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백색 벽에 일렬로 늘어선 아치형 문. 위쪽으로 발코니와 흑갈색 벽돌들, 각진 창이 있었다. 인도는 잿빛이었고, 먹구름이 남색 목도리를 입은 남자와 셔츠를 입고 핫도그를 먹으며 지나가는 여자, 그 밖에 반질반질한 구두를 신은 자들을 축복해 주었다.

존은 앞으로 걸었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린 여자가 손을 들었다. 연한 붉은색 머리카락이었다. 토끼 같은 눈망울이 배쭉했다. 존은 반갑게 웃었다.

"어쩐 일이예요, 몰리?"

"뭐."

여자는 시선을 흘낏 던졌다. 존은 여자가 무슨 뜻으로 눈짓을 한 것인지 알았으나,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새로 페인트칠 된 회록색 문. 221B라는 멋들어진 글자와 삼각형으로 된 긴 고리가 붙어 있었다. 존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회색 물감으로 덧그린 듯한 어둠이 쌓여 있었다.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과 바닥에 깔린 인도산 카펫이 보였다. 그때 존은 묘한 냄새를 맡았다. 양파, 아니 쥐의 시체가 썩은 듯한 냄새. 콧속에 공기로 엮인 밧줄이 들어찬 것 같았다. 밧줄은 서서히 빠졌다. 아주 느리게, 화산재처럼 심장 소리가 피어오른다.

존은 걸음을 빨리했다. 열 개 남짓한 계단이 선반에서 떨어지려는 접시를 잡으려고 뛰어갈 때처럼 높게 느껴졌다. 흉곽에 씩씩거리는 소리가 차올랐다. 눈이 터질 듯 하다. 존은 문고리를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존은 두어 발 더 앞으로 걷는다. 그러나 왼다리가 뻣뻣해져서, 오른 다리로 체중을 지탱했다. 절뚝거린다. 다이너마이트 연기를 들이 마시고, 폭발에 휩쓸려 조각조각 파열되는 듯 하다. 존은 한 번 더, 힘겹게 숨을 삼킨다. 흔들리던 시야가 고정되었다.

문 너머는 고요했다. 문고리는 반들반들하고, 흠집이 몇 개 있었지만 그런대로 멀쩡했다. 존은 문고리를 잡았다.

심장이 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캄캄한 집 안에서 바지춤을 부여 잡고 침실을 나서던 때처럼, 신발 끌리는 소리와 툭, 툭 하는 소리, 중년 여자의 앞치마처럼 거친 나뭇결, 먼지 냄새, 장인이 두 발 사이에 끼우고 비비는 노끈처럼 말라 비틀어진 혀...... 감각들이 전부 객사했다. 죽음은 오롯한 표현의 자유로서 존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존은 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널찍한 편이었다. 왼편으로 부엌과 냉장고가, 오른편으로 거실이 보였다. 벽난로와 그 위에 올려진 해골, 긴 소파, TV 위 아래로 쌓인 책들. 존은 빠르게 실내를 훑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존은 깜짝 놀라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커튼은 불투명했다. 그림자는 더욱 진득하게 가슴팍으로 침입했다. 존은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다, 아니 들었다고 생각했다.

들려온다, 아니 들려오지 않는다, 들려온다, 이제는, 아, 또 다시.

짧게 높은 음을 연달아 잇는 곡조는 날카로웠지만, 부드럽게 울렸다. 거실에 촛불 하나가 켜진 것처럼, 빛의 여운이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바짝 힘이 들어갔던 발가락이 풀어졌다. 존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놀랍게도 자신은 이 곡조와, 바이올린을 켜는 자를 알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하고, 규칙적이었다. 천과 천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존은 팔걸이를 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늦었어."

그리고 그가 뭐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존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홈즈 교수가 책을 덮었다. 학생들은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존은 두꺼운 교과서를 챙기며 힐긋 홈즈 교수를 훔쳐보았다. 홈즈 교수가 진행한 실험이 있은 지 벌써 두 주 째였다. 홈즈 교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존을 대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비슷하게 실행했다면, 왜 굳이 말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말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존은 갈색 백팩을 멨다. 홈즈 교수는 전화를 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고 있었다. 간간이 비만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그때 존과 홈즈 교수의 눈이 마주쳤고, 존은 어색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 홈즈 교수의 시선이 자신을 비누방울처럼 가두는 것 같았다.


열 시간 남짓을 전부 책상 앞에 앉아 있느라 살이 불었다. 늦은 시간까지 해부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찾아 오던 두통도, 메스꺼움도 사라졌다. 시계가 12를 가리켰다. 존은 펜을 쥔 채 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그가 찾아 오지 않았다. 홈즈 교수의 실험에 참여한 다음부터였다. 어쩌면 그 일 자체가 자신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중간 고사 기간이 다가오면서, 존은 가끔 맥주를 마실 때 빼고는 내분비계 기관이나 동맥의 위치를 머릿속에 입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세한 혈관들은 이름마저도 폐동맥, 수지동맥, 대퇴정맥 등 발랄하게 다양했다. 이들은 전부 해부학에 포함되었고, 조직학, 생화학, 태생학 등 과목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과제들이 쌓였다.  존은 고립성 림프소포를 생각하느라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몰랐다. 중간 고사 당일, 체크무늬 셔츠 안에 무지티를 입고 나갔다가 쪄 죽을 뻔 했다. 존은 땀을 뻘뻘 흘리느라 신경이 분산되었다. 여태껏 공부한 바가 있으니 눈살을 찌푸려가며 문제에 집중했다.

왜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가 했더니, 하필 오늘 고장이 난 터였다. 존은 수면 위로 올라온 다이버처럼 숨을 들이쉬었다. 피곤했다. 존은 거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복도에 있는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코카콜라 하나를 뽑고 고개를 돌렸는데, 홈즈 교수가 있었다. 보랏빛 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무척 더워 보였다. 존은 코카콜라를 내밀었다.

"더워 보이셔서요."

홈즈 교수는 허공을 응시했다. 존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홈즈 교수는 팔을 걷고 있었는데, 팔 안쪽에 흰색 패치가 세 개 정도 붙어 있었다. 존은 이 비슷한 것을 봤었다. 바로 누이 해리엇에게서였다. 해리엇은 지독한 골초였고, 그녀의 남편이 담배를 끊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성화를 부릴 때마다 니코틴 패치를 붙였다. 물론 그 결심이 이루어진 적은 별로 없었다.

존은 코카콜라를 딴 뒤, 한 모금을 들이켰다.

홈즈 교수가 했던 실험 이후로, 더 이상 그것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홈즈 교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을지도 모른다.

"홈즈 교수님?"

홈즈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존은 캔 콜라를 들고, 홈즈 교수를 지나쳐갔다.

http://blog.naver.com/no30768 연재 주기 깁니다!

폽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