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레오] Pretender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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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레오] Pretender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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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요?”

창밖으로 맞은편 타워의 항공등이 반짝였다. 모두가 퇴근한 라이브라 사무실. 스티븐 씨를 도와 서류 정리라도 하려던 참이었다.

“그래. 본가.”

커피를 마시던 스티븐 씨가 걱정스레 미소 짓는다.

“아버지가 소년이 보고 싶다고 성화시라.”

“아버지.”

“이틀 후에 본가 들어가야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때, 괜찮다면 같이 가줬으면…….”

스티븐 씨답지 않게 흐지부지 흐린 말끝.

대답하지 못한 건 머리가 느리게 돌아서였다. 서류를 집어 들던 자세 그대로 멈춰서 스티븐 씨의 말을 되새기기 바빴다. 본가, 아버지,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

“미안, 곤란하게 했나 보네.”

어쩔 줄 모르던 스티븐 씨가 눈썹을 내려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뇨! 곤란해서 그런 게 아니라요…….”

그거, 혹시, 상견례 같은 거예요?

“뭐?”

놀라서 물은 말에 스티븐 씨는 나보다도 더 놀란 것 같았다. 커피가 찰랑찰랑하게 든 머그잔이 기우뚱 기우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커피가 쏟아지기 직전에 간신히 머그잔을 바로 세운다.

“아니, 아냐. 지금 건 그런 건 아니고.”

“아, 그렇구나…….”

“10년 넘게 독신이던 아들한테 애인이 생겼다는 게 아버지 딴에는 신기하신 모양이라. 전부터 어떻게든 소년이 보고 싶다고 성화셨어. 그래서 그냥, 얼굴만 볼 겸.”

스티븐 씨답지 않게 진땀을 뻘뻘 빼며 설명했다.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는……?”

“……응. 이번에는.”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고 스티븐 씨는 도망치듯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상견례……. 하자고 하면 해줄 건가?”

자기가 물어놓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곧게 뻗은 손가락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두근두근 떨리고 있었다. 결 좋은 반곱슬 머리카락 사이로 수줍게 드러난 귓바퀴가 눈동자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어 뒤늦게 온몸에 열이 올랐다.

“슷, 스티, 스티븐 씨가 묻고 부끄러워하지 말아 주세요.”

“미안……. 막상 상상하니까 부끄럽네.”

“뭐예요. 저랑 결혼하기 싫어요?”

물은 순간 부끄러워져서 나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헤르사렘즈 롯의 야경이 양탄자 위로 쏟아진다.

“……좋아.”

숨소리 같은 대답.

“레오는?”

이럴 때는 꼭 이름으로 부르는 치사한 사람.

맥박이 목까지 올라와서 목소리를 내는 데 한참이 걸렸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두근두근 떨릴 스티븐 씨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도, 좋아요.”

“……고마워.”

“아뇨……. 저야말로.”

서로의 혈관이 뛰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긴장감. 창문으로 스티븐 씨가 일어나는 모습이 비쳤다. 감정을 고스란히 실은 걸음걸이로 다가와 뒤에서 소중하게 붙들어 안는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소년 앞에서는 자꾸 말이 사라져. 감정을 전할 방법이 안아주는 것 말고는 떠오르질 않네.”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 스티븐 씨의 목에 팔을 둘렀다. 맞닿은 체온이 꼭 터져나갈 듯했다.


***


스티븐 씨의 아버지는 도란도란한 파티를 좋아하셔서 반년에 한 번 꼴로 작은 홈 파티를 개최하신단다. 파티라고 해봤자 아버지의 친구분들만 참석하는 정도인데, 스티븐 씨가 나와 함께 간다고 했더니 얼마나 들뜨셨으면 주변에 어마어마한 양의 초대장을 돌리셨다고.

“너무 부담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스티븐 씨 역시 들떠있었다. 파티에 입고 갈 정장이며 구두, 사 오라고 부탁받았다는 포도주를 고르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기뻐하는데 사랑과 전쟁 같은 전개가 펼쳐지면 어쩌나, 걱정되어 물은 말.

“절 싫어하시면 어쩌죠?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시면.”

