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피디님 저 마음에 안 들죠. >



“ 컷! 다시. ”

벌써 열 한 번째였다.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같은 장면을 이토록 지겹게 촬영해 본 적이 없었다. 카메라를 든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캐치하여 그 기대에 상응하는 얼굴을 꾸며내는 것. 그건 아역 경력과 아이돌 그룹 활동을 통해 다져진 일종의 센스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씨알도 안 먹히는 게 분명했다. 여러 번 글썽였던 눈가가 따가워지고 두 줄 짜리 대사는 곱씹다 못해 너덜너덜해졌다. 내게 벌써 열 한 번째 같은 연기를 요구하고 열 한 번째 퇴짜를 놓은 이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얼굴은 분명.. 연기가 못마땅한 것을 넘어서서 그냥 내가 싫은거다.


“ 잠깐 쉬었다 합시다. ”


피디의 말에 같은 씬을 열 번 넘게 촬영하느라 피로감이 쌓인 스텝들에게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강피디님 오늘따라 까칠하시네.. 그러게 열 번 넘게 다시 가는 거 처음 아니야? 나름대로 소리를 죽여 수군거린다고 해도 다 들렸다. 답답한 마음에 거칠게 뒷머리를 헝클였다. 저 멀리서 코디가 기겁을 하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짜증이 난다. 이유도 모르고 미움 받는 느낌.. 연예계에 발을 들인 후 지겹도록 겪었지만 그것이 일과 관련된 문제면 아무래도 좀 억울했다.


코디가 붕 뜬 뒷머리를 정리하고 번진 눈가 화장을 고치는 동안 메인 카메라 앞에 앉은 피디를 바라봤다. 서른 둘이랬나. 강다니엘. 연예인 예명 같은 이름을 가진 젊은 피디. 바로 전작이 그 해 3사 통합 최고 시청률을 경신한 스타 피디. 그리고... 나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인간.


그 반감이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도 잘 안 난다. 강피디가 내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순간들을 곱씹어봤다. 첫 촬영 날 NG를 냈을 때? 1화 대본리딩을 하다가 대사를 씹었을 때? 아니다, 그보다 전.. 기억의 끝자락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것은 사전미팅 날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강피디였다. 강피디와 관련된,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된 기억. 그러니까.. 저 인간은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좀 허탈해졌다. 그동안 실수한 것 없나 전전긍긍하던 내가 병신이지. 그래도 나는 좀 좋아했는데...


똑같은 미움을 받아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러면 데미지가 더 큰 법이다.

*

너무 좋아서 열 번 넘게 돌려봤던 단막극을 연출한 피디가 새 드라마를 찍는다고 했다. 이미 회사에서는 지상파 방송 예정인 로맨틱코미디 물의 남주인공 자리를 점찍어 놨었지만 부득불 이 드라마를 찍어야 한다고 우겼다. 이미 남녀 주연이 정해진 터라 서브 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데  서브남주 계속 하면 이미지 굳어버린다는 실장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반대하던 회사도 제작진과 배우 라인업을 검토하더니 드라마 자체는 잘 될 것 같다며 내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제법 더티하게 침을 발랐다. 들어오지도 않은 대본을 검토 중이라고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냈다. 구두라도 출연이 확정되기 전에는 기사를 내지 않는 것이 이 바닥 상도덕인데 태생부터가 교양과는 거리가 먼 사장이 불부터 놓았다. 내게 대본이 들어갔다는 기사가 난 이상 윗 급의 배우들한테는 대본을 더 못 넣는다. ‘박지훈이 깐 자리’에 들어갔다는 기사가 캐스팅 소식과 함께 연예란을 뜨겁게 달굴테니까.


‘ 지훈씨 이번에 B사 주연으로 들어갈 줄 알고 서브 역 대본은 일부러 안 넣었는데 이렇게 발 벗고 나서서 찍는다고 하는 거 보니까 대본 마음에 들었나봐요? 뿌듯하네. ’

‘ 사실 주연 배우들이 연기는 잘해도 화제성은 좀 떨어져서 아쉬웠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기사 낸 것도 그냥 넘어간 거 알죠? 잘 해 봅시다. ’


사전미팅 자리에서 대놓고 좋은 티를 내는 작가님과 안심된다는 표정을 한 CP님 사이에서 강피디는 입을 꾹 다문 채 끝날 때까지 다섯 마디도 안했다. 말 섞기도 싫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달라붙는 시선이 진득하다. 피디님 저 얼굴 뚫리겠는데요.. 실없는 농담을 하려다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도로 삼켰다. 제 작품에 더러운 언론 플레이를 끼얹었으니 화가 날 만하다.


