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루.

갑수는 잃어버린 그 하루가 눈물나게 아쉬웠다. 강력 사건이든 흥신이든 초동수사가 제일 중요했다. 하루종일 주인 잃은 핸드폰을 쫓아 정처없이 서울 시내를 헤집고 다니지 않았다면, 박지민의 얕은 꾀에 넘아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박지민의 행방을 알아내 서서히 숨통을 조이고 있었을 테고, 박지민과 동행한다는 그 모호한 남자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실종 의뢰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각이 나온다. 얘는 몇 평짜리 인지, 스케일이 내수용인지 수출용인지, 갑수도 이제 반 관상쟁이가 되어 얼굴 보면 똘끼나 배포가 눈에 훤히 보이는 거였다. 그런데 지민은 참 이상했다. 몽타주만 보면 분명 아무 생각없이 사장 돈 들고 날른 후에 뒷 일은 나도 모르겠소 배 내밀 것 같은 얼굴인데 얄팍하지만 결과는 확실한 교묘한 수를 용케 두었단 말이지.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여 갑수는 뒷맛이 영 께름칙했다.

박지민의 상황을 몰랐다면 미련스럽게 끝까지 제 생각을 몰아갔겠지만 갑수는 지민이 잠깐 머물렀던 골목을 탈탈 털어 그에게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과연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 만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진 않을까.

영악하게 머리를 굴린 건 박지민이 아니라 사실 그 교복쟁이이고, 그 남자가 지민의 도주에 도움을 주고 있다면 그들의 관계는 적어도 우호적이며, 내가 그들의 동행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


"아이고, 사장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친절하고 젠틀한 목소리의 한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갑수는 순식간에 모드를 바꾸었다. 냉철하고 위압감을 주는 형사 같은 얼굴에서 안타까움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 중년 남자의 얼굴로.


"여기 명함."


남자는 갑수에게 다짜고짜 명함을 내밀었다. 갑수는 명함 속 정보를 찬찬히 읽었다. 

제이. 가명을 명함에 새긴 걸 보니 어지간히 믿음이 안 가는 인생을 살아온 모양이다. 분명 호스트빠든 나이트 삐끼든 밤일을 했던 과거가 있겠지. 명함을 받아 든 갑수가 소파위로 힘 없이 엉덩이를 붙였다. 제이는 여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후 책상위에 있던 팜플렛을 들고 와 맞은 편에 앉았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목소리를 높인다. 


"광고 보고 오셨어요? 우린 허위 매물은 취급 안 하니까,"

"사장님."


갑수는 제이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떨구었다. 힘없는 목소리가 푸르죽죽한 입술을 뚫고 나온다. 갑수에게 팜플렛을 내밀던 제이의 손이 멈췄다. 사무실을 찾아온 손님의 침통한 얼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아침 첫 장사부터 공쳤다는 생각이 든 건 무릇 제이의 인성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저 좀 도와주세요, 사장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이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커피를 타던 여직원이 저를 돌아본다. 제이는 여차하면 쫓아낼 생각으로 팜플렛을 테이블로 던진 후 팔짱을 꼈다. 범죄자나 부랑자를 상대하는 건 도가 튼 제이였다.


"무슨 말이세요?"

"우리 지민이."


갑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이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의 이름이 나온 이상 더 들어보고 말고 할 여지도 없었다. 제이는 지민에 대해 입을 열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니 씨, 여기 소금 좀 뿌려요."


하지만 책상으로 향하던 제이의 발목을 잡은 건 갑수의 그 다음 말이었다.


"우리 조카 지민이, 여기 왔었죠."


순간 제이는 멈춘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민? 조카?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칙칙한 점퍼의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우리 조카 지민이, 라고 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울먹이듯 떨렸던 것 같기도 했다.








