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해, 유혈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

빌어먹을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 한순간도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매뉴얼은 급하게 옷을 꿰입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며 굳어버렸다. 올 때야 매니저의 차를 타고 왔지만, 갈 때는? 이미 전철과 버스의 막차는 끊긴 지 오래였다. 택시까지 생각이 미쳤을 땐 낡아빠진 지갑이 자기가 품은 건 구깃구깃한 천 원짜리 네 장뿐임을 상기시켰다. 돈 때문에 생긴 악몽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데, 우습게도 그마저도 돈이 들었다. 이건 정말이지, 너무…….

"같이 나가지."
"……."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매뉴얼은 들리는 목소리에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말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남자는 긴말을 덧붙이는 대신 차 키를 챙겨 들며 가볍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괜찮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평소의 매뉴얼이라면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집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기에 매뉴얼은 결국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키곤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억 소리가 나는 외제 차에 탈 일이 생긴다면 어떨 것 같냐? 언젠가 친구들과 나누던 시답지 않은 잡담을 떠올리며 매뉴얼은 덤덤히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과거의 자신은 동네방네 자랑할 수 있으니 딱 한 번이라도 타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답했지만, 실제가 된 지금에 와서는 평생 이 일을 이야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주소 찍게."

매뉴얼이 내내 침묵을 지키니, 남자도 대답이 불필요한 말을 건넸다. 생전 써본 적 없는 내비게이션 화면에 지문을 꾹꾹 찍어누르고 나서야 고요하던 차 안에도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건조한 기계의 음성 안내로만 꽉 채워진 차가 달리고 또 달려 반 정도 도착했을 때 남자는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대답을 요하는 내용이었다.

"가수로 데뷔하고 싶다고."
"……."
"목소리를 알아야 평가라도 해줄 텐데. 계속 말 안 할 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매뉴얼은 어느새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와 덜덜 떨리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며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잘 들어야……. 아침에 들었던 사장의 목소리가 끝없이 맴돌았다. 말 잘 듣고, 시키는 일 잘하고. 하얗게 질리며 굳어가는 매뉴얼을 바라보던 남자는 가볍게 혀를 찬 뒤 질문을 바꿨다.

"다른 건 됐고. 이름은."
"…매뉴얼입니다."
"목소리 좋네. 난 알에프라고 하네. 이름으로 불러도 되고, 직함…아. 나는 이사. 그러니 직함으로 불러도 되고. 이도 저도 싫으면 저기요라고 부르게."

한참 늦은 통성명이 끝남과 동시에 차는 빨간 불 앞에 잠깐 멈춰 섰다. 알에프는 입안에서 말을 조금 골라낸 뒤 자신의 옆에서 파리한 낯으로 굳어있는 젊은이를 마주했다. 언젠가 자신이 목격했던 좁은 연습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노래하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조용한 태도에 당황한 건 오히려 알에프 쪽이었다. 데뷔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매달렸다더니, 뒤늦은 수치나 후회라도 밀려오는 모양이지. 매뉴얼의 태도에 대해 어림짐작을 끝낸 알에프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말을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거래 관계일 뿐이니까. 복잡한 마음이야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털어낼 몫이니 굳이 남인 자신이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다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오가는 차가 없는 늦은 시간이라 한산한 도로를 달린 차는 예상 시간보다 이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겨우 벨트를 풀어낸 매뉴얼이 막 문을 연 순간이었다.

"난 우리가 좀 더 즐겁게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 말과 함께 알에프가 매뉴얼의 품에 건넨 건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새하얀 백화점 쇼핑백이었다. 심지어 암만 명품에 관심이 없는 매뉴얼이라도 모를 수가 없는 고가의 명품 브랜드였다. 매뉴얼이 무어라 답을 하고 가방을 돌려주기도 전에 차 문을 닫은 알에프는 고개를 휘저어 보였다. 인센티브나 팁, 뭐라 부르든 화대 따위의 의미가 아니었다. 애초에 오늘 만족했느냐고 한다면, 내내 입을 꾹 다문 상대의 아픈 비명과 울음소리만 들은 입장에서는 글쎄. 어쨌거나 중요한 건 알에프는 상대를 기분 좋게 만나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만날 생각이 있었으며, 나름 고심해서 골라온 선물이었다는 점이었다.

"들어가서 쉬게."

어색하게 굳어서 닫히는 차창을 바라보던 매뉴얼은 결국 허리를 푹 숙여 정중한 작별 인사로 대답을 대신 했다. 들어와서 열어본 쇼핑백 안에는 시계가 있었다. 그 작은 시계 하나의 값은 못해도 매뉴얼이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몇 달을 일해 한 푼도 쓰지 않아야 장만할 수 있는 금액일 것이었다. 당연히 그 시계는 좁은 자취방에서 당장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야 하는 대학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더 짜낼 눈물도 없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한 매뉴얼은 아까 건네받은 상태 그대로인 쇼핑백을 행거 아래에 내려놓은 뒤 한 마디를 꺼낼 뿐이었다.

