹 내리치자, 가호가 쥐고 있던 푸른 구슬이 그의 손을 벗어나 스르르 공중으로 떠오른다.


“뭐 하는 짓이야……!”


——걱정하지 말거라, 바로 돌려줄 테니.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네게 과분하지만 말이다.



말 끝나기 무섭게, 둥둥 떠있던 푸른 구슬이 돌연 쏜살같이 날아와 가호의 보이지 않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이것이 있기에 나의 천 년 요력을 네가 견뎌낼 가능성이 생겼다. 보통 인간들은 몸이 터져 즉사할 테니까.


본디 기능을 상실한 왼쪽 눈을 대체하려 파고드는 구슬과, 어느새부터인가 몸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방대한 영력 때문에 끊이지 않는 가호의 비명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여우가 느긋하게 말을 이어간다. 뒤로 보이는 아홉 개의 풍성한 꼬리들 중 몇 개가 기분 좋게 흔들리기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애송이.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들을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전부 네게 달려있다.



——너의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달려있으니, 반드시 명심하거라.




13


또 다른 수백 년, 혹은 하나의 천 년이 지나갔다.



꼼짝없이 소멸당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온갖 부적과 오랏줄과 쇠사슬에 구속당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희귀 사안’ 이라며 연구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가호는 살았으려나. 나름 친하게 지냈으니 슬퍼하지 않을까. 그래도 인간들은 그런 슬픔을 딛고 일어선다 알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해야겠다.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서, 하고 싶다던 여행도 하고 가족도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다 삶을 마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못 만날 것 같으니, 이리 바랄 뿐이다.


이곳 사람들의 연구라는 이름의 가혹한 실험과, 요괴들끼리 서로 죽일 기세로 싸워야 하는 투기장에 던져질 때를 제외한 빈 시간에 이러한 생각을 해보곤 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하루하루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마지막 의지가 되고 있었다.



슬슬 가호도 인간 수명을 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가끔씩 투기장에서 보거나 어두운 통로를 끌려 지나가다 만나던 어느 요괴가 말을 걸어왔다.


——너 강하지 않아? 왜 이런 뭣 같지도 않은 곳에서 명령 따위 듣고 있는 거야?


약간 도발적으로 질문한 요괴는 곧 벌을 받았으나 그의 말은 은초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았다.

그래. 굳이 여기에 계속 갇혀있을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이곳의 모든 요괴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갈망하고 있어. 그렇다면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즈음, 그는 틈만 나면 잠을 자고 끊임없이 꿈을 꾸고 있었다. 잘 모르겠으나 아마 뱀이 되기도 전의 오래된 기억이라 직감했다. 동시에 전혀 할 줄 몰랐던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던 중이었으니.


그래서 그 중 하나의 방법으로, 그는 조용히 요괴들의 갈망과 소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그들의 소원을 먹으며 비축해두었다.



수백 년 동안.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손에 드는 것들이 대나무 조각과 붓 대신 종이와 연필로, 그리고 또 그림이 나오다가 바뀌곤 하는 얇은 판자로 바뀐 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얼핏 들은 말로는 ‘정부의 개’에게 들켰다 했다. 정부라는 자가 누구고 그 집 개의 후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겠다만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에 그들의 활약은 충분했다. 연구 자료를 옮긴다는 둥 인간들이 분주해졌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수가 확연하게 적어진 날. 그나마 남은 자들도 장소 이전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날, 은초는 자신이 모아두었던 힘을 한번에 사용하였다.



아무리 요괴들의 갈망이나 소원의 힘이 인간들의 것보다 질이 떨어진다 하여도 근 천 년 동안 쌓인 양은 어마어마했다. 다른 누군가가 반응하기도 전에 은초는 즉각 자신의 모든 구속구를 파괴하여 갇혀있던 최심부로부터 탈출하였다.

그 뒤는 파죽지세였다. 보이는 인간들을 전부 붙잡아다가 작은 밀폐공간으로 몰아넣어버린 뒤 자신 외 붙잡혀있던 요괴들을 모두 탈출시켰다. 괜히 인간들을 죽이거나 다른 요괴들이 죽이도록 놔뒀다가 원한이 쌓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 부분은 철저히 했다.



이 날, 좁고 비참한 곳에 갇혀있던 백 팔 요괴가 자유를 되찾았다.



한바탕 날뛰었더니 나른해져서 폐허가 되어버린 투기장에 똬리를 틀고 고개를 그 위로 올린다. 수백 년 동안 몸집도 커졌기에 돔 형태의 투기장을 꽉 채울 정도다.


때문에 인간 형태로 찾아온 첫 번째 요괴가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은초가 해방시킨 요괴들 중 한 명이었다.



——저희랑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바로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건 내 힘이잖아? 이미 이곳 요괴들의 소원으로 얻은 힘을 다 사용해버려서 도움될 것 같지 않구나. 그리고 너희의 사상에 공감하지도 못할 것 같으니 거절하겠다.


이 대답에 그는 유감을 표하며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조금 지나 두 번째 방문자가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너 꽤 흥미롭던데 같이 안 갈래?


조금 생각했지만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 입장으로서 너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나에게 남은 힘으로도 마찬가지이고.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협력 정도는 생각해보지.


은초의 답변에 그는 꽤나 아쉬워하며 떠났다.



