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구는 얼이 빠져있는 명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막동아, 잠시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어. 애 나올려면 오래 걸릴테니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돌삼 아재는요?"

  칠구의 조심스러운 말에 옆쪽에 조금 떨어져 있는 돌삼을 보며 명이 되물었다.

  "돌삼아, 잠시 막동이랑 얘기 좀 하고 올께. 일월이 애 낳는 거 어떻게 되가는지 좀 봐주고 있어."

  칠구는 돌삼에게 눈짓을 보내자 돌삼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런 아재들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명은 가만히 칠구가 이끄는 구석진 곳으로 끌려갔다.

  "막동아, 요즘 대감마님께서 기침이 너무 잦으시다."

  칠구의 말에 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칠구아재도 아시잖아요. 아버님께서 겨울이면 건조해서 잔기침 달고 사시는거. 왜 새삼스럽게..."

  "아녀. 예년과는 다르게 좀 길게 가시는 것 같아. 보통 초겨울에 들어설 때 시작하셔서 섣달 그믐 전에는 진정되시는데, 올해는 해가 바뀌어도 낫기는 커녕 기침이 더 잦아지셨어."

  칠구의 말에 명은 금세 깨달았다. 칠구가 이 말을 꺼내는 것이 단순히 안부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명은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왠지 이상하잖아. 그래서 혹시나 한번 찾아봤는데..."

  칠구는 소매춤에서 허름한 헝겊을 꺼내었다. 헝겊을 조심스레 펼치자 몇 가지 약재가 놓여 있었다.

  "이건...?"

  약재들을 살펴보던 명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래... 대감마님 드시는 탕약에 들어가는 약재인데, 평소에 드시지 않던 약재야. 무슨 약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것은 알겠더라구."

  명의 눈에도 늘 그의 아비가 마시는 탕약에 들어가던 약재의 모양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갈구놈한테 물어보니까 이번에는 약재를 진성 약재방이 아니라 한종 약재방에서 사온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팔개아범이 그리로 가라고 시켰다더군."

  "팔개아범이요?"

  "그래... 안방마님 사람이지."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었다. 명은 칠구가 무슨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바로 알아챘다. 칠구가 좀더 목소리를 작게 낮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두 어 달 전에 봉덕사를 갔었을 때 우연히 엿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어찌 해야 할 지 고민만 했는데, 아무래도 막동이 너한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인데요?"

  명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물었다. 자신이 알아야 할, 직시해야 할 무언가가 그 이야기 안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집안 행사 있을 때면 빠지지 않고 오시는 진철 종숙 어르신 알지?"

  "네."

  진철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느끼면서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결국 칠구까지 알게 된 것이리라. 그렇다는 것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소현의 부정(不正)이 암암리에 밑에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터, 다만, 웃전의 일이라 다들 모르는 척 서로 말하지 않고 그리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봉덕사에 갔을 때 진철 어르신이랑 안방마님이랑 한 방에 같이 있더라. 그것도... 흠흠...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뇌까리는 칠구의 말에 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칠구는 조심스레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한 이야기를 누가 들을세라 주변을 연신 둘러보다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명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 혹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던거야?"

  "네. 저도 칠구아재처럼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그것도 대감마님... 아니, 아버님께서 대국(大國)에 가셨을 때 진철 종숙께서 오신 적 있었잖습니까? 그날 밤에 우연히... 알게... 되었지요."

  짤막한 한숨과 함께 명의 얼굴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칠구의 표정 또한 어두워졌다. 보아하니 하루이틀의 일이 아닌 것이 맞았던 것이었다. 칠구 자신이 그 날밤 봉덕사에서 들은 것이 단지 찬 겨울바람소리때문에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렇구나."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방마님이 너를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을테고... 그리고, 너를 감싸는 대감마님을 마뜩치 않아하고 계셔. 큰 도련님이 너도 알다시피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으니 대감마님께서도 너에게 기대를 더 걸고 계시고. 이건 우리 아랫것들도 알 정도니, 안방마님은 더더욱 더 잘 알고 계시겠지. 그리고, 연달아 큰 도련님이 대감마님 눈 밖에 나는 일이 생기니까..."

