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시크 급행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호화로운 열차에서 내리자 짐을 옮길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먹고 자는 거야 문제 없다만 조금이라도 개인 짐은 있었다. 대기하던 이들이 계단식으로 있던 열차 아래의 공간에 넣어둔 짐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객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짧은 기차 여행을 끝내고 제 짐과 기다리던 일꾼들을 확인한 뒤에 이동하기 시작했다. 열차가 내려준 외곽지에서 중심으로 향하는 것이다.

펠메즈디예는 폐쇄적인 도시다. 지형 자체가 절벽 위의 고원이라 접근을 어렵게 하는 데다 황제의 궁이 있는 장소라는 이유로 출입도 통제된다. 아래에서 통찰의 눈이라 불리는 마법사가 지키고 있어 황도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일부의 허락 받은 사람들 뿐이다. 

중서부를 떠나올 때는 대규모 인원에 끼어 복작거렸는데 지금은 그에 비하자면 아주 소수만 남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을 전부 합해도 서른이나 될까 싶었다.

그렇게 고원으로 올라온 뒤에도 격차는 곳곳에 있었다. 고원 위의 기울어진 지형 탓에 수직적 위계가 시각적으로 드러났다. 고원은 절벽과 비교해 완만하지만 완전히 평탄하지는 않아서 지리적으로 높낮이가 있었다. 이것 또한 위계를 표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일단 절벽 가장자리에 슬그머니 아래로 기울어진 땅은 다른 곳보단 좋지 못하다는 게 자명했다. 건물의 외관만 봐도 수준이 다르기는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릴리도 아주 완만한 오르막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린 열차에서 내린 릴리는 오르막을 걸으며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지대가 높기는 해도 어쨌든 땅을 딛고 서 있는 데다 눈앞에 허공이 펼쳐져 있지는 않으니 퍽 안심이 되어서 이젠 주위를 둘러보며 구경할 정신이 생겼다.

펠메즈디예의 건축물은 돌로 지어져 있었으며 대부분 건물 외벽을 부조로 장식하고 있었다. 외곽의 기울어진 땅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건물들과 달리 안쪽으로 향할 수록 겉에 있는 부조가 다양하고 섬세해졌다. 황궁까지 이어진 길도 아름다운 빛깔 돌을 깔아두었다.

이 고원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조차도 실제로 제국 전체에서는 상위에 속한 사람일 거란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일단 부조까지 있는 석조 저택에서 사는 사람이 낮은 신분일 리는 없으니까.

릴리가 앞을 보았다. 굉장히 완만한 오르막을 걸어가며 고개를 들면 시야를 채우는 높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런대로 평탄한 고원에 자리 잡은 언덕이 길을 오르는 자들 앞에 작은 산처럼 시야를 막고 있었다. 건물들이 경사면에 지어져 꼭 수십 층이나 되는 고층 건물처럼도 보였다.

언덕을 이룬 고지대에는 황궁이 자리 잡고 있어 길을 올라가며 황궁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방문하는 자들이 경외를 느끼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릴리는 경외보다는 좀 다른 걸 느꼈다.

"저길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거야? 중부는 객에게 박한 걸."

릴리가 허리를 쭉 폈다. 펠메즈디예에는 다른 이동 수단을 이용할 수 없단다. 걷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오르막이라 좀 고생이다 싶었다. 

릴리가 먼 황궁 방향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필리엔이 괜히 변명을 했다.

"중부에선 걸을 수 있는데 걷지 않는 건 낭비라고 한다 들었습니다. 그런 문화 영향이겠죠."

"그래요. 알았어요. 멀쩡한 두 다리 놔둬서 뭐 하겠어요."

"힘드시면 제가 끌어드릴까요?"

릴리를 중심으로 필리엔의 반대편에 서 있던 로라가 그리 말하며 슬그머니 릴리 앞으로 갔다. 릴리는 피식 웃었다. 경사가 완만해서 로라가 위쪽에 서도 릴리 시선 아래였다. 그런데 끌긴 뭘 끈단 말인가. 하지만 경사지를 걷는 것도 심심하던 차였다.

"어디 해보든가."

릴리가 손을 내밀자 로라가 앞에서 잡고 끌었다. 노력은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투자 대비 효용이 무척 나빴다. 릴리는 몇 걸음 가다가 웃으며 그만 됐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릴리가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려는 순간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있었다.

"필리엔?"

"저도 밀어줄게요."