그래서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피디가 내게 그렇게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회사가 한 짓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 배역 해야 한다고 고집 부려서 일어난 일이니까.. 그런데 작가님도, CP님도 해프닝으로 넘겼던 일을 왜 강피디 혼자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이정도면 그냥 내가 싫은 거다. 이유는 여전히 불명. 답답한 마음에 가슴께를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자 코디가 와이셔츠 주름진다고 뜯어말렸다. 대본을 말아 쥔 강피디는 아직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아주 짜증나 죽겠다는 표정.. 나보다 짜증나세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수백 번 곱씹은 대사를 다시 되뇌었다. 이번에도 오케이 못 받으면 진짜 혀 깨물고 죽고 싶을 거다. 내가 혀 깨문다고 저 인간이 눈 하나라도 깜빡 할 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


 다시 촬영이 재개되려는 순간 조연출이 밥차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주연 여배우와 친분있는 배우가 보낸 깜짝 서포트라고 했다. 촬영장 내부로 천천히 들어오는 트럭 간판에는 희진이가 은아동생 응원해요~❤️ 라는 문구가 크게 붙어 있었다. 작정하고 준비했는지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배너까지 양 사이드로 세워졌다. 데뷔 초 사장이 나를 최희진 닮은꼴로 언플을 징하게 했다. 그땐 별 생각 없었는데 배너에 박힌 윙크하는 얼굴을 보니 좀 많이 닮은거 같기도 하다. 메뉴가 뭐지..헐. 냉모밀.. 슬슬 더워지는 찰나에 완전 땡큐다. 튀김도 종류별로 있네..센스 대박. 좀 전까지 바닥을 기던 기분이 금세 상승세를 탄다. 역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오빠 적당히 먹어요, 사이즈 늘면 진짜 가만 안 둘거야. “

건데.. 너무 야박하다. 코디가 아주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튀김을 종류별로 집어오는 건 포기했다. 그렇다면 원 찬스 원 포인트. 목표는 제일 큰 새우튀김. 어..? 새우가 없어? 단호박,오징어,깻잎,고구마 다 있는데 새우튀김만 없다. 센스 대박이라는거 취소. 어떻게 냉모밀에 새우튀김이 빠질 수 있지? 결국 차선책으로 커다란 오징어튀김을 집어왔다. 바삭바삭한 튀김옷 사이로 씹히는 오징어살이 쫄깃했지만 오동통한 새우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아 오늘 새우튀김 벤또 사서 들어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얼음 동동 뜬 냉모밀 육수를 삼키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강피디가 조연출 손에 질질 끌려와서 앉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뭐 씹은 표정이다. 뭐가 또 맘에 안들어서.. 밥 먹을때까지 저래.


“아 진짜 안 먹는다니까 입맛 없어. “


“ 뭐래요. 아까 피디님 배고프다고 하는거 다 들었는데 왜 또 변덕이래.. 자고로 배가 불러야 촬영도 잘 나온다고 했어요. “


안 듣고 싶어도 대화 내용이 귀로 흘러든다. 조연출은 새벽 되기 전에 끝내고 집에 들어가고 싶은게 분명하다. 오늘따라 한층 더 예민한 강피디를 살살 구슬려 밥까지 챙기는 정성이 아주 눈물겹다. 빨리 먹고 소화 좀 시키려고 마지막 면발을 집는데 강피디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휙 자리를 떠버린다. 튀김 접시를 들고 있던 조연출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에 갸웃거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자 민망해진 조연출이 푸념하듯 말을 붙여온다.

“ 아니, 지훈씨도 느끼셨겠지만..오늘 피디님 예민한 건 알겠는데.. 새우튀김 없다는 게 그렇게 화 날 일인가? 못이기는 척 먹을 것처럼 하더니 다른 튀김은 다 있는데 새우튀김만 없네요. 하는 말에 젓가락 놓고 바로 가셨어.. “

“뭐 새우튀김 엄청 좋아하는데 없다니까 화났나보죠. “


아무 생각없이 나오는대로 뱉었다. 그리고 난 한참 후에나 알았다. 강피디가 새우를 좋아하기는 커녕 먹으면 호흡 곤란이 올 만큼 심한 알러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누군가 일부러 뺀 것처럼 새우튀김만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이유를...


*


방영 전 첫 회식이 잡혔다.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가 2회 연장을 확정해서 첫방 날짜가 한 주 밀렸다. 지금도 여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 벌었다는 생각에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 회식에 국장까지 참석한다는 말에 주연 배우들도 스케줄을 조정했다. 아 오늘 새우튀김 벤또에 아사히 마시면서 영화나 한 편 보려고 했는데.. 편한 사람들과 소소한 자리는 좋지만 몇십명이 모여 부어라 마셔라 하는 건 딱 질색이다.