  잠시 말을 멈춘 칠구는 미적거리며 주저하였다.

  "칠구아재,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얼른 말해봐요."

  "그게... 참 황망하고 황당한 이야기라..."

  "괜찮으니 그냥 말해줘요."

  "으응... 안방마님이랑 진철 어르신과의 관계는 오래된 것 같아. 아마 안방마님이 시집 오시기 전에 두 분이 정(情)을 주고 받던 사이였는데, 집안에서 대감마님과 혼인시키는 바람에 두 분의 인연이 그렇게 된 것 같았어."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것말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얼른 그것부터 말해봐요. 아버님 약재 이야기도 그렇고, 뭔가 있는거죠?"

  칠구의 눈빛이 조심스럽게 명의 얼굴에 가서 닿았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약재건... 안방마님이 그러신 것 아닌가 싶어. 팔개아범이 시킨 것으로 보나... 그리고, 그때 봉덕사에서 안방마님이 대감마님 겨울 기침약에 뭔가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살짝 들었어. 바람소리랑 워낙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통에 정확하게 들은 것인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상하게 대감마님께서 기침이 안끊이시는거야. 너도 알다시피 탕약을 계속 드시면 섣달 끝나기 전에는 기침이 거의 없어지시는데, 이번엔 계속 되시더라구. 그래서 찾아봤더니 이런 약재가 나온거고... 그리고, 뭔가 더 안좋은 일을 꾸미시고 계실지도 몰라. 너한테 집안을 넘겨주면 어떡하냐는 말을 많이 했거든. 그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거라고 안방마님이 계속 말했으니... 대감마님도, 너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명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소현은 자신의 어미도 모자라 제 아비까지 잡아먹으려 하는 듯 하였다. 명의 두 손이 천천히 말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네, 칠구아재."

  잠시 뜸을 들이던 칠구가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명의 권유에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석이 도련님 있잖아..."

  "형님이 왜요?"

  "그... 진철 어르신은 자기 아들 아니냐고 하던데... 물론, 안방마님은 펄쩍 뛰시며 아니라고는 하셨는데... 큰 도련님 하는 모양새를 봐서는 어디 한 구석 대감마님 안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재! 그런 말은 어디가서도 하지 마세요."

  명은 칠구의 말을 막고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 거렸다. 마당 한 가운데 돌삼만 서있을 뿐 자신들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명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아아, 당연하지. 나도 이건 돌삼이한테는 말하진 않은거야."

  "약재랑 진철 어르신에 대해서는 돌삼 아재가 알아요?"

  "응... 어디 나 혼자 알고 있기엔 좀 큰 건이냐. 갈구놈은 너무 어리고, 돌삼이한테는 이야기해야 혹시나 안방마님쪽 아랫것들이 대감마님한테 해코지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봐야하니까. 나 혼자서는 다 파악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아재... 고마워요. 하지만, 형님에 관련되어서는 절대, 절대 아무한테도 말씀하지 마세요. 그건 어디까지나 진철 숙부님 생각일 뿐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뜬소문을 아버님이 아시게 되면...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닐 것 같아요."

  "으응, 그래. 그건 내 함구하고 있으마."

  "아재, 미안하지만, 이 약재... 내가 갖고 있어도 되죠?"

  "암, 괜찮어. 내가 갖고 있어봤자 뭔가 더 알아내기는 힘들 것 같고. 어디 알아보려고 나가볼까 해도 조심스럽더라고."

  그것도 그랬다. 아무리 성철을 위하는 마음에 무언가를 알아보고 마음대로 다닐 수는 없었다. 게다가 웃전들의 일에 어설프게 얽혔다가 잘못될 수도 있기에, 고민 끝에 그래도 양반인 명에게 가져온 것이었다.

  "막동아, 막동아! 얼른 일루 와봐! 애가 나오는 것 같구먼!"

