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답을 약속해드리도록 하죠.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지만요.

여신은 망설임의 끝에 저를 찾아온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영혼은 용기와 지혜, 그리고 거짓된 사랑으로 충만하게 차올라 있었다.

여신은 지쳐있었으나 통찰력을 잃지 않았고 동시에 전장를 두루 파악할 수 있는 노련함을 갖추고 있었다.

여신은 자신의 장기말을 움직여 이계에서 소환된 이형의 괴물을 쓰러트릴 것을 명령했다.

여신은 말했다. 그의 의미는 이미 이 땅에 나타나 있다고. 이 세계가 거울의 뒷면인지, 혹은 기만된 진실의 민낯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밀레시안이 여신의 의지에 따라 이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 평행선을 위에 놓여진 마신의 장기말(다른 세계의 영혼)은 누구일까.


밀레시안은 새파란 하늘 아래서 눈을 떴다.

온 세상은 흙이었고, 모래였고, 한 때 바다를 누비던 자들의 것이었으며 동시에 강이었다.

밀레시안은 도우갈을 마주보며 겨우 자신이 그와 같은 눈높이로 마주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겹치지 않은 평행선 위였으나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그는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 밀레시안은 괴물이 되지 못한 인간.

밀레시안은 안도했다. 이번 믿음또한 꿈이었음을, 못나고 하찮고, 나약한 본질을 깨지 못한 범인이었으나 그것이 제 온전한 그릇이었기에.

깨어지지 않음에 감사했고 변질되지 않았음에 기뻐했다. 

밀레시안은 여신이 준 펜던트를 내밀었다. 

세계를 이루던 경계선은 뒤집혔고 이제, 묶여있는 것은 밀레시안이 아닌 도우갈, 글라스 기브넨을 가진 그의 영혼이었다. 밀레시안이 그를 죽이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글라스기브넨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육신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틈을 만든 것은 분노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현자의 재치와 용기였다. 

시라, 시라. 당신의 남편이 만든 위대한 업적을 보세요. 밀레시안은 다시 만날 것을 의심치 않았던 고결한 영혼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였다. 

그것은 달을 떨어트리려는 사악한 마법사의 음모를 저지하는 영웅의 이야기 보다 빛났고 세상을 부숴버리려던 잔혹한 배신자의 분노보다 뜨거웠다. 

에르그의 붕괴, 두 세계의 연결. 기만하는 마신, 이를 저지하려는 여신. 착실하게 하나하나 밟혀가는 마지막으로 여정. 

밀레시안은 마침내 여신의 앞에 섰다. 저는 죽는 건가요? 밀레시안은 마신을 물리친 여신을 바라보았다. 

여신의 눈은 여전히 감겨있었기에 밀레시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여신은 가만히 밀레시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전을 아무리 빠르게 돌린다 하더라도 양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건너편을 들여다 보기 위해 동전에 구멍을 뚫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생명, 하나의 낙원. 

이곳이 티르 나 노이인지, 아니면 다른 어느 장소가 티르 나 노이 인지.. 지금의 당신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이미 이어진 통로는 거스를 수 없는 순리와 같으니 이곳은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일단 에린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포워르와 키홀이 에린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힘을 기르십시오. 

여신은 밀레시안에게 가호를 내렸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의 이름을 가진 가호가 아니었다. 

라이미라크와 아튼 시미니의 가호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그리고 때가 되었을때, 당신을 다시 만나러 가겠습니다. 

밀레시안은 그렇게 에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떠났을까? 밀레시안은 글라스기브넨을 쓰러트리는 순간 깨어지던 여신의 펜던트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장소로 다시 되돌아갈 용기는 없었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꿈결같은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기억하세요. 

그것은 에린을 수호하는 이를 위한 길이었고 빛으로 둘러싸인 거룩한 기사의 길이었다. 

곧게 뻗어나간 고결한 검의 길. 밀레시안은 쓰게 웃으며 뒤틀리고 더러워진 브로드 소드를 꺼내들었다. 

어느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캠프파이어 위에 버려진 검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한창 달아오른 검신에 새벽의 빗방울이 떨어지던 때에, 검은 쩌적 하고 갈라지며 생을 마쳤다. 

