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편 바로가기 http://posty.pe/5atdpy /



처음엔 좀 버벅거리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적응을 하는 법. 단골인지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말을 거는 손님들과도 여유 있게 말을 섞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 몇 명은 무슨 얘길 했는지 제헌의 기억에서 날아가고 없었지만 고성도 없었고 물건이 날아들지도 않았으므로 어쨌든 무사히 넘어갔다 여기기로 했다. 

제헌에겐 다행스럽게도 가르송이라는 건 사실상 손님을 응대하는 종업원의 옷차림에 그치는 가벼운 콘셉트일 뿐, 카페 자체는 작은 개인실로 나뉘어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으로 차별성을 주는 형태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 초보자인 제헌에게도 적당히 가르쳐서 바로 일을 시키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역할이 그리 크진 않았던 것이다. 아, 당연히 그것과 노동강도는 또 별개였다.

그래도 하다 보니 재미가 붙어 나중엔 갈고 닦은 혀가 풀려서 손님들이 신기해하며 웃을 만큼 가르송처럼 구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들에겐 동양인이 능숙한 척 열심히 접대를 하는 게 신기한 거리로 여겨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쨌든 손님들 반응은 꽤 좋았다. 중간중간 감시인지 구경인지 모를 걸 하던 단주가 웃으며 얘기를 건넸다.

"동생 의외로 적응력이 아주 좋구나?"

"세상이 저를 강하게 키웠답니다, 주인님."

"이거 그냥 멘탈이 나갔네."

하하하,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하하하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는 체념의 정서가 민족주의적 한과 맞닿은 해탈에 이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아, 고국이여.


식사는 주방장이 직접 조리해준 것을 옹기종기 모여서 먹었다. 식사 자리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고 이미 소개를 받았거나 마주쳤던 사람도 있었는데 단주가 옆에서 제헌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음…… 그러니까 이 친구는 그- 내가 아는 앤데, 어쩌다 보니 오늘부터 일을 거들게 됐어. 인사해.」

단주의 당당한 목소리와 안 어울리게도 정말 정보 값 하나도 없는 구린 소개였지만 딱히 다르게 소개할 것도 없었으므로 제헌은 떨떠름한 미소로 인사했다. 

「이제헌입니다. 성이 이고 이름이 제헌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저 케이팝 팬이에요.」

"아, 백인 진짜."

바로 옆이 아니면 안 들릴 정도로 입안으로 웅얼댄 제헌의 시선이 순간 단주를 힐끔거렸으나 단주는 정말로 눈곱만큼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방금 저 직원이 사람을 죽이고 왔다고 해도 저런 표정일 사람이라고 되뇌며 제헌은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물론 제헌에게 말을 건 사람이 백인이 아니라는 지점도 그리 중대한 문제는 못 되었다. 아무튼 백인이 나빴다. 제헌은 의례용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말했다.

「저도 자주 들어요.」

「와, 어디서 왔어요?」

「남한이요.」

「아니 어디서 살다 왔냐고요. 전 애틀랜타 출신이에요. 사장님하고 억양이 완전히 다른데 같은 데서 왔다고요?」

한 가지만 했으면 좋겠다. 제헌은 차라리 결혼했는지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호구 조사를 하라는 마음의 소리를 속으로 눌러 담으며 질문에 적당히 대답했다. 호기심 섞인 질문이 몇 가지 더 이어지고 단주가 손뼉을 짝 쳤다.

「우리 주방장의 안색이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으니 식기 전에 식사 시작합시다!」

정말이었다. 제헌만 주방장을 무섭게 본 건 아니었는지 사람 좋아하는 시골 강아지들처럼 달려들던 질문들이 뚝 그치고 다들 열성적으로 식사에 열중했다. 물론 그게 침묵했다는 뜻은 아니어서 식사하는 중에 제헌이 계속 화제로 올랐다. 제헌은 이역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불현듯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곳이었다면 밥상머리 예절을 지키라며 머리통으로 숟가락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게 더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아무렴 알 바인가.

「사장님은 제헌 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아, 뭐 그냥 좀~ 친척 같은 사이? 내가 얘 형님이고 얘는 내 동생이고 그래.」

「친척이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요.」

「친척 같은 사이면 친척 아닌 거 아닐까?」

「아닌데. 내가 보기엔 둘이 완전 똑같이 생겼는데.」

「넌 눈이 궁둥이에 달렸으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어, 이거 맛있다.」

서로 익숙한 사이인지 사방에서 끼어드는 탓에 대화가 참 혼란하게 흘러갔다. 단주가 따끈한 포카치아의 향과 맛에 정신을 빼앗겨 껍데기만 옆에 앉아 입에서 아무 말이나 뱉어내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남의 정신줄을 잡아 오는 방법을 제헌은 하나밖에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단주를 때릴 수는 없었기에 제헌은 그냥 그 대화가 안 들리는 척 건과일이 박힌 갈색 빵과 찹스테이크에 몰두하는 척했다. 

입맛이 고급이 되었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참으로 무색하게도 제헌도 곧 정말로 음식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성격 나쁜 주방장의 솜씨가 좋은 탓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제헌의 입맛이 비싸지지 않은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상당히 괜찮은 식사였다. 의도치 않게 정말로 음식에 정신을 팔다 보니 대화는 어느새 사악한 사장이 어린 동생을 잔악무도하게 부려먹으려는 흉계를 짜고 있다는 악화한 여론으로 흘러가 있었다.

