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꼭 태풍 같지 않냐?”

느닷없는 현태의 말에 창밖을 보고 있던 도경이 현태를 돌아봤다. 점심시간은 늘 그렇듯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소란스러웠고, 교실 안은 저마다의 대화들로 한창이었다. 왁자지껄한 소리들 사이로 현태가 무심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을 도경은 한동안 곱씹어 보듯 말이 없었다.

현태의 시선은 여전히 교실 창밖 운동장을 향한 채였다. 무심한 중얼거림만큼이나 시선 또한 그랬다. 무념무상 그 자체라 속내를 영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세상 심란한 고민을 끌어안은 사람처럼 현태는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짧게 왔다가지만 피해는 무지막지하니까.”

“…….”

“어쨌든 순식간에 지나갈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잖아.”

“…….”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도경은 왠지 알 것 같았다. 또다시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도경은 현태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침묵으로 동조했다. 그 순간 “일대영!” 소리치는 익숙한 목소리가 침묵을 가로지르고, 그 소리에 이끌리듯 둘의 시선이 창밖 너머로 향했다. 그러자 화단 근처에서 배드민턴 라켓을 허공에 휘두르며 여유롭게 상대편을 약 올리는 해주의 모습이 둘의 눈에 담겼다.

저도 모르게 픽 웃는 도경을 현태가 힐끗거리다가 창틀에 팔을 괴고 비스듬히 고갤 기울였다.

저런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티가 나기 때문에 진심이란 건 계산 하에 나오기가 어려운 법인가 보다. 조금 전 무심코 웃음을 흘린 도경의 표정을 읽어낸 현태는 그 생각을 반영하듯 가벼운 숨소리와 함께 웃음 지었고, 도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갈무리하며 현태에게 말했다.

“사춘기냐, 생각도 많다.”

“그런가봐.”

“안 어울려.”

무심하게 중얼거린 도경이 창 밖에서 완전히 시선을 떼며 돌아섰다. 창을 등지고 선 도경이 유리창에 뒤통수를 기대며 몸을 늘어뜨렸다. 도경은 시선을 내리뜨고는 여전히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선 현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어.”

“순식간에 안 지나가면 어떻게 할 건데.”

“…….”

“생각보다 짧지 않다면.”

“…….”

도경이 갑작스레 던진 물음에 현태는 잠시 침묵했다. 의외로 날카로운 질문에 현태는 맥 빠진 웃음을 흘리다가 굽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경험담이냐 그거?”

“어.”

“음, 생각 안 해봤는데.”

“대책 없는 건 여전하다 너도.”

도경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태가  나름대로 핑계를 대려던 찰나, “도경아!” 창밖에서 불러오는 목소리에게 타이밍을 빼앗겼다. 

목소리의 주인인 해주는 손을 흔들면서 도경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또다시 창밖을 내려다보는 도경의 얼굴 위로 얼핏 웃음이 스미는 것을 본 현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주 티를 내다 못해 알아달라는 수준이었다. 

현태는 보란 듯이 도경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른 뒤 가까이 붙어 섰다. 척 봐도 심기가 불편해진 해주의 얼굴에 만족스러워하며 아예 어깨 위에 턱까지 올려두자 곧바로 둘의 시야에서 해주가 사라졌다.

“…재밌냐.”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도경은 현태를 향해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무지하게.”

“애 좀 괴롭히지 마.”

“…누가 애냐? 설마 윤해주가?”

현태는 황당했다. “저렇게 큰 애가 어디있냐?” 라고 반박했지만, 생각해보니 어깨 위에 턱 좀 올렸다고 곧장 저러는 것을 보면 또 애인가 싶었다. 

“어디가.”

도경은 제게서 몸을 떨어뜨리자마자 교실 뒷문으로 향하는 현태의 등에 대고 외쳤고,

“니네 애한테 얻어터지기 전에 도망친다 왜.”

현태는 시야에서 사라진 해주가 30초도 걸리지 않아 교실로 올라올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도망을 핑계삼아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왔다.


“저 축제 때 여장해요.”

복도를 지나가던 해진을 현태는 언제나 그랬듯 뜬금없는 한마디로 붙잡았다. 그러며 해진이 양팔 가득 무겁게 들고 있던 스케치북 절반을 자연스럽게 제 팔로 옮겨들었다. 

“다른 쌤들은 막 애들 부려먹던데. 도와드릴게요.” 

멋대로 도와준다 말하면서 걸음을 옮기는 현태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말릴 새도 없었다. 해진은 자신의 절반정도 가벼워진 팔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해진이 하는 수 없이 현태와 걸음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해진에게 있어 현태의 한마디는 항상 배려가 없었다. 앞뒤 없이 툭 상대에게 던져놓고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이라 매번 번거롭거나 혹은 난감했다.

“여장?”

해진이 되묻자 현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고3이 뭔 축제야.”

“어쩌다보니까요. 그냥 잠깐 무대만 서는 건데요 뭐. 고3은 축제도 못 즐기나.”

그 사이 해진의 시선이 무심코 현태의 옆얼굴을 훑어보는 게 분명 여장과 현태를 매치시켜보려 가늠하는 중일 터였다.

현태의 각진 턱에까지 해진의 시선이 흘러갔다. 그 사이 지나가는 학생 한명이 “안녕하세요.” 인사하기에 “그래, 안녕.” 하고 대꾸해주는 해진을 짧게 곁눈질 하던 현태가 무미건조한 투로 중얼거렸다.

“굉장히 섹시할 텐데 구경 오실래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해진은 웃음이 터졌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해진의 목안을 울리며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순간, 현태는 왠지 입안이 마르는 것만 같았다.

“하여간 특이한 새끼.”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해진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현태의 걸음이 멈췄다. 어느덧 미술실 앞이었다. 현태는 해진에게 다시 스케치북더미를 돌려주며 제 구겨진 셔츠를 가볍게 털었다. 그리고 가벼웠던 손짓만큼이나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또다시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니까 형을 좋아하는 거겠죠.”

“…….”

“특이하니까.”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건방진 자세로 반듯하게 서서는 해진을 가만 바라보는 모습이 정말이지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방심한 순간을 노린 현태에게 말려든 해진은 그것을 따지지 못했다. 해진은 또다시 생각했다. 현태의 한마디는 항상 배려가 없다고.

좀 전의 가벼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둘 사이에는 적막함이 자리했다. 불쑥불쑥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는 현태를 난감하게 쳐다보던 해진이 고개를 돌렸다. 쭉 뻗은 복도 끝을 보는가 싶던 해진이 곧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고3인데, 정신 차리고 공부 좀 해라.”

“…….”

“아주머니가 걱정 많이 하신다던데.”

“항상 본인이 불리해지면 우리 엄마 들먹이시더라.”

“박현태.”

“알았어요, 갈게요. 어차피 예비종도 쳤고.”

현태가 늘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제 마음이 상대에게 난감하거나 곤란한 취급을 받는 게 좋을 리 없다는 것을 해진은 알고 있었다. 해진이 낮게 한숨을 쉬자, 돌아서려던 현태가 다시 해진을 마주보고 섰다.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요.”

그런 해진을 똑바로 쳐보다며 현태가 말했다.

“전 사실 형이 곤란해 질 때가 좋아요.” 

“…….”

“적어도 내가 신경 쓰이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현태가 돌아섰다. 해진은 그런 현태의 뒷모습에 눈길을 던져두다 이내 헛웃음이 터졌다. 정말이지 시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며 해진은 멀어지는 현태를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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