스티븐 씨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건너려던 횡단보도의 신호가 점멸한다. 비에 젖은 헤르사렘즈 롯의 도로 위로 불빛이 번졌다.

“당신 평생소원이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거라고 하신 분이야. 게다가 소년 같은 사람인데, 마음에 안 드실 리가 없지.”

사르륵사르륵 내리는 비가 우산을 두드린다. 짐을 전부 스티븐 씨가 들고 있어서 그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이려는데.

“소년은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스티븐 씨와 눈이 마주쳤다.

습기를 듬뿍 머금은 공기 너머로 붉은 눈이 일렁인다. 마치 폭우처럼 쏟아지는, 오로지 날 향한 믿음과 애정.

“이러니까요.”

“응?”

“스티븐 씨를 너무 사랑하니까.”

신호가 바뀌었으나 스티븐 씨도 나도 건널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티븐 씨의 가족분들한테 엄청 잘 보이고 싶단 말이에요.”

다시 신호가 꺼지기 전에 스티븐 씨의 팔을 잡아끌었다. 말은 호기로웠으나 마음은 이미 흐르르 녹아있었다. 마치 사랑을 기다린 사람처럼, 지금의 스티븐 씨는 너무 달콤해서 처음에 거절당한 것도, 스티븐 씨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그분도, 꼭 먼 나라 얘기처럼 아득해져 버렸다.

“레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스티븐 씨는 고장 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좋아서, 스티븐 씨의 팔에 바짝 달라붙어 뒤늦게 시동이 걸린 경주마처럼 마구마구 물었다.

“어머니는 뭘 좋아하세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데요? 파티에 오시는 분들, 다 스티븐 씨를 잘 아는 분들인 거죠?”

비가 오는 거리. 지나가는 사람들. 내게 보폭을 맞춰 걸으며 스티븐 씨는 차근차근 답해주었다.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셔. 예전부터 취미는 어머니를, 겉모습은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 성격이나 생각도 아버지의 소싯적과 비슷하다던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버지가 나보다 성격이 더 나쁘셨다더군. 알아주는 개구쟁이셨대. 파티에 가면 만날 사람들, 그러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나를 쭉 봐온 분들이 많지.”

스티븐 씨의 가정교사였던 분. 어머니의 오랜 친구로 스티븐 씨에게 커피의 맛을 전파하셨다는 분. 빗소리에 섞이는 스티븐 씨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상상해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어린 시절의 스티븐 씨. 수학은 싫어서 도망가려 했던 스티븐 씨. 처음 커피를 마셨을 때는 써서 뱉어버렸는데, 어쩐지 그 맛이 계속 떠올라서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커피를 마셔버린 스티븐 씨.

상상하다 보니, 이제부터 만날 사람들이 정말로 스티븐 씨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 닿고 잘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하늘로 치솟아, 스타페이즈 가문 전용기에 올랐을 때는 긴장 반 흥분 반으로 심정지가 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괜찮은가? 레오.”

그렇게 걱정되면 안 가도 된다는 스티븐 씨에게는 꼭 갈 거라고 고집을 부렸지만. 평소에는 입지 않는 고급 정장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스티븐 씨 때문에 자꾸 딸꾹질이 났다. 몇 번이나 숨을 참고 손이 새빨개질 때까지 마사지했다.

헤르사렘즈 롯과는 달리 새파란 창공. 여전히 아름다운 바깥세상.

“그리고……. 미리 말해둬야 할 게 하나 있는데.”

웅장한 저택이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 스티븐 씨가 조용히 귀띔했다.

“아버지가 그녀도 초대하신 모양이야.”

기이한 체험이었다. 긴장과 흥분은 순식간에 가시고 스티븐 씨의 절대영도에 걸린 것 마냥 머리가 차가워졌다.

“얼마 만에 보시는 거예요?”

“10년도 넘었지. 헤어진 후로는 안 봤으니까.”

보기가 괴로웠어. 말하는 스티븐 씨는 예상과 달리 차분했다. 무릎 위에 팔을 짚어 턱을 괸 채였다.

“지금도 그러세요?”

“아니.”

“긴장되진 않고요?”

