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짤대 

#13 

w.데자와 



N 인터네셔널 신규사업부문 강다니엘 본부장



대학 재학 시절, 기말고사 기간의 박지훈



약 2주 전 화요일, 점심시간 직후


다니엘은 팔짱을 낀 채 (구)비서 책상을 한참동안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랍 바로 위, 2센티쯤 튀어나온 책상 모서리에 붙어있는 작은 기계. 꽤나 오랜만에 마주친 상황이었다. 보자. N인터 오자마자 당했던 뒤로는 처음이니까 거의 3년만인가? 누구지? 왜일까?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씹고 있던 껌을 혀로 둥글렸다. 


도청 탐지기를 돌리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었다. 가정사 복잡한 재벌 집안에 태어난 숙명이랄까. 다니엘이 성인이 된 해, 아버지는 생일 선물로 탐지기를 안겨주었고 이후 다니엘은 분기당 한 번씩 최신 제품으로 교체해가며 제 주위를 샅샅이 검사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고독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3년이 흘렀는데 그때보다 더 구형 모델이라는 점이 거슬렸다. 집안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라면 훨씬 고성능의 최신 제품을 썼을 테니. 그렇다면 단순한 산업 스파이일까? 다니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그 사이 입 안에서 단물이 다 빠진 껌이 적당히 찐득해졌다. 다니엘은 도청기 위에 씹던 껌을 꾸욱 눌러 붙였다. 아예 부숴버리면 그쪽에서 눈치를 채고 숨어버릴 수도 있다. 구형 모델을 이렇게 막아두면 무언가 웅얼웅얼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만 그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 들릴 듯 말 듯,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 답답함에 가슴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덫을 친다. 


들고있던 껌 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니엘은 최근에 본부장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옹팀장과 황책임에게 다이렉트로 전달한 회의 자료 피드백과, 진행 중인 신규 아이템에 대한 논의, 경쟁사가 컨택하고 있는 남미 쪽 자원 회사 리스트, 그리고 -- 성우 형과의 개인적인 대화. 


"지훈이, 너한테 찍혔다고 생각하더라."

"찍혀?"

"어. 고작 2년차가 본부장한테 미움 받아서 어떡하냐고 나한테 찡찡거리는데 귀여워서 죽을 뻔." 

"형. 나 티 안 나?"

"아니. 겁나 나. 니가 대놓고 챙겨준 게 지금까지 얼만데. 다들 긴가민가 하고 있을 뿐이지."

"근데 왜 당사자는 모르지?"

"알잖아. 걔 똑똑한데 그런 쪽으론 눈치 없는 거." 


다니엘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토독. 토독. 이참에 완전히 드러내 볼까. 도청기를 설치한 이가 이 대화 내용을 약점으로 잡으려는 속셈이 있다면 바로 물어올 것이었다. 지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면서, 적 또한 유인한다. 일타쌍피인 셈이다. 다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아크릴 명패가 조금 삐뚤어져 있어서 바르게 고쳐놓았다. 



회식 때 부러 지훈을 콕 집어 데려다주기도 하고 그 다음날엔 아예 본부장실 안으로 불러들였건만 금요일 저녁이 될 때까지 적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협박을 하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건지, 혹은 본부장실 밖에서의 언행까지 수집할 정보력은 갖추지 못한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다니엘은 생각에 잠긴 채 사무실을 나섰다. 곧장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 금요일 밤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만나보라고 한 사람이 있어서 회사에서 한 블럭 떨어진 F호텔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N 인터네셔널 신규사업부문장 강다니엘입니다."


풋. 먼저 와서 바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다니엘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의자에 대강 걸쳐 앉았다. 


"사무적으로 오신 걸 인사에서부터 드러내시네요."

"네.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왔으니까요." 

"회장님 지시라?"

"네."


시원시원하게 생긴 여자는 성격도 쾌활했다. 집안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좋다더라, 라고 했던 할아버지 말씀이 아주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뭐, 성격이 보살급이라 한들 아무 의미 없긴 하지만 말이다. 다니엘이 주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자 여자는 제가 알아서 바텐더에게 손짓을 했다. 곧 여자와 똑같은 잔이 다니엘 앞에 놓여졌다. 


"흠.. 듣던 대로 허우대는 멀쩡한데.. 여자가 취향이 아닌 거에요, 제가 취향이 아닌 거에요?"


여자는 40도가 넘는 술을 단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다니엘은 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 입에 가져가지는 않았다. 


"..일단 후자라고 해두죠."

"아, 그래요? 전 남자가 취향이 아닌데."


