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볍게 썼어요!



<퀸덤>은 판타지 백합 앤솔로지라는 설명을 보고 곧장 구매를 결심했습니다. 판타지를 주제로 한 백합,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조합이라니요. 최고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책을 펴기 전부터 갖고 있던 기대감이 있었고, 책을 펴면서부터는 신선한 방식에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별개의 단편을 인쇄만 같이 해 둔 것이 아니라, 프롤로그를 통해 공통의 세계관을 설명한 후 선택지에 따른 진입 스토리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겹치는 등장인물도 많고 공유하는 소재나 배경도 많으니 분명 작가님들 간에 많은 의논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도 엮어볼 수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운 느낌이었네요.


[용의 심장을 꿰뚫는 자]는 읽는 내내 웃는 낯으로 본 것 같아요. 아이서 클레멘이 어린데다가 성정이 무겁지 않고 종알거리는 편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제 나름의 목표를 위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캐릭터여서 그런 걸까요. 아이서는 자신의 영지를 온전히 물려받겠다는 일념 아래 용기사단이라는 극한직업의 환경으로 자원해서 들어가지요. 용기사단은 죽음을 등에 짊어지고 싸우는 이들로 전 왕국에 유명세를 떨치는 이들이잖아요. 거기에 들어간단 건 목숨을 걸고 가는 거랑 다른 바 없는 단체. 그런데도 아이서는 망설이지 않아요. 그럴 정도로 제 목표를 고집하는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서가 황제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게 되기까지. 그 대가로 칼을 맞고도 다시 일어나, 황제와 시리온 앞에 서기까지. 황제의 명을 정면에서 거역하고 시리온의 목을 끌어안고 말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요. 내가 죽이려던 용. 영지의 승계를 위해 그 심장을 꿰뚫고 말리라던 용. 그를 앞에 두고서 제 분신처럼 소중히 여기던 클레이모어를 놓아버리기까지요. 그 흐름을 보는 동안 얼마나 미소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마무리까지 도달하고 나서 든 생각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아이서, 이 사랑스러운 용기사단원은 직분에 충실하게도 용의 심장을 꿰뚫는 데 성공했음이 틀림없더군요. 실제로 검을 들어 심장에 내리꽂은 것이 아니더라도, 간질간질한 온기로 꿰어버린 것도 똑같은 것 아닌가요. 용의 심장을 꿰뚫는 자, 어떤 소원이든 이루리라고 했으며, 아이서는 제 모든 소원을 이루고 행복해졌으니까요.


[그녀, 아스텔]은 이안보다는 아스텔의 시선에서 보려고 했어요. 아니, 그렇게 보게 되더라고요. 제가 몇 번 적은 적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름이라는 소재를 상당히 좋아해요. 이름이 두 개인 사람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 뭐 그런 소재들이요. 아스텔은 대사제로부터 받은 제 이름을 들어본 게 사는 동안의 모든 기억을 통틀어 다섯 번을 채 넘지 않는다고 했지요. 자신을 호칭하는 건 오직 ‘성녀님’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거 아시나요? 아스텔은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저를 향해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삶을 사는 동안, 그야말로 고결하고 강박적이고 품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겁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끔찍하게 피곤한’ 삶이었죠. 그러니 이안이 저도 모르게 ‘성녀’라고 불러버린 순간 굳어버렸겠죠. 숨기고 있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다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안은 아스텔을 여전히 아스텔로 대했습니다. 호칭을 성녀님으로 바꾸는 일도 없었어요. 둘이 사랑에 빠지는 시간을 흘려보내면서도, 이안에게 아스텔은 성녀가 아닌 그저 이름이 아스텔일 뿐인 한 사람이었죠. 이안이 늘 아스텔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노래하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고요. 사랑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했던가요. 거대 상단의 후계자인 이안 맥컬리도, 신의 신실한 종인 성녀 아스텔도, 둘의 손을 서로 맞잡은 순간에는 그저 이안과 아스텔일 뿐이라는 점이 너무 좋았어요.


[나의 황녀를 위하여]는 시아벨라의 입장을 돌이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할까요. 사람은 그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울 수 있어서 기뻤어요. 앞선 편들을 볼 때 시아벨라는 용의 탑(혹은 고성)에 구류되어 카벨라가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으로 보이곤 했어요. 그렇지만 시아벨라가 시리온의 입김 아래 살았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요. 몇 개월,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동적으로 언제 구하러 오냐는 생각 하나만을 하고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닐 거예요. 카벨라 대신 자신이 잡혀와야 하는 현실에 대해 원망했을 수도 있고, 제 사랑하는 언니를 그리고 욕망했을지도 모르고, 그리운 마음에 눈물짓거나 막막한 현실을 욕했을지도 몰라요. 시아벨라도 사람이니까.

이 글에서는 그런 시아벨라의 사람다운 욕망과 행동들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 좋았어요. 마침내 다시 만난 카벨라를 돌보면서도 제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고, 쌓여 있던 마음의 실타래를 풀 듯 천천히 이어나가는 모습이 경탄스럽기도 했고요. 저런 모습을 카벨라가 용케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랄까요. 뭐어, 카벨라는 느리지만 제 다리가 낫고 있다고 확신하며 믿고 있고, 시아벨라는 오랜 시간을 들여 언니를 제 손아귀에 넣을 작정이니 둘 모두 행복한 것 아닐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글을 덮었네요.


퀸덤을 모두 읽고 나니 전체적으로 여자들의 여러 욕망과 감정들을 판타지 배경으로 볼 수 있어서 즐겁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전보다 더 다양한 방식과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 많아져서 기쁜 것 같기도 하구요. 이번에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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