연인 간 스킨십이니 기대가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필리엔은 정말로 정직하게 릴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주기만 했다. 그것도 매우 잘 밀어주었다.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붙인 것도 아닌데 릴리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선두로 나아가게 되었다. 어느새 로라가 앞이 아니라 살짝 뒤로 처져서 헥헥대며 따라오는 지경이었다.

"로라, 괜찮아?"

"괜찮아요."

완만하긴 해도 오르막이라 평소보다 빠르게 걸으니 숨이 찼다. 뻔히 보이는데도 로라가 괜찮은 체를 했다. 필리엔이 슬쩍 속도를 내렸다.

"제가 너무 서둘렀습니까?"

"아무래도 좀 빠르긴 했죠. 이왕이면 다른 쪽에서 진도가 빠르면 좋았을 텐데요."

"다른 쪽이요?"

분명 릴리가 나이가 더 적은데 가끔은 필리엔이 어리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릴리는 그냥 어깨에 올라간 필리엔의 손을 토닥여주기만 했다. 필리엔이 뒤늦게 의식했는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래도 걸은 만큼 더 걸으면 도착하겠어요."

뒤따라온 로라가 가쁜 숨 사이로 말했다. 그런 뒤에 경사가 제법 있는 길을 또 올라가야 하는 것 같지만 거기까진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게 현명하겠지. 다만 계속 눈앞에 펼쳐져 있는지라 아예 생각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뭐어, 그래도 해가 지기 전엔 가겠지."

로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필리엔도 다시 걷는 속도를 늦춰 느긋하게 걸었다. 오르막길이 편리하진 않았지만 그나마 길이 넓고 쾌적해 다행이었다. 산책이라도 한다 생각하면 덜 힘들지도. 

순식간에 길을 따라 걷고 나니 주위 풍광이 꽤 많이 달라졌다. 중서부에 있는 이안드도 건축물의 규모와 형태를 통해 소유주의 신분이나 빈부를 알 수 있었지만 중부 고원 위의 펠메즈디예에서는 그 격차를 물리적으로 훨씬 빽빽하게 늘어놓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간이 협소한 탓에 그게 한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완만한 길을 따라 릴리도 점점 위로 향하고 있다. 시선을 들어 저 멀리 보이는 황궁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각각의 건물이라는 게 보였다.

여러 궁이 모여 있어 규모만으로도 하나의 마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기울어진 땅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탓에 궁도 조금씩 다른 층에 놓여 있었는데 황제께서 머무는 궁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형태였다. 릴리는 지형이 구조를 결정했을지 아니면 그 역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사실을 따지고 보면 황제의 궁이 가장 높은 곳에 있지는 않았다. 태양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건축물이 하나 더 있다. 다른 누군가의 궁은 아니고 새로운 황좌의 주인이 탄생할 때 즉위식이 일어나는 장소다. 현재 이 모든 것의 주인인 비스타비오 메이하도 그곳에서 황제가 되었다. 

여기까지 적병이 올 거란 우려가 없이 지은 황궁은 주위에 성벽을 높게 두르거나 하지는 않아 그 모습이 어디서든 보인다. 릴리는 당연히 즉위식 장소도 잘 보이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위치 탓에 가려 아래에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저 높은 경사로를 오르는 건 고행에 가깝다. 그래서 보통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며칠씩 머무르며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 중간에 다른 곳에 들려고 가며 오르는 건 체력 외에도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황궁에 방문하기 위해서 따라야 하는 규칙 때문이다. 

펠메즈디예에는 제법 악랄한 규칙이 하나 있는데, 위로 오르기 위해선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궁에 들러 그 궁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그곳의 주인이 보내 주어야 더 위에 있는 궁에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게 법도란다.

"황궁까진 정말 까마득하게 높긴 하네."

릴리는 척 보기에도 손가락 개수를 넘는 언덕 위의 궁들을 보았다. 석재 부조로 겉을 장식한 아름다운 궁들이 늘어선 모습은 멋지지만, 까마득하기도 했다. 아무 준비 없이 정식으로 황제를 알현하려면 몇 개월이든 걸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아가씨께선 오래 기다리진 않으셔도 되니 다행이에요."

"덕분에 시작부터 많이 걸어야 하는 건 별로 안 좋네. 오느라 힘들었는데 쉬지도 못하고 바로 저 위쪽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잖아."

"가서 쉬면 되죠."

