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종말 좋지 종말을 앞두고 인류가 대 혼란에 빠진 가운데에서 장양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이 자기 생활을 계속해 나가지만 한번도 받아주지 않았던 나근경의 전화를 받아서 처음으로 데이트라는 걸 해보면 좋겠군


검사라서 다른 사람 이목 신경쓰여서 나근경의 배경이랑 얽힐까봐 아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내서 오며가며 인사나 하고 밥 한번 같이 먹은 적 사이인데 5년간 꾸준히 장양에게 호감을 표현했던 나근경 장양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급레스토랑이고 물자도 바닥나고 수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곳이 아직 남아있구나 싶은데 안에 손님 하나도 없고 창백한 종업원만 기다렸다는듯 안쪽의 룸으로 안내해서 들어감 

나근경은 한결같이 깨끗하고 근사한 모습으로 장양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이런 적은 처음이라 목이 탄 장양이 물 한잔을 다 비울때까지 묵묵히 기다림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는줄 몰랐는데요 

-있습니다 메뉴는 한가지 밖에 안 남았지만, 스테이크 괜찮죠? 

이상하게 너무 긴장되고 어색해서 장양은 자꾸 식기를 부딪치거나 칼로 접시를 긁거나 하는 실수를 했는데 나근경은 그걸 놀리지 않고 유연하게 이것저것 대화 주제를 던짐 

음악도 나오지 않는 룸은 너무 조용해서 다른 세상 같았음 나근경이 장양에게 와인을 따라줘서 마셨는데, 얼마 만에 술을 마시는 건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이라, 게다가 긴장해서 와인 반잔을 그냥 꿀꺽꿀꺽 물 마시듯 마셔버림 잔이 비니까 또 따라줌 

-천천히 마셔요 

-아.. 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라 장 검사 체할까봐 

나근경이 웃었음 불편하죠? 이상하게 전에는 그 웃음이 상당히 거만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그냥 맘이 편해져서 장양은 네 하고 고갤 끄덕이며 와인잔을 만지작거림 식사가 어영부영 끝나갈 무렵 나근경이 물었음 

-장 검사, 오늘 왜 나왔어요?

장양은 와인잔의 목을 쥔 채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음 

-너무... 지쳐서요 

운석이 지구에 떨어진다는 소식은 1년 전에 발표되었고 세계는 절망과 희망을 번갈아뒤집어 쓰며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고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공권력이라고 해봤자 재판이니 조사니 제대로 될리도 없어서 장양의 일도 엉망이고 당연히 쥐꼬리만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래도 꾸역꾸역 검찰청으로 처리해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일해온 장양. 

막연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종말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초국가적 연구소 소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모두 낙담했고 누구보다 법과 정의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장양은 이 악물고 버티면서도 제눈앞에서 무너져가는 신념과 법, 정의를 직접 지켜보면서 너무 괴롭고 피곤했음 사람들은 점점 더 서로를 불신하고 차갑게 대하고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을 때 정말 넘치기 직전까지 물잔 같다는 생각에 자기자신마저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는 상황까지 오니까 스스로를 옥죄었던 규칙들도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누구라도 좋으니 잠깐이라도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끝에 나근경을 떠올린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그 많은 시간을 다 말로 할 수 없어서 그냥 지쳤다는 장양의 말에 나근경은 말하지 않은 것들도 다 안다는 듯 고갤 끄덕임 

-장 검사는 성실한 사람이니까 

-당신은요? 5년간이나 거절당했으면서, 왜 아직도 나한테 전화했습니까? 

매주 금요일이면 저녁 먹자는 나근경의 전화가 걸려왔음 안 받으면 문자로 남겨서 용무를 알 수 있었는데 그걸 5년이나 계속하고 이제 곧 세상이 망한다는데도 여전히 전화한 그 마음을 장양은 잘 가늠할 수 없어서 물었음 나근경은 와인으로 입만 축이고 장양을 쳐다보며 웃었음 

-똑똑한 사람이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나근경이 살짝 눈을 내리깔았음. 속눈썹이 원래 그렇게 짙었나 싶었음 

-나야, 장 검사 좋아하니까.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처음 듣는 것처럼 귀가 뜨거워져서 장양은 재빨리 손으로 귀를 가림 너무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래 겨우 굶어죽지 않을 수준의 식료품을 사고나면 남은 돈이 거의 없어서 술이나 담배같은 건 생각도 못했음 

-더 줘요? 

-아닙니다 

-그래 그만마셔요 취하게 만들어서 수작부린다고 오해하면 안 되니까 

-그런 오해 안합니다 

-그럼 다행이고 

일어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지 몰라 장양이 낡은 테이블 보 모서리를 만지작거렸음 

-원래 여기 디저트가 좋았거든요 장 검사도 먹어봤으면 좋았을텐데, 이제는 만들 수가 없다네 이만 일어날까요?

