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제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세성의 장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가난한 여자와 드라마 같은 사랑에 빠져 집안과 의절하고 성현제를 낳았다. 당시 회장이었던 성현제의 조부는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혼혈의 며느리를 탐탁지 않아 했고, 출산 후 도진 지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한 성현제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귀하게 자란 남자 혼자서 갓난아이를 키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성현제를 품에 안고 세성의 그늘로 돌아온 그는 다른 대기업과의 혼맥을 위한 재혼을 하고 회사를 물려받아 회장이 되었다.

덧없이 잃은 사랑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성현제는 회장에게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는 후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대를 이을 후계는 성현제이니 욕심내지 말라고 못 박아 말했다. 하지만 후처 역시 마찬가지로 대기업을 경영하는 집안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란 야심 있는 여자였다. 그는 어린 성현제를 티 나지 않게 다방면에서 압박했다. 성현제가 아끼던 물건은 영문 모르게 망가져 있기 일쑤였고 그를 따르던 강아지는 고용인에게 입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당에서 사라졌다. 붙임성 좋은 가정교사가 들어왔다가도 성현제와 조금 친해질 무렵이면 해고되었다. 교양으로 배우던 악기나 외국어 수업은 성현제가 재능을 드러낸다 싶으면 다른 과목으로 바뀌었다.

성현제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으나 살뜰하게 보살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이가 좀 까다로운 것 같아요, 양순한 척하는 후처의 말을 믿은 그는 성현제의 가정교사가 자주 바뀌는 것에 큰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성현제는 금방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새어머니는 성현제가 욕심도 내지 않는 것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가지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성현제는 그렇게 만사에 심드렁하고 뭐든 보통만큼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년으로 자랐다.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새어머니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성현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주로 돈 많은 집의 자식들만 모여 있었는데, 웬만한 집안의 직계들은 제 어머니로부터 성현제와 어울리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재벌가의 사모님들 사이에서 성현제는 천박한 여자가 낳은 사생아나 마찬가지인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혼혈인 탓에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에 그 소문은 저절로 신빙성을 얻었다. 자연히 성현제와 가까워질 수 있는 무리는 늦둥이인 척하는 재벌가의 서자나 졸부의 자식, 아니면 집안에서 내놓은 망나니 같은 부류로 좁혀졌다. 성현제는 새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그들과 어울리며 방탕하게 노는 체해 주었다.

망나니인 척 지낸 고등학교 시절은 그래도 제법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사복을 입고 멋대로 돌아다니며 성현제는 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기차를 타고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도 했고 체육관에 등록해 운동을 배워 보기도 했다. 새어머니가 의심스럽게 쳐다볼 적에는 머리에 든 거라고는 섹스와 약밖에 없는 멍청한 놈들과 클럽에 가서 돈이나 조금 뿌려 주면 그만이었다.

성적은 바닥에 출결 일수는 태반이 허구로 채워졌지만 성현제의 아버지는 기어이 그를 명문대에 집어넣었다. 건물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탓에 졸업하는 데는 평균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지만 돈으로는 졸업장도 살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이사진들 사이에서도 성현제의 자질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었기에 새어머니와 이복형제들의 견제하는 시선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해외로나 나가서 살까 생각하던 중에 성현제는 난데없이 최대 계열사의 본부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 일에는 관심이 없으니 동생에게나 물려주라 말해 보아도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며느리를 미워했던 것과는 별개로 첫 손자인 성현제를 편애하던 할아버지마저도 사내가 젊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거액의 용돈까지 꽂아 주었다. 회사에 나가는 둥 마는 둥 태만하게 근무하며 성현제는 이사진이 어떻게든 알아서 해 주겠지, 안일한 생각을 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새어머니의 살기를 담은 시선이 쏟아졌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뜻대로 풀릴 일인데 설마 진짜 해코지라도 하겠나 싶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중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온 화물 트럭에 덮쳐질 뻔한 이후였다. 순간적인 반사 신경을 발휘해 보도 쪽으로 핸들을 틀어 가로수에 앞 범퍼를 처박고서, 뒤꽁무니를 스치고 한참을 더 가서야 멈춘 트럭에서 내려서는 기사의 눈빛을 보며 성현제는 그것이 고의적인 사고였음을 직감했다. 새어머니의 친정은 뒷세계와도 끈끈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이었고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은 그들의 주특기였다. 단순히 갖고 싶지도 않은 것 때문에 일어나는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이 싫어서 피하려고 했던 자리가, 이제는 놓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새어머니가 눈을 가리고 있는 아버지에게는 배후를 밝히는 것은커녕 의도적인 사고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조차 쉽지 않을 것이었다. 진실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들 부부 사이는 단순한 혼인 관계가 아니라 기업과 기업 간의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깔린 혼맥으로 이어진 것이었으므로 세성에는 이롭지 않은 괜한 지각 변동만 일어나게 될 것이 뻔했다.

사정도 모르는 아버지는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쉬면서 여자나 만나 보라고 했다. 줄지은 맞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현제가 한유진을 만난 것은 밀려드는 맞선 중 하나를 잊은 척 피해 고등학교 때부터 신세를 지던 불량 친구들이 모이는 클럽에 갔을 때였다. 걸어오는 말 몇 마디를 받아 주고 비싼 양주를 깔아 준 후 빈 룸에 들어가서 잠이나 잘 요량으로 의자에 누웠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웨이터 복장의 앳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던 것이다. 조끼 단추는 다 떨어져 있고 와이셔츠도 반쯤 뜯겨져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문을 닫은 웨이터는 쪽유리창을 통해 밖을 살피다가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었고, 누워 있던 성현제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치고 뽀얀 얼굴에는 젖살이 덜 빠져 어린 태가 났고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가 있었다.

잠깐을 그렇게 굳어 있던 그가 뒷걸음질 치려는 때에 쌍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이 씨발년이 어디로 튄 거야?”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비틀비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성현제는 발발 떠는 테이블 아래의 머리통을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클럽 관리가 엉망이군.”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하면서, 성현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불청객도 성현제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당황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이 클럽에서만도 과거 성현제의 심기를 거스른 놈들이 입원이 필요한 지경까지 두드려 맞은 사건이 서너 번은 되었던 것이다. 성현제는 놈을 향해 가볍게 웃어 주었다. 남자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고객님, 죄송합니다.”

황급히 나타난 매니저가 남자의 앞을 가리듯 막아서며 허리가 부러져라 굽신굽신 사과를 해댔다. 곧이어 따라온 건장한 웨이터 두 명이 남자의 양팔을 잡고 연행하듯 끌고 가는 동안에도 남자는 찍소리 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미처 계신 곳까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됐어, 나가 봐.”

그러고도 매니저는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사과했으나 성현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어 보이고는 도로 의자에 누웠다. 테이블 아래에서 숨을 죽인 채 눈만 끔뻑이던 웨이터는 매니저가 룸에서 나가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감사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성현제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알아서 적당히,”

나가라고 말하려던 성현제는 문득 눈을 뜨고 테이블 아래의 겁먹은 토끼 같은 얼굴을 다시 보았다.

“몇 살이지?”

“스무 살이요.”

“이름은?”

“한유진….”

“이리 나와서 앉아 봐.”

그렇게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름은 한유진, 나이는 갓 스무 살. 부모는 없고 5살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다. 며칠 전까지 공장에서 알바를 하다가 라인이 축소되면서 퇴사당했고, 같이 일하던 형의 사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소개로 클럽에 취직했다가 처음으로 서빙하러 들어갔던 룸에서 엉덩이를 잡혔던 것이다.

“안됐군, 악질한테 걸렸어.”

“악질이요?”

“이 근방에선 유명한 놈이야. 그놈 때문에 그만둔 웨이터가 한둘이 아니라지. 출입 금지 먹인 클럽도 있을걸.”

“왜, 왜요?”

“너한테 한 것 같은 짓을 하니까. 꽂히면 한 명만 계속 괴롭힌다더군.”

“그럼 저는 어떡해요…?”

“그만둬야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한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못 그만두는 이유라도 있나?”

“월급 가불받았는데요….”

성현제는 피식 웃었다.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도와주지.”

“네?”

“그만둘 수 있게 해 줄게. 이건 일단 신뢰를 쌓기 위한 조건 없는 호의.”

“신뢰… 요?”

“나하고 일 하나 하자. 돈 많이 줄 테니까.”

한유진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성현제의 얼굴을 살폈다.

“일단 무슨 일인지 들어 보고요.”

영 맹탕은 아닌 어린애였다.

“위장 연애할 사람이 필요해. 아니, 결혼까지 할 사람.”

“네에?”

“아버지는 내가 회사를 물려받았으면 하시는데, 나는 회사 일에 관심 없거든.”

“그 회사가 세성 얘기예요?”

“내가 누군지 아나?”

“본 적 있어요….”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니 다행이군.”

한유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그게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과거의 사실로부터 유추해 보자면 얼토당토않은 상대와 결혼했을 때 할아버지가 쫓아낼 확률이 90% 이상이거든. 네가 딱 적당해. 얼굴은 반반한데 가난하고 어리고 심지어 남자지.”

말한 성현제는 자신의 완벽한 탈주 계획에 스스로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지도 몇 년이 지난 사회였지만 보수적인 할아버지는 가난하고 어린 남자 며느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면전에서 욕을 들은 기분이 된 한유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성현제를 쏘아보았다.

“저기요, 혹시 저 갖고 노시는 거예요?”

“나는 아주 진지해. 기한은 5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동안 나와 살면서 사이좋은 부부를 연기해 주기만 한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내 능력이 닿는 한 모두 지원해 주지. 네 동생에 대한 최고의 교육적 지원도 보장할게.”

황당해하기만 하던 한유진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동생을 키우기 위해 학교까지 그만두고 일하기 시작했던 한유진은 남의 돈을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동생의 대학 학자금을 위해 만들어 둔 통장의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잔고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 물론 이혼할 때는 위자료도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챙겨 줄 거야. 건물도 두 개쯤 얹어 줄 수 있어.”

“…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성현제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씩 웃어 보였다.

“즐겁게 살고 싶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대답이었다.

“지금 저하고 장난하세요?”

“정말이야. 회사일 같은 건 재미가 없어.”

그 우스운 핑계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몹시 지쳐 보였기 때문에, 그가 위장 결혼을 해서라도 회사를 팽개치고 싶은 마음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고, 한유진은 생각했다.

“… 진짜 장난치시는 거 아니죠?”

“장난으로 혼인 신고서에 도장을 찍는 사람도 있나?”

“쫓겨나면 개털 되시는 건 아니에요?”

“내 아버지가 그렇게 놔둘 리가 없어.”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부자 아빠 있어서 좋겠다, 한유진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득과 실을 셈해 보았다. 손해 보는 것이 있다면 이혼 경력 하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유진은 그와 한집에 살고 남들 앞에서 사이좋은 척을 하는 것만으로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생도 같이 살아도 되는 건가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을 버려두는 남편은 없지.”

“아, 그런 컨셉이었죠. 음…, 결정은 동생하고도 좀 얘기해 본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몇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한유진은 예전에 얼핏 인터넷에서 봤던 결혼하기 전에 알아봐야 할 배우자의 나쁜 습관에 대한 목록을 떠올렸다. 과소비, 도박, 게임, 외도… 이런 건 상관없고.

“술버릇 같은 거 있어요?”

“술은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잘 취하지도 않아.”

“어…, 그래도 술에 취하면요?”

“그냥 잔다고 하더군. 너는?”

불시에 들어온 반문에 한유진은 당황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나 붙잡고 사랑한다고 고백한대요.”

성현제가 피식 웃었다. 한유진도 같이 웃어 버렸다.

“웃기죠? 혹시 제가 나중에 취해서 사랑한다고 해도 설레고 그러시면 안 돼요.”

“기억해 두지.”

“음… 그리고…, 아, 사람 때리거나 하는 취미는 없죠?”

“특기이긴 한데 취미는 아니야.”

한유진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계약서 같은 거 쓸 수 있을까요?”

“무슨?”

“어… 뭔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결혼 무효로 하는 거?”

“다음에 만날 때는 변호사를 데리고 오도록 하지.”

“그, 아직 결정한 건 아니에요.”

성현제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네가 거절한다고 해도 여기 일을 그만두는 건 도와줄 거야.”

“아, 으음. 고맙습니다.”

나중에 갚겠다고 말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제안받은 것만으로 그 정도 도움은 받아도 될 만큼 황당한 거래인 것 같아서, 한유진은 그냥 고맙다고 말했다.

성현제는 한유진의 찢어진 셔츠 위에 제 코트를 걸쳐 주더니 어깨를 감싸 안고 룸에서 빠져나갔다. 한유진은 질색하면서도 피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딱 붙어요? 벌써 시작한 거예요?”

“네 퇴직을 조금 더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한 밑밥 같은 거라고 할까.”

그 말대로 성현제가 매니저와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한유진은 가불받은 돈을 되돌려 줄 필요도 없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성현제의 손에 이끌려 그의 고급 외제차 조수석에 구겨지듯 올라탄 후에야 한유진은 의문을 드러냈다.