다행이고도 당연한 얘기지만, 황제를 알현하는데 모든 사람이 몇 달이고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궁의 주인은 자신보다 낮은 궁에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궁의 주인이 자신의 궁에 누군가를 특별히 초대하면 언덕을 오르며 모든 궁에 들르지 않아도 된다. 아래에 있는 궁의 주인이 그에 불만을 느끼면 항의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재량이다. 

다 같이 열차를 타고 고원에 올라 펠메즈디예에 입성하긴 했지만 중서부에서 함께 출발한 자들도 그런 이유로 결국엔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인 볼일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어쨌든 궁을 올라가기 시작하는 높이가 다른 때문이다. 

시작점도 다르지만 올라갈 수 있는 높이도 달랐다. 실제로 황제의 궁으로 가서 직접 배알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기 같이 온 사람들 중 대부분은 중간에 다른 궁의 주인을 통해 보고를 올리고 위에서 내려온 명을 대신해서 받을 것이다. 릴리도 중간에 적당한 궁에서 인사를 올리고 말 터였다.

"필리엔은 저 위로 한참 올라가야 하죠? 그럼 중간에 헤어져야겠네요. 좀 더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워라."

필리엔은 대현자의 동행 자격으로 필메즈디예에 왔다. 그러니까 그레이스 집안과 교류가 있는 중부 인사의 거처에 거기 신세를 지기로 한 릴리와는 다르게 바로 황궁에 입성해서 한참 위로 오른다는 뜻이다.

일단 이카트 측의 인물이었지만 실제 이카트 가문을 대표하는 건 다른 사람이라 원칙적으론 필리엔은 아예 여기까지 올라올 자격이 없다. 그런데 대현자가 원하니, 이루어졌단다.

황제궁은 원래라면 방문 허가에만 한 달, 황궁에 들어오는데 또 추가도 닷새쯤 걸리고 아래의 궁을 지나는데 한 시간씩만 쓴다고 해도 며칠을 고생해야 겨우 황제를 알현할 수 있다. 하지만 제국의 전무후무한 공작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정도 시간 만에 모든 과정을 단축해 버렸다. 

대현자는 가장 높은 곳의 출입에 허락을 따로 받지 않는다. 즉위식에서 황제를 인정하는 건 대현자의 권리이자 의무니까. 그러므로 그가 황제의 궁에 가는 것엔 문제가 없다는 논리다. 황제가 머무는 궁보다 높은 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그 아래에서 헤맬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대현자의 동행인에게 안 된다 막을 만큼 간 큰 사람이 없었다. 필리엔은 대현자의 곁에서 황제의 궁까지도 오를 것이다.

"음, 잠시만요."

필리엔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릴리와 로라를 놔두고 성큼성큼 걸어 멀어졌다. 어딜 가나 했더니만 대현자가 있는 방향이다. 대현자는 꽤 앞쪽에서 걷고 있었는데 뒤로 처져 있던 세 사람이 파워워킹으로 쭉 따라잡은 것이다.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필리엔이 대현자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필리엔은 가벼운 얼굴로 쪼르르 돌아와서는 좋은 소식을 알렸다.

"세필리아가 두 사람도 우리랑 같이 가도 된대요."

"네?"

로라가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릴리는 로라의 얼굴을 보고 제 얼굴 근육이 지나치게 웃겨 보이는 표정을 짓지 않도록 단속했다. 

"갑자기요? 아, 물론 저도 필리엔이랑 같이 가는 건 좋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미리 연락해서 제가 신세 지기로 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어차피 올라가는 길에 있을 테니 도중에 들러서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대현자께서 가는 곳도 본인의 궁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막 결정해도 되는 거예요? 괜히 부담 지우기는 싫은데요."

"부담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필리아도 릴리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걸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북부의 설산에서 부는 바람보다 차가운 대현자가 릴리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니 눈이 어디에 달렸는지 모르겠다. 릴리는 필리엔의 해맑은 소리에 고개를 내저었다.

"필리엔이 한 얘기 중에 유일하게 어이없는 소리였어요. 어쨌든 알겠어요. 괜히 그런 소리 안 해도 따를 테니 지어내지 않아도 돼요."

"지어낸 건 아니에요. 세필리아가 릴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확실해요."

"대현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말로 하진 않았죠."

알만했다. 릴리는 그냥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려주었다. 필리엔은 본인의 생각을 고칠 마음이 없어 보였지만 릴리가 보기엔 근거 없는 망상이었다. 저런 소리를 덜컥 믿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라가 조용해진 후에 문득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럼……. 오늘 저희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릴리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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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걷는 건 건강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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