밖으로 나왔을 때 혼란스러운 거리의 소음이 갑자기 찬물처럼 끼얹어졌음 잠깐 굳어있는 장양의 등을 나근경이 부드럽게 밀었음 

-데려다 줄게요 멀지 않죠?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아요 

결국 장양의 집까지 걸어가게 됨 거리 상황이 좋지 않아서 공안 업무를 제외하고는 차 사용이 제한되어서 대부분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녀야 했음 자전거 타는 나근경을 생각하니 왠지 웃겼음 종말이 머지 않았으니 회개하라는 사람들과 종말이 머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살겠다며 여기 저기 부수는 사람들을 지나 걸어가는 저녁은 어딘지 다른 세상 같았음 둘 다 말은 하지 않은 채 걷기만 했는데 그래서 소란한 와중에도 숨소리가 잘 들렸음 나근경이 걷다가 말했음 

-장 검사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손 좀 잡읍시다 

나근경은 장양을 향해 손을 뻗었음 잡아주길 기다리면서 장양은 멈춰선 채 그 커다란 손을 가만히 쳐다봤음 세상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다 보니 이제야 깨달았음 이 손 하나 잡는다고 그것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는 일 따위는 없다는 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장양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그 손을 잡았음 엉망이 된 길을 피해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손을 꽉 잡은 채 걸었음 

-아직도 여기 살아요? 

나근경은 엉망이 된 건물을 올려다봄 지난달에 불이 나서 건물 반쪽은 골조가 흉하게 드러나있었음 

-달리 갈 곳도 없어서요 

나근경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음 집에 다왔는데 이걸 먼저 놔도 되나 싶었지만 나근경이 손을 놓지 않았기에 가만히 서있었는데 서서 한참 있어도 놓지 않아서 말함 

-다왔어요 

-압니다 

-그럼..

-나는 오늘 운이 엄청 좋아요 

나근경이 장양의 얼굴을 들여다봄 

-운이 너무 좋아서, 운석이 지금 당장 떨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되거든 이게 무슨 일일까 하고 

손을 살짝 당겨서 얼굴이 가까워졌음 나근경이 말할때 눈썹과 콧등이 간지러울 정도로 

-실험 좀 해볼까요 

나근경은 장양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음 아주 천천히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때문에 장양은 순간 나근경의 손을 꽉 잡았음 나근경은 하늘을 올려다봤음 

-다행이네 세상 망할 징조는 아니었나봅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게 맞.. 

-들어갈래요? 

하늘을 보던 나근경의 눈이 장양에게 향했음 장양은 충동적인 말을 1초만에 후회했지만 말을 무르지 않았음 나근경은 약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갤 갸웃 거리며 장양을 쳐다봄 

-장 검사, 나를 안에 들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입니까? 

나근경이 고갤 비스듬히 돌려 장양의 귀에 속삭임 

-방금 했던 애들 장난하고는 차원이 다를텐데 

낮은 목소리에 명치 어딘가가 간지러웠음 장양은 고갤 똑바로 들고 나근경을 쳐다봤음 

-그래서, 들어갈겁니까 말겁니까 

-....생각해보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당장은 못 돌아가겠네요 

나근경은 천천히 한걸음 앞선 장양이 이끄는대로 걸었음 살짝 뒤에서 보는 귀가 빨개져 있어서 물고 싶었음 장양이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부터 나근경은 장양을 끌어당겨 안았음 열쇠가 바닥에 떨어지고 장양의 낡은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고 급하게 옷 안으로 밀려들어온 손의 감촉이 낯설어서 장양은 도망갈듯 몸을 뺐지만 벽과 나근경 사이에 갇혀 피할 곳이 없었음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데 

장양의 아랫입술을 문 채 나근경이 속삭임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장양은 대답대신 나근경의 목에 팔을 두르며 제쪽으로 당겼음 무서울정도로 낯선 쾌감으로 꽉 채운 밤이 끝날 무렵 장양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음 안 잔건지 깬건지 나근경이 장양의 목에 입을 맞춤 장양이 쉰목소리로 말함 

-넌 짐승이야 

-좋았으면서

장양의 집은 불에 타진 않았지만 화재의 여파로 거실 천장 귀퉁이가 무너져서 그걸 비닐로 보수해놨음 덕분에 거실바닥에 누워있으니 밤하늘이 보였음 수천대의 위성이 반짝거리는 하늘 그걸 나근경과 누워서 보고있자니 참 이상한 일이었음 

-이제 존댓말 안해? 

-안해 

-아쉽네 나근경씨 라고 할때마다 좀 섰는데 

장양이 질색하며 머릴 밀어내자 나근경이 웃으며 장양의 허릴 끌어안았음 몸이 욱신거려서 신음하는 장양을 품에 안은 채 목덜미에 코를 묻는 나근경은 친근하고 다정하고 어쩔 수 없이 불쌍해보였음 

-내일도 검찰원에 출근 할거야? 

-해야지 

-내일도 만날래? 

