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들어선 이도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그리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옥상에 널브러진 쓸 수 없게 된 책걸상, 의자 등 따위를 마구잡이로 문 앞에 쌓는다.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지,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지,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인지 확실치 않다.

바닥을 끄는 마찰음을 듣고 뒤척이며 일어난 난호가 문 쪽을 바라본다. 아주 잠깐이지만 깊은 꿈을 다녀왔던 난호는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이 보인다. 난호와 눈이 마주친 이도가 조금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다. 난호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이도는 안다. 지금 아주 조금씩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이도가 난호에게로 한 발짝을 내디딘다.

‘왜 하필 지금인가’라고 묻는다면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떻게 보면 가벼울 수도 있는, 또 어떻게 보면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울 수 있는 이 감정을 저하기 위해 이도는 벌써 며칠째 아니, 몇 주째 주저했었다. 지금처럼 환한 점심시간, 노을빛이 잔뜩 스며든 오후, 풀벌레 소리가 커진 휴일 밤 등 그동안 이미 이도가 난호에게 고백을 하기 위한 기회는 여러 번 주어졌었다. 물론, 이도는 그 순간들을 모두 놓쳤다.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말하진 않겠다. 일일이 설명하기엔 너무 사소하고 같잖은 이유들이었으니까.

난호가 하품을 한 후 침낭에서 완전히 나온다. 침낭을 정리하고 웬일로 머리도 약간 손보는 난호. 누가 봐도 눈에 띄게 느린 속도로 난호에게 다가가는 이도. 꽉 쥔 주먹이 떨린다. 많이 붉어진 이도의 얼굴. 꾹 닫혀 있는 입술이 정전기가 통한 듯 움찔거린다. 이도가 속마음으로 얼마나 완벽한 순간이 펼쳐지길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때가 온 것 같다.

 

 

“난ㅎ...”

 

“저거 네가 한 거야?”

 

“어? 어떤 거?”

 

“옥상 문 앞에 저것들.”

 

“아, 응.”

 

“왜?”

 

“그... 그냥.”

 

“그냥?”

 

“응.”

 

“...”

 

“...”

 

“진짜?”

 

“응, 진짜로.”

 

“...”

 

“...”

 

“너 며칠 전부터 진짜 이상하다.”

 

“내가?”

 

“응, 혹시 또 아픈 거야? 얼굴도 빨간 걸 보니까...”

 

“나... 얼굴이 빨개?”

 

“전처럼 막 또 새빨갛게 변해서 달려드는 거 아니지?”

 

“...”

 

“설마 그렇게 될까 봐 나한테 막아달라고 그런 거야?”

 

“아냐!”

 

“그럼 대체 왜... 저긴 저래 놓고, 내 앞에서는 이렇게 막...”

 

“...”

 

“아, 그게 아니면 진짜 그냥 열이 나서 아픈 건가?”

 

“나 안 아파.”

 

“아픈 거 같은데... 일단 이도 네가 생각해도 저렇게 해놓은 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닌 거 같잖아.”

 

 

사뿐히 걸어와 이도와 마주하는 난호. 이도의 흔들리는 두 눈에는 난호의 얼굴 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난호의 손바닥이 이도의 이마에 닿는다. 매일같이 수련을 한답시고 손을 혹사시키는 것치곤 꽤 부드럽다. 금세 터질 것 같이 얼굴이 달아오르는 이도. 자신의 양손으로 난호의 손을 이마에서 천천히 뗀다. 고개를 푹 숙인 이도.

지금 두 사람의 머릿속은 아마도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아니, 확신한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신하는 것은 이번에도 이도의 고백은 미뤄질 것이다. 벌써 난호가 옥상 문 앞에 쌓인 책걸상, 의자 등을 다 치워 버리곤 이도의 손을 붙잡고 옥상을 나섰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면 이도의 고백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난호가 아닐까?




 

따듯한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뜨겁게 복도에 퍼져 있다. 양호실에서 나온 두 사람이 복도를 걷는다. 의심스러운 표정의 난호와 불만스러운 표정의 이도. 걸음을 맞추고 있지만 분위기만 보면 당장이라도 서로를 밀치고 따로 걸어갈 것 같아 보인다.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도 내가 만졌을 때는 진짜 불덩이처럼 뜨거웠어.”

