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누군가에게, 그것도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첫눈에 반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석진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도 필요도 없던 삶을 살아 왔다. 자신의 삶과 전혀 다른 빛깔의 그것을 생각해 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석진은 처음에 몹시 당혹스러웠다. 내가 왜? 내가 왜 쟤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지?

석진이 태형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태형이 반대로 그러한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태형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였다. 석진은 처음에 1-3학년 대면식 자리에 나가지 않으려 했었다. 복학해 돌아오는 늙다리 3학년은 그런 자리에 눈치껏 빠져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친한 녀석인 남준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우리가 영원히 아싸로 살 것도 아니고, 이 기회에 후배들이랑 얼굴이라도 터놓아야 되지 않겠느냐며 석진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석진은 그럴 시간에 차라리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게 훨씬 이득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남준에게 졌다. 남준에게 끌려가다시피 간 자리에 태형이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다고?

 

하늘 아래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을 찾아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석진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객관화가 잘 되어 있고 자부심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은 태형에게 명함을 내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만큼 태형의 외모는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김태형입니다”

 

얼굴만 잘난 게 아니라 목소리도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매력이 있었다. 낮고 부드러운데 맥없는 음성이 아니라 가슴에 진하게 자국을 남기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얼굴보다도 목소리가 듣고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갔는지도 모른다.

 

“선배님, 여기요”

 

아무도 그런 배려까지 해 주지 않는데 태형은 달랐다. 태형은 석진의 앞에 수저를 놓으면서 냅킨을 단정하게 접어 테이블에 먼저 깔고 그 위에 석진의 수저를 올렸다. 그것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매너인지, 아니면 모든 이들을 대하는 매너가 몸에 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자신에게만 특별한 배려를 보인다는 낌새를 챈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이니까.

 

 

 

 

 

 

 

“태형아 형이 밥 사 줄게. 밥 먹으러 가자”

“네 형 좋아요”

 

웃음에 티가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해맑은 웃음은 석진도 난생 처음이었다. 무해함을 넘어서 순수함의 극치인 그 웃음에 홀딱 반했다. 태형이 자신을 향해 최대한 많이 웃어 주길 바랐다. 태형의 웃음을 보려면 우선 그와 자주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용무가 없어도 괜히 1학년들이 많이 모이는 과방 근처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태형의 주변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태형의 매력에 이끌리는 사람이 석진만이 아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석진의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 들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과 두 학번 차이지만 나이로는 세 살 터울이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태형이 아닌 다른 후배들이 자신을 부담스러워할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태형의 곁을 좀처럼 떠나지는 않았다. 그의 수업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지, 주로 누구와 많이 어울리는지 등을 눈 여겨 보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일 년 여가 지났다. 반 년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부터 석진은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다. 그동안 태형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차 자신의 전유물이라는 확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참석하는 학과 행사마다, 술자리마다 태형이 와 있는 것을 그저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들은 바로는, 태형은 자신이 참석했던 자리 외에는 다른 학과 행사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알바를 하느라 바쁜 건지 그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석진이 매번 태형을 만났던 그 술자리들은 어쩌면 태형이 골라서 참석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단체로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태형이 석진이 아닌 다른 선배의 맞은편에 앉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태형의 주변을 빙둘러 다른 선배들이 더 있었다. 태형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수저를 나눠 줄 때 냅킨을 미리 깔아 주지 않았다.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김태형에게 여자친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신입생은, 더군다나 태형 정도의 외모를 가진 아이들은 금방 짝이 붙는다. 그것이 풋내기의 한 달짜리 연애든, 아니면 꽤 오래 가는 진지한 연애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태형은 아무리 봐도 여자친구가 있는 티가 나지 않았다. 혹시 그와 친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은근슬쩍 석진은 떠 볼 때가 있었다.

 

혹시 태형이는 연애 안 해?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똑같았다. 차라리 그 얼굴 떼서 저한테 줬으면 좋겠어요. 그 얼굴 달고 왜 활용을 안 하지?

 

 

“어, 태형이다”

“어 형”

 

“너 바쁘냐?”