  그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명과 칠구는 말을 멈추고는 별당 기단 앞 쪽에 서 있는 돌삼이 있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네? 돌삼아재? 애가 나온다고요? 진짜요?"

  명은 놀란 큰 두 눈으로 묻는 사이 별당 방문 창호 너머로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명은 멍하니 서있었다.

  "하이고! 꼬추네, 꼬추! 일월아, 도련님이여, 도련님!"

  개순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방문 너머 마당까지 들렸다. 칠구와 돌삼이 명의 등을 연신 두드리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었다.

  "야, 막동아! 축하해. 아들이래!"

  칠구가 보기 드물게 환한 웃음으로 명에게 축하인사를 건네었다.

  "허어, 막동이 녀석, 능력도 좋아. 나는 다섯 번만에 아들 낳았구먼."

  돌삼도 사람좋은 미소로 명을 바라보았다.

  "일월이가... 아들을 낳았다구요? 진짜? 일월이가 아이를?"

  명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그 사실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신기한 감정을 들게 하였다.

  잠시 뒤 안에서 원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아, 잠시 들어와볼래? 들어와서 아이 얼굴 봐야지."

  원의의 말에 명은 자신이 그래도 되나, 들어가도 되나 싶은 생각에 머뭇거리자, 칠구와 돌삼이 그런 명의 등을 떠밀었다.

  "어여 들어가! 어여 들어가서 일월이헌티 고생했다구 다독여야혀. 안그러구 애 먼저 안았다가는 니 평생 일월이헌티 바가지 닦일껴."

  "그래, 돌삼이 말처럼 먼저 일월이 챙기고... 얼른 들어가서 아기 얼굴 봐야지. 그래야 아비가 되었다는 걸 느낄거다."

  칠구와 돌삼의 등쌀에 명은 주춤주춤 일월이 있는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들어간 방에는 미리 떠놓은 따뜻한 물에 아이를 씻고는 겉싸개로 막 감싸고 있는 개순과 일월의 옆에서 그녀의 땀을 연신 닦아내어주는 원의가 있었다. 명은 어디에 가 앉아야 할 지 몰라 서성대다가 원의의 눈짓에 그녀가 앉아 있는 맞은 편에 앉았다. 일월을 가운데 두고 원의와 명이 마주보고 앉게 되자 원의가 옆에 놓인 깨끗한 명주천을 명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땀에 범벅이 된 일월의 얼굴을 가리켰다. 명은 천으로 조심스레 일월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일월은 아이를 낳느라 힘을 다했는지 나른한 표정으로 명을 바라보았다.

  "왔어? 나... 잘했어?"

  일월이 명에게 반말을 하였지만, 그 방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탓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잘...했어. 잘 해냈어. 일월아."

  명은 닦던 수건을 옆에 내려놓고 일월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을 당겨 제 이마에 가만히 대었다.

  "고생했어... 진짜... 수고했어."

  명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찡하였다. 비록 좋지 않은 과정으로 아이가 생겼지만, 그것은 이미 잊혀진 뒤였다. 열 달 동안 고이 품어 어머니의 정성으로 용기있게 아이를 낳은 일월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것 모두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힘이 풀어지겠지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풀어지기는 커녕 더욱 힘이 가해져 왔다. 이상함에 명은 손에서 이마를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이상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일월아! 왜 그래?"

  명의 비명같은 외침에 원의도, 개순도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일월은 눈을 고통에 찬 듯 꽉 감은 채 신음소리를 흘러 보내었다. 상당한 고통이 그녀를 엄습하는 듯 하였다.

  "어...어... 아씨... 일월이... 왜 이래요? 개순 이모... 일월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명은 두려움에 덜덜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원의도 개순도 갑작스러운 일월의 모습에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월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은거야?"

  원의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일월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는 일월은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는 지 들려오지 않았다. 악문 잇새로 신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어맛!"

  개순의 큰 비명소리에 원의와 명이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개순은 하얘진 얼굴을 한 채 일월의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 어떻게... 이를 어째!"

  개순이 말을 잇지 못하자 원의와 명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들 역시 개순과 다르지 않게 경악에 찬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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