“뭔데요?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좀 큰 물주였거든.”

“뭐 지금 저 그쪽한테 찍혀서 수청 들러 나가는 꼴 된 겁니까?”

“자연스러운 러브 스토리지.”

“저 아직 결정 안 했거든요?”

“거절하더라도 나쁠 거 없는 일 아닌가. 저 가게 사람들하고 만날 일이 또 언제 있으려고.”

듣고 보니 맞는 소리라서 한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집이 어디지?”

“술 먹은 거 아니에요?”

“안 먹었어.”

음주 측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유진은 그를 믿고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두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붙들고 집으로 가는 내내 한유진은 음주 운전이 위장 결혼의 상대에게 있어 좋은 습관인지 나쁜 습관인지 고민했다.


집에 돌아온 한유진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유현아, 할 얘기가 있는데…”

“형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동생에게 위장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느라 제가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지는 잊고 있었던 한유진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동생의 활화산 같은 분노와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왔어야 했는데 찢어진 웨이터 유니폼을 입은 채 그냥 와 버렸다. 성현제의 코트도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이 코트는 뭐야?”

“아, 이거는, 진정해 봐 유현아. 형이 다 설명할게.”

한유진은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 어린 동생에게 횡설수설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형이 새 일자리를 구했잖아, 거기서 손님 한 분이 조금 행패를 부렸는데,”

“뭐? 맞은 거야?”

“아니,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일 있기 전에 구해 주셔 가지구….”

“구해? 누가?”

“어, 그러니까 너도 아는 사람인데, 세성 성현제 있잖아, 그때 왜 너 장학금 받을 때 같이 사진도 찍고….”

그랬다. 한유진의 동생 한유현은 작년에 세성 재단의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받았고, 최우수 학생이었던 덕에 대표 수여자로 나가 당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온갖 행사에 동원되고 있던 성현제의 손을 잡고 사진까지 찍은 바 있었던 것이다. 한유진이 성현제를 알아보았던 것도 그 행사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성현제? 그 사람이 거기서 왜 나와?”

“그 사람이, 형이랑 결혼을-,”

“결혼?!”

중학교 2학년,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인 소년 한유현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한유진은 두서없이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기 위해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었으나 이미 쏘아진 화살이요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형이 몇 살인데 벌써 결혼을 해?”

“그게 진짜 결혼은,”

“혹시 사고라도 쳤어?”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성현제 맞아?”

“응 진짜 성현젠데,”

“형을 갖고 놀다 버리려는 수작인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고,”

“가난하다고 사람 우습게 보고 그런 건 아니지?”

“잠깐만 형 말 좀…,”

“혼수는 얼마나 해 오래?”

“유현아 제발.”

“재벌가에 시집가면 막 왕따당하는 거 아냐?”

“아냐 재벌가 안 들어가….”

한유현은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따발총처럼 걱정만 쏘아 냈다. 우리 유현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봐…. 자극적인 내용으로 범벅된 질문들에 고개를 저어 부정하며 한유진은 잠깐 동생 교육에 회의를 느꼈다.

“형도 그 사람 사랑하는 거야?”

하지만 동생이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는, 쉽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어린 동생의 순수한 걱정이 담긴 눈빛이 한유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동생에게 사랑이 아니라 돈 때문에 위장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부쩍 자란 동생의 옷소매가 달름하니 짧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을 댄 방바닥에는 차가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한유진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서 대답했다.

“응, 사랑해.”

“혹시 그 사람이 부자라서, 내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면…,”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 사랑해서 그래. 너 질투하는 거 아니지?”

한유진은 동생을 꼭 끌어안고 장난스레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나중에라도, 적어도 동생이 다 클 때까지는, 위장 결혼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형은 내 동생 한유현을 제일 사랑한다. 알지?”

그렇게 성현제와 한유진은 성현제의 집안뿐 아니라 한유진의 동생에게까지 사랑 연기를 하게 되었다.










성현제에게 전화를 걸어 위장 결혼에 대한 수락 의사를 밝히고, 다음 날에는 성현제가 아는 변호사와 함께 만나 혼인 신고서를 작성했다. 문현아라는 이름의 변호사는 성현제와 퍽 친한 사이인 듯 황당한 얼굴로 그를 타박하면서도 증인란에 서명을 해 주었다.

“너 정말 별짓을 다 한다.”

“네가 내 입장 되어 봐.”

“이분은 또 무슨 죄야?”

“윈윈인 거래야.”

“너한테나 윈윈이겠지.”

펜을 내려놓은 문현아는 한유진에게 명함을 건네고 악수를 청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 문현아예요. 5년 채우기 전에 이혼할 의사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요. 위장 결혼은 혼인 무효의 사유가 되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뭐 같이 살기 불편한 일 생겨도 연락하시고. 이혼남 딱지 붙는 거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혼인 무효보다는 이혼 소송 쪽이 쏠쏠할 거라는 거 알아 두세요.”

“감사합니다….”

상큼하게 웃은 문현아는 잡은 손을 세게 흔들고는 놓아주었다.

“증인 한 명은 누구로 할 건데?”

“내 아버지.”

“아, 진짜 또라이 새끼.”

“그래야 나중에 딴말을 못 하지.”

“그래, 잘해 봐라.”

그길로 세성전자 본관으로 가서 회장 집무실에 방문한 두 사람은 굳은 표정의 회장에게 혼인 신고서를 내밀었다. 한유진은 찻물을 뒤집어쓰거나 돈봉투로 따귀를 맞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회장은 한참이나 혼인 신고서를 바라보다가 서명하고서 네 행복이 거기 있다면 말리지 않으마, 말했을 뿐이었다. 그대로 구청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그들은 식도 없이 성현제가 구해 놓은 아담하지만 고급스러운 집에 살림을 차렸다. 

성현제의 할아버지인 세성 왕회장을 만났더라면 한유진의 상상처럼 박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효손인 성현제는 꼴도 보기 싫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다.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노발대발한 왕회장은 성현제와 의절을 선언했고 후계 자리는 물론 성현제의 앞으로 들어와 있던 모든 맞선 자리까지 그의 이복동생에게로 이양되었다. 모든 것이 성현제의 계획대로였다.


그가 미처 크게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면 한유진의 동생 한유현의 존재였다.

성현제는 한유현을 보자마자 예전에 장학금을 받았던 소년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동시에 그 자리에 한유진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저도 아직 어린 소년인 주제에 뚱한 얼굴을 한 중학생을 부모처럼 챙기며 팔불출같이 사진을 찍던 모습은 주변에 관심을 두는 법이 잘 없던 성현제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 표정이 천지 차이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한유진은 동생 앞에서만 진심으로 기쁜 것 같은 밝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 위장 결혼을 제안했을 때도 동생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야 망설임을 드러내던 한유진을 성현제는 기억했다. 동생 진짜 아끼는구나. 인생에 동생밖에 없는 것 같네. 성현제는 가볍게 생각했다. 기왕 사랑 넘치는 부부 시늉을 하는 거 좋은 형부가 되어 줄 셈이었다.

그런데 이 쪼그만 도련님이 성현제를 싫어했다. 자신만으로 가득 찼던 형의 세상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불쾌해하는 마음이 빤히 보였다. 어린 자신은 형에게 해 줄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성현제를 질투하면서도 선망하고 있었다.

성현제는 한유현의 앞에서 일부러 한유진을 더 애지중지하는 척했다. 애정 표현을 할 때마다 보라는 듯이 티 나게 기분 나빠하는 꼴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한유진은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동생을 배려하려는 성현제의 노력이라 생각하고 고마워했다. 실상은 저를 싫어하는 중학생을 놀리는 아저씨의 심술일 뿐이었다.

같은 집에 사는 한유현 때문에 둘은 한 침대를 써야 했지만 둘 다 헤테로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들이었기에 크게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문제는 한유진의 잠버릇이었다. 침대는 충분히 넓었지만 한유진은 잠이 들면 반드시 끌어안을 것을 찾아 굴러와 성현제의 허리를 안곤 했다. 혼자 자는 것에 익숙했던 성현제였으나 한유진을 떼어다 베개를 안겨 놓는 몇 번의 번거로운 밤을 지난 후로는 그냥 마주 안고 자는 것을 택했다. 품에 폭 안기는 따끈따끈한 체온이 썩 나쁘지 않기도 했다.

처음에 안긴 상태로 눈을 떴을 때 한유진은 당황하며 사과했다. 끌어안는 잠버릇이 있다는 것은 본인도 알던 사실이었다.

“미안해요.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난 괜찮아. 도련님에게 불시에 점검 당해도 위장 부부인 것을 들킬 걱정은 없겠군.”

어차피 불타는 신혼을 연기하느라 포옹 정도는 일상적으로 하는 사이였다.

말이 씨가 된 것인지 며칠 후에는 정말로 한유현이 별생각 없이 안방의 문을 열었다가 둘이 끌어안고 자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따라 늦잠을 잔 부부가 노크를 해도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퍽 다정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한유현은 안도감과 질투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 뒤로 한유현은 성현제에게 덜 까칠하게 굴었고, 다시는 안방의 방문을 먼저 열지 않았다.


5년간의 결혼 생활은 대체로 무난했다. 바라던 자유를 찾은 성현제는 아버지의 금전적 지원 아래 일도 하지 않고 온갖 것을 배우러 돌아다녔다. 즐거운 삶을 위해 취향에 맞는 취미 활동을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사이좋은 부부 행세를 하느라 한유진도 덩달아 따라다녀야 했다.

온갖 악기와 운동과 각국 요리에 꽃꽂이와 원예까지 별것을 다 배웠지만 성현제는 뭐든 금방 질렸다. 옆에서 지켜보는 한유진은 뭐든지 너무 쉬이 잘하게 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했다. 초반에는 열중하다가도 금방 능숙해지고 나면 시들해진 성현제는 한유진이 하는 것을 보며 트집이나 잡곤 했다.

이삼 년이 지나도록 성현제의 안성맞춤 취미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고 더는 배울 것도 없어서 취미 찾기는 흐지부지 중단되었다. 한유진이 보기에는 그냥 취미 찾기가 취미인 것 같았다. 그나마 재미있어하는 것이 요리였는데, 한유진의 생각에는 변형과 개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성현제는 가끔 실험적으로 기상천외한 요리를 만들곤 했다. 어떻게든 다 맛은 있어서 신기한 요리였다.

답잖게 달콤한 디저트를 즐겨서 베이킹을 하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베이킹으로는 절대 실험하지 않았다. 제가 먹고 싶어서 한 것이면서 그는 꼭 예쁘게 구워진 쿠키나 마카롱 따위를 한유진의 입안에 직접 넣어 주며 우리 공주님을 위해 만들었다고 생색을 냈다. 형이 단 것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한유현은 콧방귀를 뀌다가 저보다도 더 잘 먹는 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유진은 입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먹으면서도 끝까지 제 입맛을 깨닫지 못했다.

2년이 지나 한유현이 기숙사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더 이상 사랑에 빠진 신혼부부 연기를 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둘은 익숙해진 대로 여전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친밀한 스킨십을 했다. 집 안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은 한유현이 집을 비운 지도 사흘가량이 지난 후였다. 사과를 깎으려는 한유진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 가며 우리 공주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말하던 성현제가 그쯤에서 저를 노려봐야 할 한유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머쓱한 분위기가 된 가운데 둘은 조용히 성현제가 깎은 사과를 먹었다. 한유현을 의식해서 일부러 하던 행동들이 너무 익숙해진 바람에 거리감에 혼란이 오고 있었다.

밤이 되어 한 침대에 누운 둘은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같은 생각을 했다. 유현이도 없는데 같이 잘 필요 없지 않나? 하지만 굳이 따로 자자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했다. 둘은 며칠간을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잤지만, 아침이 되면 당연한 것처럼 마주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미 2년이나 가족으로 지낸 사이에 그 어색함 속에서 새삼스럽게 설렘 같은 것이 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밖에 나가면 사이좋은 부부 흉내를 계속 내야 했고 한유현도 주말마다 찾아왔으므로 둘만 있을 때라고 유달리 내외하는 것이 오히려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위장 부부라기에는 너무 친밀한 거리감이었으나 그때는 둘 다 그것을 잘 몰랐다.

주말에 한유현이 집에 오면 성현제는 한유진은 주방에 발도 못 들이게 하고서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맛은 있었지만 한유현은 형이 한 음식이 먹고 싶기도 했다. 동생과 시간을 보내라며 자리에 앉혀 두고 자진해서 부엌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남편의 모습이었지만, 한유진이 먼저 나서서 동생에게 음식을 해 주겠다는데도 부득불 뜯어말리는 것을 보면 저게 일부러 저러나 싶기도 했다.

한유현은 성현제가 형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현제가 싫었다. 형을 아껴 주는 것 같기는 한데, 형이 전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기는 한데… 아무튼 재수 없었다.

성현제는 그런 한유현이 재미있으면서도 얄미웠다. 아직 어린 도련님은 형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면서도 사랑을 받을 줄만 알지 주는 법은 모르는 것 같았다. 한유진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서인지도 몰랐다.