“아....아니요... 안 바쁜데요”

 

그날 비 내리는 도서관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석진은 태형의 이번 학기 시간표를 꿰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바쁘지 않다고 했다. 석진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 줄 만한 시간적 여유는 그에게 없었다. 석진은 눈을 딱 감고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 보기로 했다. 일종의 시험이었다. 태형의 진심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님을 확인 받고 싶었다.

 

“나 그럼 1공학관까지만 우산 좀 씌워 주면 안 되냐?”

“되....죠?”

 

“앗싸, 고맙다. 이따 점심 같이 먹을래?”

“그...럴게요”

 

“가자 김태형!”

 

 

그는 너무도 빨리 허락했다. 석진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이 자식 수업 안 가나? 하지만 이미 석진은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빼지 않았다. 팔짱을 낀 건 비를 피하기 위함보다는 의도적인 스킨십이었다. 몸과 몸이 닿았을 때 자신의 심리와 감정을 체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석진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낙심했다. 정말 자신은 태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녀석과 몸을 밀착하고 한 우산 아래에서 걷는데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녀석에게선 시원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자취하는 남학생들의 옷에서 흔히 나는 쩐내가 아니라 산뜻하고 시원한 향이 났는데, 그 향이 석진의 옷에도 옮아 붙어 종일 태형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었다.

 

 

 

“너 열 나냐? 얼굴 왜 그렇게 빨개?”

“네? 아... 아닌데요”

 

“너 몸 안 좋은 거 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이상하다. 뜨거운데”

“...................”

 

 

이상하다. 희한하다. 녀석의 몸도 분명 우산을 함께 쓰기 전과 다른 것 같았다. 눈에 띄게 붉어진 얼굴. 그리고 거칠어진 숨소리. 제발 태형아. 나는 먼저 말을 못 하겠으니까 네가 먼저 왜 이러는지 말해 주면 안 되냐? 세 살이나 많은 형이면서도 비겁하게 구는 자신을, 석진은 더 채근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아니라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선후배로라도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은 게 솔직한 욕심이었다.

 

 

“땡큐!”

“수업 잘 들으세요”

 

“너 어디서 기다릴래?”

“음... 저 공부하고 있을게요. 마치기 10분 전에 톡 주세요”

 

“어. 알았어. 고마워!”

“네”

 

 

끝내 태형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찰나의 행복은 끝났다. 석진은 태형이 자신의 뒷모습을 계속 쳐다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정말 아닌가. 정말 나만의 기분인가. 더는 태형의 감정을 확인해 볼 방법이 없다는 게 석진의 입을 마르게 했다. 그날 강의는 참석만 했을 뿐, 하나도 기억에 남은 게 없었다.

 

 

 

 

 

 

 

 

 

“웬 시집?”

“아 이거 태형이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걸 걸요”

 

“태형이가 이런 것도 읽어?”

“걔 종종 그런 거 잘 빌려 읽더라구요”

 

“오호....”

 

과방 테이블에 올려진 시집에 문득 눈이 갔는데 그 주인이 태형이란다. 그렇다면 열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태형은 마음에 드는 시가 있었는지 어느 페이지에다가 책갈피를 해 두었다. 석진은 저절로 그 책갈피를 해 둔 페이지에부터 손이 갔다. 태형이 책갈피를 해 둔 시의 제목은 <찔레>라는 낯선 제목의 시였다.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한 번도 못 본 시 같은데? 석진은 태형이 인상 깊게 읽었을 그 시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아아 - 석진이 그 시를 다 읽고 첫번째로 보인 반응은 작은 탄성이었다. 사랑에 관한 시였다. 시에 대해 잘 모르는 석진이 보더라도 이것은 사랑을 주제로 한 시가 맞았다. 태형은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일까? 말 못하는 아픈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상대가 혹시 나는 아닐까?

 

이런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한 그날의 그 시집

 

한 편의 시로 석진의 마음을 울렁이고 들썩이게 했던 그 남자가, 지금은 석진의 팬티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들켜 사색이 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다.

 

 

 

 

 

 

 


 

 

“형.... 진짜 죄송해요... 저 근데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

 

“형 제발 믿어 주세요....”

“태형아. 아까 그건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행동이 맞아. 아니야?”