썬더버드

Thunderbird






13. Let me Be me


왜 강원도인지는 사실 지민도 몰랐다. 그냥 지민에게 강원도는 막연하게 먼 곳으로 느껴져서 그랬을 수도 있다. 사실 거리로 따지자면 부산이 훨 멀지만 왠지 부산은 익숙했다. 낯선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분명 지배적이었다. 박 충동. 제이가 봤다면 분명 지민에겐 별명이 하나 더 늘었을 것이다. 

어느덧 말갛게 해가 떠오른 아침이었다. 거의 다 왔어, 지민은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정국에게 말했다. 새벽에 휴게소에서 출발할때만 해도 호기롭게 자신이 운전 하겠다며 차키를 받았던 정국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지민에게 다시 키를 넘겼다. 아침 해가 꼴딱 넘어오기 무섭게 정국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대던 탓이다.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자리를 바꿨다. 처음엔 별로 신경쓰지 않던 정국도 발신자를 확인하고 난 후 부턴 입을 꾹 다물고 도통 열지 않았다.


"누군데?"


지민은 곁눈으로 정국을 훔쳐보다 관심 없는 척 무심하게 물었다. 하지만 어느 포인트에서 심사가 뒤틀린 건지 정국은 뚫어져라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정국이 묘하게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장면을 종종 봤던 것 같다.


"집이야?"


키패드를 몇 번 톡톡 찍어 누르던 정국은 이내 핸드폰을 주머니로 찔러 넣었다. 지민의 질문에 성의없이 고개만 내젓는다. 뭐가 불만이길래 입술을 또 댓 발 내밀고 저러는 거래? 뭐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눈만 질끈 감고 있는 정국의 옆 모습을 흘겨보던 지민은 액셀을 꾹 밟다가 인상을 썼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아까부터 자꾸만 신경쓰이던 부위가 있었다. 


"야이씨 엉덩이 진짜!"


결국 꼴사납게 엉덩이를 시트 위에 실룩거리며 파르르 열을 냈다. 웬만하면 입 밖으로 안 꺼내려고 했는데 페달 밟을 때마다 엄습하는 쓰라림에 저도 모르게 신경질이 났다. 그제야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허이고. 이제야 신경쓰이시는 모양?


"많이 아파?"

"어 졸라 아파."

"어떡하지? 약 발라줄까?"

"야 됐어, 너한테 또 뭔 짓을 당하려고?"


전정국의 약 발라줄까? 에서 너무 진정성이 느껴져 등골이 서늘했다. 어제의 행위들이 되풀이 되는 생각만 하면 정말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내가 뭔 짓을 한다고 그래? 내가 짐승이야?"

"그럼 어제 네가 인간이었냐?"

"누가 보면 나 혼자 좋아 죽은 줄 알겠네."


좋은 건 좋은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지. 쏘아붙이려던 지민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아픈 유세 부리려다 좋았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건 너무 우스우니까. 사실 좋니 어쩌니 따질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모든 순간이 너무나 거짓말처럼 흘러가버렸으니. 아찔했던 순간들을 비집고 흘러나온 감정의 파편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흥분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하긴. 놀랍기도 하지. 절대 들어올리 없다고 여겼던 게 어느 순간 몸 안으로 쑥 들어왔잖아. 안 될줄 알았다고 진짜로. 정말이지 인체의 신비란. 그리고 분명 기분이 더러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발가락 끝이 배배 꼬이더니 저 좆고딩 허리에 매달려서...


"근데 왜 강원도야?"


별안간 정국의 질문이 뚝 떨어졌다. 지민이 눈에 힘을 주며 되물었다.


"뭐? 강원도가 왜?"

"왜 강원도로 가자 그랬냐고."

"멀잖아. 부산이랑."

"어?"


정국의 얼굴이 묘하게 변한다. 

'왜? 나랑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물으려던 정국은 입술을 붙인 채 픽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냈다. 이 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저기 줄줄 흘리고 다닌다는 걸 알까. 아주 귀여워서 깨물어 터트려주고 싶어지게.

질문을 속으로 삭이고 기분 좋은 자만에 빠진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는 어떤 감정들이 존재하곤 하니까.





