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약속하셨던 기일입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혁재는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던 죄책감도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듯 했다.



"자네들의 말대로 하지."

혁재는 짧게 답했다. 황제인 제 동생을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 한평생 바라던 일이었다. 단순한 권력욕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혁재는 진정으로 훌륭한 황제가 되어 나라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끌어내려야 했다. 


이복동생인 현 황제, 이동해를.






[해은] 피의 꽃 (血花)

written by 천월애






혁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했다. 다른 황자들이 겨우 소학(小學 : 유교의 기초 경전. 현재의 초등학교 수준에 해당.)을 떼는 동안, 혁재는 사서삼경(四書三經 : 유교를 대표하는 일곱 가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각 책이 모두 소학에 비해 수준이 높다.)을 다 떼었으니 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글뿐이 아니었다. 말타기나 활쏘기 등의 무술 또한 그랬다. 혁재보다 먼저 태어난 황자들도, 혁재보다 후에 태어난 황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혁재는 황자들 중 가히 으뜸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예쁨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혁재는 그것이 마냥 기뻤다.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 자신의 어머니보다 더욱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자식들 중에서도, 혁재만큼 황제에게 사랑받는 황자는 없었다. 황제는 늘 혁재의 명석함을 칭찬했다. 

이런 혁재가 황태자에 책봉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래야만 하였다. 이동해라는 놈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랬을 일이었다.




그 당시, 황후에게는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렇기에 한낱 첩의 자식인 혁재가 감히 황태자의 자리를 넘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토록 권력을 갈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서부터 궁궐 안의 사람들이 온통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왔는데,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다들 황후가 아들을 낳을 일은 없다고 말했다. 황후는 이미 불혹(不惑 : 마흔 살)이 넘은 나이였다. 


이변이 일어났다. 황후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이다. 혁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 아주 기뻐하셨다, 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제발 아들이 아니기를, 혁재는 빌고 또 빌었다.

혁재의 무수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황후는 끝끝내 아들을 해산했다. 이름은 동해(東海)였다. 황제가 몸소 신경 써 지어주신 이름이라 하였다. 해산 도중 황후가 승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적자의 탄생을 못내 기꺼워했다. 동해는 겨우 세 살이 되었을 때 바로 정식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혁재가 한참을 정식으로 책봉 받지 못한 것과 과히 대조적이었다. 혁재는 그 '기쁜' 날, 홀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열세 살의 일이었다.






황태자로 책봉 받지 못한 다른 황자들은 대체로 열다섯을 전후하여 궁을 떠났다. 하지만 혁재는 궁궐에 남게 되었다. 황태자 이동해의 간청이 있었다고 했다. 총명한 혁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혁재는 이렇게나마 자신이 꿈꿨던 궁에 조금 더 오래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좋았다.

동해를 단둘이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혁재는 긴장 속에 마른 침을 삼켰다. 


동해가 똘똘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었다. 직접 가르쳐보니 과연 그랬다. 만약 동해가 황후가 아니라 후궁의 아들이었다면, 혁재와 황태자 자리를 놓고 접전을 벌였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혁재가 밀렸을지 몰랐다. 혁재가 여덟 살에나 깨우친 것을, 여섯 살 동해는 무리 없이 이해했다. 

혁재는 두려웠다.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본 것이 처음이라서였다. 어쩌면 질투가 났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황후의 아들인 것이 부러운 터인데, 머리까지 영명한 것에 샘이 났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조금은 뾰로통하게 내뱉었다.

"전하, 전하의 명석함에 비해 소인의 식견은 그다지 넓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더 좋은 스승님을 받아들이옵소서. 소인은 더 이상 전하께 아무런 가르침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동해의 표정을, 혁재는 여전히 잊을 수가 없었다. 혁재의 좁은 학식을 비웃거나, 기껏해야 그렇지 않다며 혁재를 치켜세우는 것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동해는 당혹스러운 듯 땡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양 볼에 눈물 자욱을 남겼다. 


"아닙니다, 형님.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직 형님께 배우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제발……. 제발 그 요청만은 거두어주십시요."

동해는 펑펑 울며 그리 말했다. 영락없는 여섯 살, 딱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였다. 혁재는 괜히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렸다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교습은 계속됐다. 동해가 나이를 먹어가며 학습 속도가 더뎌진 것이, 혁재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하여 동해는 혁재보다 조금 늦게 사서삼경을 떼게 되었다.