 

“그야... 이제 날도 더워지고 그러니까... 그리고 내가 옥상 문 앞을 그렇게 막아놨는데 열이 안 오르면 이상한 거지.”

 

“...”

 

“네가 오버 한 거야.”

 

“그럼 그건 왜 했는데?”

 

“?”

 

“옥상 문 앞은 왜 막아뒀냐고.”

 

 

난호의 눈을 피해 천장이나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얼버무리는 이도. 헛기침과 함께 자신의 티셔츠를 살짝 잡아 펄럭인다. 그 정도로 더운 날은 아닌데도 말이다. 난호의 표정은 여전하다. 이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 가끔 이도의 피부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며 체온을 재본다. 이도가 체온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변온 동물도 아니고.

자꾸만 가까워지는 난호를 밀어내는 이도. 기분이 좋을 수도 없고, 나쁠 수도 없는 이 모순적인 상황은 대체 뭘까. 뭐든 지금 상황은 이도에게 좋지 않다. 난호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도 이도의 몸 구석구석은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이도가 난호와 있을 때면 유독 피곤해하는 것은 아마도 온 신경을 난호에게만 집중해서 그랬던 걸까?

멀리서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크게 소리치는 대도 가볍고 듣기 좋은 목소리라면 분명 효진일 것이다. 이도가 뒤를 돌아본다. 효진이 손에 매점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을 든 채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적당히 빠른 속도로 걸어오는 반장. 이도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효진과 반장에게로 걸어간다. 달콤함에 이끌리는 곤충처럼 이도의 뒤를 따라가는 난호.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이도를 바라보고 있다.

다른 곳을 보지 않고 이도의 뒤통수만 보고 있던 난호의 눈앞에 포장지까지 곱게 까져 있는 아이스크림콘이 나타난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손을 따라 얼굴까지 시선을 옮기는 난호. 조금 놀란다.

 

 

“뭐야.”

 

“어?”

 

“왜 놀라?”

 

“아, 아니... 반장, 너도 있는지 몰랐어.”

 

“...”

 

“미안.”

 

“미안해할 거는 아니고.”

 

“고마워.”

 

“알겠으니까 아이스크림이나 가져가.”

 

“응.”

 

“근데 넌 뭘 그렇게 이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그게 이도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 아닐까 싶어서.”

 

“이도가?”

 

“응, 넌 어떤 것 같아?”

 

“...”

 

“...”

 

“...”

 

“?”

 

“연기는 아닌 거 같은데?”

 

“왜?”

 

“그냥?”

 

“그냥?”

 

“응. 이도 너네 앞에서나, 친구들 앞에서는 이제는 숨기는 거 하나도 없잖아.”

 

“이제는?”

 

“응. 이제는. 효진이한테 들은 게 좀 있어서.”

 

“음...”

 

“너 두고 간다는데.”

 

“뭐?”

 

“난 효진이랑 이도 따라서 간다.”

 

“잠깐만!”

 

 

이미 한참 앞서 있는 이도와 효진. 그리고 그 뒤를 또 다시 적당히 빠른 속도로 따라가는 반장. 난호가 세 사람을 보면서 아무리 소리쳐도 걸음을 멈추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난호가 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걸어간다.

그림자와 햇빛 속을 번갈아 걷는 난호. 이런 속도라면 아마 절대 세 사람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까 이도의 손을 잡고 옥상에서부터 양호실까지 올 때 뛰었기 때문에 또 뛰고 싶지는 않은 난호다. 약간의 투덜거림과 여러 생각 복잡해진 머리로 걷던 난호가 갑자기 멈춰 선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난호의 손 위로 흘렀기 때문이다. 차갑고 약간의 끈적한 느낌. 평소에 잘 느낄 수 없는 그 이질적인 느낌. 난호의 얼굴이 멍하게 바뀐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 멀리에서 “야, 이난호!”라고 외치는 효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신을 차린 난호는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워놓은 채 녹아가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랴, 세 사람을 따라잡으랴 정신이 없어 보인다. 물론, 지금 난호의 머릿속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그 차갑고 끈적한 느낌이 일깨워준 물음이겠지만.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속마음과 마음속에 생긴 커다란 파문으로 고민 중에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하굣길에서는 아니었다.