밀레시안의 첫번째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났다. 


루나사는 최근 한가해 졌다는 것을 느꼈다. 

손수 엿을 고아 모든 알반에게 하나하나 입에 물려주던 친절하고 상냥한 수리부엉이가 최근 얌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야행성 동물이 자꾸 낮에 돌아다니더라. 

한없이 의욕없는 나른한 눈매로 되돌아온 카즈윈은 이전보다는 온순해진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은채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수려한 이목구비가 가지런히 잠들어있는 모습은 제법 온화한 분위기로 보였지만 40%는 사진빨에 가까웠다. 

화상액자 너머보다 현실이 가까웠던 카즈윈의 팀원들은 최소한의 소음을 위해 오타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모니터 너머로 소리없는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일명 아빠 아직 안잔다 상태. 

카즈윈은 눈을 감은채 밤새 읽은 소설의 피로를 보충하고 있었지만 감긴 것은 눈이지 귀가 아니었다. 

팀원들은 리모컨을 앞에 두고 바둑, 낚시, 혹은 종교방송을 강제시청하는 7살난 어린 아이마냥 끙끙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 외근을 나가겠다는 기특하고도 마음씀씀이 깊은 양보의 현장이었다. 

참다못한 고참 직원이 유령처럼 스르륵 일어나 사물함으로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카즈윈은 사물함 문고리에 손이 걸리기도 전에 입을 열어 고참직원의 이름을 불렀다. 

너, 저번 보고서 아직 안냈더라. 고참 직원은 일어났을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책상앞으로 돌아왔다.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보다 고요하고 규칙적인 타이핑 소리가 하나 더 늘어나고 눈물을 삼키는 긴 콧소리가 한줄기 더 얹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카즈윈은 오늘도 칼퇴였다. 

하지만 그런와중에도 카즈윈은 가장 중요한 현장보고서를 맨 나중에 넘긴다는 치밀함을 잊지 않았고 루나사의 팀장은 오늘도 치를 떨며 핸드폰을 집어들 뿐이었다. 오늘은 무슨 치킨 시킬까? 

루나사의 막내직원이 대답했다. 오늘은 치킨 말고 불닭먹어요. 

똑똑하기도 하지. 루나사의 팀장은 막내직원을 쓰다듬었지만 막내직원은 수줍어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은채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할 뿐이었다. 

초롱초롱한 새내기는 이제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이 등에, 하나가 되어.. 기억되려는 찰나 막내직원이 말했다. 

팀장님 곧있으면 주문마감시간이니까 얼른 시키세요.

 으응…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정보부의 팀장은 그렇게 핸드폰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차곡차곡 쌓이는 음식어플 포인트만이 유일한 그의 위안거리였다.


맛있네 이 집. 카즈윈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맥주캔으로 식히며 습관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찬 바람과 닿는 혀끝이 얼얼했다. 부들부들한 계란찜을 먹어도, 고소한 마카로니 샐러드를 먹어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통증에 카즈윈은 하는 수 없이 다시한번 불닭을 입에 집어 넣었다. 

매운기가 정수리까지 확 치솟으며 묘한 쾌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체온이 확 달아오르는 매운기는 역설적으로 땀이 배어 나오며 느껴지는 찬 기운을 선사했고 카즈윈은 그 시원함에 진짜 청량감을 더하기 위해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진짜 맛있네. 어느정도 포만감이 차오른 카즈윈은 절반정도 남은 닭을 대충 포장지 채로 눌러놓은채 남은 계란찜과 샐러드를 깨작이며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밀레시안은 빛의 기사가 되었고, 또 에린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다.