황제께서 갑작스레 승하하셨을 때, 동해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다. 궁궐은 한동안 떠들썩했다. 동해의 나이가 어림에도 수렴청정을 맡을 태황태비조차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스무 살의 혁재가 아직까지 궁에 남아있다는 것도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혁재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궁을 나가겠노라 몇 번이고 동해에게 청했지만 그때마다 동해는 결연했다.

 "형님, 저는 지금 생각지 못한 어린 나이로 분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궁궐에 유일한 가족이 형님뿐인데, 형님마저 나가시면 저는 대체 어디에 의지한단 말입니까. 부디 궁에 남아 부족한 저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동해의 말을 듣고 있자면 혁재의 마음은 늘 약해졌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그토록 좋아하고 따르던 동해였다. 챙겨줘야 한다는 의무감까지는 아니였고, 이 어린 아이를 차마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는 표현 정도가 알맞았다.

혁재는 그렇게 동해가 황제로 즉위하고 혁재 본인이 왕의 칭호를 받게 된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궁궐에 잔존하게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동해도 스무 살이 되었지만, 혁재는 여전히 궁궐이었다. 혁재는 서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궁에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또 남아있을 생각도 없었다. 몇 번이고 궁을 떠나겠노라 동해에게 고해보아도, 혁재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궁을 떠나면 아니 된다며 동해가 만류하던 것이 이제껏 이어졌을 뿐이었다.

혁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동해의 말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황제인 동해가 해야 할 모든 일은 혁재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릴 사항이 생기면 동해가 혁재에게 묻고, 혁재가 동해에게 답하면 동해는 대신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식이었다. 사소한 일이든 중대한 일이든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혁재가 모든 정사(政事)를 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렸을적 똘똘하다고 여겼던 것이 무색하게도, 동해는 참으로 능력 없는 황제였다.


이쯤 되자 혁재도 슬슬 동해가 귀찮고 성가셨다. 처음에는 어린 동해가 귀여워서 곁에 계속해서 있어 달라는 부탁에 응했다. 조금 더 큰 뒤에는 홀로 남겨질 아이가 안쓰러워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대체 무언가. 더 이상 동해는 어리지도 귀엽지도 안쓰럽지도 않았다. 다만 어리석었다. 혁재는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이라, 또 동해가 워낙 자신을 믿고 따르는지라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형제들 중 자신이 그나마 제일 총명하여 그런 것이리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아껴주고 챙겨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혁재는 자신보다도 등치가 훨씬 커진 이 동생을, 이젠 더 이상 예전처럼 돌보아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 가지 혁재를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궁궐 안팎으로 동해가 훌륭한 황제라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이웃나라들과도 현명하게 관계 맺고 대내적으로도 민심을 잘 보살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건 동해가 아니라 혁재가 내린 결정이었다. 이 모든 공은 동해가 아니라 혁재에게 돌아갔어야 하는 공이었다. 만일 황제가 동해가 아닌 혁재였다면 이 나라는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혁재는 동해가 괘씸했다. 핏줄 하나 잘 타고나서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으면서, 혁재가 평생을 꿈꿨으나 결국 얻지 못한 것을 손에 쥐었으면서, 정작 그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은 갖추지 못한 채 자신에게 모든 일을 떠맡기는 것에 이골이 났다. 

차라리 다른 형제들처럼 궁궐을 떠나 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같이 황제의 뒤에서 황제가 마땅히 해야하는 일들을 대신 처리하고 있자니, 어렸을 적부터 심연 속에 자신도 모르게 늘 존재했던 동해를 향한 부러움이나 질투심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샘솟는 것이었다. 




그들이 혁재에게 접근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다양한 직급의 관료들로 구성된 그들은, 혁재에게 대뜸 황제가 되고 싶지 않느냐 물었다. 그때만 해도 혁재는 반역이라는 엄청난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더랬다. 자네들이 지금 역모를 꾸미려고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냐며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는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겁도 없이 말을 이었다. 혁재 본인조차 깨닫지 못했던 잠재된 야욕을 읽었던 것인지, 달달 떨며 대답하는 목소리에서 나약함을 읽었던 것인지, 혹은 둘 다였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자신이 있어 보였다. 이혁재가 그들의 요구에 응할 것이고 절대 동해에게 일러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 아니 확신. 그들의 요지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동해는 지금 궁궐 내외로 평판이 아주 좋아 당장 무력으로 덤비다가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동해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현재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황제인 동해가 아니라 그의 형, 왕 이혁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하며 동해를 무능한 황제로 낙인 찍을 수 있는 것도 혁재뿐이다. 그렇게 해서 동해가 이상해졌다고 정평이 나면, 동해의 건강과 나라의 번영을 이유로 혁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동해는 정신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취해야 한다는 핑계를 앞세워 도읍에서 떨어진 산 좋고 물 좋은 곳의 별궁으로 모시면 된다.