하굣길은 평범했다. 날짜와 꼭 맞는 기온, 적당히 짙은 주황빛, 한가로운 풍경. 세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도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난호도 이도도 서로에게 조금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효진이 분위기를 계속 이끌어나갔기에 두 사람은 겉으로라도 평소와 같은 행동을 보였다. 미묘하게 이상한 말끝과 시선이 눈에 띄긴 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지적하지는 않았다.

결국 세 사람은 버스 정류장까지 평범하게, 평화롭게 걸어갔다. 하지만 서로 다른 버스를 타야 했던 난호와 이도는 조금은 찝찝하고 씁쓸한 그런, 평소와는 다른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작별 인사를 본 효진은 뭔가 느낌이 왔는지 흥미로워했지만 버스에 같이 오른 난호가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무언가를 캐물을 수는 없었다.

멀어져 가는 버스를 보며 한숨만 내쉬던 이도는 자신의 뇌를 때리는 충동에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난호에게 X톡을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한 마디를 쓰고 보니 너무 초라해 보였다. 평소에 문자나 글을 낮잡아 본적이 없었던 이도에게는 놀랄만한 경험이었다. 감정도, 자신의 호흡도, 공기의 온도도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은 한 마디. 이도는 눈을 꼭 감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직접 대면해 자신의 목소리로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이도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 이후로 이도가 고백을 해야 한다는 충동에 흔들리지 않게 된 건 이도의 모든 감정들도 이도의 생각에 설득 된 게 아닐까.





아직 머리가 축축한 이도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얼굴에 뭔가가 나거나 오늘따라 엄청나게 못생겨 보이진 않지만 눈 밑에 도는 불그스름한 홍조가 신경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손끝으로 홍조를 만져보는 이도. 딱히 열이 나고 있지도 않는 것이 더 문제 인 것 같다.

이도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멍한 얼굴로 침대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는 이도. 벨 소리를 감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받기 싫은 사람한테서 전화가 온 걸까? 아마도 후자는 아닐 것이다. 이도가 저렇게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니까. 침대로 몸을 던져 통화를 받는 이도.

 

 

“여보세요?”

 

“웬일이에요?”

 

“그냥!”

 

“그냥?”

 

“생각나서!”

 

“그런 이유로 전화하지 말라니까...”

 

“그런 이유로 전화해도 받아주잖아.”

 

“그야, 전화 안 받으면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이제 말 안 하고 너희 집에 가지는 않는데?”

 

“그런가...”

 

“딱 한 번 빼고.”

 

“네?”

 

“근데 그 날은 너 집에 없었어. 응, 집에 없을 때 있다 갔어.”

 

“아니 대체 왜...?”

 

“그냥. 가끔 쉬고 싶을 때가 있잖아.”

 

“자기 집에서 쉬면 되지 왜 내 집까지 와요?”

 

“우리 집은... 좀 쉬기에는 적합하지 않지.”

 

“무슨 소리예요? 뭐 집 온 곳에 CCTV라도 있어요?”

 

“아니, 왜 전에 관찰 예능 한다고 집 안 곳곳에 카메라 있었던 적도 있고... 우리 집 비밀번호는 멤버들이랑 회사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그래서요?”

 

“그래서 좀 마음 편하게 쉴 수는 없다고 해야 되나?”

 

“그럼 그냥 호텔이나 가요.”

 

“거긴 너무 차갑고...”

 

“진짜...”

 

“까다롭다고?”

 

“네. 거기다가 귀찮아.”

 

“너무 그러지 마...”

 

“싫은데.”

 

“그보다 너 최근에 연습실은 가 봤어?”

 

“말 돌리지 마세요.”

 

“... 말 돌린 거 아니고! 그냥, 이도 네 말을 겸허히 받아들인 거지!”

 

“하...”

 

“그래서 가 봤어?”

 

“그 기사 좀 잠잠해진 이후로는 조금씩 가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은 전처럼 새벽까지 연습은 못해요.”