“전혀.”

동요라고는 없는 눈으로 나를 마주하면서, 짓궂은 어린애처럼 씩 웃는다.

“소년은? 긴장되나? 아니면, 화가 났나.”

“아뇨.”

오히려 좀 들뜬 것 같다. 그렇게 말했더니 스티븐 씨는 녹아버릴 것처럼 웃었다. 덜덜 떨리며 바쁘게 착륙을 준비하는 전용기 안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부딪친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할 거야.”

“좋네요. 저 그 옆에서 으스대고 있어도 돼요?”

“의외로 취향이 나쁜걸?”

“스티븐 씨 때문이에요. 말하진 않았지만 꽤 화가 났었거든요. 어쨌거나 스티븐 씨가 아팠잖아요.”

“걱정 끼쳤나.”

사과하듯 말하며 턱을 괴지 않은 손을 내 손 위에 포갠다. 스티븐 씨는 뼈대가 곧아서 손가락이 예쁘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손바닥을 돌려 단단하고 힘 있는 큰손을 맞잡았다.

“스티븐 씨는 남한테 걱정 안 끼치시니까, 오히려 걱정할 수 있는 게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멋져도 너무 멋진데.”

내 손등을 거의 덮는 크기의 손. 손가락으로 내 손등의 뼈를 더듬어보며 스티븐 씨는 낮게 웃었다.


***


“레오나르도 군? 드디어 만나는군. 정말 반갑네, 반가워.”

스티븐 씨의 아버지는 정말로 스티븐 씨와 판박이였다. 반곱슬이지만 결 좋은 머리카락과 싱긋 웃을 때의 눈 모양, 말을 끊었다가 잇는 방식. 중후하고도 나른하게 배어 나오는 섹시함을 보며 나이가 든 스티븐 씨의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다.

“자, 좀 들게나. 술은 즐기지 않는다지? 자네가 좋아할 만한 주스를 몇 가지 구비해뒀는데 부디 마음에 들기를 바라네.”

“네, 맛있습니다. 석류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하트 모양 얼음이 담긴 석류 주스 잔을 찰랑찰랑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스티븐 씨는 아버님을 많이 닮았나 봐요. 센스 좋게 딱 맞는 걸 준비하는 게요.”

“허허. 녀석이 그렇단 말이지?”

놀리는 말투도 스티븐 씨와 똑같다. 내 뒤에서 다른 분들께 인사드리던 스티븐 씨가 습관처럼 내 손을 잡는 걸 바라보는, 사냥감을 찾은 매 같은 눈빛도.

“걱정했다네. 다정함이라고는 없는 녀석이라 남의 집 귀한 자식 마음고생시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주어 없는 말이었지만 누군가를 떠올리며 말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미묘한 아버님의 눈빛이 저 먼 곳, 나도 스티븐 씨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다.

“레오나르도 군, 스티븐과 함께 있으면 행복한가?”

“네. 정말 많이요.”

“그런가.”

처음에는 안도, 조금 후에는 미안함, 마지막에는 기쁨으로 바뀐 미소로 아버님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스티븐 씨의 손을 잠시 놓고 아버님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제 옆에서 스티븐 씨도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그래 주면 고맙겠네. 레오나르도 군, 부디 아들 녀석을 잘 부탁하네.”

“네!”

겉보기에는 비슷했던 손은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 아버님의 손이 스티븐 씨의 손보다 더 용맹한 느낌이다. 인자하던 아버님께서 돌연 풋, 웃으셔서 뒤돌아보니 스티븐 씨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 닳겠어요.”

“이제 한 번 잡아봤다. 녀석, 그렇게 좋으냐?”

“네. 그러니까 그만 놓아주세요. 제 손이 시려서요.”

“얼씨구. 레오나르도 군 앞에서는 그런 어리광도 피울 줄 아는구나.”

“아버지.”

그만하시라는 듯 찌푸린 미간과 당당하게 내민 손. 사이좋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게 보여 자꾸 목 안이 간질거린다. 아버님은 알겠다며 내 손을 스티븐 씨의 손 위에 올려주시고는 즐겁게 자리를 피해주셨다.

