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가방 끈을 붙든 대만의 손이 리듬을 타듯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을 맞춰서 걸어주는 선배. 키가 비슷함에도 태웅은 늘 조금 높은 시점에서 대만을 내려다보게 된다. 반듯한 이마와 눈썹 위까지 내려온 짧은 머리카락. 꽤나 부드러워서 자꾸만 손가락을 넣어 만지고 싶어졌다. 



부끄러우면 귀 끝이 발개지고 민망하면 목소리부터 높인다. 허허거리며 후배들과 잘 지내면서, 경기를 할 땐, 듬직한 선배다운 모습을 보여주고…강백호 같은 놈들과도 어울려준다. 체육관에 가면 늘 여름 햇살을 받으며 활짝 웃어주는 대만의 얼굴에 심장이 뛰었다. 그저, 농구가 좋았는데…농구를 하는 당신이 너무 좋아져 버렸다. 조금 말려간 입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턱의 상처가 신경 쓰였다. 그때, 당신 곁에 있었으면…선배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요즘 태웅은 무심코 대만의 무릎을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입밖으로 말을 뱉지 않을 뿐이다.






“그늘로 앉아요…”

“아, 어”



편의점 차양이 드리워진 야외 테이블. 그늘진 곳으로 대만을 밀어 넣은 태웅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 앉으면, 절루가~라며 부끄러워할 것이 분명하기에 나름 전략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태웅아, 뭐 안 먹어도 돼?”



간단한 샌드위치와 간식거리를 사 들고 온 준호가 자연스레 대만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우물쭈물하던 소연이 태웅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전, 괜찮아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지, 음료수만 하나 달랑 들고 온 태웅이 신경 쓰였는지, 작은 과자 통을 뜯어 중앙에 놓은 준호가 “그래도 좀 먹어둬…”라며 후배녀석을 챙겼다.



“네…”



짧은 대답과는 달리 태웅은 그다지 먹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매일 늦게 마쳐서, 낮에 여기 오니까 이상하다, 그치?”, 준호의 말에 대충 고개만 주억거리며 대만이 꼴딱-마른침을 삼켰다. 어색하다, 어색하다, 어색해 미치겠다.



‘이 조합, 정말 미치도록 불편하네…’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덜덜덜-떨어 대던 대만이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간단하게 컵라면이나 하나 먹으려 했는데, [제대로 먹어요. 늦게까지 있으려면 배고플 텐데…]라며 잔소리를 하는 태웅 때문에 제법 푸짐한 도시락 세트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플라스틱 포크 끝으로 반찬을 조금 휘젓던 대만이 태웅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남.기.지.말.아.요.라며 달싹이는 입술.



‘하아, 난 왜 저걸 알아듣는 거야? 글고, 저 녀석, 자긴 음료수로 떼울 거면서…’



달그락-달그락-플라스틱 컵 안에 가득 든 얼음을 흔들면서, 태웅은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소연아, 얼른 먹어…”라며 눈치를 보는 소연에게 샌드위치를 권하며 준호가 얇은 비닐 포장을 먼저 뜯었다. 권준호, 정말 대성할 인간이야. 성격이 너무 좋아…등의 생각을 하며 멍한 얼굴로 도시락만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톡톡-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대만의 손등위로 떨어졌다. 어? 고개를 들자, 조금 비스듬히 앉아있던 태웅이 상체를 숙이며 제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뭐?!’

‘얼른 먹어요. 먹여줄까요?’

‘미쳤냐?’



입술을 달싹이며 속닥대는 두 사람이 신기한 지, 한참을 둘을 관찰하던 준호가 입을 열었다.



“하하, 두 사람 사이 좋아졌네~”

“어??”