찬찬히 얘기를 듣고 있자니 혁재로서도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혁재가 해야하는 일은 고작 조금씩 엇나가는 조언을 하는 것, 바로 그것뿐이었다. 

겨우 말 몇 마디로 황제가 될 수 있다니! 

하지만 역시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직접 끌어내려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혁재는 생각을 할 시간을 달라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벌써 약속한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밤이 깊었음에도 혁재는 아직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몇 마디 난언(亂言 : 증거도 없이 사회를 교란하는 말)을 하면 된다 하였다. 동해는 혁재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들을 것이니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쉽사리 동해를 배신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동해가 혁재를 귀찮게 군다 한들 감히 어떻게……….




그때 혁재의 침실 문이 덜컥 열렸다. 동해였다. 

"형님,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ㅁ…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혁재는 깜짝 놀라 떨어질 뻔한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입을 열어 내뱉었다. '폐하의 뒤통수를 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라는 생각은 삼킨 채였다.


"형님께 물어볼 것이 있어 들렀습니다. 이걸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동해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제대로 들어 동해를 마주했다. 동해의 팔에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안겨있었다.


"웬 고양이입니까."

"하늘을 보니 곧 빗방울이 떨어질 터인데, 이 작은 고양이가 홀로 애처롭게 울고 있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제가 형님을 찾지 않았습니까."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대체 자신은 동해에게 어떤 존재기에, 이런 사소하고 사적인 결정까지도 대신 내려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막무가내로 찾아와서는. 가뜩이나 고민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었던 혁재였기에, 이런 동해의 물음이 달가울 리 없었다. 

혁재는 동해를 내쫓듯 보내고 문을 닫았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로 자신의 침방을 찾아오지 말라는 으름장과 함께였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혁재를 지나치게 따르고 좋아했다고 한들 정도가 지나쳤다. 동해가 혁재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 황제가 되어야겠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동해가 주체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면 소용없을 계획이었다. 만약 동해가 계략에 말려든다면 그것은 그만큼이나 동해가 본인의 업무를 혁재에게 미루고 있다는 반증이 될 뿐이었다. 

거짓을 꾸며내자는 게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진상을 밝히겠다는 것뿐이다. 동해를 해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모두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혁재는 굳게 마음먹었다.




야-옹--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혁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문 앞에서 고양이를 발견한 혁재였다. 아, 동해가 기어코 고양이를 문 앞에 두고 간 모양이었다. 

지금의 심정으로써는 당장이라도 고양이를 쫓아내고 싶지만…… 동해의 말대로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밖에 내놨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괜히 혁재도 마음이 불편할 터였다.


"그래. 비가 그칠 때까지만 이곳에 있으렴."

혁재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양이는 혁재의 품에서 기분 좋은 듯 갸릉거렸다.






"전하, 약속하셨던 기일입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자네들의 말대로 하지."

혁재의 대답에 그들은 예상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전하. 열흘에 한 번 이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도 혁재는 한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정치적 야망과 동해에 대한 죄책감이 뒤엉켜 머릿속을 헤집었다. 혁재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이미 판은 벌어져 버렸다. 더 이상의 죄책감은 필요치 않았다. 계획이 순조롭게 풀려가기를 바라는 수뿐이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아침 조례에서 신하들의 한숨 소리가 늘었고, 혁재가 동해의 눈치를 좀 더 살피게 된 것. 그게 전부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다짐했음에도 자꾸만 동해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동해는 그런 혁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혁재를 대했다. 혁재가 지시한 사항에 대해 문제가 생겨도, 혁재를 탓하기는커녕 사과하는 척하는 혁재를 괜찮다며 다독여주던 동해였다. 


하긴, 그게 이동해였다. 설령 혁재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도 다 괜찮다며 덮고 넘어갈 것만 같은 사람. 그 정도로 혁재를 믿고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 혹은 그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 혁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혁재로 하여금 좀 더 과감하게 행동할 동력이 되기도 했다가, 오히려 혁재가 극도의 죄악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이 많아지니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일이 늘었다. 오늘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달빛 아래 홀로 한참을 거닐었다. 그러다 축시(丑時 : 새벽 1시~3시)가 다 되어서야 침방에 들어섰다. 어쩐지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아, 고양이가 보이질 않았다.

낮에는 궁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밤이 되면 꼭 혁재의 옆으로 와 눕던 아이였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이름도 지어주고 나름 애지중지 대하던 참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편히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혁재의 유일한 말동무기도 했었다. 