-....그래

그렇게 장양은 나근경에게 삶의 일부분을 내줬음 나근경은 매너있게 굴었지만 가끔 예전에 하던대로 장양 속을 뒤집어 놔서 싸우기도 했지만 뭔가에 화를 내고 또 뭔가에 웃는다는 사실 자체에 장양은 만족했음 하루하루 출근하는 동료들이 적어지고 부장실에서 총으로 머릴 쏜 부장님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 총을 들고 이젠 정말 한계라고 생각했을 때, 나근경의 전화벨이 울린 것은 이 엿같은 세상에서 아주 작은 기적이었다고 장양은 생각했음 

깡패는 깡패대로 새 시대에 금방 적응했겠지만 그쪽도 끝이 다가오니 혼란스러운건 마찬가지인지 나근경은 아예 장양의 집에 들어왔음

불길한 카운트다운을 모른척 하며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출퇴근 길을 데려다주고 몸을 섞었음 나근경은 한번 할때마다 5년에 걸쳐 할 것을 몰아서 할 것처럼 굴었고 장양은 그 힘에 밀려 매달려 소리질렀음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건물에 방음은 안되겠지만 들을테면 들으라지

-죽는 게 무서워? 

장양이 물었을 때 나근경은 곧장 대답했음 

-난 14살때부터 죽는 게 무서웠는걸 근데 그건 나만 죽을까봐 무서운거고 이건 다 죽는다니까 별로 안 무섭네 

-깡패심보네 

-깡패니까. 너는, 장양, 무서워? 

-무섭지 

-그래도 전부 눈깜짝할 사이에 죽어서 죽는 것도 모르고 죽을거라더라

-사실 우리 이미 죽은 거 아닐까 

-그러기엔 섹스가 너무 생생한데 

장양이 나근경의 가슴을 찰싹 때림 나근경이 웃으며 장양의 손을 가져다 깨물었음 

-그날도 출근할거야? 

-.......해야지 

-안 하면 안 돼? 

나근경은 태평하게 말했지만 말 속에 담긴 불안은 숨겨지지 않았음 장양은 몸을 웅크렸음

-적어도 죽을 때는 같이 있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왜 없어 아주 큰 의미가 있지 

나근경은 동그랗게 말린 장양의 등에 입맞추며 말했음 저녁 초대했던 레스토랑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장양을 기다렸던 시간들은 아주 길었고 지겨웠고 거의 자신을 죽일뻔 했다고. 1년전 사태가 나빠지면서 레스토랑이 폐업했는데 그걸 나근경이 사들여서 손님이라곤 없는 레스토랑을 매주 금요일에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 장양을 기다리던 룸 안에서 처음엔 오기로 나중엔 절망으로 채우는 시간이 자신은 이미 종말의 끝에 서있다 온 기분인데 적어도 진짜 끝의 끝만큼은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않다고 그러니까 죽을 때는 꼭 같이 있어달라는 말은 너무 진심이라 장양은 울고말았음 


결국 마지막날 장양은 출근을 했는데 나근경이 따라왔음 검찰원은 텅 비어 있었고 늘 시끄럽던 거리는 그날따라 몹시 고요했음 서류가 잔뜩 쌓인 자신의 책상에 마지막으로 앉아 서명해야 할 서류에 서명하고 장양은 책상을 깨끗이 정리한 뒤 나근경과 함께 검찰원을 떠남 마지막날에 대한 거창한 계획이 없어서 두 사람은 그냥 장양의 집으로 돌아왔음 남은 재료를 털어서 배부르게 먹고 거실 천장에 붙였던 비닐을 떼고 맨 하늘을 올려다봄 

-섹스하다 죽으면 곤란할까 

-할거면 빨리 하자 

장양이 나근경을 끌어안았음.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서로의 존재를 실컷 확인해서 비슷한 온도로 체온이 맞춰졌음. 다행히 그와중에 운석이 떨어지진 않았음 장양은 나근경을 안은 채 나근경이 머그컵에 따라준 와인을 마셨음 처음 같이 저녁 먹은 날 마시고 몇 병 남은 걸 챙겨와서 이제 마지막 병이었음 

-후회하지 장양 

-뭘 

-나랑 더 빨리 만나야했다고 후회하지 않아? 

-안 해 그건 옳은 일이었어 

-말이라도 좋게 해줘라 좀

나근경이 투덜거리는 걸 장양은 웃으며 쳐다봤음 

-하긴 내가 하필 그런 외곬수한테 빠진 게 문제지 세상이 망하는데 재판을 준비하는 그런 사람을... 그래서 좋아했지만. 

-고마워 

-뭐, 잘생긴 얼굴? 

-같이 죽어줘서 

나근경은 장양을 쳐다보다 키스했음 몸을 붙인 채 입술이 떨어지면 다시 붙기를 반복하면서 두 사람은 오래 숨을 나눴음 하늘이 빨간 빛으로 물들때까지 오래오래 적어도 절망 속에 죽지 않고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작은 행복 속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장양은 나근경의 입술에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굴렸음 나근경이 웃었고 세상이 끝났음


~ 하는 걔 / 개

109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