대만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아니이~태웅이가 선배라고 너 챙겨주는 거 보니까 좋아서…”

“아…”



머리를 긁적이며, 대만이 쿡-비프스튜처럼 생긴 덮밥 소스안에 굴러다니던 잘 익은 감자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냥, 맨날 같이 다녀서 그런가? 하하하. 요즘 쟤랑 원온원한다고…”라 말끝을 흐리자, “그래도 대만이 너 덕분에 태웅이가 같이 플레이할 상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다독여주는 준호는 예나 지금이나 퍽이나 다정했다. 피식-웃으며 감자를 삼킨 대만이 이번엔 비엔나 소시지를 집어 입에 넣었다.



“안 그래? 태웅아…?”

“…네, 배울 게 많아요. 대만 선배한테…”

“그치? 대만이가 농구 하나는 그 누구한테도 안 밀리지~하하, 우리 MVP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켜세워주는 건데? 으흠, 목을 가다듬으며 대만이 얼굴을 붉힌다. 태섭이 놈이었으면, 시끄러우니까 입 다물고 얼른 먹으라고 윽박이라도 지를 텐데…준호에겐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민망한 마음에 그만하라고 툭-팔꿈치로 준호를 치자, “아~알았어, 알았어~”라며 해사한 미소를 보여준다.



“아, 그러고보니, 소연인 태웅이랑은 처음이지? 이렇게 사적으로는?”

“…네”



준호의 말에 태웅을 보며 얼굴을 붉힌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긴장이 되는지, 샌드위치는 먹는 둥 마는 둥. 작은 두 손으로 빵을 잡고 조금씩 뜯어먹는 걸 흘깃 보던 대만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엄청 수줍어 하네. 하긴,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불편할 지도. 어? 근데 좀전까지 준호랑은 잘 얘기하던데…내가, 아직도 무섭나?란 생각까지 들었는데 순간 태웅에게로 쏠린 소연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대만은 느낄 수 있었다.



‘….!’



두근-두근-두근-



'뭐...야?'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한데, 평소와는 다른 두근거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만이 포크 끝으로 애꿎은 쌀알만 골라내고 있었다. 소연의 입으로 집적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아이, 태웅이 많이 좋아하는구나. 태웅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때론, 태섭이나 백호랑 툴툴대면서, 저놈 저건, 무슨 인간 자석이냐? 왜 저렇게 사람이 붙어?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가 서태웅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편하지? 그제야, 대만은 자신이 지금까지 느꼈던 이 어색한 자리에 대한 거부감이 어디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태웅이랑은, 같은 학년이니까 자주 보지 않아? 너네 반 붙어 있는 거 아냐?”



귓가에 울리는 준호의 목소리. 이번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순수하게…팬으로써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아냐, 그게 말이 되냐?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대만이 또다시 한쪽 다리를 조금씩 떨어 댄다. 이거 참, 뭐야? 눈 앞에서 비밀 연애중인 애인 놈을 짝사랑하는 상대를 만나고, 또 그걸 이어주려는 마음 좋은 동네 오빠가 나오는 막장 드라마속에 들어온 거야, 나? 



준호의 말에 소연인 예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곤란하다며 ‘준호오빠, 그만 해요~’라고 웅얼거렸고, 태웅은 관심 없는 듯, 스트로우를 만지작대다 쭈욱-음료수를 빨아올렸다. 달그락-태웅의 음료수컵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얼음이 녹아내렸다. 제법 마셨는지, 절반 정도 훅 내려간 투명한 액체와 하얗고 긴 손가락을 바라보던 대만이 깊게 한숨을 삼킨다.



‘내꺼라고 생각했나 보다, 저놈은 서태웅인데…’



가슴이 조금 먹먹하다. 자꾸만 태웅과 눈이 마주치는데, 대만은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꾸역꾸역 감자를 하나 더 입안에 밀어 넣었다. 얼른 먹고 가야겠다…싶어서, 크게 맨밥을 한 가득 퍼서 입에 넣는데, 뭔가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서태웅 선수야 워낙 유명하니까…근데 전 지나쳐도 눈에 띄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아마, 잘 모르실꺼예요”

“그래? 그래도 체육관이랑 경기장에서 자주 보니까…복도에서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치, 태웅아?”