🚗💨





정국과 지민을 바라보는 횟집 사장님의 얼굴이 영 수상찮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 아침 꼭두새벽부터 물회를 먹겠다고 찾아온 시퍼렇게 젊은 두 사내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보이진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 눈빛에도 정국과 지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며칠만에 뱃속을 채우는 곡기다운 곡기에 정신이 팔려버린 둘은 경쟁하듯 빠르게 그릇을 비웠다. 소면에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먹고 나서야 결국 지민은 식당의 구들장 위로 드러누웠다.


"와, 난 더 못 먹어."

"다 먹어놓고."


정국이 입을 닦으며 대꾸했다. 배가 부르자 그제야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좌식 테이블 옆 벽을 따라 길게 유리창이 뚫려있다. 동해바다 끝단쯤에 맞물려있는 이 외딴 식당의 마당 너머로 백사장이 이어져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가 보인다. 제법 분위기있을 법도 하지만 살벌하게 철창이 펼쳐진 풍경이 영 무드를 깬다. 


"저 철창은 뭐지? 38선인가?"

"뭐?"

"북한인 거 아니냐고."


정국의 말에 지민이 발딱 몸을 일으키더니 창 밖을 살피다 혀를 찼다.


"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북한이 바다 건너 있냐?"

"그럼 저게 뭔데? 형은 알아?"

"무식하긴 쯧쯧."


지민은 대답 대신 정국을 한심한 듯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것 봐. 지도 모르면서 잘난척이야. 정국이 속으로 지민을 힐난하며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벗어뒀던 슬리퍼에 발을 구겨넣고 카운터로 향한다. 지민이 주머니에 현금을 꺼내며 식당 사장에게 곰살맞게 물었다.


"사장님. 조오기 철창은 뭐예요?"


포스기를 두드리며 지민을 느리게 훑던 사장이 대답했다. "바로 위에 군부대가 있거든요."

사장의 대답에 지민이 고개를 주억거릴 동안 정국은 카운터 옆 커피자판기에서 믹스커피 두 잔을 뽑았다. 지민에게 거스름돈을 건네던 사장이 커피를 호로록 들이키는 정국을 힐끔 바라보더니 지민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 젊은 손님들은 다른동네에서 왔나 보네."

"왜요?"

"아니 그냥..."


중년의 사장이 다시 지민을 가늘게 뜬 눈으로 수상한 듯 훑는다. 잔돈을 받고 식당을 나가려던 지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정국과 지민을 번갈아보던 사장이 미간을 좁힌다. 이질적인 광경이다. 저 화려한 옷차림하며 식당 앞마당에 떡하니 주차되어 있는 정신 사나운 시뻘건 자동차하며, 이런 강원도 깡촌 구석에서 쉬이 볼 법한 장면들은 확실히 아니다.


"아, 사장님. 혹시 이 근처에 호텔이나 리조트같은 거 없어요?"

"그런 곳은 시내 나가야 있지."

"이 동네는요?"

"여긴 민박집밖에 없어요. 아니면 외박 군인들이 묵는 여관방이나."

"럭셔리하고는 담을 쌓을 팔잔가보다."


지민이 푸념을 늘어놓더니 수고하세요, 대충 인사를 휙 던지고 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춘다. 먼저 식당을 나선 정국의 뒷덜미를 붙잡고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뭐야?"


저를 보며 인상을 쓰는 정국을 붙들고 다시 사장을 돌아보던 지민이 다정하게 물었다.


"근데 사장님, 혹시 우리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여요?"


지민의 물음에 사장이 다시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러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민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한 사람들이라기보단, 그냥 젊은이들이 새벽부터 강원도 구석까지 찾아온 게 신기해서,"

"우리 간첩이에요."

"...에?"

"아니면 탈영병이든지. 여튼 존나 이상한 애들 맞아요."

"아니, 이게 무슨,"

"많이 파세요."


