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은 없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과속하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중세에 입었을 법한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려진 간판이 달린 고급스러운 석조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 갔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 건물의 프런트에는 정장을 빼 입은 신사가 있었다.


"선택하신 방은 1박에 15골드 입니다."
"열흘."


그곳은 일반 여관이 아니라 귀족들이나 혹은 대부호들이 묵을 법한 5성 호텔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15골드면 일반 신녀들의 한 달 월급에 가까웠다. 내 한 달 월급이었단 소리다. 내가 경악을 하느라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동안 라프레티가 금화가 가득 찬 주머니를 건네자 신사가 금화 개수를 세어 주는 마도구에 넣더니 잠시 뒤 열쇠를 꺼내 건네주었다.

심지어 이 건물은 마력석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다. 혼란스러움이 조금 가시자 내려달라는 의미로 조금 움직여 봤지만 라프레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키스하기 전에 가만있어요."


나는 순식간에 쭈구리가 되어 몸을 움츠렸다. 방 문을 열고 침대 위에 날 내려놓았다. 무엇으로 채운 것인지 전생의 매트릭스보다 푹신한 침대였지만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가 겁을 먹고 눈을 꽉 감고 한껏 몸을 움츠리자 라프레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나는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예쁜 머리카락 결이라도 상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미안해요 언니. 제가 이성을 잃었었네요."
"아니, 아니에요. 저, 그, 지금은 좀 그렇고…… ."
"저 정신 좀 차리고 올 게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문을 나서려는 라프레티의 옷깃을 잡았다. 나를 뿌리치려면 내 힘 따위는 옷의 먼지를 터는 것 보다 쉽게 뿌리칠 수 있겠지만 라프레티는 멈춰 주었다. 그런 다정함이, 그런 라프레티가 좋아서 우물쭈물 하면서도 용기를 냈다.


"키…  키스…  정도는 괜…  찮은데."
"언니."


전생 포함 모솔 근 40년이라 그... 그거는 이론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고 키스조차도 처음이다. 그것도 최애와 하는 키스? 오타쿠 심장에 너무 안 좋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라프레티가 사랑스러웠다. 나, 역시 라프레티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라프레티가 천천히 다가오자 눈을 감았다.

천천히 겹쳐지는 라프레티의 입술에선 딸기 사탕의 맛이 났다. 이... 이... 입을 벌려야 하나? 내가 그래도 연상인데 리드를 해야 하나? 온갖 생각으로 복잡한 사이 라프레티가 날 눕히더니 뜨겁고 말캉한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으아, 으아아아.


"흣… 츄우……."


점막끼리 부딪히며 젖은 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첫 키스는 레몬 맛이라고 했는데 딸기 맛이라 조금 속은 느낌이다. 안 좋은 건 아니다. 좋다. 그것도 미치도록.

키스 후 짙어진 코랄 핑크의 입술이 도발적으로 보였다. 내 오른쪽 눈가의 눈물점에 가볍게 입을 맞춘 라프레티가 약간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여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언니의 첫 키스 잘 먹었습니다."
"어, 어, 어떻게 그걸!"
"그야 언니 키스 되게 못하는 걸요."


키스 내내 굳어 있었던 지라 할 말이 없어 얼굴만 붉히자 라프레티가 킥킥 웃고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언니 허락 없이는 손 안 대기로 했으니까."


그러면서 다시 한번 입을 맞춰 왔다. 나는 최대한 빨리, 아니 내일 당장 새 속옷을 사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게임 캐릭터 옷을 다 벗기면 입고 있는 것 같은 흰색의 민자 속옷으로 첫날 밤을 보내기는 죽어도 싫었다. 아, 키스에 조금 익숙해져야 겠다고도 생각했다.

숙소는 최고급 답게 방 안에 욕실이 있었고, 심지어 수도도 있어 따뜻한 물이 콸콸 나왔다. 커다란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몸을 담그자 여독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코코 네 마을의 온천에 가지 못 한 건 아쉽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았다.


"하아."


라프레티가 저렇게 적극적인 아이였던가? 내 기억으로는 라프레티는 연애에 있어선 일반 로맨스 게임의 여 주인공들과 다를 게 없었던 것 같은데. 역시 게임과 현실은 다른 거니 라프레티도 바뀐 걸까?

30분 이상을 키스만 해대서 입술이 부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계속 떠오르는 키스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 욕조 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작은 병들에 신경을 쏟기로 했다.


"향유?"


뚜껑을 열자 각자 다른 고급스러운 향기가 폴폴 풍겨 하나하나 병을 열어보고 향을 맡아 보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향은 나중에 써 보기 위해 한 쪽으로 몰아 놓았다.


'이런 거 쓰면 라피도 좋아해 주려나.'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정신 차려 마리아.


*


참방거리는 물소리가 문 틈 사이로 조용한 방 안에 울려퍼졌다.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었다. 숨을 몰아쉬던 붉어진 입술과 뺨,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초록색의 눈동자가 머리 속에 가득 찼다.


'나…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지?'


분위기를 너무 탔다. 이건 다 언니가 귀여운 탓이다. 아니 사실 언니는 언제나 귀여웠다. 내 잘못인 것인가? 응, 이건 젊은 혈기 탓이다. 이 젊은 나이에 연인이 그렇게 귀여우면 폭주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눈을 감으니 탈의실 안에서 보았던 새하얀 속옷으로 감싸여 있던 새하얀 피부가 생각났다. 컸지. 엄청나게. 내 가슴에 달려있는 것과 비교가 안 됐지. 같은 여자인데도 그렇게나 다르다. 역시 언니는 대단해. 다시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아서 조금 진정 하기로 했다. 또 코피 따위를 흘려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라피?"


잠시 뒤, 목욕을 마치고 폭신폭신한 옷을 입은 따끈따끈 언니가 나왔다. 왜 언니가 섹스를 거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에서 자라 키스도 처음인 사람이 연인을 사귄 지 단 이틀 밖에 안 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초조하게 굴지 마, 라프레티. 5년이나 기다렸잖아?'


언니 허리를 안고 그대로 배에 얼굴을 묻자 잠옷이 보들보들해 느낌이 좋았다. 안에서 향유라도 가지고 논 것인지 여러 잔향이 언니의 체향과 섞여 더 매혹적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언니가 귀여운 게 더 잘못인 것 같다.


"언니가 나빠요."
"네? 뭐가요?"
"키스 한 번 더 해주면 알려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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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잠옷
특수효과(?) : 라프레티의 눈에 폭신폭신 귀여운 언니로 보이게 된다.(평소에도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폭신폭신이 앞에 붙는다. 즉, 업그레이드(?)!!인 것이다.)

단추가 달린 셔츠에 바지. 푹신푹신한 재질. 연분홍색. 입거나 만지면 보들보들한 감촉이 기분 좋아 더운 날만 아니면 자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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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이세계 전생물을 보다가 생각난 건데 더빙이 있는 원작 속 세상에 이세계 전생을 한다면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릴까요? 그 성우의 목소리? 아니면 비슷하지만 다르게?
어느 세계를 가도 사쿠라이 타카히로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좀 무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뭐든 좋으니 로판 백합물이 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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