세번째 여신의 부름에서는 조금 위험했지만 밀레시안은 침착하게 죽음의 용과의 대면을 마치고 다시 에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괜찮은지 아닌지는 여신만이 알고 있었지만 여신은 별다른 말 없이 밀레시안을 에린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 과정에서 세 용사의 해후라던가, 마리의 진실, 다난의 입장에서 바라본 밀레시안에 대한 고찰, 중간에 누군가 한 명 용에게 물려간 것 같았지만 카즈윈에게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위기 이외에도 몇 번인가 위험한 일이 생길 뻔한 적도 있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에게 부탁했던 위험한 갑옷조각을 모으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다행(?)스럽게도 훌륭한 방해꾼이 한 명 남아있었기에 그 위협은 곧 무력화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즈윈의 금발곱슬 의심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안갔어요? 밀레시안의 질문에 도우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타깝게도요.. 도우갈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그의 육신은 굴레가 아니었다. 

그의 정신은 생각보다 그 육신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고 그 결과 도우갈은 포워르들이 알베이를 떠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저세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인지 그는 별다른 도움없이도 멀쩡히 저세상에서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본래 먹고 자고 마시고, 회복할 필요조차 없었고 느긋하게 세상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언제가려고요? 밀레시안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지루하지 않냐고 되물었지만 도우갈은 자신의 개인사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일축하며 말을 돌렸다. 

글쎄요. 이 세상이 끝날때 즈음 나도 느즈막히 돌아가려고요. 그래서 용건은?

밀레시안은 다크나이트의 갑옷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며 블랙위자드가 있는 장소에 대해서 물었다.

도우갈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듯이 낮게 웃고는 천천히 밀레시안을 훑어보았다.

보다 강해지고 싶은 건 인간의 욕망이긴 하지만..뭐, 재미있네요. 당신이 그런 인간의 흉내를 낼 줄 몰랐는데?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그 선택지는 그때와 같이 착각으로 끝나지는 않을겁니다. 일종의 계약이니까요.

도우갈은 몇번이고 한번 선택하면 되돌아올 수 없다고 경고했다.

밀레시안은 그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에 신경쓰지 말라고 대꾸했다.

도우갈은 순순히 통행증을 내어주었다.


물론 블랙위자드와 대면한 결과는 시원스러운 거절이었다.

가방속에 가득 찼던 검은 갑옷을 털어낸 밀레시안은 그 길로 케안항구로 내려갔고 이리아행 배에 올라 라노지역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한참동안 탐험퀘스트에 빠져있던 밀레시안은 불현듯 (카루숲에서 길잃은 야생 곰과 마주치고 나서야 ) 타르라크와 크리스텔, 던컨을 떠올렸고 부랴부랴 편지를 써서 부엉이를 날렸다. 답장은 매우 빠르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들은 밀레시안이 다크나이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여러 날의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반성의 의미로 손을 꼽아보며 따로 연락할 사람이 더 없었는지를 생각해보았지만 더이상 기억나는 사람이 없었던지 그대로 루트라 강을 건너 엘프의 마을로 떠나갔다.

그리고 딱 한번, 쌍검술에 관심이 생겼던 밀레시안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대륙이동을 통해 던바튼으로 귀환했을때.

밀레시안은 없는 양심을 닥닥 긁어모아 반으로 갈라낸 뒤 에반과 아이던에게 각각 한 조각씩 상납해야만 했다.

그 뒤로 잠시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울라에 머무르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설원의 자이언트 여왕이 붉은색 피빛 머리의 남자를 보았다는 소식에 밀레시안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 남자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왜? 밀레시안은 대답했다. 오해를 풀려고요.

그에게 있어서 밀레시안은 원수였다. 동시에 대적자였고, 친구의 지인이었으며, 그의 운명을 비틀어낸 원흉이기도 했다.

비틀다? 훔쳐냈다? 밀레시안은 무엇으로 정의내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오랜시간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종족의 예언이 밀레시안의 손에 들어왔다.


셋이서 하나의 이야기를 나누어가진 고대 종족들의 유물은 일찍이 용의 시대부터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예언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는 것 뿐만이 아닌 누군가가 이를 보고 듣고 행하려 한다는 것 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밀레시안은 자신을 예언하는 용의 시대의 마지막 계약자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계약은 태어날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그의 운명이었으나 밀레시안은 그 운명이 그의 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렀고, 그래서 실수했다. 