청와대 폭파시키러 가자 자기야, 정국의 손목을 움켜 쥔 지민이 종알대며 식당을 나섰다. 얼결에 지민을 따라 나온 정국이 인상을 구겼다.


"뭔 헛소리야? 청와대를 왜 폭파시켜?"

"간첩은 그런 일 하는 거 아냐?"

"형은 영화도 안 봤어? 간첩은 대놓고 그런 짓 안 해."

"그럼?"

"그 뭐지, 정보. 그런 거 몰래 캐내서 북한에 보내고 그러잖아."

"몰랐지."

"시발 뭔 상관이야. 진짜 간첩도 아닌데."


정국은 혹여나 넘칠까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커피를 지민에게 건네고 마시던 커피잔을 훌쩍 꺾어 단숨에 들이켰다. 종이컵을 손에 넣어 와작 구기더니 식당 구석 쓰레기통에 휙 던진다.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만 어딘가 염세적이다. 긍정과는 담 쌓은 인간처럼 보인다.


"가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정국이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지민이 운전석에 걸터 앉더니 컵홀더에 세워두었던 핑크색 틴티드 선글라스를 코 끝에 걸치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청와대."

"미친 소리는 1절만."

"아니면 섹스."

"1절만 하라고 했지."

"청와대 폭파랑 섹스중에 뭐가 더 미친 소리야?"

"청와대."

"그럼 답 나왔잖아."

"개소리를 논리적으로 하는 재주가 있단 말야."


지민이 입에 물고 있던 종이컵을 컵홀더로 끼워 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정국이 지민의 목덜미를 끌어 당긴 후 입술을 부딪혔다. 정국의 얼굴이 온통 핑크색으로 보였다. 싸구려라 그런지 색깔 왜곡이 너무 심하네.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을때까지 정국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지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키스하는 내내 감을 생각이 없어 보여 지민도 눈을 감지 않았다. 이내 춥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어낸 정국이 혀로 입술을 핥아 올린다. 지민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고 시동을 걸었다. 짜증나게 구는데 짜증내기 싫다. 


"자꾸 이럴 거야?"

"이러는 게 어떤 건데?"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 거냐고."

"떡쳤으면 게임 오바지."

"촌스러운 애새끼."


고물차가 요란스럽게 식당의 앞 마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근데 형."

"왜."

"형 입에서 마늘냄새 엄청 나."

"넌 마늘 얹고 커피."


정국이 손바닥을 입에 가져다 대고 길게 숨을 뱉어내다 다시 코로 흡입한다. 지민의 말이 맞았다. 정국은 제 입냄새에 코를 쥐어 잡고 인상을 썼다.





🚗💨





지민의 큰아버지. 제이는 지민의 가족사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민이나 제이나 서로에 대해 함구한 건 피차 마찬가지였기에 갑자기 나타나 지민을 찾는 큰아버지라는 사람의 정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라뇨? 그게 무슨 소리세요?"

"지민이가 재희씨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어요."


남자는 제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제이는 사회에 나온 이후로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명을 밝힌 적이 없었다. 자신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지민 포함 극소수였다. 심지어 지민조차 자신의 본명을 잘 부르지 않았다. 그 말은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는 이 남자가 지민과 가까운 사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쪽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민이 어딨는지 몰라요."

"지민이 꼭 찾아야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이러셔봤자 저는 아는 게 없다고요."

"지민이는 지금 도움이 필요해요."


직원을 돌아보며 인상을 쓰던 제이의 낯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되묻는 제이를 바라보는 갑수의 눈빛이 슬픔에 젖어있었다.


"지민이 지금 위험한 상황인 거 다 압니다. 나쁜 놈들이 우리 지민이 쫓고있다는 것도 알고요. 제가 유일한 혈육입니다. 도와줘야 해요."

"그런 얘기라면 저는 모르겠고요."


제이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갑수는 점점 틈새가 벌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본명을 알고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갑수는 쐐기를 박고 싶었다. 


"혹시 남자아이 한 명과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죠?"