혁재는 무작정 궁을 뒤졌다. 낮이기라도 하면 크게 이름을 외칠 터인데, 한밤중이라 그것도 쉽지 않았다.

"바다야, 바다야!"

한참을 바닥을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디인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혁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침전까지 와버린 모양이었다. 잠에서 막 깨어났는지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동해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아아, 아닙니다. 늦은 시각에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폐하."

"무엇을 찾고 계신 겁니까. 방금 바다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게… 지난번에 폐하께서 두고 가신 고양이를………."


동해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싫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이름까지 지어주며 보살피고 있으셨습니까."

"소인이 언제 바다가 싫다 하였습니까. 그건 그때 폐하가…"

"아, 참. 이름은 어찌 지은 것입니까. 혹여 바다로 지은 것도 제 생각에 그리 한 겁니까."

동해는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리 물었다. 물론 동해가 두고 간 고양이기에 바다라고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혁재는, 급히 말을 돌렸다.


"폐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 '바다'라면 제가 잘 데리고 있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바다'라는 말에 힘주어, 동해가 말했다. 수라간 근처를 서성거리는 것이 보여 먹을 것을 챙겨주었더니 쫄랑쫄랑 따라와 동해의 침전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었다. 챙겨준 음식을 다 먹은 것을 혁재가 정신이 팔려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동해가 고양이를 데리고 나오자 혁재가 바로 안아 들었다. 바다는 이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한 얼굴로 혁재에게 안겼다. 혁재가 막 감사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동해가 말했다.

"마침 이렇게 된 거 제 침전에서 오랜만에 담소라도 하다 가십시오."

"아닙니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어서 주무십시요. 찾던 것을 챙겼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밤 중에도 바다를 찾으러 여기까지 온 형님을 보니 다음 생은 고양이로 태어나야겠습니다."

동해는 그리 말하고는 무엇이 웃긴지 허허 웃었다. 혁재도 어색하게 슬며시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동해는 늘 이랬다. 혁재에게 관심받고 싶어하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평소 같으면 그것도 성가셨을 텐데 오늘따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환한 달빛 아래를 지나며 혁재는 그리 생각했다.






동해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뒤로는 배신할 계획을 세우는 건,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혁재는 혹여라도 책을 잡힐까 동해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동해의 감정 또한 자연히 살피게 되었다.




"형님은 이게 무슨 꽃인지 알고 계십니까. 어쩐지 형님이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아 묻습니다."

후원을 돌다 우연히 동해를 맞닥뜨린 그 날, 동해는 새빨간 꽃 한 송이를 내밀며 대뜸 그렇게 물었다. 모른다 답하였더니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하던 답을 드리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꽃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후원을 거닐다 탐스럽게 핀 것이 예뻐 형님께 무슨 꽃인지 여쭈어보러 꺾어 왔습니다."

혁재는 다시 고개를 내려 동해의 손 안의 꽃을 바라보았다. 과연 동해의 말대로 고운 꽃이었다.


"말씀대로 꽃이 참 아름답습니다."

"형님께서도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가져가시지요."

동해는 환하게 웃으며 꽃을 내밀었다. 꽃이 혁재를 닮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혁재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동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형님 방에 두고 제 생각이 날 때마다 봐주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동해는 여느 때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는 사라졌다. 다만 그 표정이 마치 고백을 하는 수줍은 소년 같아 보였던 것은 혁재의 착각이었을까.







어김없이 그들과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날씨가 우중충하고 비가 쏟아지는 탓인지 평소보다 마음이 더 언짢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 어서 잠을 청하려는데 침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자객은 아닐까. 내가 방금까지 뭘 했는지 알고 동해가 사람을 보낸 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휩쓸었다. 겨우 벽에 기대어 앉아 호신용 칼을 찾는데,


"형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불쑥 들리는 동해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칼을 놓친 혁재였다. 그 탓에 혁재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붉은 자욱이 남았다.

그걸 본 동해는 말릴 새도 없이 혁재에게 다가왔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혁재를 바라보던 동해는 어의를 부르겠다고 했다. 별 일도 아니고 밤이 깊었으니 괜찮다며 혁재가 한참을 만류한 뒤에야 동해는 겨우 말을 들었다. 다행히 큰 상처도 아니었다.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어찌 주무시지 아니하고…."

혁재가 물었다. 동해가 침실까지 찾아온 것은 바다를 두고 간 이후로 처음이다. 물론 혁재가 이렇게 찾아오지 말라며 엄포를 둔 탓이었다.


