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여명은 삐걱이는 몸으로 출근을 어찌어찌 마쳤다. 다시 말하지만 차차웅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 이르게 집을 나서서,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가게 문을 열었다. 함께 출근한 것을 별로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내연애는 아무도 모르게 시작해서 아무도 모르게 끝내야 한다는 것을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차차웅이니만큼, 직원들 수명이 다할 때까지 헤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가게가 사라지고 동료들의 손자의 손자가 태어날 때 까지도 초이와 여명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을 문득 상상한 여명은 어쩐지 아득한 기분에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백 년도 넘게 살아온 차차웅이지만, 그리고 이미 많은 인간들을 떠나보냈지만. 언제나 그런 상상을 하면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인간 사회에 섞여들어 살아가는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이별에 있어선 언제나 매정해야 한다. 인간들 뿐만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도. 


잠긴 가게 문을 따며 초이가 물었다. 


"자기, 목련이는?"

"오늘은 산책. 가끔 며칠씩 안 들어오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응, 말은 놓기로 결정했구나."

"그래서 싫어?"

"아니, 더 친근해서 좋지. 이 참에 이름도 불러 볼래?"


여명은 눈을 흘기며 초이의 옆구리를 한 번 더 찔렀다. 당연히 안 아팠지만 초이는 아픈 척 몸을 움츠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익숙한 공기가 두 차차웅을 반겼다. 겹쳤던 손을 놓고, 손 끝을 잠시 스쳤다가. 둘은 각자의 자리로 향해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하며 가게는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그 왁자지껄함이 싫지 않았다. 


95.


계절이 흘러 흘러 가을이 찾아왔다. 여명의 졸업이 목전이었다.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둔 여명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어찌저찌 졸업장을 향해 달려갔다. 중간에 교수님의 망태기에 담겨 대학원에 갈 뻔 하긴 했지만. 졸업작품을 준비하다 계획서를 두 번 날려먹어서 이성을 잃고 컴퓨터를 부수려고 드는 것을 목련과 초이가 막아주긴 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명이 차차웅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다시는 수능 안 칠 거야...... ."

"하하, 그 얘기 팔십 년 전에도 했다고 목련이가 말해줬는데."

"아니 걔는 왜 자꾸 그런 얘기만 하지? 아무튼 시끄러워. 다시는 학교 안 다닐 거야."


탁자에 늘어진 여명이 미간을 구겼다. 머릿속이 꽉 차버려서 먹먹했다. 여명은 불행하게도, 막학년 막학기 잘못된 선택으로 조별과제가 낀 교양을 듣게 되었다. 하필 복학생들끼리 조가 짜였고 사람 좋은 여명이 어어, 하는 사이 이 복학생들은 탈주했다. 4인분 음식은 해본적 있어도 4인분 과제는 해본적 없던 여명은 졸지에 이 팀의 버스기사가 되었다. 여명은 팀원들을 기름에 죄다 튀겨 버리고 싶었다. 조리과는 사람을 찢어. 다들 명심하도록 해. 


-주인은 조리과가 굳이 아니어도 사람 찢을 수 있는데요. 그 직후에 처용님이 와서 주인을 죽이겠지만.

"아, 시끄러워 최목련! 나 죽으면 너도 죽거든?"

-전 성이 없는데요?

"내 등본 떼보면 최 씨니까 너도 최 씨지."

-왜 주인이랑 같은 성이죠? 용마의 자유를 존중해 주세요.

"내 용마는 왜 주인 존중할 줄을 모르지?"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여명의 머리맡을 목련이 맴돌았다. 촉촉한 고양이의 콧잔등이 쿡쿡 여명의 뺨을 눌렀다. 그 귀여운 감각에 여명이 우는 소릴 내며 목련을 꽉 껴안았다. 보통 고양이었다면 도망쳤겠지만 목련은 용마이니만큼 주인의 주접을 견뎌 주기로 했다. 정말이지 이럴 때만큼은 착한 용마다.


꽉 안긴 채 털을 그루밍하는 목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초이가 상냥한 목소리로 여명을 달랬다. 자기, 오늘 거기까진 끝내야 한다고 했잖아. 여명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것까지 끝나면 데이트 하자."

"자꾸 미뤄서 미안...... ."

"응? 괜찮아. 아. 팀원들 문제인가? 내가 만나서 얘기라도 해 볼까?"

"아니, 하지마 선배."


여명은 정색했다. 초이와 팀원들의 만남? 솔직히 예의범절을 주입해 줄 것 같아서 끌리긴 한데 백프로 처용님이 뜰 거다. 그럼 난 죽겠지? 여명은 자기 목숨 소중한 것을 아는 쫄보였다.  


96.


여명은 해탈한 얼굴로 졸업장을 받아들었다. 내가 다시 수능을 치면 차차웅이 아니라 개다. 