남자는 지민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제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했지만 그 대답에 갑수는 무언가를 확신 할 수 있었다. 갑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눈물을 쥐어짜냈다.


"이대로 두면 둘 다 위험해져요."

"잠시만요."


제이는 뒤돌아섰다. 이 남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큰아버지라는 이 남자는 지민과 그 꼬맹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지민에게 일행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애초에 이 남자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왜 둘 다 위험해 진다는 건가요?"

"그 남자애 미성년자예요. 부모가 찾고 있어요."

"......"


제이는 갑갑함에 말 없이 재킷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갑수는 여관 주인에게 들었던 정보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미성년자라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필하기로 했다. 


"네, 교복. 교복을 입고 있었을 거예요."

"교복이요?"


순간 제이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 그 남자애는 지민과 같은 디자인의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비웃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희씨도 보셨으니 아실테죠?"


그러고보니 남자의 말투가 묘하게 취조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제야 제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인지 신원을 확신 할 수도 없는 남자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민이 자신의 얘기를 모두 할 정도로 믿고 있는 유일한 혈육에게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따지고보면 이상한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그럴듯한 정보 몇 개에 홀려 지민을 위험하게 만들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설령 이 남자가 진짜 큰아버지라고 해도 지민이 원하지 않는 이상 제이는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어르신, 근데 어떡하죠. 저는 정말 지민이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이번엔 제이의 차례였다. 최대한 안타까운 낯으로 속상한 듯 말했다. 비통한 얼굴로 한참이나 눈물을 쥐어짜내던 갑수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분명 이 남자는 눈치를 챈 것이다. 


"정말 모르시나요?"

"네. 어떡하죠. 너무 죄송합니다."


더 이상의 연기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뒷짐을 지고 사무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제이에게 물었다.


"여기 사업장 신고는 된 곳인가요?"

"그럼요."

"중고 말고 대포도 취급 하죠?"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구린 게 많으셔서 불이익을 당했을 때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으시겠군요."


제이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펴 가세요, 지민이 큰아버님."


갑수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제이는 자신이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제이와의 대화를 통해 갑수는 박지민이 이 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끝까지 이 남자를 속여 지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수확이 있었으니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기 무섭게 문 너머로 재희의 욕지기가 쏟아졌다. 재희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건물을 나온 갑수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런 식의 일처리는 평소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면 자신의 기호같은 건 잠시 뒤로 물려 둘 수 있을 정도의 융통성은 있었다.


 



🚗💨









"하여튼 융통성 없기는."


정국은 혀를 쯧 찼다. 도대체 이 동네만 몇 바퀴째 도는 건지 모르겠다. 가만 입 다물고 지민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결국 짜증 섞인 말이 터진다.


"아까 그 아저씨가 이 동네엔 없다잖아."

"구린 곳은 이제 싫어."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고작 여관에서 쪽잠 자자고 사장 돈 훔쳐 토낀 줄 알아?"

"다 똑같아. 아무데나 가자 좀."

"시발, 싫다고!"

"시발 아무데나 가서 좀 하자고!"

"하긴 뭘 해? 발정 났냐?"

"어. 발정 났다. 너랑 존나 하고 싶어서 발정 났다."

"너? 확 들이 받아버려?"

"한 번 하고 들이받어. 곱게 죽어줄게."

"아 더워. 시발 에어콘."

"세게 좀 틀어봐."

"세게 튼 거야."


미친놈 널뛰기 하는 것 마냥 대화가 여기저기 튀었다. 날씨는 너무 더웠고 에어콘은 영 제 구실을 못했으며 정국은 섹스가 하고 싶었고 지민은 하기 싫은 척 했다. 열이 올라 땀이 나기 시작할 때 쯤 둘은 제이의 당부를 못 들은 척 하고 싶었다.


"형, 뚜껑 열자."

"일단 열면 게임 끝인 거 알지."

"이 차에 뭘 더 바라?"