밀레시안은 이미 비틀어진 운명을 반대로 꺾는다고 해서 비틀린 자국이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그 운명이 강하고 억셀 수록 접혀졌던 과거만큼이나 깊고 고통스러운 자국이 남는 다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게 밀레시안은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추락시켰다. 시대의 끝을 알리는 드래곤의 계약자를 보며 절망했다. 

밀레시안은 그토록 바래왔던 불멸을 삼킬 있는 용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음(포기)에도 내비치지 않았던 실망감을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에리..? 

루에리는 그토록 증오하던 대적자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증오를 내비치지 않았다. 

서리조각으로 만든 꽃을 가슴에 품어야 비로소 마주 설 수 있었던 지옥같은 열기의 바닥아래서, 그는 거울과도 같은 눈빛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전에 없이 따스하고 또 연민에 가득 차 있었기에, 밀레시안은 제 본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또 추악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자신이 변질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변질됨은 자신뿐만이 아닌 무고한자의 영혼마저 잠식해나갔고 밀레시안은 이제 그 죗값과 마주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가슴팍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는 서리방울을 눈으로 쫓으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고개가 한없이 무거웠다. 가슴에서 목으로 그리고 혀끝으로, 아릿한 통증에 밀레시안은 더듬거리며 희미한 소리를 쥐어짜내야만 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어리석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돕고싶었다고. 마리를 만난 타르라크의 웃음이, 아련하게 스쳐지나가는 마리의 한숨이, 당신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도왔던 것처럼 내가 당신을 도우면. 그렇게 당신들을 지켜보다보면. 나도 언젠가 그런 이들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혹 그게, 당신들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밀레시안은 온기를 희망했다. 애정을 갈구했고 안식을 바라며 의지할 곳을 찾아 온 대륙을 떠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변했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 누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깨달은 순간조차 시간이 부족했다. 화산 아래 떨어진 눈물과 회한을 모두 모아쥐어도 은둔자의 깊은 칼데라호와 같이 깊을 수는 없으리라. 

현명한 칼데라호수의 드래곤은 말했다. 아직 모든 운명이 결정된 것은 아니네. 

해야할 것은 해야했고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운명은 뒤집히고 뒤섞이는 것을 반복했다. 

밀레시안은 운명의 마지막 결과는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묶이는 것은 누구이고 풀려나는 것은 누구였나. 

영혼과 운명, 세계와 생명. 하나의 이름을 가진 양면의 동전. 

밀레시안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어둠 저편에서 작은 금속 동전이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트라타의 윈드벨 소리였다.


벨소리가 울리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겠습니다. 

지루하던 연강의 오아시스같은 존재, 유일한 희망. 대부분 스트레칭으로 부활을 알렸지만 몇몇 과한 수면상태였던 이들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고개를 흔들어야만 했다. 

그 모습은 솔직히 조금 공포스러웠다.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이들은 흰자위를 드러내놓고 고개를 돌리며 알 수 없는 주문 외우기 시작했고 이 소리에 반응한 시체들이 격한 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주문은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광경을 난생처음 본 외부강사는 흠칫흠칫 놀라며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얘네 무서워.. 

하지만 이러한 죽음과 부활이 일상이었던 학생들은 강사의 시선이 어찌되었건 생기가 돌아온 몸에 좀더 신선한 카페인을 보급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뿐. 겉보기엔 좀비영화가 따로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떠나간 탓에 강의실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강사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안돌아오는거 아니야? 눈으로 가방의 수를 헤아리던 강사는 유난히 깨끗하게 정리된 자리들을 눈여겨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신경쓰지 말자. 당당하게, 담대하게. 내 할일을 하는거야. 외부강사는 심호흡을 하며 탁상에 있던 작은 페트병을 들어 가볍게 입안에 흘려넣었다. 

페트병 중간에 둘러진 노란색 포장지에는 나침반 마크와 함께 물의 용량과 성분, 수원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프롬 더 스카하 아일랜드.

냉장고에서 꺼낸지 한참 지났지만 영혹의 산 꼭대기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청정수는 언제 마셔도 특유의 청량감과 신선함이 살아있어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물 한잔 마시며 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 

첫 출진으로 나갔던 좀비떼 1부대가 급하게 강의실로 뛰어들어오며 멀린을 크게 불렀다. 멀린형! 멀린형! 