「아니거든? 얘 나이 많거든?」

「몇 살인데요?」

「어, 음, 이제 스물 넘었던가?」

「아동 노동 착취로 신고하자!」

심각한 사안과 달리 과장된 어조로 말한 사람이 와하하 웃었다. 이제 스물을 넘었으면 아동이 아닌 데다 일단 이건 제헌의 나이도 아니었다. 자기 인생이 상당 부분 날아가 버렸으나 제헌은 묵묵히 크랜베리가 들어간 감자 샐러드를 퍼먹기만 했다. 사실관계를 정정해서 해명하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대화를 흘려들으며 식사에 열중하는 때문이지 딱히 단주가 여론에 몰려 쩔쩔매는 게 고소해서 방치하는 건 아니었다. 제헌은 즐거운 마음으로 고소한 샐러드를 냠냠 퍼먹었다. 

대화하다 아침으로 패스트푸드를 먹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주방장 분개하며 좋은 음식에 대한 신념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주는 잔소리꾼 보듯 그를 보았을 뿐이고 제헌은 단주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했다. 원체 사나운 얼굴이라 조금 열성적으로 말하는 것인데도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단주나 그러든가 말든가 익숙하게 구는 다른 직원들이 아니었다면 제헌도 공포에 떨었으리라.

그날 제헌은 구석에 있는 직원 휴게실에서 잤다. 휴게실에 간이침대가 있는 걸 보니 블랙 기업이 틀림없었다만 어쨌든 지금 제헌에겐 유용했다. 놀랍게도 단주의 업장은 24시간 카페여서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이나 밤에는 직원들도 눈치껏 돌아가며 휴게실에서 종종 눈을 붙인다고 했다. 때론 그냥 빈방에서 잘 때도 있고. 어쩐지 늦은 시간까지 마감을 안 한다 싶더라니. 

물론 그 얘기를 한 게 오너인 단주라는 점은 좀 신기했지만, 얘기하는 걸 듣자 하니 본인부터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에는 업무 강도가 널널하다고 해도 굳이 손님도 많지 않은데 야간 근무를 시키다니 한국인답다고 해야 할지. 역시나 악덕 기업이 아닐 수 없었다. 

야간에는 야간 근무자가 있어 사람 몇 명이 교대했다. 얼굴을 익힌 에이린도 퇴근하며 다음 날 보자며 인사를 했다. 제헌이 처음에 짐작했던 것처럼 에이린이 홀 직원 전체를 관리하는 매니저였다. 말하자면 총지배인이다. 일단 제헌도 홀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는 제헌의 직속 상관이었다. 제헌은 본능적으로 바닥이 드러난 내면의 사교성을 모두 끌어올려 살갑게 배웅하여 보냈다. 모아둔 내공이 다 해 진기를 썼으니 아마 수명이 줄었을 것이다.

오늘은 카페 오너인 단주도 여기서 밤을 새운다고 했다. 갈 곳도 아는 사람도 없는 제헌을 배려하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려다가도 좀 한적하다 싶어지면 어김없이 단주가 나타나 사소한 일들을 끝없이 시켰으므로 노동자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심지어 자려고 누웠다가 잠 못 들고 뒤척이고 있는 걸 보고는 억지로 일으켜서 웃는 얼굴로 또 일을 시켰다. 이 악랄한 고용주에겐 사탄도 형님 할 게 분명했다. 

같은 형님을 두어 사탄과 형제가 되어버린 제헌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퇴근도 못 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하다 새벽에나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거의 기절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 잠들어 있던 단주 때문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주 건강에 나빴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같은 침대라든가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휴게실에 있는 간이침대는 아주 좁아서 두 사람이 동시에 누울만한 자리도 없었다. 단주는 3인용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길이를 감당 못 한 소파 밖으로 다리가 비죽 튀어 나가 있는 게 제헌의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있는 거 먹어. 레이가 퇴근 전에 만들어놓은 거야. 어제 아침으로 햄버거 같은 거 사줬다고 얼마나 긁어대는지. 아무튼 까탈스럽다니까."

제헌이 깬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막 잠에서 깬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잠들지 않았던 건지 제헌이 놀라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는 동안 단주는 팔로 눈을 가린 자세 그대로 말했다. 셔츠를 걷어올리고 있어 의외로 가는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틀 전의 위용이 꿈은 아닌 듯 드러난 팔뚝엔 잘 짜인 근육을 따라 비스듬히 그늘이 졌고 잠기운이 스민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탁했다. 내려놓은 블라인드를 투과한 햇살을 가리려는 의도였겠으나 저대로 오래 있으면 팔과 이마에 빨간 동그라미가 생길 터였다.

성격이야 어쨌든 자고로 음식에 까탈스러운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야 하는 법이다. 제헌은 투명한 황금빛으로 졸인 사과가 들어간 파이를 먹으며 그 말을 되새겼다. 산뜻한 사과 향을 거들 듯 시나몬 향이 따라오고 파이 지에선 버터 향이 솔솔 났다. 하루의 시작을 이런 사과 파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어려움은 감수할 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성격 나쁜 빨간 머리 주방장은 정말로 솜씨가 좋은 게 틀림없었다. 제헌은 시원찮은 잠자리를 상쇄하는 맛있는 식사 덕분에 마음이 풀어졌고 그날도 노예처럼, 아니, 가르송처럼 부려졌다.  

카페가 은근히 인기가 많은 데다 처음 하는 일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바빠서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하루가 또 그냥 지나갔다. 이건 뭔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은 잠들기 위해 혼자 자리에 누웠을 때나 떠올랐기 때문에 물어볼 사람도 따질 사람도 없어서 제헌은 그대로 잠들었다. 꽤나 예민한 성정에도 불구하고 종일 이어진 육체노동이 제헌을 베개에 머리만 닿아도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