 

지민은 루프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루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차에 뭘 더 바라냐니까?"


정국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지민은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지민을 따라 차에서 내린 정국이 함께 루프를 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손 대지 않은 듯 묵직한 루프가 뻑뻑하게 밀렸다. 반 쯤 열렸을 때 우당탕 소리를 내며 폴딩이 순식간에 접혔다. 애를 먹이던 루프가 활짝 열리는 순간 둘은 직감했다. 다시는 이 차의 뚜껑을 닫을 수 없겠구나, 라고. 지민은 차를 바라보며 허망하게 물었다.


"이거 부러지는 소리 맞지?"

"응. 아작나는 소리 나던데."

"이제 진짜 못 닫겠네."

"알고 있었잖아."

"좆 될 거 알고 있었다고 해서 좆 되는 게 괜찮은 건 아니지."

"문 안 닫힌다고 망한 것도 아니지."

"저질러 버린 이상 좆 된 거 맞아."

"꼰대같이 구네."

"꼬온대?"

"난 내가 좋아서 지른 건 후회 안 해."

"누군 한대?"

"후회 하는 것 같아서."

"...웃기네."


말끝을 흐렸지만 지민은 정말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늘 예측불가이며 종종 희극을 가장한 비극의 이면은 우리를 배신한다. 다행인 건 한낱 루프 따위가 지민을 후회하게 만들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다. 소중한 것과 필요한 것은 분명 그 무게가 다르다. 자동차 부품은 필요한 것이지 소중한 건 아니다. 

소중한 것. 만약 지민이 후회할 일이 생긴다면 바로 그 소중한 존재 때문일 것이다.


"경치 좋네."


정국은 자동차의 사소한 문제같은 건 그새 잊어버린 듯 한가로이 길 끝에 섰다. 낮은 턱 아래 경사진 언덕엔 마른 풀이 자라있고 언덕 아래로 모래사장이 맞닿아있다. 정국의 말과는 달리 사실 경치가 썩 좋진 않았다. 경치 좋은 바다가 보이는 곳은 이미 리조트나 고급 호텔이 들어서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후미진 이차선 도로일 뿐이다. 정국은 멀찍이 서있던 지민을 제 옆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곤 음미하듯 지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내 허리를 끌어 안고 뒷목에 입술을 묻는다. 지민은 정국의 애무를 받으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섹슈얼하지만 성욕과는 별개의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정국은 마치 지민의 냄새가 자신의 숨인 것처럼, 지민의 살이 자신의 양식인 것처럼, 지민의 평화가 자신의 안식인 것처럼 굴었다.


"하고 싶어."


지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국은 지민을 끌어 안고 아이처럼 졸랐다. 지민이 핀잔하지 않은 건 정국의 말이 질 나쁜 농담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어, 지민아."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차이. 어쩌면 정국은 아직 눈치채지 못 한 것 일수도 있다. 


"형 때문에 내가 자꾸 바뀌는 거 알아?"

"......"

"나 원래 운명같은 거 안 믿거든."


지민 역시 스스로를 운명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삶을 견뎌내는 이들에겐 때때로 운명보단 자발적 불행이 더욱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운명은 또 다른 낙인일 뿐이다.


"근데 형을 보면 운명이라는 게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네 착각이야."

"형, 내가 그 증거잖아."

"유치해, 이런 얘기."

"형이랑 있으면 내가 보여. 진짜 나를 사는 것 같아."


지민은 필요한 것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왔다. 소중한 것의 부재는 느끼지도 못했다. 아예 맛보지 못했기에 갈증조차 허락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정국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 공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해."

"왜? 난 하루종일 수백번도 더 할 수 있어."

"아니, 충분해."

"그럼 사랑한다고 해도 돼?"

"헛소리."

"그럼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돼?"

"사춘기."

"그거 벌써 지났는데?"

"중2병."

"지났다고."

"발정기."

"사랑한다니까."

"미친놈."

"형이랑 섹스하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시발, 차라리 섹스를 하자고 해."