성현제는 그렇게 자신을 바쳐 가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붓는 한유진이 신기했다.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사랑이었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도 저런 사랑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새어머니와 그 자식들을 보면 별로 그랬을 것 같지 않았다. 성현제가 특별히 삭막한 삶을 살았다기보다는 한유진이 이상한 쪽인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한유진은 사랑이 많았다. 동생이 고등학교에 간 후 적적하다며 입양한 고양이를 애지중지 길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새도 주워 와서는 길들였다. 작은 짐승들은 한유진에게는 껌딱지처럼 들러붙으면서 성현제는 통 따르지 않았다.

한유진이 사랑하는 것들은 다들 성현제를 싫어했다.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윈윈인 거래라는 생각은 변함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이혼남 딱지가 붙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나중에 좋은 혼처라도 알아봐 줘야겠다고, 성현제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위자료만 두둑이 챙겨 주면 충분할 거라고 여겼었지만, 달라붙는 날파리가 있을 것도 걱정이 되었고 신경 써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5년이 지나고 위장 결혼의 만료 시기가 다가왔다. 5년은 적절한 시간이었다. 성현제의 이복동생은 부회장의 자리에 올라 있었고 그건 차기 회장으로 확정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한유현은 한유진의 소망대로 명문대에 합격한 상태였다.

이혼을 준비하며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혼 자체야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한유현에게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곤란했다. 특별히 핑계를 댈 사유가 없었다. 너무 사이좋은 모습만 보여 준 것도 문제였다.

“도련님도 이제 다 컸는데 그냥 사실대로 말하지 그래.”

“그래도 될까요?”

“그간 나쁘게 지냈던 것도 아닌데, 이해해 주겠지.”

한유현은 둘의 결혼 생활이 꾸며진 것이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돈 때문에 그랬다는 거야?”

“응, 뭐. 그런 셈이지.”

“역시 나 때문이지?”

“아냐, 그냥 내가 편하게 살고 싶어서 그랬어.”

모로 봐도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었지만 한유현은 더는 형을 추궁하지 않았다. 성현제와 결혼한 덕에 한유진의 삶이 편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한유현은 5년 전보다 훨씬 건강해지고 표정도 밝아진 형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형에게는 언제나 짐만 되는 기분이었다. 어린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다정한 척해야 했다고 생각하니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이제 내가 형을 책임질게.”

한유현은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들을 책임지는 것은 거액의 위자료일 뿐이었다.










한유진은 어마어마한 위자료와 함께 건물 두 채와 실거주용 아파트를 받았다. 건물 하나는 강남 노른자위 땅에 있었고 다른 하나와 집은 한유현이 입학할 대학교 근처였다. 건물 1층에는 작은 카페가 차려져 있었는데, 바리스타 수강을 할 때 나중에 카페나 하면서 살고 싶다 했던 한유진의 말을 잊지 않은 성현제의 선물이었다.

카페를 본 한유진은 조금 감동했지만, 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끈 떨어진 연 주제에 위자료 너무 많이 주신 거 아니에요?”

“네 청춘을 산 값으로는 싸지.”

솔직히 한유진은 자신이 하나도 손해 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성현제는 어린 나이에 이혼 경력을 만들어 버린 것이 미안한 것 같았지만, 그를 만나기 전의 삶에서는 누군가와 결혼하는 미래를 꿈꾸어 본 적도 없었다.

처음에는 성현제를 별 배부른 소리를 하며 돈으로 사람을 사려는 재수 없는 재벌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함께 사는 동안 속사정을 알게 되면서 그런 선택도 이해하게 되었다. 성현제가 그런 이상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면 유현이를 무사히 키울 수 있었을까? 한유진은 성현제를 만난 것이 인생에 있어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성현제는 자산관리사와 임대관리인을 붙여 주는 등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조심하라는 말은 백 번도 더 한 것 같았다.


한가롭게 카페에 앉아 책이나 읽으며 지내는 나날이 이어졌다. 돈 벌 생각으로 하는 카페가 아니었기에 가격도 저렴했고 한유진이 내리는 커피는 제법 맛있어서 단골도 꽤 생겼다. 낯을 가리지 않는 고양이 피스와 작은 새 삐약이도 입소문을 타서 유명해졌다.

다소 심심하기까지 한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 한유진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요리할 때 참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누군가의 손을 잡지 않고 걷는 산책길이 가끔 낯설게 느껴졌다. 동생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쓸쓸함은 더 커졌다. 연애라도 해야 되나, 한유진은 피스를 끌어안고 누워서 생각했다.

성현제는 더 심했다. 그는 홀로 잠든 첫날 밤에 벌써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품 안이 비어 있는 것이 어색해 베개를 끌어안아 보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겨우 잠들었다가 아침에 눈떴을 때는 가슴팍에 파묻힌 정수리가 보이지 않는 것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혼자서 지내기에 집은 너무 넓었고 기분 전환 삼아 구워 본 쿠키는 맛이 없었다. 세상 혼자 사는 인간이었던 성현제는 자신이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인지 처음 알았다.

그냥 이혼 안 하고 살았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잠시 하던 성현제는 곧 자신의 파렴치함에 깜짝 놀랐다. 고작 혼자 살기 적적하다는 이유로 앞길이 창창한 젊은 애 발목을 잡으려 하다니. 한유진의 가난을 기회 삼아 가장 빛나는 시기를 제 사기극에 어울리게 만든 것도 이미 충분히 잘못이었다.

싱숭생숭해진 성현제는 여행을 떠났다. 결혼 생활의 마지막 2년 정도는 새로운 취미를 찾기보다는 한유진과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간이 더 많았는데, 다른 취미 활동보다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보는 것마다 신기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알대는 사람이 곁에 없는 여행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낯선 장소는 낯선 대로 허전했고 가 보았던 장소에서는 한유진과 함께 갔을 때의 추억이 떠올라 기분을 잡쳤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 주면 한유진은 모르는 게 없다고 놀라워했고 반쯤은 지어낸 사실이라는 것을 고백하자 사기꾼이라며 제법 아프게 가슴팍을 때렸었다. 그 뒤로는 하는 말마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스럽게 쳐다봐서 성현제를 웃게 만들곤 했다. 여행 내내 한유진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성현제는 계획했던 것보다 이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성현제는 취미 찾기 활동을 재개했다. 한유진과 함께하기에는 곤란했던 익스트림 스포츠 위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건 자극은 짜릿함을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비교적 안전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위험한 것까지 시도하던 성현제는 베이스 점프에 대해 알아보다가 사망률을 보고 그만두었다. 좀 재미있게 살고 싶은 거지 죽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취미 찾기가 취미 아니냐던 한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취미를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재밌었던 것도 같은데.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성현제는 곧 깨달았다. 즐거웠던 것은 한유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현제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고민했다. 5년을 함께 살았어도 한유진에 대해 특별한 설렘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일단 너무 어렸고, 겉으로는 다정한 척 지냈어도 근본적으로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계약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오래 같이 살아서 곁에 있는 것이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한유진과 함께 지내던 때가 살면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사랑했다가 헤어진 사이도 아닌데 그냥 친구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던 성현제는 한유진이 보고 싶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마침 곧 한유진의 생일이었다.


생일 전날, 성현제는 치즈케이크를 한 판 구워서 한유진의 카페로 찾아갔다. 카페에는 손님이 제법 많았다. 몇 되지 않는 테이블이 다 차 있었고 카운터 앞에 줄 선 사람도 둘이나 되었다. 성현제는 안쪽으로 들어가 케이크를 놓고 커피를 내리는 한유진 곁에 섰다.

“내가 할 테니 주문받아.”

“여, 성현제 씨?”

한유진은 여보라는 말을 뱉을 뻔하다가 겨우 호칭을 고쳤다.

“반가워하는 건 좀 있다 하지. 아메리카노인가?”

“네, 두 잔이요.”

성현제는 창업 멤버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하기 시작했다.

주문받은 음료가 다 나가고 둘은 그제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웬일이에요?”

“보고 싶어서.”

한유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생일 축하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사이 같은데.”

성현제가 케이크 상자를 내밀자 한유진은 열어서 안을 확인하고는 베이커리 진열장의 바닥에 넣었다.

“고마워요.”

성현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손님이 또 한 차례 들이닥쳤다. 한유진은 아예 앞치마를 내어 주었다.

“원래 이렇게 바쁜가?”

“요즘 들어 손님이 많아졌어요.”

“알바라도 쓰지 그래.”

“안 그래도 뽑으려고요.”

얼굴이 꽤 피곤해 보였다. 피부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기도 했다. 성현제는 무심코 손을 뻗어 한유진의 볼을 쓰다듬었다.

순간 날카로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아하. 성현제는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여기저기 앉아 있는 사내놈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여자도 둘 있었다. 다 한유진을 노리는 놈들이었다.

성현제는 느릿하게 볼을 문지르고 손을 떼었다. 한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뭐 묻었어요?”

“응.”

뭐가 많이 묻기는 했지.

성현제는 레시피를 잘 모르겠다는 핑계로 카운터를 차지했다. 주문을 받으며 눈여겨본 놈들의 면면을 살폈다. 몇 놈은 노골적으로 좌절한 티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했다. 분수를 아는 놈들이었다.

‘한유진 정도 되는 남자가 아무하고나 만나서는 안 되지.’

성현제는 시어머니의 마음으로 흑심 품은 놈들을 검열했다. 아무도 모르게 한유진의 예비 애인 1차 면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과는 물론, 전원 광탈이었다.

마감할 때까지 일을 도와준 성현제는 삐약이와 피스를 차에 태우는 한유진에게 넌지시 말했다.

“알바 구할 때까지 종종 도와줄까?”

“안 바쁘세요?”

“네가 없으니까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아.”

운전석의 문을 열던 한유진이 성현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희게 빛나는 얼굴을 보며, 성현제는 한유진이 이렇게 생겼던가, 생각했다. 위에서 드리운 빛이 만드는 음영 때문에 낯설어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내일은 문 안 열 거예요. 모레 11시까지 오세요.”

“네, 사장님.”

피식 웃은 한유진이 차에 탔다.

“케이크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생일 미리 축하해.”

한유진은 손을 흔들고 창문을 닫았다. 골목을 빠져나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성현제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유진이 말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키스할 뻔했다.


성현제가 일하기 시작하면서 카페에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 성현제가 잘생겼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몇 가지 베이커리 종류가 맛있는 것도 한몫했다.

손님이 한창 많은 오후 시간에는 정신이 없었다. 새장 문을 열 줄 알게 된 삐약이가 호시탐탐 탈출을 시도하는 것도 혼을 빼놓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 나온다고 별것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날개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잘 날지 못하는 작은 새는 파닥거리며 성현제의 몸을 쫑쫑 타고 올라서는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곤 했다. 새장 문을 끈이나 고무줄로 묶어 놔도 어떻게든 요령 좋게 풀거나 끊어 내고 탈출했다. 매번 잡아서 넣는 것도 일이었다. 성현제는 웃으며 그냥 두라고 말했다.

“내가 좋은가 보지.”

새는 머리 위에 올라탐으로써 서열이 위라는 것을 주장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작은 새를 머리에 올리고 컵을 씻는 성현제의 등을 보며 한유진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굴지의 대기업 세성의 회장이 될 뻔했던 남자가 제 작은 카페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일 같은 것은 재미없으니 즐거운 백수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며 위장 결혼을 제안했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잘생긴 남자가.

물을 잠근 성현제가 손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물끄러미 보던 한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눈매를 휘며 다정한 웃음을 짓는다. 한유진은 순간 원인 모르게 당황해서 잡히는 대로 원두 봉지를 들고 그라인더에 쏟아부었다.

“새로운 블렌딩인가?”

성현제의 말에 이미 그라인더에 다른 종류의 원두가 반쯤 차 있었음을 깨달은 한유진이 봉지를 다시 여미려다 손을 놓쳤다.

“조심해야지.”

성큼 다가와 봉지가 떨어지기 전에 잡아챈 성현제가 그것을 한유진의 손에 다시 쥐여 주고는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몇 년이나 일상적으로 하던 행동인데도, 한유진은 그 접촉이 새삼스러웠다. 눈을 들어 얼굴을 올려다보자 성현제가 또 다정하게 웃었다. 뱃속이 간질거렸다.

“어디 안 좋은가?”

서늘한 손이 뺨을 감쌌다. 얼굴에 열이 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주한 연한 색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점점 가시는 것을 보며, 한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문이 열리며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한유진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 얹어진 손도 한 발자국만큼 따라왔다가, 엄지 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쓸고 떨어져 나갔다.

성현제는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한유진은 어쩔 줄 모를 기분이 되어 그대로 서 있다가 저를 흘끔거리는 손님들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서 화장실에 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새빨갰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어떡해….”

이혼한 남편에게 설레고 있었다.