세 번째로 찾아온 요괴는 쌍둥이 형제였다.



——이런 곳에 있을 바에는 우리랑 같이 가자.


수백 년 전 그의 직설적인 말이 마음에 남고 해방의 계기가 되었던 때처럼, 은초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건네온 제의였다. 많이 망설여졌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너희들만이 해결하려는 일이 있잖은가? 지금 내가 따라가서 망치고 싶지 않으니, 모두 해결된 뒤 다시 만나도록 하자.


이 확답에 쌍둥이 형제는 기쁜 얼굴로 다음을 기약하곤 귀갓길에 올랐다.



이렇게 마지막 요괴까지 ‘연구원’을 떠난 뒤, 은초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잠이라는 것은 아무리 취해도 부족하다. 특히 먼 옛날의 일들을 전부 꿈으로 만나려니 턱없이 모자르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마 바깥세상으로 치면 이틀 정도가 아닐까.


요괴들의 난리통 때문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건물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기운을 더듬어보아도 일반인들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 중 한 명이 서서히 자신이 똬리 틀고 있는 장소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으나 가만히 기다렸다.



이 사람이 바로 현 스위퍼즈의 든든한 후원자, 통칭 ‘형사 아저씨’다.



당시 거대 뱀인 은초를 보고 크게 놀랐어도 냉철하게 대응해준 아저씨 덕분에 지금까지 조용히 스위퍼즈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애매한 점을 들자면.


——그래서, 넌 이름이 뭐냐?

나이……은초.


끊임없이 보아온 꿈 때문에 무심코 옛 이름이 튀어나올 뻔 했다.


——나이? 은초?? 나은초?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에 침묵을 유지했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멋대로 결론지었다.


——그냥 간단하게 나이로 해라. 등록은 나은초? 인가로 해둘 테니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4


바깥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그를 몰래 데리고 나와 본인 기준 최소한의 도움을 주었던 아저씨가 없었다면 적응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나마 조금씩 알아가던 중, 요괴 관련 일을 해볼 생각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여러 번 싸움꾼으로든 중재역으로든 아저씨 따라 일을 하다 보니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아직까지 사교성 관련 문제가 좀 많이 커도 괜찮을지 모른다. 이 말을 그대로 아저씨에게 했더니 잠시 동안 골초만 빡빡 피우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불을 끄며 그에게 조용히 일러주었다.


——넌 사교성 제로야.


살짝 충격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언젠가 대신해줄 누군가를 구해야겠어. 라는 결론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던 와중.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랑 일처리 하러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누가?

——당연히 네 얘기지 인마.


해서 묵묵히 따라가 대기하고 있었더니.



“어이 아저씨, 도우미 따위 필요 없다 했잖아!”



건방진 대사를 날리며 등장해서는 아저씨한테 뒤통수가 휘갈겨진 금발의 남자.

보고 바로 알았다.


이 사람, 가호의 환생 같은 존재구나.


영혼이 거의 완전히 똑같은 데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은초, 즉 나이의 왼 눈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돌려달라 할 생각은 딱히 없었기에 상관 없었다.



“네가 아저씨 소개로 온 놈이냐? 썩 내키진 않지만 뭐 이번 안건만이라도 자~알 부탁한다. 내 이름은 신 가호다.”

“……나이.”

“하? 올해로 스물 다섯……이었나?”

“아니, 내 이름. 나이.”

“……뭐 그리 분간하기 번거로운 이름 달고 있는 거야!”



그들 사이, 또 하나의 첫 만남이었다.




15


이젠 없는 너에게.


나는 어쩌다 보니 거대해져서 대요괴로 소문난 것 같다. 인간 모습으로의 둔갑도 완벽해졌고.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되었어, 바다.

그래서 너의 환생으로 보이는 인간이랑, 요즘 생긴 동생들이랑 다녀왔어. 물 짜더라.


눈은 돌려주지 않아도 돼. 이미 현재의 너와 완벽하게 융합된 것 같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아마 미소한 행운을 가져다주는 정도의 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예전에 자주 보던, 앞장서던 너의 뒷모습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해 앞장서볼 생각이야.

그땐 고마웠다 해둘게.

그러니 너도 무사히 전생을 마쳤었기를, 이번 생도 잘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나는, 너와 함께 꿈꾸던 모습이 되어있을까?




16


환생이 아니라 가호 본인이라는 사실을 나이가 깨닫을 때는 이미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요괴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느라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고 나이를 알아보기까지, 가호는 나이보다 조금 더 오래 걸린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도 여전한 둘의 모습이 보이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쓰고 싶어서 쓴 부분. 스포일러가 좀 큰가? 생각도 들지만 아직 1화밖에 없고 괜찮겠지 뭐...

***좀 슬픈 노래를 BGM으로 넣고 싶었는데 못 찾았습니다. 유튭에 없으면 없는 거겠죠. 일단 일본어 노래이긴 한데 미즈키 나나 님의 <하늘에...> 가 개인적 비쥐엠. 우정이라 찰떡임. (안예은 님의 <상사화>도 좋긴 했지...상황이 맞지는 않지만ㅎ)

***여담으로 나이는 1화의 의뢰인이랑 가호가 겹쳐보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여 (지금 앎

다음 생은 미역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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