 

“.............네... 그건 맞아요”

“너.... 그런 취향이야?”

 

“아니, 아니에요 형 절대!!”

 

석진의 지난 일 년은 무참히 무너졌다. 내가 저런 애를 좋아했었다고? 어떻게 저런 멀끔한 모습으로 저런 짓을?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태형이 석진에게로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다가왔다. 석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태형의 눈빛에 물기가 잔뜩 고여있다.

제발 제 말을 들어 달라고 애원하는데 석진은 아무 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배신감과 낭패감, 그리고 상실과 절망이 어지럽게 교차하며 석진을 때린다. 넌 변태 녀석을 좋아한 거야. 저 자식은 사이코 패스야 - 누군가의 음침한 목소리가 우글거리며 석진을 괴롭혔다.

 

 

“형 저 그런 거 아니에요! 설명할게요!”

“................... 나가라 그냥.....”

 

“형!”

“일단 가...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해”

 

“형 제가 다 말할 수 있어요! 다 말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네?!”

 

 

태형이 울먹이며 무릎을 꿇는다. 그래, 잘못은 했지. 너를 믿었고, 너를 좋아했던 나에게 이런 배신감을 안겨 줬으니 넌 무릎을 꿇어도 싸. 석진은 이렇게 소리치며 그를 꾸짖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의 앞에만 서면 늘 이런 식이다. 정작 해야 할 말은 뱉지 못하고 다른 말만 엉뚱하게 지껄이게 된다.

이대로 태형을 내보내면 그와의 관계는 영원히 끝일 것을 안다. 그도 그걸 알 것이다. 그러니 석진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직은 그렇다. 그에 대해 충분히 실망했으면서도 아직 일말의 미련이 남았다. 내가 왜 이런 자식에게 미련을 갖는 건데. 석진은 이런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저 형 좋아해요.... 사실.....”

“........................”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남의 속옷을 함부로 훔치는 거! 그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란 거 알아요. 근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김태형이 날 좋아하는 게 맞다고? 얼떨결에, 더군다나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밤잠을 못 잘 정도로 고민하던 태형의 고백을. 그런데 시원하지가 않다. 그것만으로는 그의 기괴한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다. 만일 좋아해서 이러는 게 맞다면 그는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너... 나 좋아했어?”

“.................. 죄송해요 형... 진짜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 건데....”

“다요. 그냥 다요... 형이 불쾌해 하실 거 알아요. 그런데... 제 마음이 그런 걸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는 죄송하다고 한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석진은 알아야만 한다. 속옷을 몰래 훔친 것에 대한 사과인지, 허락도 없이 같은 성별인 자신을 좋아해버린 것에 대한 사죄인지.

 

“다....라면.... 날 좋아한 것도... 미안하다 이거네”

“불쾌하실 거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형.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안 나타날게요. 제가 휴학이라도 할게요! 형, 근데 이거는요... 이거는 진짜 다른 이유가 있어요 형!”

 

 

그는 자신이 석진을 함부로 좋아하게 된 것부터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석진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 결국 이랬었구나. 그동안 태형이 자신에게 보였던 모든 말과 행동들에 대한 설명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가 남았다.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해명이다.

 

 

“그 다른 이유.... 설명해 봐 그럼....”

“진짜... 믿어 주실 거예요?”

 

“너 이거 해명 못 하면.. 난 두 번 다시 너 안 봐... 아니 못 봐 태형아”

 

 

태형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극한의 절망에 빠진 표정이다. 대체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어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진은 지금 자신을 덮친 이 혼란과 낭패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자신이 이런 태형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괴감은 그를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심각하게 괴롭힐 것이다.

 

 

 

 

 

 

 


 

 

“여기.....라고?”

“네 형”

 

“................”