"하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찾아왔습니다. 제가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는 것을 형님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옛 생각이 나서 형님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자 하여 왔습니다."


혁재는 밖을 바라보았다. 과연 비가 내리는 꼴이 사나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해는 천둥번개가 내리는 날이면 혁재의 옆에 와 잠들곤 했었다. 황제에 즉위한 이후로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어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혁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 생각이 나서 마음이 물러진 것도 있었고 어쩐지 거절하기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턴가 동해에게 매정하게 대하기 쉽지 않았다. 죄책감, 그래 죄책감이었다. 이혁재가 이동해에 고분고분해진 것은 전부 죄책감 탓이었다. 


그나저나 온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천둥이 무서워 형의 침실을 찾다니. 남들이 보기에 괴이하지 않나 싶었다. 차라리 자신이 중전이라도 되었으면 이상하게 보이지라도 않을 텐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혁재는 너무 놀라 고개를 털었다. 


"폐하께서는 왜 중전을 들이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중전을 들이시면 될 일 아니십니까."

혁재는 방금 했던 망령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 그렇게 물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없는데 어찌 중전을 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 황실을 앞으로 누가 이어간단 말입니까. 황태자 책봉도 없이…"

어느새 동해의 표정에 잔뜩 날이 선 것을 발견한 혁재가 말을 멈췄다. 손을 베인 칼날보다도 더 매서운 눈빛이었다. 조금 전의 망측한 상상을 들킨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전에 누굴 만나고 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동해를 어떻게 하려 했는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형님께서 그 자리를 대신하면 되지 않으십니까."

동해는 혁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혁재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정말 동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행히 동해는 오래지 않아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예처럼 다정한 낯빛이었다.

"그냥 해본 말씀인데 무엇을 그리 놀라십니까. 제가 형님을 두고 어찌 가겠습니까. 저는 여인을 들이는 것보다 그저 형님과 이렇게 함께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혁재는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마침 밝은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동해는 바로 혁재의 손을 잡았다. 혁재가 의아한 듯 동해를 쳐다보자 "아, 곧 천둥 소리가 들릴 것 같아 그랬습니다."라 동해가 답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둥이 쳤다. 혁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동해에게 기댔다.


한 차례 난리가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동해에게 안겨있는 꼴이라는 것을 알게 된 혁재였다. 화들짝 놀라 동해에게서 떨어지려는 것을 동해가 붙잡았다.

"아직 하늘의 기운이 여전한데 조금 더 이렇게 있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천둥이 두려워 그렇습니다."

혁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천둥이 무서운 것은 혁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있으면 그래도 견딜 만 했다.


아,

무심코 머리를 스친 생각에 고개를 들어 동해를 바라봤다. 역시 태연한 표정이었다. 동해가 천둥을 무서워했던가? 물론 입으로는 늘 그리 말했었다. 하지만………


또 다시 시작된 천둥에 혁재가 몸을 웅크렸다. 동해는 팔을 뻗어 혁재를 완연히 감싸 안았다. 토닥토닥 혁재를 도닥이며 동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 형님이 있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홀로 침전에서 눈물을 흘릴뻔했지 뭡니까."


말뿐이었다. 동해는 천둥번개를 무서워한 적 없었다. 혁재가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매번 찾아온 것이었을 뿐이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동해의 온기에 혁재의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천둥때문에 놀라서 그래. 아, 아니면 동해가 모든 계획을 알고 있을까봐 두려워서. 혹은 이렇게 착하고 나밖에 모르는 동생을 배신하려는 게 미안해서. 그래서… 그래서……

머릿 속을 맴도는 한 가지 단어를 지워내려 혁재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것은, 그것만은 안 된다. 아닐 것이어야 했다.






무능해진 황제 이동해에 대한 소문은 궁 안에 점차 퍼졌다. 시중 드는 나인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면 혁재는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분명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는데,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날이 좋은 어느 아침이었다. 나인들의 숙덕거림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혁재의 귀를 사로잡았다.


"봤어? 그 글자가 적힌 나뭇잎 말이야."

"보긴 했는데…. 대체 무슨 뜻이기에 다들 그렇게 쉬쉬하는 거야?"

"나도 아까 몰래 엿들은 건데 '바다의 기운이 다 했다.'는 뜻이래."

"그런데 그게 어째서?"

"얘도 참. 폐하가 요즘 갑자기 이상해지셨다는 얘기 못 들었어? 누가 봐도 폐하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문구잖아. 역시 하늘도 다 알고 계신 걸 거야."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조용히 하지 못할까!"