그날 한유진은 밤새 뒤척였다. 성현제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기업 오너의 아들인 데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잘생기고 못 하는 것이 없는 남자. 한유진 같은 가난한 고아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이상한 위장 결혼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존재조차 몰랐을 사람.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살면서 그 벽을 잊고 말았지만, 성현제를 한 사람의 남자로 바라보게 되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현실이 덮쳐 왔다.

조금 외로웠기로서니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긴 시간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꾸며 낸 다정에 길들여지고 만 걸까.

자꾸만 심장이 조여들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성현제의 얼굴이, 뺨에 닿았던 큰 손의 서늘한 체온이, 깃털처럼 입술을 스치던 손끝의 감각이.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제멋대로 헤집고 돌아다니며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다 그 사람 잘못이야. 이제는 다정할 필요가 없는데 다정하게 굴어서. 다정할 이유도 없는데.

혹시나 하는 희망이 잠깐 피어올랐다가도 결혼 생활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푸스스 사라지고 만다. 매일 같은 침대에 누워 끌어안고 자면서도 무슨 일이 있기는커녕 한 조각 설렘도 없는 사이였다. 그건 그러니까, 습관 같은 거였다. 쓸데없이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잔인한 습관.










한유진은 알바를 뽑기로 했다. 뽑는다고 해 놓고는 성현제가 너무 일을 잘해서 미적대며 미루고 있던 일이었다.

조금 일찍 나가 카페 전면에 구인 공고문을 붙이고 있을 때 성현제가 도착했다.

“뭐해?”

“알바 뽑게요.”

한유진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흠, 굳이 뽑아야 하나? 둘로 충분한 거 같은데.”

“지금 알바는 자르려구요.”

“왜? 커피도 잘 내리고 베이킹도 수준급인 인재 아닌가?”

“너무 비싼 몸이셔서요. 월급을 얼마나 드려야 할지.”

“자진해서 일하겠다는데 굳이? 사장님이 갑질을 할 줄 모르시네.”

성현제는 다가와 종이에 적힌 것을 읽어 보고는 한유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월급은 사장님의 사랑으로 주는 것이 어때.”

한유진은 그 팔을 팩 뿌리쳤다.

“아,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이제 사기 칠 사람도 없는데.”

성현제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눈썹을 늘어뜨리며 과장되게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매정하군.”

“성현제 씨가 너무, 아 됐어요.”

뒤돌아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한유진의 등을 보며 성현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에는 공고를 본 단골 두어 명이 제가 해도 돼요? 하고 들이댔다가 성현제의 깐깐한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성현제는 상냥한 얼굴로 에스프레소 머신은 다룰 줄 아는지, 포스기를 다뤄 본 경험은 있는지 같은 평범한 질문부터 시작해서 케냐 AA의 특징을 말해 보라느니,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와 에티오피아 시다모의 차이점은 아냐느니 사장인 한유진조차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들을 해 댔다. 도전자들은 질린 얼굴이 되어 포기를 선언하며 커피를 주문했고 성현제는 기분 좋게 웃으며 본인 카드로 결제를 해 주었다. 카페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의 서비스라고 말했지만 먹고 떨어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왜 지원자들한테 심술이에요?”

“심술이라니, 나만큼은 하는 후임을 뽑아 둬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그래. 쫓겨나는 마당에 이 정도도 못 하나?”

불쌍한 척하는 말투와는 달리 웃음기가 걸린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 상황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곱게 자라신 분이 설거지하고 걸레질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너랑 있는 게 좋은 건데.”

한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빙글대는 낯짝이 얄미웠다. 장난스런 수작질을 거는 주둥이를 때려 주고 싶었다.

“… 진짜 싫어.”

한유진은 들고 있던 행주를 성현제의 가슴팍에 집어 던졌다. 가볍게 받아 든 성현제가 카운터에 행주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기분 상했나?”

“… 그렇게 방해해 대는데, 그럼 기분이 좋겠어요?”

머리를 쓰다듬으려 뻗은 손을 피하며 한유진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나하고 일하는 게 싫어?”

한유진은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성현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좀, 부담스러워요.”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한유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성현제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군.”

한참 뒤에야 대답한 성현제의 목소리는 어쩐지 씁쓸하게 들렸다. 한유진은 고집스레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아 정리할 것도 없는 선반을 뒤적거렸다.

그 뒤로는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성현제는 가끔 한유진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한유진은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최소한의 대화만이 오갔다.

저녁 무렵 또 한 명의 지원자가 나타났다. 한유진은 별다른 것을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채용했다.

“좋아요, 유명우 씨. 내일부터 나오실 수 있어요?”

세파에 찌들어 보이는 구부정한 남자는 한유진의 쿨한 말에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합격인 건가요?”

“네.”

“저, 사실 제가 카페 알바는 경험도 없고…”

“얼굴 보니까 아주 잘하실 것 같아요.”

“제, 제가요?”

“네. 내일 10시 반까지 출근 가능하세요?”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명우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허리를 90도로 접어 인사했다. 저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싶었지만 한유진은 지금 성현제에게 온 정신이 쏠려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성현제 씨는 이제 안 나오셔도 돼요. 일하신 값은 시급 1만 원 맞춰서 드릴 테니 계좌 번호 주세요.”

인수인계니 뭐니 트집을 잡을 줄 알고 대답할 말을 준비한 보람도 없이 성현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좌는 문자로 알려 주지.”

한유진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고서 간신히 성현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만 가 보세요.”

“이런, 오늘까지는 일하게 해 주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일찍 닫으려구요.”

성현제는 가만히 한유진을 보다가 작게 웃고는 머리 위의 삐약이를 잡아서 건네주었다.

“삐이!”

삐약이는 내려오기 싫다는 듯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울었지만 작은 새를 주고받는 둘의 호흡은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니었기에 꼼짝없이 한유진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말았다.

“삐약삐!”

삐약이의 불만 가득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혼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동안 즐거웠어.”

“도와주셔서 고마웠어요. 잘 지내세요.”

성현제는 나가면서 출입문의 팻말을 클로즈로 돌려놓았다. 별 곳에서 다 세심한 인간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성현제의 뒷모습을 보던 한유진은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일어서 삐약이를 새장에 가두고는 뻘쭘하게 앉아 있던 유명우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몇 시까지 시간 괜찮아요? 일 좀 미리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유명우는 밤새도록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의욕 과다의 신입 알바였다.


유명우는 일을 곧잘 배웠다.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있어 포스기나 머신을 다루는 것도 금방 능숙해졌고 후각이 예민한지 원두를 향으로 구분할 줄 알았다. 내친김에 커피 드립도 시켜 보았는데 한 번 보여 주면 그대로 따라 하는 포트 컨트롤이 예술이었다.

“우와, 명우 씨 천재 아니에요? 바리스타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요.”

“처, 천재라뇨….”

“빈말이 아니고 진짜로요. 내가 내린 것보다 맛있는 것 같아.”

한유진은 유명우가 처음으로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다 마시면 못 잘 텐데.”

둘이 한 모금씩 맛을 보고도 커피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버리기 아까울 만큼 맛있었다. 아직 몇몇 테이블에 손님이 남아 있어서, 한유진은 새 알바가 내린 커피를 시음해 볼 것인지 물어보고 작은 컵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다들 만족스러워하며 칭찬했다.

“거 봐요, 진짜 맛있다니까. 내가 처음 내린 커피는 쓰레기였는데.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죠?”

유명우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사정을 들어 보니, 유명우는 제대 후 학비가 없어서 휴학을 연장하고 알바를 구하고 있었는데, 자신감 없는 태도 때문에 매번 면접에 떨어지고 몇 번은 일하다가도 금방 잘렸다고 했다. 또 한 번의 면접에서 탈락하고 변변찮은 대학 나오면 뭐 하나, 그냥 자퇴해 버릴까 생각하던 중 카페에 구인 공고가 붙은 것을 보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들어와 봤는데, 뭘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합격이라더니 천재라고 칭찬을 받은 것이다.

“사, 사장님이…, 흑, 장난치시는 줄 알았어요.”

유명우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어…, 솔직히 유명우 씨 뽑은 건 좀 홧김에 그런 거긴 한데요. 재능 있다는 건 진짜예요.”

“그런 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봤어요….”

“음, 그냥 재능을 찾는 게 좀 늦은 거겠죠. 제가 일 잘 알려 줄게요, 이쪽으로 나가 봐요.”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한유진은 유명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좀 황당한 한편으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등바등 돈 벌려 애쓰던 옛날 생각도 나고.

“술 한잔할래요?”

손님이 모두 나가고 이른 마감을 마친 한유진은 유명우에게 제안했다. 엉엉 운 사람을 그냥 보내기도 뭐하고 기분 전환을 좀 하고 싶기도 해서였다.

피스와 삐약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차를 두고 나와 근처의 술집에 갔다. 대학가다 보니 손님들은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한유진은 그게 좀 어색했다. 나이로 치면 제 또래들일 텐데 뭔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든 느낌이었다. 띠동갑도 넘게 차이 나는 성현제와 살아서 그런가. 이게 다 성현제 때문이다. 속으로 전남편을 씹으며 한유진은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뭘 시키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런 데는 처음 와 봐서….”

“저도 잘 모르는데….”

둘은 똑같은 얼굴로 곤란해하다가 결국 만만한 치킨에 맥주를 시켰다.

술자리는 예상보다 즐거웠다. 예전에 일자리를 구하느라 고생하던 얘기로 공감대를 쌓은 둘은 동갑인 것을 알고 말을 놓았고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유명우도 풀어진 태도로 곧잘 제 이야기를 했다.

너무 편해진 것이었을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일까. 어느새 한유진은 성현제와의 위장 결혼이나 이혼한 후에야 뜬금없이 흔들리는 마음까지도 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아, 나 진짜 TMI 대폭발이다, 오늘 첨 만났는데.”

문득 민망한 마음이 들어 물을 마시며 말하자 부모가 이혼한 얘기까지 했던 유명우도 머쓱하게 웃었다.

“근데 유진아, 그 전남편이라는 분이 아까 머리에 새 올려놓고 있던 사람 맞아?”

“응…. 잘생겼지? 어떻게 사람이 돈도 많은데 얼굴까지 잘생겼지? 몸매도 장난 아니야. 운동도 잘하고 못 다루는 악기도 없어…. 세상 진짜 불공평하다니까. 재수 없어….”

한유진은 빨개진 제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서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주절거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커피는 네가 더 잘 내리는 것 같아. 그 사람도 처음 내린 건 구렸었어.”

유명우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진짜 많이 좋아하나 보다.”

“으응…, 나 진짜 너무 웃긴다? 몇 년을 같이 살면서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막… 두근거리더니… 진짜 갑자기….”

“근데 내가 보기에는, 그분도 너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뭐? 성현제가?”

“아까 너 보는 눈빛도 그렇고… 네가 좋은 게 아니면 왜 맨날 와서 일하고 그랬겠어?”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원래 그래, 쓸데없이 다정하고… 흥미 위주에… 제멋대로….”

“그래?”

“그래…, 네가 몰라서 그래….”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한유진은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며 간밤의 기억을 더듬다가 이불을 찼다. 어쩌자고 어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을까. 휴대폰의 쌓인 알림을 확인하다가 성현제에게서 계좌 번호만 달랑 적힌 문자가 온 것을 보고는 기분이 더욱 저조해졌다.

좋아하기는 무슨. 착한 유명우가 딴에는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이겠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위로는 부적절했다.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부정하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던 기대를, 술에 취했어도 필름은 끊기지 않았던 한유진은 온전히 기억했다. 그건 한유진을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도 유명우와의 대화로 속이 제법 후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변변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던 한유진은 이런 속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동생에게도 할 수 없어서 속에만 담아 두던 이야기들을 말로 뱉고 나니 두루뭉술했던 감정이 정리되며 어디를 잘라 내야 할지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한유진은 성현제가 일한 시간만큼의 금액을 정확히 계산해서 송금했다.










유명우는 카페 일에 빠르게 적응했다. 동선이 꼬이거나 물건을 못 찾거나 하는 일은 있어도 음료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잘한다 해도 같이 일하는 첫날이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라 점심시간 후의 피크타임은 평소보다 정신이 없었다.

새장이 빈 것을 알아차린 것은 테이크아웃 단체 손님이 한 팀 지나간 후 한시름 놓았을 때였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지만 작은 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명우야, 삐약이 못 봤어?”

“어? 언제 없어졌지?”

새장을 탈출해도 성현제의 머리에나 올라앉아 있거나, 성현제가 없을 때면 한유진의 머리나 어깨에 앉아 있던 삐약이였기에 새장 단속에 안일했다. 케이블 타이 같은 걸로 문을 묶어 놓을 걸 후회하며 한유진은 삐약이의 탈출을 목격한 손님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그때 성현제가 들어왔다. 머리 위에 삐약이가 앉아 있었다.

“삐약!”

맥이 빠진 한유진이 물끄러미 보고 있자 삐약이가 힘차게 울며 의기양양하게 작은 날개를 펼치고 파닥파닥 홰쳤다.

“… 뭡니까.”

겨우 뱉은 말에 성현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인데.”