준호의 말에 하는 수 없다는 듯, 네, 짧은 대답을 한 태웅.



‘바보, 서태웅…싫단 얘긴 안 하네…’



하긴, 완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치수 동생이니까 친하게 지내면 나쁘진 않겠지…라고 납득해보려 했지만, 곱씹으니 확-열이 받았다. 포크 끝으로 애꿎은 비엔나 소시지를 세동강으로 쪼개며 대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편해 죽겠네...'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보려는 준호와 얼굴을 붉히며 더듬대는 소연. 별 생각없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자신이 얼마나 잘 먹고 있는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태웅. 그러니 이 놈의 덮밥이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갑해…’



밥을 입안으로 욱여 넣곤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데, 쿨럭, 쿨럭, 사래가 들렸다. 급하게 포크를 내려놓고 얼굴을 붉히고 켁켁거리자, “어, 대만아, 여기 음료…”라고 옆에 앉은 준호가 주스를 내미는 순간, 태웅이 긴 팔을 뻗어왔다.



“여기요…”

“….?”



두 눈이 벌개져서 태웅을 올려다보는데, 자신의 입술 바로 아래 음료수를 대어준다. 아무런 생각없이 태웅이 내민 음료를 쭉 빨아들이곤, 하아, 살겠다…라 중얼대자, 입가를 닦아주는 엄지손가락.



두근 두근 두근-



“고…고맙다…”



얼굴을 붉히는 대만을 바라보며 고개만 까딱하는 태웅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불편한가보네, 선배...'



 차양 아래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엄청 긴장한 거 같은데…그럼에도 우물거리며 식사를 하는 것이 자신과의 약속 때문임을 태웅은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살이 닿아도 혼자서 파스스-놀라고 얼굴을 붉히는 것이 귀여워서 자꾸만 손을 대고 싶어졌다.



‘손잡고 뽀뽀하고 싶다…’



조금 헝클어져서 삐죽이는 대만의 머리카락을 스윽, 정리해주며, “천천히 다 먹어요…”라 훈수를 두자, “열심히 먹고 있거덩?!”, 궁시렁거리며 대만이 콧잔등을 찌푸린다. “너 때문에 더 못 먹겠다. 잔소리 좀 그만하지?”라며, 대만이 그제야 준호가 내민 주스캔을 흔들었다.



“줘요, 따줄께요…”

“어? 으응…”



아무 생각없이 태웅에게 캔을 내미는 순간, 아차차-옆에 애들 있었지? 싶어서 “저, 야, 내가 할께…”라며 우왕좌왕하는데 촤악-하얗고 긴 손가락이 단번에 캔을 따준다.



“하하하…내가 맨날 운동 끝나고 힘없다 하니까…얘가 음료수 따주는 게 루틴이 돼 버려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자, “원온원이 효과가 있었나봐? 태웅이 마음을 다 얻고?”라며 미소를 선보이는 준호. 하아, 제발, 준호야…그 얘긴 하지 말자~란 표정으로 친구 놈을 쏘아보던 중, 대만의 시선이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소연에게 스쳤다.



두근 두근-



‘뭐야, 얘? 그러고보니, 좀 전부터 태웅이만 보고 있네…’



소연의 시선을 따라가며, 대만이 꿀꺽-꿀꺽-주스를 비워버렸다. 입안이 씁쓸하고 또다시 가슴이 답답하다.



‘하하하, 설마, 나? 고작 1학년 여학생, 그것도 치수 여동생한테 질투라도 하는 건가?’



연습을 구경하러 오는 여학생들은 워낙 많으니까…또 체육관 뒤에 줄지어 선 학생들을 일일이 신경 쓰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 평소엔 몰랐는데 눈 앞에서 서태웅을 동경하는 예쁘고 가녀린 여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치수랑은 안 닮았네...'



