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림인은 성벽을 타넘고 철문을 찢는다. 그런 이들이 수백 명씩 무리지으면 평범한 갈대밭도 전장이 된다.


그 전장 한가운데 날카로운 꽃이 피었다. 잎은 사람 키만한 은빛 묘도(苗刀), 줄기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여자. 반투명하게 비치는 비단으로 싸인 팔이 공기에 스미듯 움직이니 칼날이 적을 홀리고 칼끝은 그들의 목숨을 후볐다.


키는 유난히 컸지만 몸은 말랐고, 고혹적인 눈웃음을 흘리면서도 앳된 빛을 숨길 수는 없었다. 젊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날뛰는 그녀에게 숱한 남자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목숨이 하나씩 사라졌다. 흐르는 피를 받아 마시며 그녀가 피우는 꽃은 더 크고 화려해졌다.


천마를 떠받치는 마교의 네 기둥[四魔楹] 중 하나, 화유설(花柔雪)은 피의 화단 한가운데서 생각했다.


'심심해라.'


고리타분하고 나이 먹은 남정네들 따위 백 명을 죽인들 잡초를 뽑는 것보다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표정과 몸짓과 검술로 적을 홀렸지만,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적들 중 아무도 유설을 홀리지 못했다.


그녀를 홀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다른 곳에서 교도를 이끌고 있으니 남은 건 오직 하나뿐이다. 유설은 그 한 명, 남궁영인(南宮永仁)을 애타게 찾았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 유설은 영인을 찾는 대신 영인을 끌어들일 미끼를 찾았다. 같은 가문 출신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 사람은 혈육의 정에 얽메이지 않지만, 그런 모습을 연기해야 하니까.


유설은 남궁세가 가주의 독자를 발견했다. 이름은 모른다. 애초에 기억하지도 않았다. 얼굴은 그럭저럭 반반했고 실력도 괜찮았지만 재미 없는 남정네 중 하나일 뿐이니까. 유설은 그에게 덤벼들었고, 그는 오십 초만에 오른팔과 검을 잃었다.


영인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남궁가 사람을 찾아 베었다. 두 명을 죽이고 명을 불구로 만들자 영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설은 생각했다.


'난 여자 좋아하는데.'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장을 한다.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잘생겼던들 남자에게 이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영인은 아름다워 보였다.


영인은 유설보다 키가 작았다. 딱히 책 잡을 일은 아니다. 유설은 유난히 키가 큰 편이었으니까. 영인은 몸이 가늘었다. 역시 책 잡을 일은 아니었다. 유설은 근육 넘치는 남자가 싫었다. 옷을 잘 입지도 않는다. 적당히 예스럽고 정갈한, 남궁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을 뿐이었다. 유설은 신경쓰지 않았다. 옷을 잘 입지만 실력이 모자란 사람보다는, 옷을 못 입어도 강한 사람이 좋았다.


그리고 영인은 강하다. 어쩌면 유설보다도.


유설은 재차 생각했다.


'정말로, 여자만 좋아하는데…….'


그래도 영인이 싫지는 않았다. 유설은 환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구름이 피어오르듯 영인의 검이 눈앞을 메웠다. 그 사이에 날카로운 검광이 번갯불처럼 꽂혔다.


유설은 칼날의 꽃을 피웠다. 소나기가 꽃을 적시듯 유설의 묘도와 영인의 검이 한데 뒤섞였다.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에 유설은 몸을 떨었다. 적을 홀리고 목숨을 취하는 그녀가, 오히려 영인에게 홀렸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그 속에서 의문이 피처럼 흘렀다. 이 사람의 검은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영인에게 배를 뚫리는 순간까지도, 유설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내장을 헤집는 아픔 속에서 유설은 영인과 눈을 마주쳤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제 알겠네."


유설은 입술을 핥았다.


"여자였군요."


영인의 눈이 다시 단호해졌다. 그가……. 그녀가 손목을 비틀었다. 내장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 좋아하고."


칼날이 옆구리를 찢으며 빠져나왔다. 유설은 울컥 피를 토하며 무릎 꿇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영인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알아차린 너는 여기서 죽을 텐데. 내 알 바인가? 그렇게 말하는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예쁘다.'


유설은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영인의 차가운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그쪽으로 뻗으며 유설은 상상해보았다. 저 낙낙한 옷 아래 숨겨진 옷은 어떤 모습일지.


나중에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 * *



그리고 한 시진 뒤, 시체 더미 속에서 눈을 떴다.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불사신이 아니었다면 즉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목과 머리를 분리하지 않는 한 불사신이었지만, 아무튼 살아남았으니 세세한 것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가까운 데서 확 파고드는 탄내가 더 중요했다. 누가 불이라도 지른 듯했지만 유설은 꾹꾹 참았다. 당장 움직이기는 부담스럽다. 주변 상황도 모른다. 주변에 정파의 고수들이 잔뜩 있기라도 하면 애써 되살아난 목숨도 도로아미타불이었다.


그녀는 조심조심 움직여가며 시체 더미를 파고 내려갔다. 꼼지락꼼지락 땅을 파 그 아래로 숨으며 유설은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남궁영인을 남자로 알고 있다. 방계 출신이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 가주가 될지도 모르는 천재라고 검사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여자였다. 스무 해 넘게 잘도 숨기고 있었지만 비밀은 언제고 밝혀지는 법이다.


그러고 나면 영인도 지금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서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타오르는 시체 아래서 유설은 말갛게 웃었다.




제목은 가제에용.


화유설 : 마교 간부 출신. 경험 많은 광공

남궁영인 : 남궁세가 방계 출신의 남장여자. 여자인 걸 숨기고 남궁세가 가주 자리 노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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