“미안해. 평소에는 저렇게까지 들뜨시는 분이 아닌데.”

스티븐 씨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잡고는 사람들을 지나쳐 테라스로 나갔다.

“소년이 와서 어지간히도 좋으셨나 봐. 술도 평소보다 많이 드시고.”

“괜찮아요. 즐거웠는데요.”

“그랬다니 다행이네.”

테라스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했다. 포근한 갈색 조명등이 들어온 실내는 어둠 속에서 바라보면 더욱 단란해 보인다. 스티븐 씨는 지쳤다며 크게 한숨 쉬고는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비웠다.

“이래서 집에서 하는 파티는 힘들단 말이지.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기만 해도 진이 다 빠져.”

“그래도 잘하시던데요? 라이브라랑은 다른 모습이라 신선했어요.”

“그래?”

대리석으로 된 난간에 기대며 스티븐 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라이브라에서는 친한 동료들이랑 일하는 비즈니스 맨 같았는데 여기서는 이래저래 예쁨 받는 부잣집 도련님 같았달까요? 귀찮아하면서도 거절하진 못하는 게 귀여웠어요.”

“자기보다 13살이나 많은 사람한테 귀엽다고 하는 거야?”

“뭐 어때요? 사랑하면 눈이 먼다잖아요.”

일부러 어깨를 으쓱했다. 스티븐 씨는 갈수록 능청스러워진다면서 하하 웃었다.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술 냄새와 음식 냄새를 지운다. 스티븐 씨가 본가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정원의 나무 냄새를 맡고 있는데, 갑자기 진한 향수 냄새가 끼어들었다.

“안녕, 스티븐.”

고운 목소리였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스테파니.”

“많이 변했다.”

천천히 뒤로 돌아 마주한, 스티븐 씨의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스티븐 씨의 몫까지 샴페인을 두 잔 들고 있었다. 스테파니라는 이름의 그녀가 샴페인 잔을 내밀었지만 스티븐 씨는 이미 빈 샴페인 잔을 들어 거절을 표했다. 스테파니 씨는 나직하게 미소 짓고는 스타페이즈의 인장이 박힌 옷을 입은 집사를 불러 샴페인 잔을 돌려주었다.

“잘 지냈냐고 물으면 너무 염치없나.”

그리고 그렇게 물었다. 옛날 애인을 마주하는 애틋함을 담아.

“나는 잘 지냈어. 궁금해할 지 모르겠지만.”

“궁금했어.”

답한 스티븐 씨도, 옛날 애인을 마주하는 목소리였으나 스테파니 씨와는 확연히 달랐다.

“늘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잘 지냈다니 다행이군. 신께서 그 바람은 들어주신 모양이야.”

서글펐다. 목소리도 시선도.

스테파니 씨는 쓰게 웃었다.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스티븐 씨를 바라본다. 스티븐 씨가 주먹을 꽉 쥐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 그랬었다. 스테파니 씨는 스티븐 씨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 그녀가 하는 말은 통렬하게 아팠다고.

“원망스러웠나 보구나.”

가벼운 한마디에도 스티븐 씨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게 보인다. 스티븐 씨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자 스테파니 씨의 몸에도 상처가 났다. 스티븐 씨는 하늘을 올려다봤고, 스테파니 씨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침묵이 칼날이 되어 서로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스티븐, 기억나?”

먼저 입을 연 건 스테파니 씨였다. 조곤조곤하지만 가시 돋친 말투.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어서, 너와 헤어질까 봐 무섭다고 했더니 완전한 공유라는 책 선물해줬던 거.”

스티븐 씨의 눈이 공포로 떨린다. 스테파니 씨는 그걸 바란 듯 싱긋 웃었다.

“그때 나한테 그랬지. 그 책처럼 사랑하고 싶다고. 가능하다면 나와, 그렇게 인생을 공유하고 싶다고. 우리 18살 때였는데, 난 그때 너한테 이렇게 대답했어. 너는 언젠가 나를 떠날 거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인생을 공유하고 싶어질 거라고.”