 매니저형은 내 마음도 모르고 조연출한테 지훈이 참석 가능하다고 바로 대답해버렸다. 형 그럴 땐 없는 스케줄이라도 만들어야지. 뭐 주연 배우들도 조정하는 스케줄을 핑계로 빠지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강피디는 첫방이 일주일 연기되었다는 소식에 오늘 처음 보는 밝은 표정을 하고 있다. 회식은 별로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술 진탕 먹고 들이받아 볼까. 술을 마시면 없던 용기가 생긴다. 다음 날 아침에 책임져야 할 일도 덤으로.

아, 오늘 술 좀 잘 들어간다. 서먹서먹하던 스텝들과도 한잔씩 주고 받다보니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슬슬 열이 오르고 기분이 들뜬다. 맞은 편에 앉은 강피디는 서글서글하게 주는 술 다 받아 마시면서도 나한테는 말 한 번 거는 법이 없다. 소품팀 막내 스텝 잔까지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이 정작 마주보고 앉은 사람 잔 비어 있는 건 안중에도 없다. 내가 그렇게 싫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는다.

 

1차 중간에 드라마국 국장이 도착했다. 몇 십명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인사 하는게 부담스러웠는지 적당히들 하라며 손을 흔든다. 피디,작가,주연 배우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 가장 상석에 자리 잡고 앉은 국장이 한 명 한 명 아는 체를 하는데 나는 오늘 처음 보는거라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그쪽은 아니었나보다.


“ 박지훈씨, 임전무님은 잘 계시지? “

“ ..네? “

“ 이번 작품 투자 감사하다고 꼭 전해드려. 반사전으로 제작하는 것도 다 덕분이라고... “

“ 아, 네... “


임전무님은 잘 모르겠고 그 외동딸 근황은 아주 잘 알고 있는데요. 불퉁하게 튀어나올뻔한 말을 도로 삼켰다. 이주에 한번씩 놀이공원이며 스케이트장이며 데리고 놀러다니는데 아주 쑥쑥 잘 크더라구요. 차마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어서 웃으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작가님의 원고 진행 현황으로 대화 주제가 넘어가는데 맞은 편에 앉은 강피디가 소리나게 잔을 탁 내려놓더니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하며 목례를 하고 일어선다.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빼내는 걸 보니 한 대 피우고 들어올 모양이다. 머리에 열이 오르니까 충동이 잘 조절이 안 된다. 화장실 간다고 대충 둘러대고 강피디를 따라 나섰다.


가게 옆 골목 안쪽으로 들어간 강피디가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문다.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꼭 화보 속에서 튀어 나온 것 같다. 다리가 도대체 어디부터 시작되는거야..연예인 같은 이름을 한 강피디는 생긴 것도 꼭 연예인 같다. 인기척을 느낀 강피디가 내 쪽을 보더니 금세 인상을 구긴다. 물고 있던 담배를 한쪽 손에 들고 니가 여기 왜 있냐는 표정을 하는데..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성큼 성큼 그 앞으로 다가가는데 내가 그냥 돌아갈 줄 알았는지 강피디의 눈이 커진다.

너는 내가 마음에 안들고 나도 네가 마음에 안든다. 서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는 거랑 입으로 내뱉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겠다는 뜻이고 후자는 아주 끝까지 가보자는 거다. 먼저 불을 놓았다. 강피디가 무려 열 두 번째 컷에 오케이 사인을 내면서도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 이 종말은 이미 예견된거다.


“ 피디님 저 마음에 안 들죠. “

“ 어. “


폭탄을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대로 튕겨서 내가 맞았다.


“ 니 얼굴,회사,배역,뒷배, 전부 다. “


그것도 아주 KO 당할만큼 정통으로.


살살 오르던 취기가 싹 가신다. 이런 질문 받을 줄 알고 답변 미리 준비 해놓으셨어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줄줄 내뱉는 행태에 기가 찬다. 차라리 니 새끼 좆같다고 대놓고 말하는게 더 데미지가 적을 것 같다. 강피디는 피우던 담배를 대충 부벼 끄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장초던데.. 한시도 더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에 울컥 목이 메인다.


나는 분명 좀 좋아했다고.. 당신 카메라에 담겨 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고집이라는 걸 부려봤는데... 결과는 아주 처참했다. 오늘 밤에 일어난 일 중 내일 아침에 내가 책임질 건 바닥까지 가라앉은 내 기분 뿐이다.


* CP: PD의 역할을 10여년 거친 후 맡을 수 있는 직책으로서 PD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제작국에 할당된 프로그램을 맡은 PD들을 조율하고, 관리하며, 프로그램의 기획을 맡는 사람으로서
일반회사의 이사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방송 프로그램에서 제작인력 스크롤에서 맨 처음
나오는 '기획' 옆에 나오는 이름이 바로 CP의 이름이락 보면 된다. 대개는 기획,관리자의 역할이므로 실전
연출을 많이 하여 경력을 많이 쌓고 회사내에서 인정을 받으면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녤윙

구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