 

“그래? 그럼 그거 봤어?”

 

“뭘 말하는지 알겠는데...”

 

“어때?”

 

“확실히 공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긴 하더라고요.”

 

“아냐, 뭘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고맙다고도 안 했는데.”

 

“나는 이도 네 맘 다 알 수 있어. 진짜로.”

 

“...”

 

“이도야?”

 

“...”

 

“전화 안 끊겼는데... 왜 말을 안 해?”

 

“어이가 없어서.”

 

“너무하다...”

 

“...”

 

“...”

 

“내가 형을 왜 좋아했을까요?”

 

“갑자기? 근데... 그건 너무 마음 아픈 말인데...”

 

“아니, 진짜 순수하게 그냥 묻는 거 에요. 내가 뭐 때문에 형을 좋아했을까요?”

 

“글쎄... 얼굴?”

 

“그런가? 형은 절 왜 좋아했어요?”

 

“어? 나? 그냥...”

 

“그냥?”

 

“아니, 그냥은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멋져 보였거든.”

 

“제가요?”

 

“응. 혼자 살면서 꿈도 많고, 지쳐도 계속 회복하고, 계속 웃어주고...”

 

“음... 그렇구나.”

 

“근데 그건 왜?”

 

“형.”

 

“응.”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어?”

 

“이번엔 형처럼 나이 차이 나는 사람도 아니에요.”

 

“어...”

 

“나도 아마 형처럼 그 애가 멋져 보여서 좋아하나 봐요.”

 

“전 애인한테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지만... 뭐, 이도 네가 좋다면야 멋지고 좋은 사람이겠지. 나처럼.”

 

“오늘 고백할 거에요.”

 

“뭐?”

 

“그러니까 이만 끊어야겠어요. 그 애한테 연락해야 되거든요.”

 

“... 잘되길 빌게.”

 

“고마워요, 형도 저 말고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싫어.”

 

“네?”

 

“난 이도 너 기다릴 거야. 네가 데뷔하고 성인 될 때까지.”

 

“...”

 

“끊는다!”

 

“네.”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휴대폰이 닿고 있던 볼이 조금 따듯해진 느낌이다. 여전히 조금은 축축한 머리칼은 어지럽게 얽혀있거나 이상하게 뭉쳐있다. 이도가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성인이면 형 나이는...’

 

‘나이는 그렇더라도 군대 갈 거 아니야.’

 

‘아니, 근데 내가 만나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웃겨.’

 

 

몸을 일으킨 이도가 다시 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이도. 누가 봐도 산발인 머리와 한 부분만 붉어진 피부를 보고 그런 것 같다. 또 다시 울리는 휴대폰. 오늘따라 바쁜 휴대폰에 이도는 덩달아 피곤해한다.

 

 

“여보세요?”

 

“이도야?”

 

“어... 난호?”

 

“응.”

 

“이 시간에 왜 전화 했어? 나도 하려고 했는데.”

 

“어... 그랬구나... 너 오늘 시간 많아?”

 

“응... 그렇긴 한데...”

 

“그럼, 좀 있다 9시 30분쯤에 XX산 입구에서 볼래?”

 

“어... 가능은 한데, 갑자기 왜?”

 

“아... 나 너한테 할 말이 있거든.”

 

“할 말?”

 

“응.”

 

“그냥 전화로 해도...”

 

“전화로는 안 될 것 같아서.”

 

“... 알았어.”

 

“응.”





약간의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 어둑한 풍경과 합쳐져 조금 으슥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지만 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산 입구 주변의 가게들 그리고 포근한 날씨 덕분에 마음속에 미소가 빙그레 그려진다.

주위를 둘러보는 이도가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체크한다. 난호의 난대 없는 부름 덕분에 머리를 다시 감고, 옷 장 속 옷을 다시 꺼내고, 화장을 한 것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확실히 평소의 이도와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예쁘게 맺혀 있는 봉오리의 느낌.

뭐가 그렇게 긴장 되는지 이도는 자꾸만 목을 축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어폰이 다른 소리 들을 다 차단해서인지 이도는 더욱 더 자신의 뛰고 있는 심장과 쓸데없는 생각에 깊이 빠져든다.