성현제는 30여 분 전부터 와 있었다. 카페 안이 붐비는 것 같아서 들어가지 않고 안쪽이 잘 보이는 창문 앞에 팔짱 끼고 서서는 어디 날 쫓아내고 얼마나 잘하나 보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창문 앞에 삐약이의 새장이 있었다. 삐약이는 성현제를 발견하자마자 날개를 파닥이며 눈을 빛내더니 새장을 탈출해 단체 손님들 틈에 섞여서 카페를 빠져나왔다.

갑자기 나타난 삐약이가 몸을 타고 올랐을 때는 성현제도 조금 놀랐다. 머리 위에 올라앉은 작은 새는 고향에 돌아온 양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서 깃털을 고르고 있는데, 안쪽에서는 뒤늦게 삐약이의 부재를 알아차린 한유진이 사색이 되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현제는 한유진이 더 마음 졸이기 전에 안으로 들어섰다.

한유진이 삐약이를 도로 새장에 넣으려 하자 삐약이는 삑삑거리며 반항했다.

“그냥 두지 그래.”

“손님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편하게 생각해.”

“편한 사이여야 말입니다.”

“불편할 건 또 뭔가.”

한유진은 물끄러미 성현제를 보다가 그의 값비싼 니트에 발톱을 박고 버티는 삐약이를 놓아주고 카운터로 갔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어요?”

“예가체프로 하지.”

한유진은 뒤돌아 유명우에게 물었다.

“명우야, 예가체프 아직 남았지?”

“두 잔 분량은 될 것 같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며 성현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유진이 계산을 하는 동안 뒤에서 유명우가 드립을 준비했다.

“새 직원이 내려 주는 건가?”

“네. 쟤 잘해요.”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어제 술 한잔했더니….”

별생각 없이 대답하던 한유진이 카드를 건네며 성현제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뭘 그렇게 캐물어요? 남이야 친하든 말든.”

성현제는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쿠폰은 안 주나?”

“또 오시게요?”

“그럼 안 되나?”

한숨을 내쉰 한유진이 도장 하나가 찍힌 쿠폰을 한 장 꺼내 주었다.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성현제는 카운터 앞자리에 떡하니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셨다. 일어서라는 듯 정수리를 쪼아 대고 있는 삐약이만 없었더라면 화보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커피 맛은 트집 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한유진이 서툰 알바생 때문에 고생하면 은근슬쩍 도와주며 점수를 따려고 했던 성현제로서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3시를 넘어 손님도 뜸해지자 한가해진 한유진이 성현제에게 다가왔다.

“시간 많으신가 봐요?”

“네게 내어주는 시간은 조금도 아깝지 않으니 걱정 말아.”

뭔가 도와 달라는 것인가 싶어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는 성현제에게 한유진은 마주 상큼한 웃음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밥 좀 먹고 오게 잠깐 가게 좀 봐 주세요. 명우가 아직 근처 밥집을 잘 몰라서.”

한유진은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더니 카운터에 부재중 팻말을 놓고 유명우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멍하니 닫힌 문을 보던 성현제는 픽 웃어 버렸다.

“어렵네….”

처음엔 마냥 익숙하게만 생각해서 선을 넘기 어렵게 만들더니, 이제는 성현제를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나 싶어지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린다.

겁 많은 토끼 같은 한유진을 어떻게 하면 다시 둥지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 부리로 머리카락을 당기는 삐약이의 성화에 못 이겨 일어서 카페 안을 서성이면서 성현제는 한참을 고민했다.


성현제는 그 후로도 매일같이 카페에 손님으로 찾아왔다. 오후의 한가한 시간대에 와서는 이제는 지정석 같은 카운터 앞자리에 앉아 삐약이를 머리에 얹고 커피를 마셨다. 책을 읽거나 뭔가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일하는 한유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집요하게 뒤를 쫓는 시선이 느껴질 때면 한유진은 괜히 긴장해 안 하던 실수를 하기도 했다. 유명우가 점심을 먹으러 가서 혼자 남을 때면 어색함은 더 커졌다.

그렇다고 성현제가 뭐라고 먼저 말을 걸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들어와 주문할 때와 두어 시간 앉아 있다가 나가기 전 인사할 때, 그들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짧고 의례적인 것밖에 없었다. 성현제는 그냥 가만히 한유진을 지켜보다가, 스치듯 시선이 얽힐 때마다 다정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계절은 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 한유진의 마음도 간질거렸다. 옆에서 자꾸만 널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며 바람을 넣는 유명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진짜 네 전남편 좀 어떻게 해 봐. 너 없으면 나 되게 무섭게 쳐다보는 거 알아?”

“내가 뭘 어떻게 해… 자기 발로 와서 돈 내고 커피 사 먹는 손님을. 오래 눌러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쫓아내라는 게 아니라… 빨리 좀 둘이 사귀든지 다시 결혼을 하든지 해.”

“뭔 소리야 나는 마음 접었어.”

유명우는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다.

성현제의 쿠폰에 도장이 다섯 개쯤 찍혔을 무렵에 한유진은 참다못해 먼저 말을 걸었다. 유명우는 식사를 하러 가고 손님도 하나 없는 때였다.

“진짜 왜 이래요?”

“이제야 말을 걸어 주는군.”

“왜 맨날 와서 신경 쓰이게…,”

“신경이 쓰이긴 하나 보지?”

“말이라고 해요? 일하는데 빤히 쳐다보기나 하고.”

성현제는 맞은편에 앉은 한유진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웃었다.

“뭘 웃어요?”

“귀여워서.”

한유진은 당황해 얼굴이 빨개져서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성현제가 한유진의 팔을 당겨 도로 자리에 앉혔다.

“대화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어. 자꾸 피하는 것 같아서.”

“무슨…, 무슨 대화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다 끝난 일 아닙니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 처음부터.”

한유진은 당황해 입을 버끔거리다가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장난치지 말아요.”

“장난인 것 같나?”

“성현제 씨 같은 사람이… 왜, 나한테….”

“유진아.”

한유진은 일어서 카운터로 갔다. 뒤따라간 성현제가 등 돌린 한유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진아.”

귓가에 속삭이는 이름에 한유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 나는, 성현제 씨 이러는 거 이해도 안 되고…”

“네 마음은?”

“… 모르겠어요. 생각할 시간을, 좀…,”

귓바퀴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유진은 몸을 떨었다. 얼굴이 홧홧했다. 정말로 성현제가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믿을 수 없어서. 그가 거쳐 왔던 다른 모든 것처럼 제게도 쉽게 질려 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기다릴게.”

정수리에 입술을 꾹 누른 성현제가 떨어져 나가고, 카페의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도 한유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성현제에게 사랑받을 자신이 없었다.


그날 한유진은 내내 넋이 빠져 있었다. 머그잔을 하나 깨기도 했다. 유명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성현제와의 대화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얘기하면 유명우는 분명 제 말이 맞지 않냐며 성현제랑 만나 보라고 할 텐데, 그에게 제 복잡하고 자신 없는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네가 좋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런 답이 돌아올 것이 뻔했다.

뭐가 문제냐면, 성현제가 문제였다. 그는 한유진이 사랑하기에는 너무 완벽하고 잘난 사람이었고, 한유진을 사랑하기에는 마음이 가벼운 남자였다. 한유진은 그의 사랑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 저를 좋다고 하는 말이 진심인지도 믿기 힘들었다. 그의 손을 잡고 사랑에 빠지기에는 불투명한 미래가 두려웠다. 한유진은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복잡해서 저녁을 거르고 보지도 않는 TV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한유진은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밤늦게 들어온 동생이 깨워서 일어났을 때는 깜빡하고 보일러를 켜지 않았던 탓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봄 감기가 오려는 것 같았다.










다음 날은 다행히 카페의 휴무일이었다. 동생은 신입생 새터에 간다고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침밥을 먹이고 동생을 배웅한 한유진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제대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설핏 잠들었을 때 꾼 꿈에서는 성현제가 저를 안고 있었다. 가짜 부부였을 때처럼 품 안에 폭 끌어안긴 한유진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응석을 부렸다. 어디 가지 말아요. 성현제는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 대답하고 머리 위에 입을 맞춰 주었다.

잠에서 깨어 혼자라는 것을 깨달은 한유진은 몹시 서글퍼졌다. 성현제가 내민 손을 잡든 그러지 않든, 그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벌써 상처받고 있었다.

시간은 아직 해 지기 전의 오후였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고 기침까지 나는 것이 상태가 심상찮았기에 늦기 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타 왔다.

입안이 까끌거려서 사 온 죽을 몇 숟가락 먹다가 덮어 버리고, 약을 먹은 한유진은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끔뻑이다 유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우야, 내가 감기에 걸려서… 내일은 일하기 힘들 것 같아. 너도 집에서 쉬어.”

- 많이 아픈 거야? 병원은 갔다 왔어?

“괜찮아. 약도 먹었어.”

- 밥 잘 챙겨 먹고… 너만 괜찮으면 나 혼자 일해도 되니까 이참에 며칠 푹 쉬어.

“독감도 아니고 금방 낫겠지. 고마워.”

전화를 끊은 한유진은 배 위에 올라앉은 피스를 쓰다듬으며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이 들면 또 꿈에 성현제가 나올 것 같아서 눈을 감기 싫었다. 내일 카페를 쉬기로 한 것도 아픈 것보다는 성현제를 만나기 두려워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감기 기운에 약 기운이 더해져 눈에 힘을 주고 버틴 보람도 없이 선잠에 빠져든 한유진은 걱정대로 내내 성현제의 꿈을 꾸었다. 꽃꽂이를 배우다가 귓가에 꽃 한 송이를 꽂아 주던 성현제, 갓 구운 쿠키를 입안에 넣어 주던 성현제, 바이올린을 배울 때에 뒤에서 자세를 고쳐 주던 성현제. 유럽의 어딘가를 여행하던 때의 꿈에서는 성현제의 품에 안긴 채 노을을 보고 있었다.

열이 올라 잠에서 깰 때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 꿈이 보여 준 환상인지 기억과 꿈의 경계가 모호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다시 잠들면 어김없이 또 다른 과거의 기억이 꿈으로 각색되어 등장했다. 꼭 한유진을 사랑하는 것 같은, 성현제가.

그래서 눈을 떴을 때 성현제의 품에 안겨 있었음에도, 한유진은 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 품 안에 더 파고들며 허리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많이 아픈가?”

걱정이 담긴 낮은 목소리에 으응, 어리광 섞인 대답을 하며 부드러운 셔츠에 뺨을 비비던 한유진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을 밀치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밀려드는 현기증에 휘청대자 부드럽게 안아 다시 눕혀 준 성현제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성현제 씨가, 왜, 어떻게….”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왜 왔어요?”

“사장님이 아파서 쉰다고 써 붙여 놓았기에, 걱정이 돼서.”

유명우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모양이었다.

“전화는 꺼져 있고, 인터폰에도 답이 없기에 실례인 줄 알지만 들어왔어. 다행히 비밀번호를 안 바꿨더군.”

한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걱정해 주신 건 고마운데요, 침대에는 왜 기어들어 와요?”

“네가 안아 달라기에.”

“무슨 말도 안 되는…,”

불신을 가득 담아 성현제를 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을 뿐이었다. 밤새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던 한유진으로서는 그게 마냥 헛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아서 문제였다.

“땀이 많이 난 것 같은데 씻지 그래. 죽을 좀 해 놓았어.”

다정하게 눈매를 휘며 웃는 얼굴을 보다가 한유진은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내내 눈뜨자마자 보았던 성현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밤새 꾸었던 꿈에서처럼,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성현제의 얼굴.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주방으로 가자 앞치마까지 두른 성현제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어제오늘 쌓아놓은 것들까지 씻은 모양으로 건조대에 그릇이 가득했다. 새삼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어색해서 입술만 잘근거리다가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감기 환자가 찬물을 마시려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온 성현제가 물병을 빼앗아 도로 넣고는 미지근한 보리차를 따라 주었다. 얌전히 식탁 앞에 앉아 보리차를 홀짝이는 한유진의 뒤에 선 성현제가 목에 걸쳤던 수건을 빼 들어 젖은 머리칼을 닦아 주었다.

“머리를 잘 말려야지.”

“이따 말리면 돼요.”

“물이 떨어지잖아.”

고개를 비틀어 피하는데도 성현제는 꼼꼼하게 머리를 닦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한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에 쥔 유리컵을 만지작거렸다. 축축한 수건을 옆의 의자 등받이에 걸친 성현제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빗다가 귓바퀴를 스치고는 떨어져 나갔다.

성현제가 끓인 죽은 샀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맛있었다. 어제보다 몸이 조금 좋아져 입맛이 돌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맞은편에 앉은 성현제는 죽을 먹는 내내 한유진을 빤히 보고 있어서, 그릇에 머리를 푹 처박고 먹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약은 있나?”

“어제 병원 갔다 왔어요.”

“그건 잘했군.”

약을 먹고 방으로 가자 성현제는 머리를 바싹 말려야 한다며 한유진을 침대에 앉히고 드라이어를 꺼내 들었다.