번쩍. 다니엘은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이 오기 전부터 이미 몇 잔을 마셨는지 취기가 올라있는 여자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저도 아버지가 시켜서 나온 거라."

"..."

"그쪽만 떨떠름한 거 아니란 거 알려드리고 싶네요."

"..."

"아무리 싫어도, 사람을 만나기로 했으면 좀 웃으시구요. 피차 비즈니스잖아요." 


다니엘은 입가로 잔을 가져갔다.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골치가 아팠었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그것도 상대 쪽에서 먼저 패를 보여서. 여자는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이번엔 병 째 주문을 넣고 있었다. 


언론 재벌가 출신인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도피 유학을 나갔다가 최근에 불려 들어왔다고 했다. 안 들어오겠다고 땡깡을 부렸지만 애인과 함께 간 쇼핑몰에서 카드가 긁히지 않는 사태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소환되었다. 다니엘과의 만남은 여권과 카드를 돌려받기 위한 거래로, 미국에 있는 애인에게 들키면 아마도 난리가 날 거라며 그녀는 큰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만남에 안도하며 그녀와 명함을 교환했다. 가까이 지내서 나쁠 것 없는 집안이었고 친구 삼기에도 괜찮은 성격이었다. 무엇보다, 이것으로 두 집안이 당분간은 조용할 터였다. 


싱글몰트 500밀리 한 병을 뚝딱 해치운 둘은 로비에서 쿨하게 헤어졌다. 그녀는 회전문 앞에서 운전기사를 기다렸고 다니엘은 실외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호텔 앞, 연말 트리용으로 미리 설치해 둔 대형 전나무 뒤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을 빨고 있는데, 마침 여자가 세단을 타고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훈과 라이관린이 호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이 시간에 호텔을? 둘이서? 다니엘은 심장이 쿵, 하고 발치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계속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무언가가 눈앞에 날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제때 털지 못한 담뱃재가 바람에 날려 알아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끄고 다시 호텔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둘은 호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지훈은 택시 승차 장소에 섰으며, 관린은 도어맨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어떤 상황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야근 후, 회사 앞 사거리에서 택시 잡는 데 실패하여 여기까지 흘러온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제 상태가 심각하긴 했다. 예전엔 그저 가까이만 둬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정말로 가까이 끼고 있어보니 더 큰 욕심이 생겨났다. 대체 어떻게 하면 재수없는 상사가 아닌, 강다니엘 개인으로서 어필할 수 있을까. 라이관린이 인턴이기 이전에 지훈에게 친한 동생이었던 것처럼, 자신 역시 그에게 본부장이 아닌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차륵. 


그때, 트리 반대편에서 셔터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가, 다니엘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아니, 그것보다 저 렌즈가 향하는 방향은 분명 —


다니엘은 렌즈가 찍고 있는 피사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훈은 택시에 막 오르는 중이었고, 관린은 차에 탄 지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한 카메라의 존재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밝게 웃는 얼굴들이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적은 다니엘이 친 덫에 반응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적이 노리는 타겟을, 다니엘 자신이 착각했을 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악의는 강다니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박지훈을 향한 것이었다.  



주말에 블라인드가 터졌을 때, 다니엘은 확신을 했다. 이제 덫을 서서히 조일 때였다. 지훈이 퇴사하겠다며 도망을 가버린 후, 팀장들로 하여금 본부 전체의 보안을 점검토록 한 것은 사냥을 위한 밑밥이었다. 스파이가 있는지 경쟁사에 자꾸 정보가 새고 있으니 문서 보안에 각별히 유의하라. 지원팀에다가는 도어락 설치 기사를 불러 달라고도 얘기했다. 상사 비위 맞추기 하나는 기깔나게 잘하는 지원팀장이 아래 직원들을 들들 볶더니 본부장실 문에는 그날 바로 도어락이 설치되었다. 한편 월요일 주간회의에서는 본부 전원을 앉혀두고 다이렉트로 공표했다. 주중에 도청 탐지 업체를 불러 사무실 전체를 싹 한 번 검사해보겠다고. 만약 도청기든 몰카든 뭔가가 나오는 즉시,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그 겁대가리 없는 스파이를 찾아내고 인생 전체를 족쳐버겠다고. 이후 이 모든 사정을 공유한 옹팀장과 돌아가며 보초를 서기 시작했다. 도청 탐지 업체가 오기 전, 도청기를 수거하러 올 '적'을 잡기 위해. 


그리고 오늘 밤, 다니엘은 월척을 건졌다. 생각지도 못한 박지훈이라는 대어와, 원래 잡으려고 했던 미꾸라지 둘 다를. 