완전한 공유는 스티븐 씨의 침실에 있던 프랑스 고전 소설의 제목이다. 해석하며 읽느라 읽는 속도가 더딘 날 위해 스티븐 씨는 밤마다 불어를 영어로 바꿔 읽어주었다.

“너는 그때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만,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던 거야.”

두 달이 넘게 이어진 낭송이 끝나던 날, 스티븐 씨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티븐 씨에게 그 책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어떻게 그 책을 묻게 됐는지.

“나는 네 운명의 사람이 아니었어.”

그리고 나를 만나 다시 그 책을 꺼내게 되어서, 얼마나 기적 같은지.

“스테파니.”

“스테파니 씨.”

동시에 말했으나 스테파니 씨의 눈은 나를 향했다. 옆의 스티븐 씨가 놀라 나를 바라본다.

“스티븐 씨의 운명이 누구인지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스티븐 씨의 운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면, 두 분은 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놀리는 건가요?”

“사실을 말한 거예요.”

스테파니 씨는 소리 없이 웃었다. 미소는 화사한데도 눈빛이 싸늘해서 어처구니없어한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표현이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운명이 되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서 무작정 스티븐 씨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지독한 책임 전가 아닐까요.”

저 표정이 스티븐 씨를 어떻게 난도질했을 지가 보여서.

스티븐 씨가 손을 붙잡아왔다. 단단하고 예쁜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얽고 꽉 움켜쥐었다. 스테파니 씨는 날카로운 눈매로 맞잡은 손을 보고, 내 옆에 선 스티븐 씨를 보는 것으로 소리 없는 비난을 가했다.

“그래요, 워치 씨. 보편적으로는 당신이 하는 말이 맞죠.”

하지만, 이라고 상냥하게 덧붙이고서 스테파니 씨는 내가 아닌 스티븐 씨를 보고 말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저와 스티븐 사이의 공유는요.”

“말씀대로예요, 스테파니 씨. 누구도 모를걸요. 그게 얼마나 스티븐 씨를 아프게 했는지도.”

원망, 혹은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 애처롭던 스테파니 씨의 시선을 다시 내게로 돌려놓았다.

“스테파니 씨와 헤어진 후로 스티븐 씨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대요.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차였었고요. 연애 초반에는 거의 스테파니 씨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름답고, 똑똑하며, 상냥하고도 가차 없는 분이시라고 얼마나 칭찬 일색이었는지 알면 놀라실걸요?”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눈동자가 흔들린다. 스티븐 씨가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마치 사과하듯이.

“그러니까요, 스테파니 씨. 당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두 분은 영원히 사랑했을 거예요.”

사과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나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어요. 아니었다면 저와 스티븐 씨도 만나지 못했을 거거든요. 스티븐 씨는 믿은 운명을 스테파니 씨는 믿지 않아서 두 분은 영원하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분명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었겠죠. 그러니 그런 식으로 원망하는 거, 그만둬주시겠어요?”

“기세등등하시네요, 워치 씨. 스티븐의 사랑을 등에 업으니 세상 무서운 것이 없던가요?”

“등에 업어요? 제가요?”

아니요. 똑 부러지게 말했다.

“누가 누구 한 명을 등에 업은 게 아니라, 손을 맞잡고 같이 걷고 있는 거예요. 저는 그런 영원을 믿어요.”

툭.

어깨 위로 뭔가가 떨어진다. 위를 올려다보니 스티븐 씨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었다. 붉은 눈동자에 소리 없이 고인 눈물이 툭, 툭, 내게로 고여 든다.

“……스티븐 씨가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요.”

“소년은 왜. 이런 데서 덤덤한 거야.”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라서요. 스티븐 씨야말로 왜 울고 그래요, 취하셨어요?”

“안 취했어. 취했으면 안 울었을 거야.”

오히려 웃었을 거라고, 스티븐 씨는 울다 말고 피식 웃었다. 오래도록 쌓여있던 감정이 녹아내린 사람 같았다. 까치발을 들어 얼굴을 닦아주니 괜찮다고 자상하게 달랜다. 두 손을 붙잡아 만지작거리는 스티븐 씨를, 스테파니 씨가 허망하게 지켜보았다.

“말투…….”