“제가 할게요.”

“너는 늘 뒤는 제대로 안 말리잖아.”

결국 드라이어는 성현제의 손에 들렸다.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한유진은 허벅지 위로 바지를 구겨 쥔 제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살 때도 뒤가 덜 말랐다며 성현제가 새로 머리를 말려 주던 일이 자주 있었다. 그때의 성현제도 지금처럼 간지럽게 귓바퀴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던가….

드라이어가 꺼지고 성현제가 한유진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들었다. 집요한 시선에 사로잡힌 듯 눈이 마주치고, 성현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성현제는 허락을 구하듯 맞닿은 코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눈을 감자 입술 위로 말캉한 것이 내려앉았다. 한유진은 잡고 있던 바지의 천을 더 세게 움켜쥐었으나, 곧 그 손은 성현제의 큰 손에 잡혀 깍지 끼워졌다.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끝이 앞니를 두드렸다. 한유진은 한숨 같은 작은 숨을 뱉어 내며 입을 열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열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이 끓는 냄비처럼 어지러웠다.

열이 올라 따끈한 입안을 더듬으며 성현제는 너무 성급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끝에 겨우 닿을 수 있었던 입술은 지나치게 달콤했고, 가늘게 새어 나오는 가쁜 숨소리마저 사랑스러웠다. 맘 같아서는 이대로 온몸 구석구석을 맛보고 품 안에 가두고서 놓아주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겁이 많은 그의 연인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지 이내 손을 들어 가슴팍을 밀어냈다. 입술은 순순히 떨어졌지만 얼굴을 감싼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성현제는 한유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유진은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빼냈다.

“… 감기 옮아요.”

성현제는 맥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우리의 첫키스에 대한 감상은 그게 다인가?”

안 그래도 빨갛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한유진은 성현제의 가슴을 툭 때렸으나 성현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던 한유진이 다시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나도 성현제 씨가 좋아요.”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성현제는 잠깐 굳었다가 곧 환하게 웃으며 키스하려 들었다. 손으로 그 입술을 막아 밀어내며 한유진은 말을 이었다.

“근데 성현제 씨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못 믿겠어요.”

“어째서?”

성현제의 반문이 한유진의 손바닥에 닿아 뭉개졌다. 민감한 피부에 입술이 스치는 감촉에 한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5년간 봐온 성현제 씨는… 뭘 오래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성현제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도, 금방 지겨워하게 될 것 같아서요.”

“나는 취미 삼아 사랑을 하려는 게 아닌데.”

손바닥에 닿은 말이 너무 간지러워서, 한유진은 그만 손을 내려놓았다. 성현제는 그 손을 도로 잡아 올려 손바닥에 몇 번 입 맞추고는 입가에 댄 채로 생각에 빠졌다.

한유진이 손가락을 스치는 숨결을 견디고 있기가 힘들어질 즈음 성현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연애부터 해 보는 게 어때.”

“뭘 들었어요? 나는 당신 못 믿겠다니까.”

“하지만 나를 좋아하잖아.”

당당하기까지 한 눈빛에 한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유진을 사랑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니까. 그럴 때 하는 게 연애 아닌가?”

“나는…,”

“그러다 나를 믿을 수 있게 되면, 다시 결혼하는 거지.”

한유진은 자신만만한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한테 먼저 질려 버리면요?”

성현제는 다정하게 한유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지 않겠다는 믿음을 줄게.”

“나는…,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지금 내가 너를 포기하고 가 버리면, 상처받지 않을 건가?”

몇 번이나 삼키고 삼켰던 눈물이 끝내 터져 나왔다. 성현제는 그 눈물을 받아 마시고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한유진은 결국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안았다.


실컷 운 후에 세수를 다시 하고 침대에 누워 한유진은 성현제의 품에 안겼다. 성현제의 옷은 눈물로 흠뻑 젖어 한유현의 옷으로 갈아입었기에, 품에서는 한유진에게서 나는 것과 같은 섬유 유연제의 향기가 났다.

가만히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한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애매하던 관계의 이름을 재정의한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편해졌으나, 셀 수도 없이 안겨 왔던 품 안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잠이 오지 않나?”

성현제가 물었다.

“어제부터 너무 많이 자서요.”

한유진은 고개를 들어 오늘부로 애인이 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내려 붉은빛이 드리운 가운데 잘생긴 얼굴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현제가 손을 들어 한유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좀 내린 것 같은데.”

이마에서 미끄러져 내린 손이 볼을 만지작거렸다. 한유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다시 또 키스였다.

입안을 더듬는 혀의 감촉은 아무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숨을 할딱이자 입술을 뗀 성현제가 코끝과 이마, 볼과 귓가까지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렸다. 얽힌 다리 사이로 서로의 흥분이 느껴졌다.

“배는 안 고픈가?”

한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성현제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결이 정수리를 적셨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군.”


그의 바람대로 다음 날 한유진은 한결 개운해진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으나, 이번에는 성현제가 감기에 걸려 버렸다. 성현제가 끓여 놓았던 죽을 나눠 먹고 한유진이 타온 약을 한 봉지씩 먹은 둘은 얼굴을 마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하루 더 쉴까요?”

“일을 방해하는 애인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한유진은 침대 맡에 앉아 제 침대에 누운 성현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픈 모습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던 남자가 골골대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왜 감기에 걸렸는지를 생각하면 민망하기도 했고.

“집에 데려다줄까요?”

“여기가 좋아. 네 냄새가 나거든.”

한유진은 성현제의 입술을 톡 치고는 일어섰다.

“오픈만 하고 다시 올게요.”

성현제가 팔을 뻗어 한유진의 손을 잡았다.

“기왕이면 손 말고 입술로 때려 주면 안 될까?”

“이 아저씨가 정말….”

입으로는 타박하면서도 한유진은 못 이긴 척 끌려가 키스해 주었다.










한유진은 정말로 오픈만 하고 유명우에게 가게를 맡긴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한유현이 와 있었다.

“이 새끼가 왜 내 옷을 입고 형 침대에 누워 있어?”

겉옷도 벗지 않은 채로 이불을 두른 성현제와 대치하고 있던 한유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현아, 그게…,”

“형한테 들이댄다던 새끼가 성현제였어?”

“어? 네가 그걸 어떻게….”

당황한 한유진은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을 내뱉었고, 한유현은 배신감에 찬 얼굴이 되어 한유진을 노려보았다.

“이러려고 나한테 카페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거야?”

“아니, 아냐 그게 아니라… 성현제 씨가 일을 도와준 건 사실인데…,”

“나는 카페 근처에도 못 가게 해놓고! 형한테는 내가 아직 어리게만 느껴지는 거지?”

“그게 아니라 유현아….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손발 씻고 와서 얘기하자.”

착한 동생 한유현은 씩씩거리면서도 패딩 점퍼를 벗고 손발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한유현은 새터에 가서 선배들이 한유진의 카페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장이 젊고 얼굴도 볼매인데 건물주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자연히 어떻게 한번 해 보려는 놈들이 생겨났고, 한유현의 앞에서 형의 얘기를 떠들어 댄 선배 놈도 그런 놈 중의 하나였다.

‘근데 얼마 전부터 개잘생긴 남자가 가드를 쳐서 어중이떠중이는 다 떨어져 나갔다는 거 아냐.’

‘얼마나 잘생겼길래?’

‘진짜 개쩔어. 키가 190은 넘는 것 같은데 얼굴은 조각 같고… 눈 색깔 보면 혼혈 같기도 하고.’

선배들이 하는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듣던 한유현은 다음 말에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아, 어디 얘기하는지 알겠다. 거기 S약국 골목 쪽에 있는 카페 아냐? 이름이 해연이던가?’

‘어 너도 알아?’

‘거기 커피 맛있거든. 로스팅도 직접 하고.’

‘사장도 존나 맛있게 생겼어. 언뜻 보면 평범한 거 같은데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게 색기가 그냥…’

한유현은 거기서 이성을 잃고 선배를 폭행한 끝에 경찰서를 들렀다가 조기 귀가한 것이다.

“그래서 선배를 팼다고?”

“그 새끼가 형을 두고 더러운 소리를 하잖아!”

“뭐라고 했길래?”

“그,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한유진은 이마를 짚었고 이불을 두른 채 얘기를 듣고 있던 성현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유현에게 말했다.

“도련님도 형님을 노리는 개새끼들의 존재를 확인했다니 얘기가 쉽겠어.”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내가 처음 카페에 갔을 때도 가관이었지. 남자가 다섯에 여자가 둘이었던가?”

“한 번에 그만큼이나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 내가 다 퇴치했지.”

한유진은 묻고 싶었다. 대체 언제요?

“더러운 말을 입에 담은 놈은 제대로 패 줬겠지?”

“물론이죠.”

“그래, 법적인 조언이 필요하면 내 이름을 대고 이쪽으로 연락하고.”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잘못되면 네 형이 곤란해져.”

한유현은 부루퉁한 얼굴로 성현제가 내민 변호사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래서 그쪽은 왜 우리 집에서 내 옷을 입고 형 침대에 누워 있던 건데요?”

“그게 말인데, 한유진 군과 나는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했어.”

“잠깐만요, 성현제 씨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한유진은 당황해서 성현제의 팔을 붙들었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한유현의 울화를 부추겼다.

“누구 맘대로?”

“그거야 우리 맘대로지.”

“형, 저 새끼가 무슨 짓 했어?”

“아니야 유현아, 그냥 내가 감기에 걸려서, 간호해 주다가 감기가 옮는 바람에…”

“뭔 짓을 했길래 감기가 옮아?”

“너 사고방식이 너무 불건전한 거 아니야? 감기는 원래 옆에만 있어도 옮아!”

“그냥 옆에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야.”

부적절한 곳에서 끼어든 성현제 때문에 상황은 혼돈과 파괴를 향해 달렸다.

“나는 이 교제 반대야!”

“내가 뭐 어때서 그러지? 돈 노리고 달라붙는 날파리들보다야 훨씬 낫지 않나.”

“이혼남이잖아!”

“그건 한유진 군도 마찬가지인데.”

“너 때문이잖아!”

급기야 성현제의 멱살을 잡은 한유현의 양옆으로 피스와 삐약이까지 가세해 야옹야옹 뺙뺙 말을 얹어 댔다.

“다 조용히 해!”

참다못해 소리친 한유진이 감기 기운이 남아 띵하게 울리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잡았던 멱살을 놓고 얼른 팔을 잡아 부축한 한유현이 둘렀던 이불까지 떨어뜨리고 반대편에 붙어 선 성현제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유현아.”

“으응, 형.”

“형도 많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야. 성현제 씨랑은 예전에 그런 식으로 만난 사이긴 하지만, 좋은 감정이 생겨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어.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는 말에 한유현은 기가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현제 씨.”

“네.”

“성현제 씨는 잠깐 나 좀 봐요.”

방으로 성현제를 끌고 간 한유진은 등짝을 때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애한테 유치하게 왜 그래요?”

“도련님이 질투하는 건 재밌는걸.”

“성현제 씨가 이런 식이니까 내가 믿기 힘들다는 겁니다.”

“으음. 잘못했어.”

제법 화가 났던 한유진이었지만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에 맥이 빠져 버렸다.

“잘못한 거 알면 얌전히 누워 있기나 하세요. 환자 주제에 나대지 말고.”

어깨를 밀자 침대로 풀썩 누운 성현제가 한유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불시에 끌어당겨져 성현제의 위로 엎어진 한유진이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두 팔로 감싸 안은 성현제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이불이 없는데.”

“갖다줄게요.”

“이 이불이 더 마음에 드는걸.”

“아, 좀, 사람이 어떻게, 으응…”

뭐라 더 타박하려던 목소리는 겹쳐진 입술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뒤통수를 붙든 채 집요하게 이어지던 키스는 한유진이 성현제의 입술을 제법 세게 깨물고 나서야 멈춰졌다.

“밖에, 유현이도 있는데….”

“도련님도 이제 다 컸는데 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쪽, 깨물려 놓고서 겁도 없는 입술이 다시 한번 맞닿았다.

“진짜 물어뜯어 버리기 전에 그만 해요.”

성현제는 푸스스 웃으며 제 몸을 덮은 한유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한유진이 끄응, 숨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어쩌지.”

“좀 놔요.”

“네가 너무 좋아.”

버둥대던 한유진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좋아서 미치겠어.”

속닥거리는 고백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몸에서 힘을 빼고 성현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한유진은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두 개의 심장은 똑같이 엉망으로 빠르게 뛰고 있어서, 어느 것이 누구의 소리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한유현이 뭘 하고 있는 거냐며 문을 두드릴 때까지 둘은 그대로 누워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현제와 한유현을 단둘이 남겨 두기가 불안했던 한유진은 성현제를 제집에 데려다주고 카페로 복귀했다. 다음 날은 일과 후에 성현제의 집으로 가 볼 작정이었으나 성현제는 늘 오던 시간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해 한유진을 놀라게 했다.

“몸도 안 좋은데 집에 있지 않고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밤에 찾아가려고 했는데요.”