처음엔 그저 치수를 응원하러 오는 거라 생각했는데…물론 친오빠를 응원하려고 매번 체육관을 찾을 리는 만무하고. 강백호 녀석이랑 친한 거 같아서, 백호네 친구들과 같이 다니는 건가?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면…결국, 이유는 한 가지였다.



“소연이가…태웅이를 많이 좋아하는 가 보네?”



읏, 망했다. 속으로 생각했어야 하는데 무심결에 입밖으로 뱉은 생각. 대만이 인상을 구기며 어색하게 웃어보지만 이미 뱉은 말은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네?!!”

“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소연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두 볼이 발개진 것도 모자라서, 눈을 어디 둘 지 몰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아, 그게…제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요?”라고 웅얼거린다. “아, 아냐, 내가 미안…그냥 무심결에…”, 손사레를 치며 대만이 오히려 미안해하자, 소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음료수를 집었다.



“그, 그게…제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태웅 선수 본 게…”



당황한 소연과는 달리 평온한 얼굴의 태웅은 대만의 표정만을 살피고 있었고, 조금 장난끼가 오른 준호가 “하하하, 소연이가 원래 태웅이 팬이지 않았어? 중학교때부터…”라 부연 설명을 해줬다.



“그, 그만해요! 준호오빠! 서태웅 선수한테 미안하게…”

“뭐, 어때? 태웅이도 다 알고 있지 않았어? 소연이가 엄청 열렬한 팬인데~”

“오빠…”



태웅의 눈치를 보며 소연이 준호를 말렸다.



“왜애? 하하, 너네 아직 말도 안 텄다며~이참에 친하게 지내면 좋지~안 그래 대만아?”

“아, 어…뭐, 그렇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만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아직 한마디도 안 한 거냐? 쟤가 좀 냉랭하긴 한데…”

“….”

“동갑인데, ‘서태웅 선수’보단 편하게 불러도 되지 않나? 어, 태웅아?”



주스캔을 비워내며 우물거리던 대만은 찌릿-뚱한 표정으로 매섭게 자신을 쏘아보는 태웅의 모습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뭐 어쩌라고?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뭐라 하는데, 어? 내가 너랑 사귀니까 절대로 니 근처에 가지 말라고, 어리 애를 윽박이라도 지를까?!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뭔가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아서 하하하…대만이 쓴 웃음을 흘렸고 점점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건 태웅도 마찬가지였다. 



‘귀여워서 봐주려고 했는데, 안되겠네, 정대만...도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건지...’



가만히 듣고 있던 태웅이 탁-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내려놓는다. 이 사람 허술하고 영 신경이 둔하다.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어디론가 흘러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은 태웅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내 마음이 어떤 지 모르면서…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테이블에 팔을 괸 태웅이 똑바로 대만을 응시했다.



두근 두근 두근-



“준호선배…”

“어? 어?”



눈은 대만을 향하고 있었지만 태웅은 준호를 불렀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어?! 진짜!??”

“….!!!”



두근 두근 두근-



미, 미쳤냐? 서태웅?!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포크를 꾹 쥔 대만의 손이 살짝 떨렸다. 야, 그만 안둬?!라며 눈을 부릅떠보지만 잘생긴 애인 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뭐야~태웅이는 농구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

“누구야, 어떤 사람?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이럴 땐, 권준호의 친숙함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싶었다. 하아,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만이 빈 주스캔을 들었다 놨다 혼자서만 분주하다.



“중학교때…부터 좋아했는데…”

“….”

“그땐, 몰랐어요. 좋아하는 건지. 근데, 최근에…’

“최근에?”

“네, 최근에 고백했어요. 예뻐요, 무척…”



소연의 커다란 눈망울이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흔들렸고, 준호는 이 어마어마한 고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한 눈치였다. “농구만 하는 줄 알았는데…태웅이도 연애에 관심이 있었구나? 대만아 넌 알아? 너네 둘이 매일 같이 다니니까…”라 웅얼거리던 준호는 귀 끝과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바짝 얼어 있는 대만을 돌아보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설…마? 하하, 아니겠…지?’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준호가 말을 고른다. 대만과 태웅을 번갈아 살피는데...둘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말을 잘못 꺼낸 거 같네...'



