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마. 다녀 올게."

나는 거실에 있는 엄마들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지?"

마마가 큰 소리로 물었다. 

"네~."

신발을 신고 있는데 엄마가 따라 나왔다. 

"다정아. 너 민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아."

"응? 뭐를?"

"민주가 좋아한다는 사람 말이야. 속앓이만 하지 말고 직접 물어 보는 건 어때?"

"엄마도 참... 그런 걸 어떻게 물어 봐? 그러고는 싶지만..."

"내 느낌에는 말이야. 네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꼭 물어 봐."

"그럴게."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민주가 기다릴 것 같아서 얼른 밖으로 나왔다. 



"선배, 또 왔어요? 어제도 자고 갔으면서 오늘 또... 자주 보네요."

문을 열어 준 건 민희였다. 

"언니 아침에 수영한다고 나가던데 설마 수영도 같이 한 건 아니죠?"

민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얼굴을 살펴 보았다. 

"아... 같이 했어. 나만 한 게 아니라 친구들하고 다 같이 했어."

"아~. 네~. 그러셨구나. 선배하고 언니 정말 친하네요.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만나요?" 

민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는데 안에서 민주가 나를 불렀다.  

"거기서 뭐해? 왔으면 빨리 들어오지 않고." 

"언니한테 가 보세요. 빨리 보고 싶을 거 같은데. 언니도 그러려나?"

민희가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민희의 표정에 갑자기 심장이 서늘해졌다. 모른 척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우리는 민주의 방에 있다. 민주는 한 시간째 교과서와 필기 노트를 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민주가 말을 꺼냈다. 

"서연이 수영복 마음에 들었어?"

"어?"

"그런 거 나도 있어. 좋으면 다음에 입을게."

"민주가 입은 아이스크림 수영복 귀여웠어. 개구리 수모도. 난 그런 게 좋아."

"그런데 왜 그렇게 쳐다봤어?"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드니 민주야말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세나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서연이의 수영복을 뚫어지게 봤다고 했다. 그런 나의 행동에 누군가가 속상해 할 거라고도 했다. 서연이의 수영복을 보긴 했지만 잠깐 봤을 뿐이다. 그 수영복을 좋아한 건 내가 아니라 지민이었다. 나는 절대 아닌데 민주나 세나나 똑같은 얘기를 하니 억울한 기분이 뭉글뭉글 피어 올랐다. 


"다정아."

"응?"

"너 나 처음 봤을 때 기억 나?"

"당연히 기억하지. 2학년 새학기 첫날 같이 밥 먹자며 다가와 말 걸었잖아."

"넌 그때가 처음이었구나." 

"넌 아니야? 언제 나를 처음 봤는데?"

"입학식 날. 너 신입생 대표였잖아." 


아... 맞다. 그랬지. 민주는 그때 나를 처음 봤겠구나...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민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벌써 1년이나 지났네. 시간 정말 빠르다. 근데 내가 같이 밥 먹자고 했을 때 왜 거절 안 했어? 그전에는 다 거절했잖아."

"... 내가 그랬나?"

"그랬어. 밥 같이 먹자며 누군가 옆에 앉아도 관심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도 붙이지 않고 밥만 먹었어. 그런 네가 왜 나는 허락한 거야?" 

"글쎄... 내가 그랬어? 기억이 안 나. 민주는 뭐가 달랐을까? 아~. 민주가 예뻐서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하하."

민주는 내가 다른 아이들을 퇴짜 놓았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저 진지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바꿔 보려고 크게 웃었는데 민주는 따라 웃지 않았다. 

"너랑 같은 반이 된 거 행운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우리 서로 마음이 통했구나."

"1학년 때 너에 대해 다른 애들한테 물어 본 적이 있어. 무섭다고 하더라. 초등학교 때 반 아이를 내리쳐서 머리에서 피가 철철 났었다고."

"그런 얘기를 듣고도 용케 밥 먹자고 했구나."

"어떤 사람인지 직접 알아 보고 싶었거든... 다정아."

민주가 방금 내 이름을 불렀다. 민주의 목소리는 어쩜 저리 달콤할까?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귀가 간지럽고 몸이 녹아 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는 이렇게 주말까지 함께 보낸다는 거 생각도 못 했어. 정말 좋아."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민주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다정아, 너는 장래 희망이 뭐야?"

"생각 안 해 봤어."

"공부가 재밌어?"

공부가 재미있는 걸까? 그것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어. 도서관 가는 게 취미였고 책도 많이 빌려서 읽었지. 그러다가 학교 학원 다니느라 뜸해졌지만 지금도 알고 싶은 게 많아. 관심분야 책 읽는 건 좋아하지만 시험을 목표로 공부하는 건 그다지 재미있지 않아."  