두 나인의 대화는, 상궁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한참을 문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혁재는 나인과 상궁이 떠나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분명했다. 이런 짓을 꾸밀 것은 그들뿐이었다. 

혁재는 한달음에 그들을 찾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묻자, 계획대로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계획은 말이 없었지 않느냐. 왜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어차피 필요한 일입니다. 전하께 말씀드리면 저지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감히 이런 일을 꾸미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 게냐."


그 말을 들은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하늘이 진정 무서우셨으면 처음부터 반역을 생각지 마셨어야지요."

혁재는 대꾸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이렇게 놀라시니 소신들이 다음 계획을 전하께 알려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하면 또 무슨 말씀을 하실지." 

혁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동해를 죽인다니? 그런 말은 없었다. 그럴 계획이었다면 당연히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손이 떨리다 못해 온 몸이 떨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혁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겨우 내뱉었다. 

"ㅇ,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분명 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모든 것이 다 전하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폐하께 모든 것을 알리겠다. 정말 그러고도 목숨이 남아날 것이라 생각하느냐."

"무엇을 말씀드린단 말입니까. 아, 전하께서 감히 폐하의 자리를 노린 일 말입니까. 주동자인 전하께서는 진정 무사하실 거라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혁재가 이를 악물고 뱉은 발언에,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열한 웃음을 지은 채 대답하는 것이, 마치 혁재를 비웃는 꼴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는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지 마십시오. 이러다 전하가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걸 폐하께 들키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려 떠나갔다. 혁재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벌써 달이 밝은지 오래였지만, 혁재는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더러운 야욕을 채우겠다고 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인가.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의 정당한 대가를 받겠다는 것뿐이다. 동해를 죽이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별궁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자신이 챙기면 될 것이다. 

그리 가볍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이 혁재를 위한다고? 아니. 그들은 그들을 위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혁재는 동해를 끌어낼 수단,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허울 좋은 방패일 뿐이었다. 

정말 그들이 군대를 이끌고 동해에게 덤빈다면 상황은 어찌 될 것인가. 예전 같다면 당연히 근위대가 든든하게 동해를 지켜줄 테지만 동해의 지지도가 한참을 떨어진 지금은 어찌 될지 몰랐다. 그리고 그건 모두 혁재가 자초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동해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럼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재가 이 일에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반역, 반역을 일으킨 죄를 물게 될 것이다.

아니, 혁재를 아끼는 동해의 자비로 혁재 자신의 사형은 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의 혁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차라리 죽음으로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면 죽고 싶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동해의 시선이었다. 항상 자신을 다정하게 봐주던 동해의 눈에 모멸감과 배신감이 서린다면………

혁재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동해가 그저 귀찮은 동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야-옹--

밤새 아무것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는 혁재가 걱정이었는지, 바다가 무언가를 물고 와 혁재에게 건넸다. 언젠간 동해가 주었던 이였다. 예쁘게 피어있던 것이 다 말라있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했지만, 혁재는 어쩐지 그 바스라진 꽃이 동해의 마음 같았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동해의 마음을 자신이 이렇게 처참히 부숴버린 건 아닐까……


선물을 가져다주어도 혁재의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애교를 부리듯 혁재의 옆구리로 얼굴을 부비는 바다였다. 혁재는 바다를 품에 안았다. 동해가 준 또 다른 마음이었던 바다를 쓰다듬으며, 혁재는 입술을 꼭 물고 한참을 더 울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울다 지쳐 혼절했던 혁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하늘에 걸린 후였다. 혁재는 용모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래, 동해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랑캐 부족의 침입이 있다는 소식에 오늘 아침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셨사옵니다."

동해를 모시는 상궁들의 얘기에, 혁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쟁의 기미가 보인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핑계일 것이 분명했다. 혁재는 당장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를 붙잡고, 어느 방면으로 갔는지 어느 정도의 병력을 데리고 갔는지 묻고 물었다. 예상대로 동해가 데리고 간 군대는 많지 않았다. 분명 그들이 손을 써둔 것이었다.

혁재는 채비를 마치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최대한 빠르게 말을 달렸다. 출발한지 오래지 않았다 들었으니 아직 희망이 있었다. 어서 가서 동해를 무사히 데려와야 한다. 






혁재는 수풀 뒤에서 숨을 죽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눈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막내로서 잡일을 도맡아 하던 놈이었다. 소란스럽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아직 별일이 일어나지는 않은 듯했다.

저 놈이 여기 있다는 것은 다른 놈들도 이 근처에 있다는 거겠지. 들키지 않고 조용히 처리해야 승산이 있었다. 혁재는 조용히 활시위를 당겼다. 