*



내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부하 직원인 줄을 스스로도 몰랐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책상 바깥으로 뛰쳐나갈 듯 놀랐지만 현실의 나는 본부장이 시킨 대로 입을 틀어막은 채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본부장은 무언가를 책상 유리 위에 올려놓았다. '찾고 있던 것'인 듯 했다. 머리 바로 위에서 울리는 금속성 물체의 정체에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꾹 참고 버텼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

“말씀 좀 해보시죠,”

“......”

“민정 대리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 초조하게 바닥을 찍어대던 하이힐 소리가 왠지 익숙하더라니, 지난 주 본부장에게 야단을 맞고 복도로 달려나가던 구두 굽 소리가 무의식 중에 남아있었나 보다. 그나저나 민정 대리님은 이 밤중에 본부장실로 숨어들어서 대체 뭘 찾고있었던 걸까. 설마 휴가 기간에 전체 공지를 내렸다는 정보 유출 문제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녀가 산업 스파이..? 나는 혼란한 머릿속을 헤집으며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언행들을 떠올려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팀도 달랐거니와 평소 그리 친한 편도 아니었기에. 그래서 사실 그녀가 나에게 소개팅을 제안했을 때 좀 놀라긴 했다. 알기로,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왜 박지훈 대리를 노린 거죠?” 


악. 깜짝 놀라서 고개를 치켜드느라 책상 바닥에 머리를 찧고말았다. 책상 재질이 워낙 단단해서인지 다행히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대신 내 머리가 그만큼 충격을 흡수했다. 나는 정수리에서 찌르르 울리는 고통을 감내하며, 바깥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정보 유출 플로우에 왜 내가 나와. 와씨, 나 무슨, 이 회사의 최종 병기이기라도 한 거야? 기승전박지훈 뭐 그런 거임? 


“김민정씨.” 

“......”

“대답 안 하시면 이대로 기밀 유출죄 적용시킵니다.”

“......ㅇ나잖아요.”

“뭐라구요?” 

“짜증난다구요.” 


허. 본부장이 조소를 흘렸다. 나 역시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어졌다. 내가 뭘 어쨌다고 사람을 보고 짜증이 나네 마네 난리야. 에이, 에이. 나는 책상 아래 허공에 짧은 주먹을 날리며 순간의 화풀이를 했다. 


“박대리가 대체 뭘 했다고 민정씨가 그렇게 짜증이 나는데요?” 

“얼굴 하나 믿고 나대고. 또 그게 먹혀서 특혜 받고. 들어오긴 제가 훨씬 먼저 들어왔는데 큼직한 업무는 걔가 다 하잖아요! 전 고작 지원팀에 처박혀서 잡일만 하고!”


히스테릭한 고성이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본부장의 단정한 구두코가 책상을 떠나 그녀 앞으로 갔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제 방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

“블라인드에 악성 루머를 올렸습니까?” 

"......"


뭐라고?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하며 그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방금 본부장이 책상 위에 올린 물건이 도청기이고. 민정 대리는 저걸 회수하러 이 시간에 사무실로 숨어들었으며. 무엇보다.. 블라인드도 저 사람이 올린 거였어? 


"말씀해 보세요. 대체 왜.."

"제가 먼저였다구요."

"뭐가요?"

"본부장님 좋아한 거, 제가 먼저라구요." 

"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한 태도였던 본부장에게서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뭐, 블라인드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치를 이미 넘어선 터라 오히려 초연해진 채로 뒷말을 기다렸다. 분명 나에 관련된 얘기가 오가고 있는데, 묘하게 남의 일 보는 것 같은 -- 엄마랑 같이 주말 드라마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본부장님 처음 오셨을 때부터 반해서.. 지금까지 그거 하나로 버텼어요. 개저씨 팀장이 저보다 늦게 들어온 남자 후배한테 더 중한 일 주고, 저한텐 비서 업무나 잡일만 던져줄 때도. 그게 본부장님 비서 업무였기 때문에 참았어요."

"......"

"덕분에 본부장님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다 알 수 있었던 건 좋았죠. 스케줄도 다 꿰고 있고, 화분 보낼 집 주소도 알고. 보안 강화한답시고 도어락 설치하면 뭐해요? 이거 제가 기사 부르고 설치한 건데. 비번도 제가 설정했고, 마스터키도 제가 갖고 있는걸요. 그뿐만이 아니라--" 

"그래서, 그게 박지훈 대리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구요."


지금까지 쌓인 한을 다 풀어내기라도 할 듯 빠른 속도로 쏘아붙이던 민정 대리의 말을, 본부장이 냉랭한 어조로 끊어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가 3년동안 열심히 일궈온 거,"

"......"