"역겨워."

무엇이? 제 속에서 들린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은 채로, 매뉴얼은 낡아빠진 매트리스 위에 지친 몸을 누이고 애써 눈을 감았다.

***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헐떡이는 폭염 때문일까? 근 한 달 만에 만난 매뉴얼의 상태는 어딘지 이상했다. 방학 중 동아리 활동을 위해 오랜만에 매뉴얼의 자취방에 모인 스턴과 크레인은 확신에 찬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대화하던 중이나 노래를 부르던 중간에 갑작스럽게 소리가 끊겨 바라보면 입을 다물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매뉴얼이 있었다.

"매뉴얼.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어? …아냐.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매뉴얼은 자신이 돌아보기까지 크레인과 스턴의 부름이 자그마치 다섯 번이나 이어졌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고민이 있는 거라면 들어주고, 아픈 거라면 돌봐줄 텐데. 언제나 묻지 않아도 먼저 조잘대던 매뉴얼이 입을 다물자 스턴과 크레인은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냐, 아프냐 물으면 조개처럼 입을 앙다물어버리니. 그러던 중 둘은 매뉴얼이 고장 난 듯 멈출 때마다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꽂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좁은 자취방 구석. 옷이 주렁주렁 걸린 행거 아래에는 옷자락에 가려진 쇼핑백의 산이 쌓여있었다. 어느새 매뉴얼은 다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게 다 뭐야?"
"그냥 둬."

맹세하건대 크레인과 스턴에겐 악의랄게 없었다. 친구의 걱정거리로 보이는 것들을 그냥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말리는 매뉴얼의 목소리에는 얼핏 두려움까지 서려 있었건만, 속삭임이 너무 작았던 탓이었을까 혹은 친구들의 의욕이 넘쳤기 때문이었을까. 첫 번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두 사람에게 매뉴얼의 비명 같은 절규가 들렸을 땐 이미 쇼핑백의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져버린 뒤였다.

느리게 흘러가는 여름 오후의 환한 빛 아래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물건들을 마주한 크레인과 스턴은 의문과 당황으로 굳어있었다. 저게 뭐지? 단순히 짐 더미인 줄 알았던 것들의 정체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종류였다. 매뉴얼의 형편에, 아니. 평범한 20대 청년의 수준에 맞지 않는 온갖 고가의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쇼핑백에서는 포장도 뜯지 않은 신발부터 옷과 가방, 그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시계와 액세서리가 들어있을 보관함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그냥 두라고 했잖아…!!"

조금 전까지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던 자취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친구들을 밀쳐버리고 매뉴얼은 반쯤 나간 정신으로 그것들을 주워 담아 원래 자리에 급히 쌓아 올렸지만, 한 번 무너진 탑은 쉬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무너져내렸다. 다가오는 친구들의 손길도 다 쳐내고, 잔뜩 상처 입고 날 선 짐승처럼 매뉴얼은 예민하게 성을 내며 그들을 쫓아내기에 급급했다.

"매뉴얼, 우리는 그게 아니라……."
"됐으니까 그냥 두고 꺼져. 당장 나가라고!"
"야! 우리가 일부러 그랬냐고! 저게 대체 뭔데?!"

우리가 그때 조금만 더 나이를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훗날 스턴은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씁쓸하게 웃었다. 크레인은 그럴 때마다 대답 대신 술을 들이켰다. 능숙하게 대처하진 못했어도 적어도 매뉴얼에게 같이 목청을 높이며 험한 소리를 하진 않았을지 모른다는 후회는 그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둘의 가슴에 박혔다. 그날, 계속된 욕설과 다툼 끝에 결국 스턴과 크레인은 마음이 상한 채로 매뉴얼을 홀로 두고 자취방을 떠났고, 매뉴얼은 혼자 엉망이 된 그 방에 틀어박혔다.

"씨발……."

거칠게 울리는 이명에 고통스럽게 귀를 막으며 주저앉은 매뉴얼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친구들에게 들킨 순간 선명히도 들렸던 자신의 세상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여름의 열기가 지독히도 뜨거웠다. 메말라 죽을 것만 같아 급히 물을 찾아 들이켰지만, 무엇하나 해소되는 건 없었다. 이건 어쩌면 꿈일까? 악몽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엉망일 수는 없었다. 꿈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만…….

붉은 핏방울이 팔뚝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을 때 매뉴얼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건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들었던 과도를 떨어트리고 끅끅대는 울음을 터뜨리던 매뉴얼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을 때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기엔 수치스러웠고, 막 엉망으로 쫓아낸 친구들에게 걸자니 염치가 없었다. 그 무수히 많은 연락처 사이에서 유일하게 눈에 들어온 번호를 바라보던 매뉴얼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게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를 받은 상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무미건조한 태도에 매뉴얼은 오히려 마음을 놓으며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사님, 오늘 만나실래요?"

Abiga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