"언제나 시험 잘 보잖아."

"피할 수 없으니까 공부하는 거지. 그리고 시험 잘 보면 마마가 좋아하거든."

"신입생 대표로 선서하는 너를 봤을 때 나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같이 공부하다니 기분이 이상해. 넌 어디서나 눈에 잘 띄고 주목받잖아."

"내가 그래?"

"너도 느끼고 있으면서 그러네. 너한테 관심있는 애들 많아."


민주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 오해는 바로 잡아야 한다. 

"민주야. 애들이 나한테 관심 가지는 건 보통 안 좋은 쪽이야." 

"안 좋은 쪽?"

"엄마가 둘이라는 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관심 많이 받았거든. '너는 왜 엄마가 둘이야?' 부터 시작해서 꼬치꼬치 캐묻다가 결국에는 시비거는 일이 많았어." 

"그게 뭐 어때서? 엄마가 둘이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방금 민주가 했던 말을 시비 거는 애한테 똑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민주는 나와 생각이 비슷해서 통하는 게 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긴장이 풀린다.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졸음이 밀려 왔다. 


"민주야, 나 조금만 잘게. 아침부터 수영을 해서 그런지 졸리네."

"침대에서 잘래?"

"소파가 좋겠어."


나는 빈백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고 잠에 빠져 들었다. 

의식의 영역 여기저기에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정확하게 짜맞춰지는 경우가 있다.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다. 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러 개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마마의 목소리였다. 

「계속 신호를 보내고 안달나게 해서 엄마가 다가오게 만들었어. 엄마 단순하잖아. 쉽게 넘어 오더라.」

그래... 신호... 신호...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 마마는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서 좋아하는 마음을 알려 주었다. 나는 민주에게 어떤 신호를 얼마만큼 보냈을까?


두번째는 민희의 목소리였다.

「언니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기만 했지 친구 집에서 잔 적은 없어요. 다정 언니네가 처음이에요. 캠핑까지 따라갔죠.」

그래. 민주하고 같이 간 캠핑 재밌었어. 또 가고 싶다...


세번째는 민주의 목소리였다. 

「캠핑가는 거... 사실 무서웠어요. 벌레 같은 거 징그러워서요. 그런데 다정이하고 같이 있으니까 하나도 안 무섭고 재밌기만 했어요.」

민주는 벌레가 징그럽고 무서운데  나와 함께라서 캠핑이 재미있었구나... 


「다정아, 너네 집에서 하룻밤 자도 돼?」

「레즈라도 상관없어. 다정아, 너 여자 좋아해 본 적 있어?」

방이 덥다고 하면서 갑자기 민주가 옷을 벗고 누웠다. 정말 더워서 그랬을까? 

「너는 마마를 진짜 좋아하는 거 같아. 아까 보니까 마마를 뒤에서 안더라. 마마를 안는 느낌으로 지금 날 안아 볼래?」

자기를 안아 보겠냐는 민주의 말에 나의 심장이 쿵하는 소리를 내며 내려 앉았었다. 이런 게 신호일까?


「다정이는 손이 참 예뻐. 나 손 예쁜 사람 좋아하는데.」


... 민주의 책상 유리에 끼워져 있는 벚꽃잎 네 장은 내가 준 것이다. 민주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겹치며 꽃잎을 내려 놓았다. 그때 느꼈던 손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짜릿했다. 민주도 느꼈을까?


민주 폰 배경화면에 저장된 사진... 그건 민주와 내가 벚꽃나무 아래에서 함께 찍은 것이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내 손을 잡아 끌어 당기며 자기 옆에 나를 앉힌 민주가 떠올랐다. 

「나도 민트초코 좋아해.」

민주는 정말 민트초코를 좋아한 걸까? 


「서연이랑은 어떻게 됐어? 친구하기로 했다고? 정말 그게 다야? ...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민주는 뭐가 걱정스러웠을까? 

「서연이 수영복을 왜 그렇게 쳐다봤는데? 나도 그런 거 있어. 좋으면 입을게.」

서연이 수영복 때문에 민주가 신경쓰였나 보다. 내가 좋아하면 그런 수영복을 자기도 입겠다는데 이것도 신호일까? 


「너는 밥 같이 먹자고 누가 옆에  앉아도 관심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도 붙이지 않았어. 나는 왜 허락한 거야?」

그 사람에게 내가 말도 붙이지 않은 걸 민주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동안 나를 지켜 본 거야?


