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특히 조증에 대한 묘사, 폭언, 어머니의 딸에 대한 집착, 학교 폭력(따돌림)등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럼 어머니에게서 죽으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네가 죽어야지 내가 죽을 수 있으니 빨리 내 눈 앞에서 죽으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너는 평생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어떨까. 너는 결국 지저분한 행동거지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거라는 말은?

 

나는 이 모든 말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2023년 3월 17일. 나는 당장 필요한 짐을 캐리어에 쑤셔 넣은 뒤 숄더백 하나를 추가로 매어들고 집을 나왔다. 가는 길에 배가 고파서 햄버거를 사먹었고, 지하철을 타고 꽤 오랜 시간을 이동한 뒤 나의 대피처인 숙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4월 1일까지 머물렀다. (모아둔 돈이 좀 있었던 덕분이다) 숙소 방에서는 취사를 할 수 없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밖에서 무언가를 사먹거나 간편식으로 때우는 나날이 이어졌다. 적어도 아침은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고정이었다. 약 2주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많은 시간을 침대에 드러누워 있거나 카페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보냈다.

 

다만 독립만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거나 한심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내가 좀 더 많은 돈을 모으지 않으면 독립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생각은 어머니에게서 폭언을 듣고 쫓겨나다시피 숙소로 이동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배달음식을 끼니별로 나눠먹고 편의점 할인품목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나는 다음 취직이 이뤄질 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집에서 지내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새로운 거처를 찾으면 되잖아?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삼십 년 가까이 어머니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한 번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취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왜? 왜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어? 그 무자비한 인간에게서 어째서 도망치지 않은 거야?

 

터울 많은 오빠와 언니도 내게 같은 것을 물었다. 왜 너는 독립을 하지 않지? 왜 그 작은 방에 틀어박혀서 나갈 생각도 않고 본가에 들러붙어 있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상대가 친한 친구였더라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사소하고 치졸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통이 편리한 아파트 단지에서 지내며 관리비를 부모님이 대신 내주고 식비와 기타 비용을 부모님에게 얹혀서 해결하는 생활에 안락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어머니의 조현병이 나를 괴롭게 한다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을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는 더러운 핏줄을 이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너는 창녀가 될 테니 지금 여기서 죽어야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너는 결국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머니의 말에 굴복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폭력과 폭언에 굴복하는 대신에 안락한 집의 보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자신의 일인데도 애매하게 추측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폭언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어졌기 때문이다. 폭언과 방임 속에서 자란 나는 따돌림의 좋은 표적이 되었고 집은 나의 상처를 보듬어줄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튼 밥이 있고 잘 자리가 있고 바람을 막아줄 벽과 따뜻한 물이 있었다. 나는 그런 요소들을 막무가내로 끌어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람은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으므로.

 

어머니는 나에게 특히 집착했고, 그 집착을 편애로 해석한 오빠와 언니는 나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아버지는 그저 내가 참고 견디기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타이르는 것 밖에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내했다. 참았다. 죽으라는 말을, 더러운 년이라는 말을, 너는 내가 바라서 낳은 아이라는 말을, 나는 평생에 걸쳐 너를 서포트할 거라는 말을 견뎠다. (어머니는 나를 자신의 분신이자 꿈을 이루어줄 아바타로 보는 동시에 더러운 사기꾼의 피를 이은 예비 범죄자로 보았다) 그러면 언젠가 좋은 일이 찾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오지 않았다.

 

따돌림은 반이 바뀔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직도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나를 죽도록 괴롭혀댔던 가해자의 얼굴도 목소리도 떠올리지 못한다. 다만 끔찍하다 못해 상흔을 남겨버린 몇몇 사건들과, 2학년 때에는 좋은 아이들을 만났었더라는 기억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나에게 집착하며 나를 못살게 굴었다. 조현병 환자 중에는 조증에 들어서면 자신이 나았다고 판단하고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 증상을 악화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 표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증에 들어서면 새벽까지 활동하며 잠을 자는 사람들의 게으름을 탓했고 자신의 명민한 두뇌를 쫓아오지 못하는 아둔한 이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한 번 조증에 들어서면 그 증상이 반년은 넘게 이어졌기에 우리 가족은 모두 이로 인해 고통 받았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다 보면 증상이 완화되지 않을까, 그런 낙관적인 예측을 한 적도 있었다.

 

언니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도권으로 넘어가 십 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 오빠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오랜 시간 본가에서 지냈으나 약 2년 전 새로운 집을 구해 그곳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작년부터 조증이 다시 발병한 어머니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아버지와 나의 몫이 되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가 증오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착하는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 늪에서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3월 31일. 원래대로라면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던 나는 어머니의 병세가 가라앉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서 머무르며 독립할 자리를 찾아보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완곡한 제안을 받았다. 이미 17일의 사건으로 어머니의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선 지금 지내는 숙소를 떠나 좀 더 번화한 시내 인근 게스트 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예약 기한은 일주일. 그 안에 나는 내가 지낼 공간을 찾아야했다.

 

다만 운이 좋았다.

 

요즘은 어플로 얼마든지 부동산 매물을 검색하고 중개사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 내 고등학교 친구 중에는 한때 부동산 중개업자로도 일했던 친구와 나와 비슷한 이유로, 그러나 나보다는 더 이른 시기에 집을 나온 친구가 있었다. 단지 이 세 가지 조건이 준비된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쉬운 상태로 매물을 비교하고 원룸을 구할 수 있었다.