"형님,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갑자기 들리는 동해의 목소리에 혁재는 활을 떨궜다. 그 덕에 잔뜩 당겨졌던 화살은 바닥에 맥없이 꽂혔다. 놀란 것도 잠시, 혁재는 황급히 동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에게 숨어있는 장소를 들키면 불리하다.


그때 혁재가 노리던, 그들 중 막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혁재가 다시 손을 뻗어 화살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폐하, 잔당들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 막내라는 놈이 뱉은 말이었다. 혁재는 두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 동해를 보았다. 동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들떠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형님. 

형님? 어제 잠은 제대로 주무신 겁니까. 어찌 하루 만에 이리 수척해지셨습니까."

혁재의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보던 동해는, 낯빛을 바꾸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혁재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 어서 함께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형님은 어서 가서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해는 몸을 일으켜 혁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혁재는 얼떨결에 동해의 손에 일으켜 세워졌다. 아직도 멍한 표정이었다. 




겨우 말을 매어둔 곳으로 걸음을 떼다가 발에 뭔가 채여 바라보니, 어제 혁재를 면전에서 비웃던 그놈이었다. 심장 한가운데에는 화살촉이 관통해있었다. 혁재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걸 바라보던 동해가 표정을 싹 굳혔다. 

"이놈이 형님의 낯빛을 그리 만든 놈입니까."

동해는 화살이 박힌 가슴 부근을 발로 꾸욱 눌렀다. 아직 숨이 완전히 멎지 않았는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에 미간 주름이 더해졌다. 피가 울걱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혁재는 황급히 동해를 뜯어말렸다. 혁재가 억지로 웃어 보이자 따라서 환하게 미소짓는 동해였다. 방금까지 악마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고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런 동해를 간신히 달래 궁으로 향했다. 우선 돌아가서 얘기를 해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동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날의 기억은 황태자로 책봉되던 날이었다. 그 날의 분위기? 즉위식에서 손뼉을 쳐주던 사람들? 그런 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동해는 겨우 세 살이었다. 

동해가 기억하는 그 날의 유일한 장면은 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모두들 밝은 와중에 홀로 침울해 보이던 그 낯빛. 입꼬리는 분명 웃고 있는데 어쩐지 울고 있는 것만 같던 두 눈. 동해는 그게 누구인지 무슨 일로 그런 표정을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렴풋하게 뇌리에 박혔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형인 황자 이혁재였다. 동해 자신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황제가 되었을 사람이었다. 동해가 태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았기에, 혁재는 이미 궁 안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황태자였다고 했다. 

동해는 혁재에게 마음이 쓰였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서도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혁재를 좀 더 알고 싶었다. 일부러 혁재에게 배움을 얻고 싶다 황제를 졸랐다.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함이었다.


동해는 혁재가 그냥 좋았다. 혁재는 동해보다 키도 컸고, 글도 잘 읽었고,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의 동해는 겨우 다섯 살, 여섯 살이었다.) 막연한 동경이었다. 

혁재 형아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혁재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동해는 혁재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학습 진도를 잘 따라오면 혁재가 칭찬을 해주곤 했는데, 그것도 너무 좋아서 동해는 늘 열심히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혁재가 대뜸 동해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다 말했다. 동해가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동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러자 혁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허둥지둥 동해를 안아주었다.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혁재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것을, 동해는 눈치챘다.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것이다. 혁재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뱉은 것인지.


동해는 그 날 이래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혁재를 책임지리라고. 혁재가 동해 때문에 모든 걸 빼앗겼으니, 동해가 혁재를 오롯이 감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 이후로 동해는 혁재의 시험에 적당히 모르는 체를 하였다. 이미 이해한 내용을 잘 모르겠다며 묻고 묻던 날도 손에 꼽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혁재가 자신을 떠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았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집착이었다.






열 살이나 어리다는 것은, 동해에게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다. 그걸 핑계로 착한 혁재를 한참이고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동해의 칭얼거림을 혁재는 당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혁재가 아니면 안 된다며 보채고 보채왔던 것이 벌써 십 년이 넘었다.




혁재가 해준 조언이 이상했다. 한 번은 실수겠거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점점 잦아졌다. 나의 혁재형은 이런 걸 틀릴 사람이 아니었다.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피의 꽃이 조정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


황실을 찾아온 무녀가 남긴 말이었다. 동해에게 마음에 둔 여인이 있냐 물었다. 그 여인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니 마땅히 경계하라 덧붙였다. 동해는 그게 혁재임을 단번에 알았다. 이혁재가 괜히 혁(赫 : 붉을/혁)재(宰 : 도살할/재)가 아닌 모양이었다. 동해는 이를 바득 갈았다. 