「나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 그런데 너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도 못 해. 미친 듯이 하고 싶은데 하려고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입에서 말이 나오질 않아.」

이건 햄버거 가게에서 민주가 연수에게 한 말이었다. 저 말을 듣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민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굴까 정말 궁금했었는데 이제 보니... 


네번째는 세나의 목소리였다. 

「민주와 연수는 학교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어. 그리고 민주는 입학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빠졌지.」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민주의 목소리. 

「널 처음 본 건 1년 전이야. 입학식 때.」


마지막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다정아, 너 민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아. 누구를 좋아하는지 직접 물어 보는 건 어때?」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민주를 답답하게 하는 눈치없는 바보가 바로 나였다. 민주는 계속 나에게 신호를 보냈는데 내가 너무 둔해서, 내 감정에만 빠져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민주가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 민주야. 여기 앉고 싶어? 나 일어날까?"

"아니, 그대로 있어."

민주는 뒤로 돌아 등을 보이며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친구의 무릎 위에는 앉지 않아.」

어젯밤 민주가 한 말이 떠올랐다. 민주는 지금 내 무릎 위에 앉아 있고 나는 민주의 등을 보고 있다. 갑자기 어지러워서 쓰러지듯 민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두 팔을 민주의 몸에 감았다.

"민주야."

"응."

"지금 어떤 얼굴인지 보고 싶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민주는 뒤돌아 앉았고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많이 늦었지? 미안해."

민주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자 민주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싫어?"

아차 싶어서 민주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 떨려서 그래. ... 네 입술 부드러워."

민주는 내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주의 볼이 붉어졌다. 

"입술에 하고 싶어."

".........."

대답을 기다렸지만 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할게."

민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닿는 민주의 입술 역시 부드러웠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키스... 처음이야."

민주가 말했다. 

"나도 그래... 저기... 한 번 더 할래?"

이번에는 민주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유신아. 우리 다정이가 언제 이렇게 큰 거지? 우리 뒤에 숨고 우리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애였는데 벌써 사랑을 하네. 곧 우리 곁을 떠나겠지?"

레이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나오자 유신은 레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다정이 아직도 많이 어려. 우리가 옆에 있어 줘야지."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으면 좋겠어."

"상처는 누구나 받아. 하지만 다정이는 운이 좋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다정이가 운이 좋아?"

"그럼~. 태어나자마자 레이를 만났으니까.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이야?"

유신의 말에 레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나도 참 운이 좋았지. 20대에 레이를 만났으니까. 레이를 만나기 전과 후 인생이 바뀌었어. 있잖아. 레이. 나 평생 레이만 따라다닐 거야. 나 하나로는 부족할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언제나 너야."

"그렇게 말해야 레이지. 내 인생 가장 큰 행운은 레이를 만난 거고 가장 큰 선물은 다정이야."

"정말?"

"정말."

"기분 좋아."

"잊지 마. 세상에서 나만큼 레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다정이도 자기를 가장 사랑해 주는 짝을 만날 거야. 운이 좋은 아이니까."

"그러면 좋겠어."

"이리 와, 레이."

유신은 레이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레이는 유신의 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설렘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는 사람은 레이말고는 없어. 진짜 정말 많이 좋아해." 



나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고 민주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애들한테 언제 말할까?"

"역시."

"뭐가 역시야?"

"다정이답다 싶어서." 

"말하지 말까? 숨기고 싶어?"

"아니야. 해도 돼."

"너를 뭐라고 부를까? 여자친구? 연인? 애인?"

"뭐든지 좋아."

"민주야, 나 너무 기뻐.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고 힘들었다구. 널 놓치기는 싫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막막했어."

"바보... 기쁜데 왜 울어?"

민주가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는지를. 

"나도 몰라. 행복한데 자꾸 눈물이 나와.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 ... 민주야."

"응?"

"실감이 안 나. 이거 꿈 아니지?"

"내 체온이 느껴지지 않아?"

"느껴져. 따뜻해."

"그런데 너 스킨십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많이 해 본 사람 같아. 내가 처음 맞는 거지?"

"처음이야. ... 민주야, 나 너만 바라볼게. 나랑 사귀어 줄래?"

"울지 말라니까. 예쁜 얼굴 망가지잖아. 오늘부터 우리... 1일이야."

"너무 좋아서 그래."

민주가 내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 얼굴은 뜨거워졌고 열기는 고스란히 민주의 손에 전달되었다. 

"뜨겁지 않아?"

"뜨거워서 좋아."

민주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지금 민주의 얼굴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GL 레즈 백합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첫 소설은 엘.컴플렉스이고, 사랑에 서툴고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연재 중 갑자기 새 소설이 떠올라 아르테미스의 견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연재소설과 단편소설을 꾸준히 올릴 예정입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은유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