“이제 별로 아프지도 않아.”

이마를 짚어 보자 정말로 열이 거의 없었다.

“너야말로 좀 더 쉬어야 하지 않아?”

“명우 혼자 어떻게 일해요.”

“알바를 더 뽑지 그래.”

“다 나아 가는데요, 뭘.”

“나하고 놀 시간이 없잖아.”

손을 잡고 손바닥을 은근하게 문지르는 손길에 한유진은 볼을 붉혔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워서 뒤를 돌아보자 유명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슬쩍 빼내려는 손을 꼭 붙든 성현제가 짐짓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카페를 괜히 차려 줬어.”

“정말 기뻤는걸요.”

“그래도.”

“… 그럼 파트타임이라도 더 뽑을까요?”

“한 서너 명 뽑아. 사장님 없어도 굴러가도록.”

“그럴게요.”

성현제는 그제야 환하게 웃더니 한유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유진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성현제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고는 밀어냈다.

“일하는 데서 이러지 말아요.”

“네가 사장인데 뭐 어때.”

말과는 달리 순순히 물러서는 것 같던 성현제는 다시 손을 잡더니 기어이 한유진의 볼에 입을 쪽 맞추고서야 놓아주었다. 유명우가 혀를 쯧 차는 소리가 들렸다.


파트타임 알바생을 몇 명 더 뽑고 유명우는 매니저 직함을 달게 되었다. 새 알바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유명우에게 카페 관리 전반에 대한 것까지 알려 주고 나니 몇 종류 되지 않는 베이킹밖에 신경 쓸 것이 없었다. 그마저도 유명우가 관심을 보이기에 몇 번 해 보게 했더니 금방 익숙해져서 정말로 손댈 것이 없어졌다.

카페 일은 줄어들었지만 한유진은 성현제와 데이트를 다니느라 바빴다. 유명하다는 맛집은 다 찾아다녔고 스물다섯이나 먹고 처음으로 놀이공원도 가 보았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후 다리를 후들거리자 성현제는 한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다니려고 해서 민망하게 만들었다. 기념품을 파는 곳에서는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사다가 씌우려 하기도 했다. 같이 쓰고 다닐 거면 하겠다고 말하자 흔쾌히 받아들인 성현제는 한유진이 고르고 고른 표범 귀 머리띠를 했다.

“잘생기니까 별게 다 어울리네요.”

토끼 귀를 단 한유진이 불퉁하게 하는 말에 성현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더 잘 어울려.”

“이게요?”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본 한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토끼 귀가 따라서 휘청거렸다. 성현제는 뒤에서 한유진을 안고서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 놀란 토끼 같거든.”

“제가요?”

“지금 그런 얼굴.”

한유진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들어 머리 위에 얹힌 성현제의 얼굴을 보았다. 퍽 사랑스럽다는 듯이 저를 보는 눈빛은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언제요?”

“네가 내 품으로 도망쳐 왔을 때.”

“클럽에서요?”

“그래.”

한유진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때 처음 본 거 아닌데요.”

“알아. 도련님 장학금 받을 때도 봤었지?”

“알아요?”

“어찌나 사진을 열심히 찍어 대던지, 인상 깊었어.”

한유진은 몸을 돌려 성현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클럽에서 알아봤었어요?”

“아니, 도련님 만나고서야 기억났어. 그러니까 그땐 처음 만난 게 아니야.”

“순 자기 좋을 대로네요.”

성현제는 툴툴대는 한유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이마에 키스했다. 시도 때도 없는 키스에는 한유진도 익숙해져서 잠깐 주변을 힐끔거리고는 팔뚝을 찰싹 때릴 뿐이었다.

“그건 그냥 서로 일방적으로 본 거니까, 만났다고 할 수는 없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한유진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표범 귀를 단 성현제가 토끼 귀를 단 한유진을 다정하게 안고 있었다.

“내가 토끼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표범하고 토끼 같긴 하네요.”

“왜?”

“영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잖아요.”

성현제는 잠깐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가는 머리띠를 벗어 놓고 토끼 귀 머리띠를 하나 새로 가져왔다.

“이러면 어때.”

토끼 귀를 단 성현제가 쓸데없이 귀여워서 한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유진은 놀이기구는 취향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성현제가 토끼 귀 머리띠를 하고 찍은 투샷을 한유현에게 보내는 바람에 동생과 놀이공원에 한 번 더 가야 했다. 할 일 없고 시간 많은 백수 성현제가 끼어들어서 산통을 깨 놓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성현제가 한유진을 많이 좋아한다는 것은 느꼈는지 전만큼 불을 뿜을 것처럼 싫어하지는 않는 한유현이었다.

셋이서 나란히 토끼 귀를 달고 찍은 사진은 인화되어 한유진의 방 침대 맡의 협탁 위에 놓였다. 활짝 웃는 형과 성현제 사이에서 한유현만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연애는 순조로운 것 같았지만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한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불안감이 있었다. 그는 이제 성현제가 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으나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생기지 않았다.

그들은 데이트를 하고 포옹을 하고 키스도 자주 했지만 아직 사랑의 마지막 단계에는 이르지 않은 상태였다. 한유진이 아는 성현제는 더 나아갈 곳이 남지 않은 일에는 열중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서 키스가 깊어지며 분위기가 묘해지다가도 문득 불안해진 한유진은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곤 했던 것이다.


계절은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어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성현제의 집에서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던 한유진에게 성현제는 꽃놀이를 가자고 제안했다.

“남쪽에는 벌써 벚꽃이 핀다던데.”

창밖에는 목련 꽃잎이 비를 맞아 한 잎씩 떨어지고 있었다. 포크를 빨며 흰 꽃잎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던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일치기로 갈 수 있어요?”

“하루 자고 오는 게 나을걸.”

한유진은 눈을 들어 전남편이자 애인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웃으며 마주 보던 성현제가 한유진의 손에서 포크를 빼내 접시 위에 놓고 입술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한유진은 대답을 얼버무리다가 몸을 일으켜서는 성현제의 목을 안고 짧게 키스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마실래요?”

“난 괜찮아. 너도 다른 차를 먹지 그래.”

“아, 여기 자몽청 있네요. 현제 씨도 자몽티 어때요?”

“좋지.”

한유진은 그날 확답을 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성현제도 한유진이 그런 상황을 피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험 없는 풋내기의 부끄러움쯤으로 생각했지만, 어색한 상황이 몇 번 반복되면서 좀 더 근본적인 두려움 같은 것에 가깝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유진이 성현제에게 욕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입술을 맞비비고 옷 안으로 서로의 맨살을 더듬으며 착실히 흥분하다가도 한유진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몸을 움츠리고 어설픈 핑계를 대었다. 잠깐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삐약이가 우는 것 같은데. 가스 밸브를 안 잠근 것 같아요. 한유진은 명백히 섹스 그 자체를 꺼리고 있었다. 꽃놀이에 대해서도, 1박의 가능성을 얘기하자 금방 말을 돌려 버렸다.

연애하기 시작한 이래 감기에 걸렸던 그 첫 번째 날을 빼고는 한 번도 동침한 적이 없던 둘이었다. 한 침대에 누워 어설픈 말로 도망가는 것도 힘들어지면 내가 저를 강제로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나? 성현제는 한유진을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으나 저를 그런 파렴치한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조금 서운했다. 더 깊이 닿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는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한유진이 마음을 열고 먼저 안겨 오기를 원했다.

다음 날 한유진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퍽 비장한 표정을 하고 성현제에게 말했다.

“남도 꽃놀이, 가죠.”

“기다리면 서울에도 벚꽃은 필 텐데.”

“싫다는 거예요?”

“아니, 좋아. 언제 갈까?”

“아무 때나 날씨 좋은 날에요.”

그렇게 둘은 연애 후 첫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한유진은 동생에게 피스와 삐약이를 잘 돌봐 주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성현제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한유진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여행을 떠나며 이제 그만 성현제를 믿고 의심 없이 사랑을 받겠다는 결심을 다졌다고 생각했지만, 몸을 나눈 후에도 그 사랑이 여전할까 하는 걱정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은 너무 빼는 바람에 도리어 질려 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구차한 마음이 등을 떠민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유치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성현제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줄수록 한유진은 더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무력한 패배자처럼 느껴졌다. 이미 한유진은 성현제를 너무 사랑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다시 부부가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한유진은 운전대를 바꿔 잡을 것을 제안했지만 성현제는 피곤하지 않다는 말로 사양했다. 그런 배려마저 한유진에게는 불만으로 쌓이고 있었다. 한유진으로서는 성현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건 한유진을 점점 초조하게 만들었다.

사천 IC를 빠져나가 조금 달리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양쪽에 가득한 해안 도로가 나타났다. 기상청에서 예보한 대로 날씨는 맑았고 햇살이 부서지는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벚꽃잎이 그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 봄바람을 맞으며 한유진은 스쳐 지나가는 벚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컨디션이 안 좋나?”

문득 성현제가 물었다.

“아뇨, 괜찮은데요.”

“멀미라도 하나 싶어서. 좀 더 달릴까 아니면 숙소부터 갈까?”

“좀 더 있다 가요. 꽃이 예쁘네요.”

창문으로 날려 들어온 벚꽃잎 한 장이 성현제의 머리에 붙었다. 한유진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곁눈질하던 성현제가 웃으며 손을 뻗어 한유진의 손을 한 번 꼭 쥐어 주고는 다시 기어를 잡았다. 한유진은 벚꽃잎을 떼어 주려 했으나 꽃잎은 그보다 먼저 바람에 날려 다시 어디론가 가 버렸다.

해안 도로를 몇 번 왕복한 후에 둘은 예약한 호텔에 가서 짐을 풀었다. 전면의 큰 유리창으로 바다가 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창문 가까이서 내려다보면 안쪽으로 꽃이 핀 벚나무들이 몽글몽글한 솜사탕처럼 줄지어 늘어선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성현제는 어디를 가든 최고의 전망을 가진 고급 호텔에만 묵었다. 예전 그의 여행에 그저 덤처럼 따라다닐 때는 역시 부자는 다르네, 재수 없어 따위의 감상만 불러일으키던 것들이 둘의 여행이 되자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좋은 방 잡았네요.”

“마음에 들어?”

성현제의 태도도 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돈이면 다 된다느니 재수 없는 소리를 했을 것이다.

한유진은 뒤에서 저를 안은 성현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여행 준비는 성현제 씨 혼자 다 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내가 하면 쉬운 일이니까.”

한유진은 유리창에 비친 성현제의 얼굴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한테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닌데.


늦은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 잔씩 사든 둘은 해변을 잠깐 걷다가 삼천포의 명소라는 영화관으로 갔다. 상영관의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푸른 바다가 고스란히 보이는 모습에 한유진은 감탄사를 뱉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아요.”

성현제는 제일 전망 좋은 상영관을 통째로 빌린 보람을 느꼈다. 종일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던 한유진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창밖을 보는 한유진을 잠시 감상하다가 데리고 적당한 자리에 앉자 곧 커튼이 자동으로 닫히며 상영관은 암실이 되었다.

스크린에서는 한참이나 지역 광고가 이어졌다. 한유진이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무도 안 들어오죠?”

“평일이라서 관객이 없나 보지.”

한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시작된 영화에 빠져들었다. 꼭 고양이같이 구는 용이 나오는, 전적으로 한유진의 취향인 애니메이션이었다. 성현제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그는 영화에 집중한 한유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얼굴을 물들이는 스크린의 반사광만큼이나 다채롭게 변하는 표정은 감상하는 맛이 있었다.

문득 한유진이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스크린에서는 소년이 용을 타고 날고 있었다. 용이 나는 하늘은 새파래서 한유진의 얼굴도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표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읽기가 어려웠다.

영화 속의 소년이 무어라 소리쳤고, 한유진은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성현제는 쥐고 있던 한유진의 손을 고쳐 잡았다. 한유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영화가 끝나자 커튼이 걷히며 바다가 다시 펼쳐졌다. 해 질 무렵이 되어 바다에는 이제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 위로 드문드문 떠 있는 작은 섬들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붉은 노을이었다. 까만 암실 속에 뻥 뚫린 것처럼 바다만 보이는 광경은 묘하게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데가 있었다. 세상의 끝에 단둘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로 세상에 단둘뿐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유진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가, 동생과 피스와 삐약이와 유명우와…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떠올리며 반성했다.

“내가 진짜 좋아하긴 하나 봐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바다를 보던 성현제가 한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유진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성현제 씨를요. 많이 사랑하나 봐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얼굴이 성현제를 돌아보며 수줍게 웃었다. 성현제는 심장이 잠깐 멎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유진은 가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해서, 이렇게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곤 했다.

“… 유진아.”

참았다 뱉는 한숨처럼 터져 나오는 연인의 이름을 속삭이며, 성현제는 한유진을 끌어안았다.

“사랑해.”

“알아요.”