“편해서.”

“……나한테는 들려준 적 없는 말투네.”

“편하지 않았어.”

이제 내가 말할게. 그런 웃음을 짓고 스티븐 씨는 한 걸음을 걸어 스테파니 씨를 마주했다. 다부진 몸 너머로 스테파니 씨가 요동치는 게 보였다.

“편하지 않았어?”

“불안했어. 미치도록 잡아두고 싶은데 잠시라도 눈을 떼면 나를 벗어나 사라질 것 같더군. 그럴수록 더 간절히 원하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아서 네 옆의 나는 늘 불안했어.”

“……겁쟁이.”

“서로 마찬가지지.”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어, 라는 스티븐 씨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스테파니.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어. 너무도 닮아서 운명이 될 수 없었던 거겠지. 살아보니 운명은 용감한 자의 것이더군. 너도 나도, 소중하다는 족쇄에 갇혀 서로에게 용감할 수 없었어.”

미안해. 사과한 스티븐 씨를 스테파니 씨가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거기서 사과하는 건 반칙이라는 것처럼.

“그러니 나보다 용감한 사람을, 부디 만나기를 바라. 나는 여전히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

스티븐 씨는 결연했고, 스테파니 씨는 슬퍼했다. 예전에도 두 사람은 이랬을 것 같다. 소중해서 감정을 내세우지 못하고 감정에서 파생된 칼날만을 겨누는 불행하게도 진심인 사랑. 스테파니 씨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갈색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 나라 말이에요?”

“포르투갈어야.”

Seja feliz.

행복하세요.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건넬 수 없다니, 우리는 참. 여전히 겁쟁이군.”

그러니까, 라며 스티븐 씨는 뒤로 돌아 나를 품에 안았다. 탄탄한 가슴팍에 묻히며 표정부터 확인했다. 다행히도 스티븐 씨는 웃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소년을 만나 다행이야.”

“이제라도 아셨으면 됐어요.”

“진작부터 알았지.”

“잘했어요, 스티븐 씨.”

팔을 뻗어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스티븐 씨는 약한 알코올 향을 풍기며 웃고는 셔츠 깃 사이를 파고들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레오.”

“네?”

“내 운명은 네 거야.”

알아요. 대답하고서 스티븐 씨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가슴이 따스하게 젖어 든다.


***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내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스티븐 씨는 아무래도 큰일이라고, 내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병에 걸린 것 같다며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넸다. 질세라 스티븐 씨를 마주 보니 그런 나를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용감하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걸.”

그런 말로 심장을 뛰게 했다. 헤르사렘즈 롯이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대로 스티븐 씨와 집에 가서, 끝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스티븐 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크라우스?”

스티븐 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무적으로 바뀌었다. 메시지를 따라 도륵 도륵 움직이던 눈이 커지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표정을 구기더니,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의자 등받이에 묻는다.

“왜요? 무슨 일이 생겼대요?”

“BB가 나타났다는데.”

“네에?!”

“하여간에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군.”

스티븐 씨가 허망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아니래요. 내가 듣기에도 퉁명스러운 말투라서 뱉고 보니 더 짜증이 났다.

“10분 후면 도착할 거야. 시간을 최대한 끌어보라고 했어. 미안하지만, 소년. 사랑을 속삭이려면 세계부터 구해야겠군.”

“아, 열 받아! 각오해두라고 해요!”

“그러지.”

스티븐 씨는 피식 웃고, 가기 전에 힘내자며 입술을 맞대왔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것이다.



스티븐 가족과 스테파니는 제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에요!

스티븐-스테파니. 소꿉친구 설정을 살려 비슷한 뉘앙스의 이름으로 지어보았어요.

서로가 소중해서 오히려 감정이 왜곡되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 자꾸 어긋날 뿐이라 결국 놓을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 소중해서 옆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은 떠올릴 때마다 너무 아픈 것 같아요.

퇴고를 조금 더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칼을 너무 많이 대게 될 것 같아서 그냥 올려보아요. 1편은 감정의 흐름을 짚는 느낌, 2편은 서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둘, 3편으로는 운명을 거머쥔 둘을 그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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