 

나의 행동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문제나 의문이 있을 때 타인이 아니라 친구에게 물어보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솔직히 너무나 큰 장점이다. 한때 친구들과 소원하게 지냈던 나조차 이때에는 자신의 비사교적 행동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친구들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내가 방을 구하는 일은 심리적으로 더 험난했으리라 생각한다.

 

어플에서 내가 원하는 조건을 설정하고 방을 찾았을 때, 마침 금액이 적절한 원룸 매물이 나왔던 것도 적잖은 행운이었다. 4월 초 방을 찾던 당시의 나는 6월이나 7월 쯤에 경기도나 수도권 쪽에 취직하여 경력을 쌓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와 산다는 로드맵을 그려두고 있었는데, 이 계획을 따르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전월세 연단위 계약을 맺기 힘들다는 큰 단점이 존재했다. 설령 연단위 계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후일 직장이 결정되어 상경하게 될 경우에는 보증금이 크게 까일 터였다. (실제로 친구 중 한 명은 그런 상황을 각오하고 집을 뛰쳐나왔다고도 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양호한 상태의 단기임대 매물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점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샤워부스는 벽이 아닌 유리로 되어있었고 바닥은 안쪽 장판이 일어났는지 전체적으로 울룩불룩했고 건물 자체에 도시가스가 연결되어있지 않아 난방이나 요리를 비롯한 모든 일을 전기로 해결해야했다. (나는 다음 달 전기세가 얼마나 나올지 벌써부터 두렵다)

 

그럼에도 평온한 공간이 거기 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오가지 않는 오후 2시, 살짝 어수룩하던 공인중개사가 문을 열고 안쪽을 보여준 순간 나는 ‘이 정도라면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술했다시피 완벽한 점은 없었으나 수압은 제대로 나왔고 벌레가 나오지도 않았으며 책상과 부엌과 옷장과 신발장이 있었다. 그 이후에 조건이 비슷한 원룸을 몇 군데 추가로 둘러보았으나 전체적인 방의 상태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본 방이 가장 양호했다. (이 부분은 공인중개사도 동의했다)

 

그래서 나는 게스트 하우스 예약이 끝나는 4월 8일을 기점으로 계약서를 쓰고 방에 입주하기로 했다. 따로 살 공간을 구할 계획을 세운 것이 4월 1일이고 해당 매물을 본 것이 4월 4일, 가계약금을 입금한 것이 4월 5일이었으니 일정은 상당히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다. 사실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그게 더 곤란했지만.

 

처음에는 고시원을 들어갈 생각도 했었다. 4월 초 기준으로 내가 둘러본 고시원은 총 세 군데였는데, 한 곳은 보증금 20에 월세 38만으로 방에 개인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의 크기가 몹시 협소하여 샤워를 하려면 변기에 앉아서 물을 뿌려야 했다. 고시원까지 들어가는 입구가 낮인데도 어둑하고 벌레가 날아다닌다는 점도 감점요인이었다. 


두 번째 고시원은 빛이 잘 들어오는 대로변에 있었으며 방의 상태도 나쁘지 않아보였으나 남녀공간이 같은 건물의 좌우로만 나누어져 있었고 곳곳에 소음을 항의하는 중이가 붙어있었다. 이쪽은 월세 27만이었다. (보증금은 메모해두지 않았음) 


마지막으로 본 고시원은 여성전용이었는데, 방의 상태는 양호하고 안전성도 나름 보장되어있었으나 결국 마지막 선택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모아둔 돈이 있다면 공용으로 시설을 쓰는 고시원보다 원룸 쪽으로 가는 게 더 낫다고 친구가 조언해준 덕분이었다. (이래서 친구의 조언이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원룸의 상태가 크게 이상하지도 않고 단기임대여서 보증금이나 월세비용이 그리 부담되지 않다는 것도 한몫했다. 가계약금을 입금하고, 계약일 당일에 남은 계약금과 월세를 합쳐 입금하면서, 그리고 이사에 앞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들이면서, 나는 내가 지난 몇 년 간 일을 하면서 모은 돈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때 모아둔 돈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컵라면이나 삼각김밥만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일을 기록해서 남겨두자고 생각한 것은 단순히 내가 이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가족에게서 폭언을 듣고 고통 받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내 상황이 완전히 겹쳐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적는 이 이야기는 그저 기만으로만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호조건을 갖출 수 있었던 나조차, 스스로 마음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남기고 싶었다.

 

탈출을 하려면 그럴 마음을 먹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나는 너무 망설였다. 너무 겁내고 너무 움츠러들어 있었다. 단지 마음만 먹는다면 고통이 고인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도움을 주려는 이들도 도움을 구할 방도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틀어박혀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 폭력과 폭언의 공간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영원히 그곳에서 지낼 수는 없다.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뒤늦게야 그걸 알아차리고 방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지냈던 공간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강압적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괴롭고 슬픈 공간이라면 떠나도 된다. 최소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해볼 수는 있다. 거기서 계속해서 고통 받아도 좋을 인간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리 강인하고 엄격한 장애물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을 계속 옭아맬 수는 없다. 당신은 탈출할 수 있다. 벗어날 수 있다. 믿어도 좋다. 나는 그렇게 믿고 나서야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은 빛이 무척 잘 들어와서, 오후가 되면 석양빛이 가득차는 걸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그 석양빛 속에 어머니의 욕설과 폭언이 뒤섞여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고요할 뿐이다. 나는 그 빛 속에서 공부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요리를 하면서 안정감을 느낀다. 아무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고, 이 공간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이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힘을.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혹은 읽지 못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기록을 남긴다. 또한 언젠가 이 기록을 볼 내가 이런 일도 있었다고 웃어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ikye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