그래도 뿌듯한 감정이 없진 않았다. 여명의 친구, 유자가 꽃다발을 들고 그녀가 운영하는 밴드의 팀원들과 함께 와 있었다. 와글이는 사람들 틈에서 삐쳐나온 옅은 금발을 슥슥 손으로 빗어 가다듬던 유자가 꽃다발 든 손을 건성으로 들어보였다. 


"졸업 못하고 대학원에서 썩을 줄 알았는데 졸업을 하긴 하네."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심하긴 뭐가 심해, 새끼야. 여기 꽃다발."


졸업 축하한다. 삼삼한 말 뒤에 씩 웃은 여자는 여명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근데 오래는 못 있는다. 나 뒤에 바로 공연 있어서. 여기 내 팀원들. 인사해."

"안녕하십니까!"

"졸업 축하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각이 바짝 잡혀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유자의 '팀원들'을 떨떠름하게 본 여명이 유자에게 속삭였다. 너 조폭......그런 거 안 하지? 인간들 데리고 그런 짓 하면 처용님이 단속하는 거 알지? 

물론 헛소리 말라며 등짝을 맞았다. 유자는 손이 매웠다. 


97.


여명은 호적상 고아였으므로 부모는 없었다. 사실 다른 차차웅들도 다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래서 여명의 졸업식에는 혈연이 이어진 가족은 올 수 없었다. 여명이나 초이나,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레스토랑의 직원들에겐 아니었나 보다. 초이가 사장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들은 단체로 모여들어 여명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여간에 참 좋은 사람들이다. 여명은 초이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꽃다발을 흔들었다. 야 쟤는 저걸 한 손으로 쥐네. 힘도 좋다. 직원 중 한 명이 질린 듯 말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이 차차웅이니까. 


"초이 선배!"

"응, 졸업 축하해."


그가 웃으며 건넨 꽃다발은 언젠가 여명이 받았던 것처럼, 흰 안개꽃 사이사이 하얀 라일락이 꽂혀 있었다. 점원들이 와글와글 여명의 주위로 몰려들어 불만을 토로했다. 야! 넌 초이 선배밖에 안 보이냐? 우리는? 선배 부끄러워요. 여명아 졸업 축하한다. 우리 사진 찍자. 아니 쪽팔리지도 않냐? 시끄러! 사진 말고 남는 게 뭐가 있어? 이게 다 추억이야!


여명도 마지막 말엔 동의했다. 


98.


두 개의 꽃다발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사람들 사이 파묻혀 찍은 사진을 팔랑이고 있자 목련이 베개 위로 훌쩍 뛰어올라 기웃거렸다.


-뭐 보세요?

"졸업식날 사진 찍은 거.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전 그런 것 없어도 계속 옆에 있을 텐데 무슨 상관이람. 

"그래도 다음엔 같이 찍자, 응?"


용마를 끌어안으며 조르듯 말하면, 흰 고양이는 곧 앞발로 여명의 이마를 꾹 밀었다. 성가시단 뜻이다. 


99.


여명은 얼마 안 가 레스토랑의 정직원으로 고용되었다. 월급도, 일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힘들었지만 정말이지 나쁘지 않은 직장이다. 무엇보다, 초이가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무작정 친근히 여겼고, 그 다음에는 무서워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여명은 초이와 연애 중이었다. 옛말에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일 년 전의 여명에게 너는 네가 무서워하고 불편해하는 탈과 연애할 것이라고 알려 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명은 초이의 품에 안겨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틀어놓은 TV에선 때늦은 멜로 영화가 흘러나왔다. 꽤 오래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영화 배경이 언제였더라. 자기도 저 때 다 컸었나?"

"선배랑 비슷하게 살았으니까 그랬을걸? 극장에 걸렸던 걸 본 기억은 나는데, 저맘때 영화들 여자 너무 이상하게 다뤄서 극장 가서는 안 봤어."

"하긴 이십 년도 더 된 영화지. 채널 돌릴까?"

"아니, 됐어. 거의 다 봤는데 뭘. 영화 끝나고 아침 해먹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할 거니까 가만히 있어. 나 이런 거 로망 있단 말이야."


초이는 미지근하게 웃으며 여명의 머리에 뺨을 묻었다.


"나야 좋지. 그럼 점심은 내가 해도 돼?"

"선배 마음대로 해."


100.


여명은 스스로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을 살아 온 차차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명은 특별히 처용의 눈에 띌 일도, 미친놈들의 눈에 띌 일도 없이, 적당히 차차웅들과 교류하고 적당히 인간 사회에 섞여 평범하게 살아왔다. 대다수 차차웅들이 그러하듯. 

그러다 초이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둘은 연인이 되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꼬인 인생인가 싶기도 했지만 현재 여명은 자신의 인생에도 선택에도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다. 


입맞춤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마주잡은 손은 서로의 온기로 미지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둥글게 만 몸을 쓸어내린다. 숨을 고르다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는다. 


여명은 행복했다. 그리고 행복할 것이다. 




레스토랑의 고양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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