이도에게로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온다. 적당하고 부드러운 걸음.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분명히 저 걸음 하나하나에는 엄청나게 많은 힘이 들어가 있을 거다. 이도의 바로 뒤에서 걸음이 멈춘다. 무언가 느껴져 뒤를 도는 이도. 난호가 서 있다. 미소 짓는 난호와 어색함과 당황함이 얼굴에 잔뜩 드러난 이도. 살짝 뒤로 물러난다.

 

 

“왔으면 연락하지... 놀랬잖아.”

 

“아... 그냥 왠지 이도 네가 여기 있을 거 같아서.”

 

“어? 왜...?”

 

“그게... 그냥 이 자리가 이도 너랑 잘 맞아 보여서.”

 

“그게 뭐야... 난호 너 풍수지리 같은 거 볼 줄 알아?”

 

“아니... 그냥 내 직감.”

 

 

난호의 말에 살짝 웃음을 보이는 이도. 그런 이도의 모습을 보고 난호의 발도 조금은 더 거칠고 투박하게 땅을 밟는다. 이도는 코앞으로 다가온 난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지만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뭔데?”

 

“어... 그게 여기서 말고.”

 

“그럼?”

 

“우리 조금만 올라갈까? 천천히.”

 

“... 그래.”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도는 난호를 평범하게 만나기에 과하지 않은 복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을 올라가기에 적합한 복장은 아니다. 난호는 이도의 신발을 보고 살짝 미안한 얼굴을 하지만 이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자신의 새하얀 운동화로 거침없이 흙길을 밟는다. 이도를 따라 산을 걸어 올라가는 난호. 편안한 모습이지만 이도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조금씩 딴청을 부리는 것 같다.

얼마 정도 올라갔을까. 꽤 깊이 들어온 두 사람. 아까까지만 해도 보였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차가워진 공기가 피부에 닿고 검은 밤은 좀 더 짙게 펼쳐져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고서야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세차게 흔들리는 나무가 내는 소리 때문이다. 오감을 무너뜨리는 풍경.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조화롭다. 모두 딱 이 상황에 알맞은 모습이다.

갑자기 멈춰선 난호는 하늘을 바라본다. 난호의 뒤를 따라가던 이도는 난호를 따라 멈춰 선다. 무언가 결심한 듯 숨을 잔뜩 들이키는 난호. 뒤를 돌아본 후 이도의 손을 잡는다. 난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도는 당황한 것 같아 보이지만 난호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난호의 행동에 몸을 맡긴다.

아무생각 없이 난호에게 이끌려 뛰던 이도의 눈앞에 산속이라고 믿기지 않을 평지가 펼쳐진다. 이도의 손을 놓는 난호. 그리곤 이도에게로 한 발짝 걸어간다. 너무 큰 한 발짝 이었는지 순간 이도의 숨이 난호에게 닿아 난호는 조금 뒤로 물러난다.

이도는 주변을 둘러본다. 정말 아무도 없는 이름 없는 풀들과 어지럽게 펼쳐진 나무가 전부이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 덕분일까. 어둡지도 으슥하지도 않다.

 

 

“예쁘다.”

 

“그렇지?”

 

“응.”

 

“뭔가 이런 곳에서 말해야 될 거 같아서.”

 

“왜?”

 

“어... 그러면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거 같아서.”

 

“난호 네가 안 솔직할 때도 있어?”

 

“있지... 나도 가끔은 거짓말을 하니까. 근데 꼭 나 때문만은 아니야.”

 

“어?”

 

“너 때문이기도 해. 그러니까 너랑 나 둘 다 솔직했으면 해서.”

 

“어, 어...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이도 넌 할 말 없어?”

 

“나?”

 

“응.”

 

“너한테?”

 

“응.”

 

“... 있어.”

 

“그럼 내가 먼저 해도 될까?”

 

“...”

 

“네가 먼저 해도 돼.”

 

“...”