귀한 값 얼굴에 안경자국 날 세라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뿔테안경을 건 채 퍼질러 자고 있던 멀린은 뮤직비디오풍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소라면 일반 좀비 2,3,4처럼 컥커거걱 하고 오만상을 찌푸렸을 테지만 촬영이 끝난지 얼마 안된 그의 얼굴에는 아직 비지니스용 아우라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나름 인기있는 아이돌이었지만 이미 멀린의 실체를 알고 있는 동기들은 사기치지 말라는 시선으로 멀린을 흘겨보고는 갑작스럽게 뛰어들어온 좀비 1을 돌아보았다. 형! 그 금발머리 정장남자가 또왔어요! 

멀린은 뭔데 그거.. 라고 느릿하게 대답했다.

좀비1은 답답하다며 다시 소리쳤다. 그때 그 곱슬머리 멋있게 생긴 남자요. 

멀린은 곱슬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뭐! 하고 크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처음부터 열지도 않은 가방을 휘딱 둘러매고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강사는 노골적으로 튀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뒤따라가는 좀비 1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형 진짜 조폭 같은 무리들이랑 엮인거 아니에요? 요즘 뉴스에서 많이 그러던데? 

멀린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계단을 내달리기 시작했고 멀지 않아 현관에 모여든 의문의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린은 머리하나 툭 튀어나온 금발머리의 남성을 바라보며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좀비1이 걱정한 것과 같이 검은색 정장을 쫙 빼입고 나타난 금발머리의 미남은 호스트나 마피아 적어도 이쪽세계의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 곱슬은 멋있었다. 

멀린의 소리없는 문자가 소리쳤다. 아 왜! 

톨비쉬는 환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멀린쪽을 바라보며 문자로 답장했다. 조카님 스케줄이 비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지. 가자, 일해야지. 

멀린은 ㅗhhhhhhhhhhh하고 영타를 치다가 소심하게 지우고는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톨비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책략가와는 말을 섞지 않는게 상책이었고 그 말에는 문자 그림 비언어적 몸짓언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멀린은 자기가 공항나갔을때도 이런 인파는 안몰렸다며 툴툴거렸지만 몰려든 인파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제 2진이 멀린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붉은색 가죽의 수첩형 스마트폰 케이스가 인상적인 화려한 인상의 청년이 서 있었다. 

보석처럼 빼어난 비취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은 잘빠진 검은색 세단에 기대어 선 채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절과 맞지 않은 조금 두꺼운 옷차림이었지만 저 얼굴이면 폭염주의보를 뚫고 눈이 내린다 하여도 믿을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진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보리색 케시미어 목도리를 두르고 있던 청년은 한 여름특가상품 홈쇼핑에 나온 목도리를 완판시킬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오셨네요. 얼른 타세요. 르웰린은 화면에 시선을 떼지 않은채 문을 열어주었고 멀린을(뒤따라 나온 톨비쉬를) 뒤따라나온 타과 학생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역시 방송관계자가 맞다니까! 아니야 일반인이라고 본인이 그렇게 말했어. 당사자들을 앞에둔 추측은 점점 불이 붙었고 이는 강의실이 있는 층 창가에 모여든 멀린의 과 동기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의실로 되돌아온 좀비1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삭였다. 역시 마피아라니까. 왜 마피아야 야쿠자일 수도 있지. 

앗 아니야 방금 문열어준 남자애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유명한 재벌 집안 신시엘라크가의 장자야.

창가에서 한발 떨어져 스마트폰을 검색중이던 동기의 말에 창가의 무리들은 조용히 머리를 맞댄채 떠오르는 추측들을 한데 그러모았다. 

누군가가 조용히 한 단어를 읊조렸다. 삼합회…? 

멀린은 크게 재채기를 하며 코끝을 문질렀다. 


2019.05.09

https://twitter.com/teclatia_con/status/1126269957006708736 

https://twitter.com/teclatia/status/1101256148018057216

대충 살자... 길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인가 유니콘스럽게 건너갈 방법은 있는 베그절벽처럼 https://spinspin.net/teclatia 칭찬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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