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네라도라











"야, 너 어제 내 옆에 누워서 잤지?"

"응."

"나 잘 때 무슨 말 하지 않았냐?"

"아니?"

"그래? 잠결에 네 목소리 들은 것 같은데..."


들렸나 보네... 하긴, 이창섭이 잠이 많긴 해도 깊게 자지는 못하는 스타일이니까. 어쩌면 그래서 잠이 많은 걸 수도.
아니, 근데 어젯밤 내 목소리를 들은 건 들은 건데 왜 이 놈은 우리의 아침식탁에 같이 앉아 있냐고. 밥 그릇은 왜 세 개고, 수저는 또 왜 세 세트인 거야.


"야, 저 사람은 언제 가냐?"

"이 밥까지만 먹고 갈 거야. 먹으라고 해준 건데 거절하면 무안하잖아."

"지금 둘이 먹으려 한 아침에 그쪽이 억지로 껴서 먹고 있는 건데. 말은 바로 해야죠."


성재가 나름 작은 소리로 묻는다고 물은 건데 귀가 밝은 현식이 창섭 대신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계속되는 말씨름에 밥상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고 창섭은 말리느라 바빴다. 하지만 정작 그는 둘의 싸움이 왜 일어나는지는 몰랐다.
시끄럽게 아침식사가 끝나고 현식이 가기 전 성재에게 말을 건낸다.


"성재야, 우리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할 얘기 없어요."

"잠깐이면 돼."


창섭에게 등 떠밀린 성재는 결국 현식을 따라 내려가 얼떨결에 배웅까지 해주게 되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둘 다 아무말이 없다가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여는 현식이다.


"어디 아파?"

"네?"

"그냥... 안색이 안 좋아서."

"신경 끄시죠. 그쪽이 알 거 없으니까. 할 말이라는 게 뭡니까. 빨리 말해요. 학교 갈 준비 해야 돼요."

"어젯밤에. 봤어."

"...."

"배가 아픈 거면... 이렇게 멀쩡하다 죽을 듯이 아파하는 병은 내가 아는 것 중 췌장암 밖에 없는데."

"그 말 하고 싶어서 끌고 나왔어요? 왜. 그거 갖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아니. 걱정돼서 묻는 거야."

"맞으면. 맞으면 뭐 어쩔건데요."

"...."


눈에 훤했다. 이 사람의 속셈이. 죽을 거면 빨리 나가 뒤지라고.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면서도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자연스레 둘 밖에 안 남을 테니까.


"많이 아플텐데. 창섭이도 알아? 너 아픈 거."

"...신경 꺼ㅇ-"

"기왕이면 말 하는 게 좋아. 아무것도 모른 채 남겨진 사람도 죽을 듯이 아프거든."

"...."

"어, 버스 왔다. 마중 나와줘서 고마워."


답지도 않은 멘트에, 강제적이었던 행동을 멋대로 호의로 받아들이는 건 역시 저번과 다를 바 없이 재수없었다.
그나저나 이창섭에게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남겨진 사람도 죽을듯이 아프다고? 이창섭이 아플 거라고... 그 애가 날 따라 아파하는 게 보기 싫어서 말 없이 떠나려는 건데, 어째서. 어째서 그 애가 아프게 되는 걸까.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말 없이 떠나는 것도, 곁에 있는 것도 안 된다면 난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걸까.


-


"육성재!"

"어, 어...?"

"또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은 무슨- 너랑 언제 놀러갈까 생각 중이었거든?"

"나 한 달간 네 부탁 들어주는 거 이제 안 한다고 했을 텐데?"


창섭의 말에 손에 쥐고 있던 달력과 펜을 꽉 쥐는 성재다. 그 잠시 사이에 그는 수백번을 고민한다. 사실대로 털어놓을까, 말까. 말하면 창섭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얼굴을 보고 제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을까.
여러 걱정과 우려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면서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어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차피 나 나가면 더 못 보는데 겨우 한 달이 어렵냐?"

"네가 하늘나라를 가, 외국을 가? 그저 이 집 나가서 본가로 들어가는 거면서. 전화하면 10분 안에 만날 수-"

"그게 아니니까!"

"뭐?"

"...나 본가 들어가는 거 아니야. 멀리 가."

"뭐래.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더 이상 여기로 안 돌아와."

"...."

"그러니까-"

"어디로 가는데?"


성재의 표정이 꽤나 진지해서 창섭은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나보다. 금방 씻고 나와 축축히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묻는다. 그가 소파 위에 앉은 성재 옆으로 와 앉으니 소파가 창섭쪽으로도 폭 가라앉았다.
성재는 애써 창섭이 아닌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입을 연다.


"멀리. 아주 멀리."

"...."


시선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창섭과의 추억이 눈에 밟혔다. 처음 룸 메이트를 해주기로 한 날을 기념하여 같이 찍은 사진, 누가 더 잘 기르나 내기 하자며 두 개를 샀지만 성재의 식물이 죽어버려 같이 키우게 된 창섭의 산세베리아, 같이 낙시가기로 한 날 큰 맘 먹고 각자 하나씩 장만했던 낚싯대, 신혼부부처럼 즐겁게 고민하다 고른 가구들.
별 건 없지만 결국 조그만 것들은 모두 추억이었다. 그런 집에 지낼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사정없이 먹먹해지고 우울해진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이라면, 쓸데없는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일인데. 유학이야? 이렇게 갑자기?"

"아니."

"그럼... 뭐, 가족 때문에? 이민 가?"

"아니."

"그럼-! 이유가 뭔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답답하게 진짜..."

"네가 알 필요 없으니까 이러지."

"내가 알 필요가 없어...? 멀리 간다며. 10분 거리 본가도 아니고 아주 멀리 간다며! 근데 4년 친구에 2년을 꼬박 같이 살았는데도 그걸 알 필요가 없어? 실망이다, 이 새끼야. 그래, 너 같은 새끼랑 친구 한 내 잘못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나 약속있어. 준비 해야 돼."

"...아파서-"


창섭이 일어나 발을 딛으려던 찰나, 성재가 창섭의 손을 급히 잡는다. 손목도 아닌 손을 잡은 건 그만의 비밀스런 욕구 해소 방법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욕구를 쌓아내니까.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아파서'라는 말을 입 밖에 내버렸다. 창섭이 등을 돌리는 순간이 어찌나 두려운지 모르겠다.
성재의 마음 속은 이미 모순적인 마음 둘이 부딪히고 싸우며 겨루고 있었다.

그런 성재에 고개를 훽 돌려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는 창섭이다. 이마를 덮은 까만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이 토독 토독 성재의 눈 앞으로 떨어진다.


"아파서... 쓰러지면 안 되니까 머리는 말리고 가. 너 감기 잘 들잖아."

"...."


끝내 알려주고 싶지 않다. 결국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죽으러 간다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알려서 그 사람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은가 보다.


"뭐하는 거야."


창섭은 무표정으로 성재에게 잡힌 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엄지로 창섭의 손바닥을 매만지던 성재의 손이 움찔했다. 손을 빼내려 팔에 힘을 주자 성재는 더 꽉 잡아온다. 그리곤 살풋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곤 먼저 손을 놓는다.


"손 따뜻하다."


그리곤 거실 서랍 앞으로 가 헤어 드라이기를 꺼내고 그 옆에 있는 콘센트에 코드를 꼽는다.
손이 허전해진 창섭은 방금 전 제 손으로 파고들던 한기를 다시금 쓰다듬고 있다. 더불어 성재의 눈빛까지.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리며 저릿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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