"박지훈 걔는 한방에 다 따냈잖아요." 


감정이 치솟는지 민정 대리는 말을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분을 못 참는 거친 숨소리가 책상 아래까지 들려왔다. 


"전 온갖 잡무 다 떠맡고, 긴 시간 노력해서 겨우 승진했는데. 걘 2년차에 대리 달고. 제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본부장님 보좌 역할도, 회의 시간에 고작 말 한 마디 했다고 바로 꿰차고."

"..김민정씨는 박지훈 대리가 그걸 어떻게 이뤄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걔가 이뤄내긴 뭘 이뤄내요. 그거 다 누군가가 준 거잖아요. 본부장님이 걔 예뻐해서 싸고 도니까 그 아래 팀장도 책임도 눈치 봐서 똑같이 하는 거구요!" 

"김민정씨, 애초에 제가 박대리를 왜 예뻐한다고 생각하세요?"


잠시 숨을 멈췄다. 민정 대리가 쏟아내는 말들이 가시라면 본부장이 던진 질문은 화살이었다. 나는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쥐며 가슴팍에 모았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단 잘생기긴 했잖아요."

"네, 그 이유도 맞아요."

"거봐요. 외모 하나로도 눈에 띄는 애가 맨날 애교 부리고. 상사들 앞에서 눈웃음이나 치고. 남자가 직장에서 그러고 다니는 거, 너무 이상하잖아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상해요! 이상하다구요! 남자면 본부장님이나 옹 팀장님처럼 듬직해야지. 귀여운 척 웃고 다니는 거 너무 게이 같다구요!"

"김민정씨."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흘렀다. 지난 2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얼굴 맞대며 지내온 사람이 나에 대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 속은 모르는 거구나.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쥐고있던 주먹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박대리, 생각보다 남자다운 사람이에요. 설사 그렇지 않다한들, 민정씨가 그 사람의 남성성을 평가할 권리는 없어요.”

“......”

“그리고 박지훈 대리, 일 잘하고 똑똑해요. 민정씨가 보기엔 지훈 대리가 별 거 안 하는 걸로 보일지 몰라도,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평소 민정씨가 하는 노력의 두 배 이상을 박대리가 하고 있어요. 타고난 것도 있는데 거기에 노력이 더해지니, 김민정씨가 못 이기는 게 당연하구요.”

“......”

“상사인 제가 봐도, 배울 점이 많고 성숙한 친구에요.” 


결국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민정 대리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 고인 눈물이었는데, 흐를 때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뭐랄까,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칭찬보다 기분이 좋았다. 남들보다 조금 튀는 외모.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학벌. 8학기 칼졸업. 대기업 입사. 내가 가진 객관적인 지표를 본 사람들은 나에게 '타고났다' '머리가 좋다'라는 둥의 칭찬을 했다. 하지만 사실은 -- 그 타이틀을 가지기 위해 나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무수한 밤을 새었고, 코피를 흘렸으며, 호구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팀플 수업의 하드캐리를 했다. 아이돌이었다면 무릎 하나 깨진다 생각하고 돌려댄 셈이다. 


그런 나를 처음으로 인정해 준 사람. 결과가 아닌, 과정을 오롯이 지켜봐준 사람. 

나는 새삼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냈다. 


"김민정씨,"

"..네."

"피차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마무리 합시다."

"......"

"민정씨가 잘못을 뉘우치고, 본인 스스로 사표 내시면. 없던 일로 해드릴게요."

"..사표요?"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생각도 못해본 일이라는 듯, 놀라며 반문하는 민정 대리에게 본부장은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네. 죄를 묻지 않는 대신 다른 회사 가시라구요."

"하.. 하지만.."

"이 사단을 내놓고, 더 버티시려구요? 전 제 사무실에 도청기 설치하고, 동료 몰카 찍어서 익명 게시판에 올리는 사람이랑은 소름 끼쳐서 일 못하겠는데요." 

"......"

"참. 지금 대화 전부 녹음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오리발 내밀 생각은 하지 마시고. 이직한 뒤에도 입 잘못 놀리시면.. 아시죠? 제가 가진 모든 수단 동원해서 철저히 밟아드리겠습니다." 


무서운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더 냉철한 사람이었다. 녹음은 언제 시작한 거야, 대체. 민정 대리 역시 놀랐는지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아무래도 지금 이 방 안에서 침착한 건 본부장밖에 없는 듯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나가기 전에 박지훈 대리랑 라이관린 인턴한테 꼭 사과하시구요." 

"......"

"폰트 크기 12, 자간 150%, A4 꽉 채워서 자필로 쓰시고, 저한테도 사본 제출하세요."