"근데 섹스도 하긴 할 거야."


정국의 얼굴이 답답함에 일그러졌다. 제 맘속에 있는 말을 백분의 일도 채 꺼내지 못한 듯 조급하게 굴었다. 어조가 급해지고 발음이 샌다. 속을 꺼내 보여줄 수 없음에 괴로워했다. 


"형이 자꾸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 같아서 불안해."

"......"

"너도 알잖아. 너도 날 보면 느끼잖아."


아무리 마음을 닫아도 정국이 진심이 들린다. 지민은 정국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왜 유독 전정국에게만 덜 갈린 사포처럼 까칠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다. 기어코 너는 이런 존재가 되려고 나와 만난 거지. 하지만 넌 알아야 돼. 나는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걸.


"전정국. 난 너의 각성제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야. 너의 변화가 나 때문이었다고 해도 그건 네 이야기일 뿐이야."

"...왜 그런식으로 말 해?"

"너 혼자 운명이고 너 혼자 특별하잖아. 난 너 특별하지 않아."


정국의 얼굴에 날이 선다. 동시에 느껴지는 절망같은 감정은 드라마틱하게 정국의 표정을 바꾼다. 정국이 한 걸음 다가오는 그때 정국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지민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국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왔다면 편협하고 가난한 제 속내를 들켜버렸을지도 모른다.


"받아."

"안 받아."


지민은 대꾸 대신 정국의 주머니에 꽂힌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지민의 얼굴이 굳어진다. 어제부터 계속 걸려오던 전화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게 된 것 같다. 정국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차로 돌아온 지민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팔짱을 꼈다.

갑자기 모든 게 싫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정국과 몰랐던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민은 이런 감정이 낯설다. 

그때 정국이 차 문을 열고 몸을 쑥 들이밀었다. 치켜뜬 정국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와."

"뭐?"

"나랑 싸워."

"허, 미쳤냐?"


생각도 못한 정국의 말에 지민은 실소가 터졌다. 반면 정국의 생각은 확고한 듯 했다. 운전석 문을 열고 지민을 끌어내렸다.


"시발, 진짜 미쳤냐 너?"

"나만 운명이라며. 그런 좆같은 소리를 듣고 누가 가만 있어?"

"뭐래 미친놈이. 돌았냐 진짜?"


우악스럽게 팔을 당기는 정국의 힘을 이기지못한 지민이 결국 차에서 내렸다. 셔츠의 단추가 뜯어져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정국에게 붙들린 팔목이 금방 붉게 물든다. 지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국을 노려봤다.

성큼성큼 다가온 정국이 지민의 어깨를 밀쳤다. 차체에 등을 부딪친 지민이 다시 실소를 터뜨린다.


"진짜 해보자는 거지."

"해. 다이다이 떠."

"좆밥 새끼."

"시발 양아치 주제에 말은 존나 많죠."


정국은 마치 다른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형은 나의 운명이라는 말을 하던 정국의 모습이 불과 5분 전이었는다는 사실에 지민은 벌써 현실감이 없었다. 


"너 이따위로 구는 거 후회 안 하지."

"안 해. 너한테 더 바라는 것도 없어."


정국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민이 주먹을 날렸다. 퍽, 주먹이 부딪히는 살벌한 소리가 나고 정국의 고개가 돌아간 채 멈췄다. 길게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정국이 다시 지민을 노려본다.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입을 열었다.


"내 차례야."


바닷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불었다. 바다 때문인지, 지민이 준 상처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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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자 <-'연성'으로 쓰기에 한없이 로맨틱하고 무대책 행복회로 단어지만 1차가 해버린 까닭에 저도 모르게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해버린거죠....팬픽에서도 못 쓰는 과다설정 상황 😇

그나저나 한 달만이네요..돌아왔는데 계절이 바뀌어있다니...너무 오랜만이라 까먹으신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ㅠ🤧

키쏘포타 다시 정상영업 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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