뭔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 노력한 건데, 전개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훗날 준호는 이날을 떠올리며,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태웅과 대만 두 사람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지 상상도 못했다고 툴툴대곤 했다.



‘근데, 지금은 엄청 곤란하네?’



갑작스러운 태웅의 고백에 소연인 시무룩해져 있었고, 요주의 인물 둘은 말을 아끼며 눈치만 본다. 어떡하지?? 다행히 준호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파해 줄 구원투수가 등장한 것이다.


“안경선배!!!”



맞은편 횡단보도 쪽에서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준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 강백호!”,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자, 백호와 태섭 그리고 한나가 이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뭐해요? 아직 안 갔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태섭이 고개를 갸웃하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준호에게로 오던 백호는 태웅의 옆에 앉은 소연을 보곤 기겁을 했다.



“아니!! 이 야비한 새끼! 내가 없을 때 우리 소연이를. 소연아, 괜찮아? 서태웅 놈이 이상한 짓 하거나 한 건 아니지?!!”



다짜고짜 테이블로 다가와 백호가 길길이 날뛰자, 그럼 그렇지...하며 태섭이 혀를 찼다.



“백, 백호야~아니야, 그냥 가는 길에 다같이 뭐 좀 먹은 거야~”

“서태우우웅~!!”



씩씩거리며 태웅에게 달려드는 백호를 소연이 나서서 뜯어말렸다. 소연의 말에 잠시 수그러드는 것 같더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태웅을 쏘아보는 백호. 결국 소연이 백호를 붙들곤 편의점 계단 아래로 내려갔고, 대만은 묵직했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하, 백호가 오니까 활기가 넘치네…”라며 한숨을 돌리는 준호. 그리고 “한나야, 너도 뭐 마실래? 덥지 않아?”라며 한나를 붙들고 편의점으로 총총총 들어서는 태섭. 하아, 역시 정신없어…라 낮게 중얼대던 태웅이 스윽-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요…”

“….어?”



다시금 태웅이 손을 내밀어왔다. 멍하니 태웅을 올려다보던 대만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어마어마한 무리수를 두고 있는 이 어린 남친이 든든하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손을 뻗어 하얀 손가락을 꾹 붙들었다. 팔에 힘을 주어 절 일으키는 녀석에게 의지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읏차, 습관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그러다 주름 생겨요…”라며 단단한 손가락이 이마에 와 닿는다. 슥슥-제 주름을 펴겠단 의지로 미간을 만지작대는 태웅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너, 진짜 못 말려…”라 속삭이자 그저 어깨만 으쓱한다.



‘이리 와요…’



입술을 달싹이는 태웅을 보며 대만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테이블을 돌아 태웅의 곁으로 가자 허리에 자연스레 감기는 긴 팔. 찌릿-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그냥 두면 선배, 도망갈까 봐요…”라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도망치긴 누가…!”

“…선배요”

“너…”



자꾸 그러면 뽀뽀할 꺼예요…귓속말보다 더 간지러운 숨결이 민감한 귓볼에 닿자 파르르 대만의 속눈썹이 떨렸다. “손 좀 떼시지?”, 쿡-팔꿈치로 태웅의 옆구리를 치는데, “어이! 두 사람, 뭐해요?! 안 가려고?! 아직도 여기 있었어요?”라며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는 태섭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서태웅, 잘 됐나 보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게, 연애란 좋긴 좋구나...'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 태섭이 대만에게로 다가왔다. 까딱 까딱-고개 좀 숙여보라는 제스처에 대만이 허리를 굽히자, 들려오는 목소리. “선배, 사람들 앞에서 너무 티 내진 말고~적~당히 해요~”, 큭큭, 낮게 웃으며 한나와 함께 편의점 계단을 내려가는 태섭의 등 뒤에 쌍욕을 날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대만이 먼저 걸음을 옮긴다. 끝까지 자신의 어깨를 붙든 손을 놓지 않는 태웅을 슬쩍 돌아본 대만의 입새에 한숨이 서렸다.