"그.. 그렇게 까지.."

"뭐, 하기 싫으시면 산업 스파이 낙인 찍혀서 법원 불려다니시든가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조금씩 훌쩍거리더니 이제 엉엉 소리내서 우는 게,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사태의 중대성을 이해한 것 같았다. 


"대답."

"......알겠습니다."

"네, 그럼 나가보세요. 나가실 때 보안 구역 문단속 잘하시구요."

"......네."


아까보다 힘을 잃은 구두 굽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도어락이 잠겼다. 띠릭.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는데 책상 아래로 커다란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조심스레 손바닥을 올리자 맞닿은 곳으로부터 따뜻한 체온이 번졌다. 


"머리 안 부딪치게 조심."

"..네."


너무 오래 바닥에 앉아있어서였는지 엉덩이가 시려웠다. 골반을 나머지 한 손으로 비비며 일어서자 본부장이 앞에 우뚝 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은 그대로 잡은 채. 영 민망하여 손을 빼내려 하자 오히려 힘이 더 주어졌다. 저.. 본부장님.. 이 손 좀.. 더듬더듬 말을 잇는데, 그가 손을 놓기는 커녕 제 쪽으로 훅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끌려가 그의 가슴팍에 부딪쳤고 곧 그의 팔이 내 등을 감싸안았다. 널찍하고 단단한 몸이었다. 한참 전에 깼던 취기가 다시 몰려오는 듯 하여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본부장님."

"네."

"감사해요."

"뭐가요."

"그냥.. 전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전부 삼켰다. 그리고 아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알 것 같았다. 수면 아래에서의 내 노력을 알아주고 평가해주는 눈을 가진 그라면 반드시. 


내 생각이 맞았는지 그 또한 대답 없이 나를 안은 채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맞은 편 빌딩의 야근이 끝났는지 한 층 전체의 불이 꺼지며 방 안의 어둠이 한층 진해졌다. 그가 팔을 조금 풀어내면서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침이 절로 삼켜졌다. 


"키스해도 될까요?"

"..언제는 물어보고 하셨나요."

"그건 그렇네요."


씹어먹힐 것 같았던 지난 번들과는 달리 이번엔 너무나도 부드러운 키스였다. 천천히 다가오던 얼굴에서 콧대가 슬쩍 꺾이고,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는 혀의 감촉이 말랑하고 푹신했다. 마치 생일 케이크 위의 생크림을 찍어 먹는 듯 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단 맛. 갈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입술이 부리처럼 내밀어졌다. 그가 쿡쿡 웃으며 입술을 콕콕 찍어내렸다. 답지 않게 귀여운 버드 키스라, 내가 베시시 웃어버리자 이번엔 입술 전체가 진득하게 맞닿았다. 느릿하게 부비는 입술 사이로 혀가 조금씩 밀려들어오고. 치열을 가볍게 훑는 동작에 몸이 떨렸다. 조금 용기를 내어 혀를 내어 보았다. 항상 일방적으로 잡아채이고, 깔리기만 했던 내 혀가 잇새를 비집고 나가 그의 혀 아래를 톡톡 건드리자 그는 놀란 듯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이내 내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중간에서 만나기도 하고, 그가 훅 치고 들어오기도 하고, 내가 그의 입술 안쪽까지 마중을 나가기도 하며, 두 혀가 부드럽게 섞여들었다. 끈적하고 달콤한, 초콜렛 퐁듀 같은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채워나갔다. 


"박대리님."

"네?"

"저 그럼 어실당본 아닌 거죠."

"어실당본? ..아! 카톡 프로필이요?"

"네."


무슨 뜻인지 맞춰보세요! 하면서 눈을 빛내는 게, 주인의 칭찬을 바라고 있는 대형견 그 자체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카리스마 본부장 맞나 싶을 정도의 갭차이.. 그의 머리 위로 귀가 삐죽이 솟아있는 듯한 착각을 애써 떨쳐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제 실연 당한 본부장이잖아요. 아니에요?"

"..맞아요."

"너무 쉽게 맞춰서 실망하셨구나?"

"어."


갑자기 터져나온 반존대와 그에 이은 반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픽, 웃음을 흘렸다. 


"실연 당한 건 아니긴 한데.."

"아니긴 한데?"

"아직 그 이상은 아님."

"뭐야. 사귀는 거 아니야?"

"글쎄요,"


나는 슬그머니 몸을 빼내며, 그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본부장님 앞으로 하는 거 봐서요." 


연애 역시 노력이 필요한 법. 

자, 강다니엘 본부장님. 다음 분기 평가를 위해 어디 한 번 노력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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