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크롬 아카이브 코멘트 보고 쓰는 글

※ 물크롬의 과거와 가족에 대한 날조, 동인 해석 포함

※ 결제선 이하에는 사담만




아발론 왕성의 연회장은 늘 열려있다. 그것이 플로렌스의 젊은 대장군, 이제는 아발론의 기사인 크롬 레디오스가 날마다 그곳의 피아노를 바라보게 할 구실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늘도 뚜껑이 닫힌 피아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계절에 맞춰 바꿔 단 얇은 커튼 너머로 따뜻한 빛이 흘러들어오는 낮이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굳게 잠겨있던 스트라스 왕성의 연회장과 달리 이곳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연회가 열렸을 때 지체 높은 분들만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왕성 사람이면 누구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왕성에 잠긴 문보다 잠기지 않은 문이 많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크롬 레디오스는 종종 왕성의 텅 빈 연회장을 찾았다.

누군가 매일 관리하는지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매끈한 뚜껑을 보며 크롬은 레디오스가에 있던 검은 피아노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혼수로 가져왔다던 그 피아노는 저택 응접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재에 놓였다고 했다. 아주 어렴풋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종종 어머니가 그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 남아있었다. 정작 그 피아노 소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훈련과 교육, 엄한 다그침으로 점철된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도드라진 장면임이 틀림없어 크롬은 지금도 종종 레디오스가의 피아노, 그 앞에 앉아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와 그립거나 하지는 않는데도 그랬다.

가주와 장남이 검술 훈련으로 저택을 비우면 레디오스 부인은 종종 서재로 향했다. 나이가 어려 아직 본격적인 단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아버지가 맡겨 둔 책을 읽고 구술시험을 치러야 했던 차남은, 서재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책에서 시선을 떼고는 했다. 아직 한참 남은 페이지와 언제 끝날지 모를 피아노 소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은 서재로 걸음을 옮겼고,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간 문가에서 어머니의 연주를 들었다. 간혹 기척을 눈치챈 어머니가 이리 오라 손짓하면 조심스레 그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겨드리고는 했다. 건반을 누르는 우아한 손끝을 바라보다 악보 넘기는 것을 잊어 허둥댈 때도 어머니는 작게 웃기만 했다. 어머니는 이 레디오스가에서, 크롬이 실수를 해도 꾸짖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대대로 자식들을 뛰어난 검술과 전략으로 플로렌스를 수호할 무인으로 키워내는 데 집중해왔던 레디오스 가문이 차남에게 피아노 교습을 허락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장남과 차남을 모두 불러 앉힌 자리에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차남보다, 자신은 이전처럼 검술 훈련에만 매진하고 싶다고 말한 장남의 말에 아버지가 더 흡족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어린 크롬은 기뻤다. 아홉 살 이후로는 크롬 역시 단련을 시작해야 하니 피아노는 그때까지만이라는 조건이 걸렸음에도 좋았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어머니와 좀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손 모양은 둥글게, 손목을 굽혀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며 건반 위에 얹은 제 손을 고쳐주는 어머니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샾 대신 플랫을 누르거나 박자가 맞지 않아도 아버지와 보내던 시간처럼 ‘다시하라’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는 않았다. 음자리표 그리는 법을 배운 날에는 무심결에 아버지의 책에 낮은 음자리표를 그렸다가 지우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런 날에도, 메트로놈에 맞춰 단 몇 마디만 수십 번 반복해서 친 날에도 즐거웠다. 왕가의 초대를 받아 왕립 교향악단의 연주를 들을 때 겨우 졸음을 참으며 꼿꼿이 앉아있던 제라드와 달리 크롬은 온 신경을 집중해 음악을 들었다. 피아노 협연이 있는 날에는 주 멜로디를 외워뒀다가 아버지가 집을 비운 날에 오른손으로나마 따라 쳐보고는 했다. 피아노 교습이 없는 날에 몰래 피아노를 치다 들켜도, 화들짝 놀라 급히 뚜껑을 닫는 아들이 손가락을 다치지는 않았나를 먼저 묻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어쩌면 크롬은 피아노를 필요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주일 중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 피아노를 치는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일러둔 책을 잘 외워두었다가 칭찬을 들을 때도 기뻤지만, 크롬은 칭찬도 꾸중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건반을 눌러도 되는 피아노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렇기에 아홉 살 생일을 맞은 다음 날 서재에서 피아노가 사라져버렸을 때, 크롬이 느낀 감정은 당시 그가 가진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악보가 든 선반은 그대로임을 확인했으나 종이에 붙박여 더는 소리로 흘러나오지 못할 음표는 의미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피아노에 대해 어머니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레디오스 저택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생기거나 사라진대도 집안사람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런 크고 작은, 갑작스러운 ‘변화’조차 자식들을 군부를 거쳐 플로렌스의 중앙 정계에 입문시키고자 하는 가주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악보집을 아들이 더는 쓰지 않는 물건을 보관해두는 상자 속에 집어넣으며, ‘아버지도 젊은 시절에는 종종 피아노를 치시곤 하셨단다’라고 일러주던 어머니의 말은 크롬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한때 아버지 역시 피아노를 치셨다는 사실보다는, 아버지가 거기서 손을 떼었듯 제 삶에도 이제 더는 피아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더 크게 와닿았다.

너는 장차 플로렌스를 수호할 검이 될 것이다.

글로리어스 왕가의 후예가 저를 동무로 지목한 날, 아버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피아노는 불필요했다. 귀족가의 자제로서 가져야 할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 정도는 진작에 쌓았으니,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시절’은 끝이 났다. 어쩌면 어렸던 제게 피아노란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른다고, 어른이 된 크롬 레디오스는 그렇게 생각해본다.

문득 그는 아버지도 지금 자신의 나이 정도 되었을 때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계속 플로렌스에 있었다면, 그리하여 친우이자 주군이 총기를 잃고 낯선 땅의 마도사에게 미혹 당하고 있는데도 그 곁에 푸른 장미를 지키는 가시로써 함께 하고 있었다면, 하는 가정이 덩달아 떠오른다. 아발론의 기사가 된 지금은 불충임을 알면서도 그 말로가 어땠을지를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지만, 또 그가 그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는 이유는 뚜껑조차 열지 못하면서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피아노 때문이다. 플로렌스의 대장군인 크롬 레디오스에게는 의무와 책임, 명예와 긍지가 있었으나 이곳 아발론에서는 ‘여유’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평생을 플로렌스의 검으로 살다가 검으로 죽는 것이 명예로울 거라고, 그것을 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정해져 있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쏜즈오더의 기사단장도, 플로렌스의 대장군도 아니다.

크롬이 피아노 뚜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흰 장갑에 감싸인 긴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듯 검고 매끄러운 표면을 훑는다. 이제는 장갑을 벗는 게 더 어색하지만 피아노를 치려면 당연히 이를 벗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는 손을 감싼 장갑처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저를 감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아발론이고, 연회장의 문이 언제나 열려있을 것임을 크롬 레디오스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누르며 기억나지 않는 음표를 더듬어가는 날이 올 것이다. 연회장 피아노에서 손을 거두며, 그는 반드시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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