 

 

석진은 태형이 한 말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표정이나 말투를 보건대, 그리고 평소의 성격으로 추측하건대 결코 거짓말은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태형은 석진에게 절절히 좋아했노라고 말했지만 석진은 자신의 감정을 일단 감추었다. 태형은 반면 모든 것을 쏟아냈다. 자신이 석진을 좋아하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 했던 말과 행동들에 대한 해명. 그리고 속옷을 훔쳐야만 했던 일들까지도. 그것이 석진의 혼란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다만 태형의 말에 대한 진위부터 따져 보기로 했다. 이대로 태형을 영영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기회를 준 것이다. 만일 태형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석진은 뺨을 쳐서라도 그를 내쫓고 두 번 다시 말을 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형은 다르다. 이미 다른 사람들과는 비할 수 없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지 오래다.

절절한 사랑 시를 읽고 있었던 태형의 진심을 마지막으로 믿어 보고 싶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그의 마음을 받아 들여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일 년이나 쌓아 두었던 말들을 얼떨결에 다 털어낸 태형. 조금도 홀가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잔뜩 긴장해 있으며 두려움이 가득 찬 얼굴이다. 지금 석진과 태형이 함께 서 있는 곳은 며칠 전 태형이 다녀간 그곳. 냥보살 민애옹의 사무실이다.

 

 

“태형아”

“네 형”

 

“난 네가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

“..................”

 

“그리고 제발 사실이었으면 좋겠고.....”

“형....?”

 

“난 적어도 네가...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나를 속이는 애가 아닌 거란 걸... 확신하고 싶어”

 

이게 다 그 고양이 때문이야. 그 고양이가 부적 이야기만 하지 않았어도 - 정작 부적으로 인한 효험은 보지도 못했다. 효험을 보기는커녕 석진과의 관계는 최악에 치달아 있다. 일시불로 결제한 돈 10만원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만일 그 고양이가 입을 닦는다면 태형은 그 고양이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태형도 석진도 숨을 고른다.

 

석진은 아직도 태형이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을 믿지 못한다. 석진이 아니라 세상 그 누구라도, 고양이가 말을 하며 고양이가 그런 부적을 써 주었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고양이가 존재한다면 왜 아직도 매체에서 떠들어대지 않는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석진은 더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만일 태형의 말이 거짓인 게 밝혀지면 자신과 태형의 관계는 정말로 끝이다. 석진이 아무리 그를 붙잡고 싶어도 그 스스로 멀어질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일 년 넘게 좋아해 왔음이 이미 다 밝혀졌는데도,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관계라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은 드물 것이다.

 

 

“벨 눌러 봐”

“네.....”

 

 

태형은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더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누른다. 찾아 오겠다고 미리 연락은 해 두었었다. 단, 석진이 함께 간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벨소리가 울리고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남자가 문을 먼저 열고 태형을 맞이한다. 그러나 태형 옆에 서 있는 석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 멈춘다.

 

 

“누구....?”

“아 같이 온 손님이요. 냥보살님 좀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그런 얘기 없으시더니.....”

“일단 들어갈게요”

 

“...........그러세요 그럼”

 

 

석진 또한 태형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느꼈던 것처럼, 자신의 상식에 배치되는 광경에 놀란다. 불상도 탱화도 향로도 없다. 기이한 인상을 풍기는 오방색 깃발도 없다. 방울도 없다. 석진 역시 태형과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추고 더 들어오지 못하자, 그들의 머리 위에서 어떤 남자가 말한다.

 

“집 보러 왔어? 어서 들어 와 앉아”

“........................”

 

석진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다. 이상하다. 사람이 없는데 사람 소리가 난다. 자신을 머리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하얀 고양이다. 설마 저 고양이가 태형이 말한 그 고양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고양이는 사람의 말소리를 낼 수가 없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자신을 향한 석진의 미심쩍은 시선에 일침을 가한다.

 

 

“뭘 봐? 고양이가 사람 말 하는 거 첨 봐? 아 첨 보겠구나?”

“...................”

 

“저기 앉아 얼른. 알아 보러 온 거잖아. 내가 진짜 말을 하는 고양인지 아닌지”

 

현기증이 인다. 태형이 옆에서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석진은 그대로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점점 이곳이 무서워진다. 고양이가 말을 하고, 그 말을 인간이 알아 듣는 진풍경.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한 말은, 얘가 네 빤스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있다가 너한테 들켰다 이거지?”