맞부딪치는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한유진은 불현듯 깨달았다. 사랑이란 걱정이나 자존심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의 상처를 걱정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밖에 없었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해 스스로 상처 입히기보다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신기할 만큼의 행복감이 차올랐다. 내내 고민하던 것들이 모두 하찮게 여겨졌다. 한유진은 성현제를 사랑하고 있었고, 성현제는 한유진을 사랑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호텔까지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시동도 걸지 않은 차 안에서,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둘은 틈만 나면 서로를 보았고 눈이 마주치면 입술도 곧 맞닿았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까지 그새를 못 참고 혀를 섞던 둘은 중간에 문이 열리고 노부부가 타는 바람에 멋쩍게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다행히 노인들은 눈이 침침한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서 있다가 잠시 후에 물었다.

“이게 올라가나?”

“네.”

한유진이 대답하자 혀를 찬 노부인이 늙은 남편을 타박했다.

“뭐가 급하다고 지대로 보지도 않고 암거나 올라탔어.”

“에잉, 다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겄지.”

노인들은 퉁명스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성현제와 한유진은 서로를 보며 작게 웃었다.

내리기 전에 한유진은 로비 층의 버튼을 눌러 주었다. 그리고 노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허리를 잡혀 돌려세워졌다.

“잠깐만, 방에 가서, 으응!”

고개 돌려 입술을 피하자 귓불을 빨다가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성현제가 뜨거운 숨을 길게 내쉬더니 한유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자 몇 걸음 만에 객실 문 앞이었다. 카드키를 꺼내며 한쪽 팔로만 엉덩이를 받쳐 드는 것에 놀란 한유진이 으앗 소리를 지르며 목을 끌어안았다. 발끝에 걸려 달랑거리던 로퍼 한 짝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안으로 차 넣은 성현제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침실로 가는 걸음이 급했다.










성현제가 침대 위에 몸을 내려놓자 한유진은 발을 흔들어 남은 신발 한 짝을 마저 털어 내듯 벗어 던졌다. 방 안 어디론가 날아간 신발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성현제의 입술이 먼저 부딪쳐 왔다. 첫키스를 하는 소년들처럼 마구잡이로 입술을 비비대며 그들은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온종일 비어 있던 방 안에는 찬 공기가 맴돌았으나 열이 오른 두 사람의 몸을 식히지는 못했다.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지고 얼굴을 든 성현제가 한유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 캄캄한 가운데 거실의 미등만이 덜 닫힌 방문 틈으로 한 조각 노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중에도 희게 빛나는 한유진의 얼굴은 성현제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가로등 아래 서서 의심을 담은 눈빛으로 저를 살피던, 새삼스레 예뻐 보였던 한유진의 얼굴.

성현제는 손을 뻗어 한유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유진은 어리광처럼 손바닥에 볼을 부비다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또 가슴 떨리게 사랑스러워서, 오히려 성현제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이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 되는 것인지, 그래도 저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인지, 이제는 겁내지 않는 것인지.

물어볼 말조차 고를 수가 없어서 하릴없이 볼만 만지작대는 성현제를 보던 한유진이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물리려는 성현제의 손을 잡고 다 안다는 듯이 괜찮아요, 속삭이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잔뜩 구겨진 카디건을 벗어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던 성현제는, 마지막 단추까지 풀어졌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한유진을 끌어안았다.

“유진아.”

내뱉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가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피부 위로 혀끝이 미끄러지고 여린 살이 빨아들여지는 감각에 한유진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둘 곳을 몰라 방황하던 손이 성현제의 옷자락을 꾹 잡아 쥐었다. 너무 성급하게 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성현제는 안심시키듯 한유진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드러난 어깨를 더듬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 맨가슴을 스치고 바짝 솟은 첨단을 머금었을 때, 한유진이 몸을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혀를 내어 유실을 몇 번 둥글리던 성현제는 떨림이 멎지 않자 입술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젖은 가슴에서 입술이 떨어지는 습한 소리가 유독 크게 방 안을 울렸다. 한유진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팔만 겨우 끼워져 있던 셔츠를 완전히 벗어 버렸다.

“겁먹었어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성현제의 셔츠에까지 손을 대며 묻는 말에 성현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왜?”

성현제는 말없이 한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새 중간까지 풀어진 셔츠 사이로 성현제의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맨살에 스치는 한유진의 손끝이 차가웠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뒤늦게 이어진 대답에 한유진은 고개를 들어 성현제의 얼굴을 보았다. 빛을 등져 그림자가 진 얼굴은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한유진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 나도 그래요.”

옷을 완전히 벗겨 낸 한유진이 성현제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입술을 맞댄 채로, 한유진이 작게 속삭였다. 과감하게 먼저 혀를 얽어오는 것에 성현제는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팔을 둘러 마른 등을 쓸어안고서, 성현제는 입안을 헤매는 달콤한 혀를 빨다가 입술을 내려 다시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혀끝이 문질러질 때마다 움찔대며 밀려나던 끝에 뒤로 눕혀진 몸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한유진이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자기 전에 걸쳤던 가운은 온데간데없고 맨살을 서로 맞댄 채 마주 안은 상태였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한유진은 고개를 들어 성현제를 올려다보았다.

“잘 잤어?”

한참 전부터 깨어 있었던 것 같은 성현제가 기다렸다는 듯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한유진은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성현제가 부드럽게 몸을 안아 일으켰다. 온몸이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입에 대 주는 생수를 받아 마시고 몇 번의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한유진은 갈라진 목소리나마 뱉을 수 있었다.

“몇 시예요?”

“열한 시.”

“체크아웃은?”

“세 시로 미루어 놓았어.”

“그게 돼요?”

“허니문이라고 했거든.”

한유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배 위에 얹어진 손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나 먼저 씻을, 으윽!”

한유진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뻣뻣하게 굳은 사지의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다. 성현제가 팔을 살살 주물러 주었다.

“으으… 아, 살살… 윽, 아….”

성현제는 아예 한유진을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서 온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팔다리는 물론 허리며 어깻죽지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너무 용을 써서 그런 것 같았다. 막상 직접 혹사당했던 곳은 안이 부었는지 약간의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 말고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한유진은 인체의 신비를 느꼈다.

한참을 주무르고서도 서 있기조차 힘들었기에 어젯밤처럼 성현제가 몸을 씻겨 주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몸이 붉은 흔적으로 얼룩덜룩한 것을 본 한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현제가 목을 물었던 곳에는 피딱지까지 앉아 있었다.

“어떡할 거예요, 이거.”

상처 위에 입을 맞춘 성현제가 미안해, 사과했다. 성현제의 등에도 한유진이 할퀸 자국이 가득했기에 피장파장이기는 했다. 동생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옷 입는 데까지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기에 한유진은 성현제의 품에 안긴 채로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체크아웃 시간대를 한참 넘긴 때이니 아무도 안 탈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 봤지만 엘리베이터는 중간에서 멈추었다. 올라탄 사람은 공교롭게도 어제의 노부부였다.

“내려가는 건가?”

“네.”

노신사가 묻자 성현제가 대답했다.

“벌써 타 놓고 물으면 뭐하누.”

아내의 타박에 노인이 껄껄 웃었다. 둘은 어제처럼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바로 어제 만난 사이에 모른 척하기도 뭐해서 한유진은 고개를 들고 눈인사했다.

“어디가 아픈겨?”

노부인이 한유진을 살피며 물었다. 한유진은 대답 없이 얼굴만 붉혔다. 한유진의 빨개진 얼굴과 성현제의 태연한 얼굴을 번갈아 본 노인이 홀홀 웃었다.

“좋을 때야.”

“그럼, 좋을 때지.”

아내의 말에 남편이 맞장구쳤다. 때마침 로비 층에 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잘 살어, 색시 말 잘 듣구.”

“그려, 재밌게 살어.”

“감사합니다.”

덕담을 건넨 노부부가 내리고 엘리베이터에는 둘만 남았다. 어제 셀프 파킹을 했기 때문에 지하 주차장까지 직접 내려가야 했다.

“아우, 만나도 저분들을 또 만나네.”

한유진이 민망함을 떨쳐 내려는 듯이 중얼거리자 성현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인연인가 보지.”


서울로 돌아가기 전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는 다시 어제의 해안 도로를 지나쳐야 했다. 봄비치고 제법 거센 빗줄기를 맞아 떨어진 벚꽃잎이 길가에 눈처럼 쌓여 있었다. 풍성한 꽃다발 같던 나무들은 기분 탓인지 어제보다 모양새가 빈약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서 어둑한 풍경은 그림같이 반짝이던 어제에 비해 우중충한 모습이었으나 한유진은 지금이 훨씬 좋았다. 이 봄과 함께 사랑도 떠나 버릴 것만 같던 기분이 남 일처럼 느껴졌다.

“비가 와서 꽃이 빨리 지겠어요.”

“내년에 또 피겠지.”

“내년에도 또 올래요?”

“좋지. 영화관도 또 갈까?”

“그래요.”

해가 바뀐 후의 일을 약속하는 것은 성현제와의 연애를 시작한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래의 일을 생각해도 더는 불안하지 않음에 한유진은 작은 감동을 느꼈다.

“우리, 결혼할까요?”

문득 말하자 눈을 크게 뜬 성현제가 한유진을 돌아보았다. 차가 비틀거렸다.

“앞에 봐요, 앞에!”

갓길에 차를 세운 성현제는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기울여 한유진의 입술에 키스했다.

“고마워.”

한유진이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너무 멋없는 청혼이었나?”

“아니, 충분히 감동적이었어.”

다시 한번 입 맞춘 성현제가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사실은 내가 먼저 청혼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한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린 케이스 안을 보았다. 한 쌍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이런 건 언제 샀어요?”

“좀 됐지.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반지를 꺼낸 성현제가 한유진의 손을 잡아 들었다.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유진을 보다가 말했다.

“몰랐는데, 나는 욕심이 많아.”

한유진은 의아한 눈으로 성현제의 얼굴을 보았다.

“잃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한 것은 네가 처음이라서. 어쩌면 조금 집착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손가락 끝에 반지가 닿았다.

“네가 예전에 말했던 것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아. 지금 나는… 나중에 네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하게 될까 봐 무서워졌거든.”

한유진은 성현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금빛처럼 보이는 노란 눈동자가 자신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는 놓아줄 자신이 없는데. 괜찮겠어?”

작게 웃음 지은 한유진이 대답했다.

“꼭, 지금은 놓아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성현제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피식 웃었다.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절대 못 하지.”

남은 반지 하나를 마저 꺼내 성현제의 손에 끼워 준 한유진도 웃으며 말했다.

“마찬가지예요.”

“천생연분이군.”

꽃잎이 지는 거리에서 빗줄기가 차체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길게 키스했다.










봄꽃이 다 지기 전에 그들은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변호사 문현아와 유명우를 비롯한 카페 직원들, 취미 찾기를 하며 가까워졌던 몇몇 지인들만 초대한 결혼식에는 성현제의 아버지까지 참석했다. 근엄한 얼굴의 회장님과 뚱한 얼굴의 대학생이 각각 양가의 혼주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식을 마칠 무렵에는 두 사람 다 우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회장님은 죽은 아내가 생각나서였고, 한유현은 형을 성현제에게 주기 싫어서였다.

신혼여행은 몰디브 섬으로 갔다. 신혼여행이 아니라면 가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햇살 아래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밤에는 파도 속 플랑크톤이 별무리처럼 파랗게 빛나는 열대의 바다는 과연 듣던 대로 아름다웠지만, 한유진이 그것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방갈로의 침실에 난 커다란 창문을 통해서였다. 돌아간다고 따로 지내게 되는 것도 아닌데 성현제는 한유진을 침대 위에서 내려올 틈이 없게 했다.

이전에 함께 살던 성현제의 집이 다시 둘의 신혼집이 되었다. 형과 살던 아파트에 혼자 지내게 된 한유현은 고등학생일 때처럼 주말마다 부부의 집에 찾아왔다. 그러면 성현제는 또 한유진을 손 하나 까딱 못하게 앉혀 놓고 맛있지만 기상천외한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매번 뭐 씹은 표정으로 밥을 먹곤 하던 한유현은 여름 방학이 되자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유현이 처음 차린 어설픈 밥상 앞에 앉아 한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도련님이 드디어 철이 들었다는 성현제의 칭찬이 달갑잖은 덤처럼 따라왔다.

아침이면 한 침대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로 잠에서 깨고, 날씨 좋은 날이면 손을 잡고 함께 산책하고, 갓 구운 쿠키를 나누어 먹고, 가끔은 여행을 떠나고…. 깊어진 스킨십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일상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성현제의 아버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이좋던 부부가 잠깐의 방황을 거친 끝에 재결합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들은 정말로 이상한 위장 부부였다. 어쩌면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봄이 왔을 때는 약속했던 대로 삼천포에 꽃놀이를 갔다. 일 년 전과 다름없이 흐드러진 벚꽃이 바닷바람에 흩날렸고 영화관의 유리벽 너머로 노을 내리는 바다의 풍경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것처럼 성현제와 한유진의 사랑도 여전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모여 한 해가 되었듯이 그런 한 해 한 해를 쌓아 평생을 함께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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