'얘 고집을 누가 꺾어...'



계단을 내려와 우측으로 돌아가자, 한나와 태섭, 준호, 백호 그리고 소연이 늦게 내려오는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대만 선배! 여우놈이랑 무슨 얘기한 건데?!”

“시꺼, 강백호…”

“요즘 맨날 둘이 붙어 다니죠? 조심해요~그러다가 선배도 저 자식한테 물들…”



깝쭉대는 백호가 대만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 선 태웅이 “시끄러, 빨간 머리…”라 윽박지른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 같기도 하고...



"대만 선배, 건드리지마"

"뭣이?!! 야, 대만쒸가 니꺼냐?!! 웬 상관이야?? 나랑 더 친하거든?!"

"....!!"

"최근에 대만쒸가 니 상대를 해줬다고 착각하나본데 원래 이 몸이 개인 연습을..."

"내꺼야, 그러니까 손 대지마"

"에엥???!!"



'하하하, 이것들이 사람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로 언성을 높이는 후배놈과 잘나신 남친을 바라보던 대만이 결국 나섰다. “그만들 해라~서태웅, 너도 이리로 와…”, 태웅의 손목을 붙들어 제 등 뒤로 당기며 대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니, 대만쒸??!! 저 여우새끼 편 드는 거야??!"

"편이 어딨냐?! 사사건건 시비 걸지마~강백호 "


이 상태로…오늘 과연 끝까지 공부를 할 수는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안되겠다 싶었는지 준호가 백호에게 다가왔고, 한숨을 뱉은 대만이 태웅의 손을 잡아 끌었다.



“너도 일일이 상대하지 마…”

“...."

"...대답?"

"....네"



바락바락-대드는 백호를 무시하며 태웅이 대만의 뒤를 따른다. 자신의 손목을 잡은 선배의 손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가자, 백호야~대만이 말이 맞아…”

"안경선배~~"

"태웅이가 아직 백호 니 표현을 잘 이해 못해서 그런거야~악의는 없어~또 태웅이도 대만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너무 자극하지 말자고~"



준호가 씩씩대는 백호를 달래 주었다. 역시 여럿이 모이니까 시끌벅적하네. 이 순간, 채치수의 부재가 사뭇 그리운 준호였지만, 지금은 이 녀석들을 어떻게 든 모레 있을 재시험에 합격시켜야 했다. 후우, 준호가 깊은 한숨을 뱉으며 백호의 등을 툭툭 두드린다. 투덜대면서도 백호가 걸음을 옮겼다.



“근데, 안경선배…”

“어?”

“저기, 저 두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묘~하게 엄청 가깝네~”

“…어?”



고개를 든 준호의 눈엔 앞장서서 걷고 있는 태웅과 대만의 뒷모습이 보였다. 대만의 어깨를 꼭 붙든 채, 태웅은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있었다. 강백호, 이런 쪽으로는 예리하네? 백호한테 들킬 정도면 다 들킨 거야, 대만아…하하하. 친구놈의 애정전선이 꽃길이기를...조심스레 기원하며 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냥, 모른 척해주자, 백호야…”

“에? 뭘요?”

“그런 게 있어~”



피식-웃는 준호의 등 뒤로 뜨거운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태웅아...풋, 막 지르고 싶구나...

* 탱댐 소장본 발간 공지가 떴습니다! 성인물이라 안타깝지만 성인분들만 구매 가능하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공지 확인해 주세요!







농놀중/탱댐/19금/내가 읽고 싶은 거 쓰기*자급자족*

JIN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