감히 형이 나를 벗어나? 다른 놈들과 날 배신할 계획을 세워? 

그놈들이 나의 착한 형을 무슨 말로 꿰어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혁재는 이동해를 벗어날 수 없다. 절대로 혁재에게 황제의 자리를, 놈들에게 혁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형은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형은 나를 벗어나면 위험해.






섣불리 증거 없이 덤비다가는 그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치밀하게 증거를 모으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일부러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혁재를 비롯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대충 예상하던 대로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 웅성대는 관료들에게 일렀다. 

그대들을 전부 믿노라고. 그러니 그대들도 짐을 믿고 따라야 하노라고. 앞으로 짐이 이상한 소리를 하거든 우선 대강 흘려 들으라고. 중요한 일은 따로 불러 다시 일러주겠다고. 짐의 헛소리에 조정에서 대놓고 짐을 비난해도 좋다고. 이유는 차차 알려줄 것이라고.


동해는 찬찬히 사방을 둘러 보았다. 자리한 신하들을 전부 눈에 담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모든 관료들을 외우고 있던 동해인지라, 그 정도는 금방이었다.

동해는 두 신하를 지목했다. 가장 권위 있는 대신과, 이제 막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무관이었다. 함께 책략을 논의할 사람과, 그들의 편인 척하며 정보를 구해올 사람이었다. 


동해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수많은 신하들 앞에서 다시 한번 주먹을 쥐며 맹세했다. 

나만의 붉은 꽃을 절대 남에게 빼앗기지 않겠노라고. 아무도 탐할 수 없도록 꺾어서라도 곁에 두겠다고.











궁에 돌아올 때까지, 혁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할 말이 있는 듯 입술만 달싹거리다 마는 것이 전부였다. 동해의 침전에 마주앉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동해는 그런 혁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혁재가 마침내 입을 뗐다.


혁재의 이야기는 동해로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혁재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동해의 눈치를 살폈다. 

동해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무수히 용서를 구하는 혁재의 말에도 일부러 낯빛을 바꾸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굳은 표정으로 나직이 내뱉었다.


"형님은…, 그리도 제가 싫으셨던 겁니까. 제가 진정 죽기를 바라셨습니까."

혁재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 어찌 소인이 감히…… 잔뜩 메이는 목소리였다.


"형님이 그토록 저를 증오하시는지 정말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런 마음이시라면 당장 오늘이라도 떠나셔도 좋습니다. 그동안 억지로 형님을 잡아두어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혁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이제 더는 동해를 떠나고 싶지 않다, 매일같이 동해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이 입안을 한참이고 맴돌았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내기엔 염치가 없었다. 자신때문에 궁궐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혁재였다. 하지만… 하지만……


동해는 시선을 낮춰 자신의 용포 소맷자락을 바라봤다. 혁재가 동해의 옷깃을 꼬옥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차마 보내지 말아라 말을 할 수 없겠지. 나의 혁재 형은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형은 너무 착해서 탈이다. 그래서 동해가 혁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사랑했겠지만.


동해는 당장이라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고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그것마저 원치 않으신다면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역모를 꾸민 죄를 묻겠습니다.  평생 제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혁재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렁그렁한 눈이었다. 혁재는 동해에게 달려들 듯 안겼다. 동해는 그런 혁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진정으로…. 정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혁재를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앞으로는 꼭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 형님."


한 번만 더 저를 벗어나려 한다면 그때는 정말 형님을 꺾어버릴지 모릅니다.

뒷말은 애써 목구멍으로 삼켰다. 오랜 공을 들여 겨우 내 뜰 안으로 들여온 이다. 괜한 조바심에 일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형은 언제라도 내 손바닥 안일테니까.

동해는 후원을 가득 메운 붉은 꽃밭을 떠올렸다. 진정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

너무 당연하게도ㅠㅠ 혁재오빠의 한자 이름인 赫宰는 실제로 붉은 피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네버에버...ㅠ '빛날/혁'에 '재상/재'일 거예요. '붉다'랑 '도살하다'는 한자사전 저 아주 아래 아래 있는 의미입니다. 혹시나 오해치 말아 주세요 흑흑

++)

추신을 적은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본문에 볼드나 색깔처리된 부분이 몇 군데 있는데, 그 부분을 집중하며 읽으시면 조금 더 새로운 각도로 감상할 수 있으실 것 같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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