“.................네”

 

빤스, 그놈의 빤스 - 태형은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다. 왜 하필 빤스여야만 했을까. 왜 하필 빤스여야만 해서 나를 이런 곤경에 굴려 넣은 것일까. 이제는 저 흰 고양이가 전혀 고맙지 않다. 결국 고양이가 말한 대로는 하나도 이루지 못한 셈이다. 석진의 진심을 알기는커녕 미친놈이자 상변태로 낙인 찍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냥보살은 석진의 찬찬한 설명을 듣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태형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당신이 시켰잖아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난 빤스에 부적을 붙이라고 했지 그거 냄새 맡으라곤 안 했는데?”

 

“그래도....!”

“야. 네가 오바해 놓고 왜 나한테 따져. 어이가 없네 저거”

 

“하.......”

 

‘빤스’는 석진에게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넌덜머리 나는 단어다. 태형의 구차한 설명을 이미 들은 터라 아직도 믿을 수는 없지만, 흰 고양이의 입에서도 ‘빤스’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언급되는 것을 보니 태형의 말이 사실이긴 한가보다.

하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석진에게는 모두 기괴하고 낯설다. 고양이가 말을 한다. 김태형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팬티를 훔치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란다. 석진은 차라리 허탈하게 웃고 싶어졌다.

 

“아 그러니까 나는 분명 그린 라이트라고 얘한테 얘길 해 줬다고!”

“..................”

 

“근데 얘가 안 믿어서 굳이 그 부적을 써 간 거래니까?!”

“........................”

 

“왜 말이 없어?”

“고양이..... 아니지....?”

 

“어어, 이게 무슨 짓이야. 안 놔? 안 내려 놔?”

 

석진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고양이의 앞발을 낚아 챈다. 그리고 발을 들어 발바닥을 확인한다. 태형이 보여 준 부적에 새겨진 무늬는 과연 이 고양이의 앞발 모양과 일치하기는 한다. 그리고 발바닥은 영락없는 고양이의 발바닥이다. 고양이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앞발을 석진의 손에 맡기고 헛웃음을 짓는다.

 

“야 지민아. 살다 살다 내가 별일을 다 겪는다 야”

“못 믿는 게 당연하죠 뭐....저도 첨엔 그랬는데요”

 

 

“고양이가... .맞네?”

“아 그럼 내가 강아지겠냐고!”

 

“아..........”

“아무튼 일은 그렇게 된 거야. 이상 없지? 그럼 다 확인 됐지?”

 

석진은 아직도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태형의 말이 모두 진실로 밝혀진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이 고양이가 매스컴에 방송되지 않은 이유를 그제야 납득한다. 누구도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친 놈이라고 할 테니까. 정신병자 소리를 들을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근데 왜 하필.... 빤스에요?”

“음... 그게 왜 빤스냐면 말이지”

 

석진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사실 이것이 아니다. 그런데 말이 헛나와버렸다. 팬티도 아니고 ‘빤스’라고 발음한 데에는 태형이 그렇게 발음을 했던 탓도 있다. 태형은 고양이에게 들은 대로 유난히 ‘빤스’라는 단어를 강조했었다. 부적을 ‘빤스’에 붙여서 간직해야만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의 가장 은밀한 곳과 맞닿는 물건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

 

“가장 은밀한 속마음도 캐낼 수 있다. 뭐 이런 이치지. 흠흠. 괜히 내가 민망해지는 건 왜일까”

“그래서.....”

 

“아니 근데 누가 속마음을 알아 내랬지 누가 빤스 냄새 알아내랬냐고!!”

“좋은 향기가 나는 걸 어떡해요 그럼!!”

 

“저기 태형아.....”

“앗 죄송해요 형”

 

이제 격분과 놀라움이 차츰 가라앉은 석진의 마음에는 태형을 향한 연민이 스미기 시작한다. 마음 고생을 많이 했구나. 그가 벌인 일들의 당혹스러움은 이제 먼발치로 사라지고, 그동안 태형이 겪었을 심적 부담과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절절히 다가온다. 너는 내 팬티 냄새까지도 좋아해 주는 아이인데 - 석진의 눈빛에서 애잔함이 끓기 시작하자 흰 고양이는 샐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거 봐. 그린 라이트 맞다니까”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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