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탈출구 하나는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이 어떤 곳이던가. 우는 아이에게서도 사탕을 빼앗고, 넘어진 사람을 밟고 지나가는 곳이 아니던가. 당연하게도 그에게 구원은 없었다. 유진은 종종 자신이 육식 동물 사이에 내던져진 살진 초식동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먹히지 않으려면 똑똑하거나, 다리가 빠르기라도 해야 했지만, 그에겐 둘 다 없었고, 그게 이 세상을 거지 같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의 가장 큰 이유였다. 똑똑했더라도 겨우 빠져나갔을 함정에 우둔하고 느린 저를 빠트린 것은 아주 고약한 작자일 테다.


언제 어떤 짐승에게 모가지가 물려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 그런 것이 유진을 다급하게 만들었다면 진작 죽음으로 도피했을 테지만 공포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붕 뜬 기분을 배려할 리가 없는 시간은 매번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고, 유진은 이 우습기 짝이 없는 연극처럼 보이는 삶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예쁜 인형처럼 앉아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던 그를 두고 이용 가치를 논하기 시작했다. '시집을 잘 가야 한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지만 어떤 감흥도 받은 적이 없다. 이것도 남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무터 들어와서 그런지, 간지럽지도 않았다. 혹은 천성이 그런건지. 무감하게 '네.' 대답만 해도 그들에게는 예쁜 딸이 되었다. 기특한 딸, 예쁜 딸, 착한 딸.


부모는 당연히 인형 같은 딸이 정말 인형처럼 움직일 줄 알았던 게 분명했다. '너도 슬슬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니.' 하는 말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그제야 유진에게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상대는 규모가 조금 더 큰 기업의 이사. 여기까지라면 혹시 몰랐다만, 유진도 익히 알고 있는 그 얼굴이, 본인보다 열 살이나 많은, 이미 이혼 전적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떠올리자 문득 잔인한 현실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유진은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냄새나는 아가리에 처박히게 될 인생을 어떻게 해야 차악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 아니, 그 전에 우선 인생이라는 놈의 목줄을 잡아끌 방법부터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방법을 강구해도 모르겠다면 모가지를 물려 죽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일까? '덜 아프게 물어주세요.' 부탁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삶이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남자의 곁에서 사모님이라 불리는 삶보단 나을 것이다. 바닥이라 생각한 곳은 실은 바닥이 아니고, 언제나 그보다 더한 바닥이 존재하는 법이니. 그저 현실감 없는 삶에 흘러 다녔던 것일 뿐,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에겐 유예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최유권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런 맥락에서 꽤 운이 좋은 일에 속했다. 적어도 유권은 그에게 흑심을… 아니, 정정하자.


적어도 '사모님'으로 앉혀두거나 사업의 인질로 휘두르려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보증이 있었다. 결혼했으니 아이도 낳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 그런 것들은 없을 것이라는 보증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아는가? 유권의 계약서는 얌전히 부인 행세를 하라는 것이었지만 서로를 방패 삼아 좀 쉬고 싶다는, 그런 내용에 가까웠다. 이혼 경력이 있는 열 살 많은 남자보다야 나은 것은 확실했으니 유진으로서는 크게 손해 보는 제안도 아니었을뿐더러, 앞으로도 그 비슷한 제안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래. 유예 기간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리 좋지 않은 머리로도 대강 계산이 끝나자 유진은 계약서를 다시 읽어보겠다며 챙겨 들어가려다가, 혹여 유실되거나 마음이 변할 것을 우려하여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었다. 어쨌든 이전의 선택보다는 나쁘지 않음이 분명했으니까. 어떻게 되어도 좋다.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을 잊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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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인지는 몰라도 연기는 순조로웠다. 유권의 연기가 탁월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한편 그의 뒤에 버티고 있는 회사가 이전의 사람보다 더 거대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와 유권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방패 삼으려는지도 계약서를 읽은 뒤에는 묻지 않았는걸. 그냥, 그는 유예 기간이 생긴 것으로 만족했다. 더더군다나 최유권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연기를 위해서라고 말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공과 사가 확실해보이는 것이 퍽 믿음직스러우니 트집 잡을 것도 없는 것이 당연하고.


유권이 무엇을 숨겼던 그것이 자신을 향한 날붙이가 아니면 괜찮다고. 그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영영 유예되기를 바랐으나 위기는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고, 전우애는 생각보다 끈끈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그래서 출근하는 최유권을 붙잡고 조심하라고 속삭였던 것 뿐이다. 우리는 서로의 방패니까. 그가 사라지면 자신은 애써 무시하고 있던 현실로 끌려가야 하니까. 유예는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 이게 더 득이 되니까…. 부끄러운 것도 없는데 그렇게 변명을 했더랬다.


그때 유권이 어떻게 웃었더라? 평소와 달리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유진은 언제나처럼 외면하기를 택했다. 유권은 영영 진실을 외면하려는 그가 기꺼웠고, 뻔하고, 가엾고, 안쓰러웠다. 


아, 이보다 가엾고 사랑스러운 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유진은 그를 전우라고 믿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지만, 유권은 그의 생각보다 깊은 감정을 품은 지 오래였다.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피식자.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았다. 유권을 이용한답시고 내세우는 것이 그늘막을 만드는 일에 그친다면 얼마든지 이용당하고말고. 물려도 아프지 않을 이빨을 가지고 얼마나 물겠어. 약간의 피를 보는 것도 괜찮지. 그래봤자 그는 영영 가련하고 어여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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