 

 

둘 밖에 없는 것과 다름없는 곳에서 서로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런데도 이도의 머릿속은 지금 난호만이 가득 채워져 있다. 난호의 입술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는 이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은 더 이상 그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모순적인 비밀을 진정시킬 수 없다. 아니, 이도의 심장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입술을 꽉 깨무는 이도.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것은 항상 일을 시작하기 전이나 일이 끝나고 난 후다. 그렇기 때문에 해서 항상 사람들은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것을 놓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퍼할 일은 아니다.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해서 언제나 완벽한 결말을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내가 먼저 말한다?”

 

“그...”

 

“이도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엇.”

 

“정말 오늘까지는 몰랐는데... 오늘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정말 찰나였는데... 요 며칠간 이도 너 보면서 왜 저러지 하고 생각이 들었던 순간들이...”

 

“그게...”

 

“그래서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너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것 같아.”

 

“...”

 

“근데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

 

“...”

 

“그래서 말인데. 가르쳐 줄래?”

 

“정말?”

 

“?”

 

“알고 싶어?”

 

“응, 왜?”

 

“알게 되면 넌 내가 싫어질 수도 있고, 친구로 지낼 수 없을 지도 몰라서...”

 

“어... 어떤 거라서 그러지...”

 

“효진이랑 전처럼 다닐 수 없을 지도 모르고, 연락조차 안 할지도 몰라...”

 

“나쁜 비밀이야?”

 

“... 나쁘지도 착하지도 않아서 문제야.”

 

“그럼 말해줘.”

 

“어?”

 

“비밀이 나쁘지도 착하지도 않으면 결국 이도 너도, 그 비밀도 아니라 내가 문제인 거잖아.”

 

“곡 그렇지도 않을걸...”

 

“이도야.”

 

“응...”

 

“너는 내가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어떻게 널 대할 거 같아?”

 

“모르겠어... 난 난호 네가 아니잖아.”

 

“응, 그게 당연하지. 우린 아주 찰나를 만나도 그렇다고 아주 길게 만나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가 없잖아. 추측하는 것 조차 힘들 걸?”

 

“그래도 불안해... 내가 말하면 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래도 괜찮아. 왜냐하면 그게 당연한 거잖아. 그 비밀 때문에 네가 끙끙 앓는 것보단 나아. 뭐, 정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는 궁금증 때문에 좀 힘들겠지만!”

 

“...”

 

“어때? 말하고 싶어?”

 

“바보.”

 

“바보?”

 

“응, 잔뜩 잘난 척 해 놓고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난호를 보며 웃는 이도. 공기를 타고 이도의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이도의 심장이 점점 정상의 크기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달빛과 어둠에 가려져 있어 보이진 않겠지만 이도의 얼굴에 퍼졌던 붉은 색도 점점 이도의 마음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천천히 난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이도. 난호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응, 나도 좋아해.”

 

“누구를 너를?”

 

“아니 이도 너를.”

 

“너 내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뜻을 모르는구나?”

 

“좋아한다는 게 좋아한다는 거지 다른 뜻이 있어?”

 

“내 말은... 내가 널 사랑한다고.”

 

“사랑?”

 

“응, 난호야 난 아무래도 널 사랑하는 거 같아.”

 

“좋아한다는 거랑 사랑한다는 게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

 

“?”

 

“뭐라고?”

 

“들은 그대로인데?”

 

“...”

 

“?”

 

“그래서 지금 내 고백을 받은 거야?”

 

“난 이미 대답했는데?”

 

“...”

 

“왜?”

 

“말해줘.”

 

“뭐를?”

 

“그렇게 두루뭉술한 대답 말고 진짜로 사랑한다고.”

 

“싫어.”

 

“왜? 너 지금 나 어색해 할까 봐 장난치는 거지?”

 

“아닌데? 자꾸 말하면 닳을 까봐 그래.”

 

“...”

 

“?”

 

“너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그러는 너도 이상한 사람인 걸.”



?

드디어 결말이 났습니다!

마지막화라고 글자 수가 많아지다 보니 교정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네요...

이렇게 또 결말을 내고 나니 같이 달려주신 독자님들에게 정말 절하고 싶어요 ㅠㅠㅠ

그리고 앞으로 독자분들도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모두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정말 여러분들 덕분에 항상 글을 씁니다!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오타 지적이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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