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은 모든것이 의아했다. 왜 이번에도 흰 천에 덮혀 벽난로 앞에서 일어난건지. 그리고 왜 또 미친듯이 배가 고픈지 말이다.


집주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어제 쇼파에서 잠이 든 것 같은데 또 벽난로 앞인걸 보면 주인이 옮겨놓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죽이거나 어디 팔게 아니면 보통은 벽난로 앞이 아니라 다른 곳에 눕혀두는게 정상 아닌가? 오늘은 좀 이성적으로 먹으면서 생각했다. 음식은 여전히 차고 넘쳤고 당분간은 먹어도 줄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당분간이 되면 안되는데..... 원래 목적은 산을 넘어 어디든 도시로 가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었다.


유진은 본래 실험체였고 연구소에서 도망을 나왔다. 그 도망갈 틈을 만들기 위해 연구원의 다리를 물어 뜯고 자신의 등뒤로 달려드는 개들에게 돌을 던졌다. 그 지옥같은 곳에서는 매일 매일 인체 실험을 강행했고 자신이 아끼던 동생들은 그 실험으로 인해 모조리 죽었다. 지금 연구소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죄다 어디선가 새로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자신이 시간을 끌 동안 아이들이 도망 칠 수 있도록 뒷문을 열어놓았는데 다들 잘 도망쳤는지 모르겠다. 걱정은 되었지만 발목을 붙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호의이자 기회였으니.


유진은 오로지 죽은 아이들이 그리웠다. 무슨 실험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실험대에 누우면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고, 연구원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면 끊임 없이 무언가를 적어내렸다. 자신은 한유진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언제나 실험 넘버로 불렸고 개처럼 목줄이 채워져 끌려다녔다.


지금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괜히 목을 매만졌다. 아무것도 입지 못하고 흰 천만 두르고 있는 것은 불편했으나 연구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보다는 나았다. 어쩌면 이 저택을 뒤지다 보면 입을 만한 옷이 나올지도 몰랐다. 유진은 먹던 것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넓은 홀에는 천자락이 쓸리는 소리만 울렸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저 높이 매달려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것이 저것만 팔아도 집 한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택은 온갖 비싸보이는 물건들 천지였다. 연구소에 갇혀 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유진의 눈에도 보통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닌 것 같았다.


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한기가 오르는 팔을 문지르며 1층의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문을 지나니 유진이 찾던 드레스룸이 있었다. 대충 걸칠 수 있는거면 되는데.



"와.... 뭐가 이렇게 크지?"



집 주인은 상당히 체격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모든 옷들이 큼지막했다. 하나같이 고급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이렇게 크면 입는 것이 소용이 없을 정도다.


유진은 손에 잡히는 드레스 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것만 입어도 허벅지까지 옷자락이 내려왔다. 바지는 말할 것도 없겠네. 팔을 걷어 올리고 서랍장을 뒤지는 유진의 손길이 다급했다. 이렇게 거리로 나갔다가는 변태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가지런 했던 옷장이 점점 개판이 되고 유진의 뒤로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이 쌓여갈 즈음 손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와중에 또 졸음이 몰려오는 것이다.


눈 앞이 흐릿해지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다. 진짜 미쳤나. 밥만 먹으면 졸리다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뺨을 때려봐도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유진은 뒤로 털썩 누웠다. 옷이 잔뜩 쌓여 있는 덕분에 쇼파 처럼 푹신했다.



"일어나서... 다시......"



유진은 그렇게 깊은 수마에 빠졌다.




*



성현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밑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멈췄다. 아마 또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강한 수면제를 발라뒀는데도 저만큼 움직일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죽었어야 될게 또 살아났다는게 이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기척이 멈춘 곳은 드레스룸이었다. 드레스룸은 세개가 있는데 1층에 있는건 낡은 옷만 넣어두는 곳이었다. 아마 밥을 먹고 옷이라도 훔쳐 달아나려고 했나보다.


성현제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그리고 드레스룸을 열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이런. 곤란하군."



전혀 곤란하지 않다는 어투였으나 그에 대해 지적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널부러져있는 아이의 몸을 들어올렸다. 드레스 셔츠 밑으로 하얗고 기다란 다리가 흔들렸다. 성현제의 길고 길었던 지루함이 오늘로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



유진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했다. 온 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걸 억지로 끌어올렸다. 눈을 떴을 때 또 벽난로 앞이면 이제는 좀 소름돋을 것 같으니까 정신을 차려야했다.


그리고 한참을 낑낑 거리니 잠이 좀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으......?"



눈을 뜨자 레이스가 수놓아져 있는 테이블 보가 보였다. 그보다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리자 검은 가죽 끈으로 칭칭 묶여있는 제 몸이 보였다. 잠 기운이 모조리 가셨다. 고개를 번쩍 들자 식탁 끝에 웬 남자가 앉아있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누,누구세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 것 같고."



좆됐다. 집주인인가보다. 이제껏 무전취식 한 것을 탓하려는게 틀림 없었다. 유진은 잘못을 빌기보다 도망칠 궁리부터 했고 그 모든게 성현제의 눈에 또렷하게 보였다. 성현제는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말했다.



"이름이 뭐지?"

"알아서 뭐하시게요."

"이런. 재워주고 먹여준 이에게 무례한 언사군."



저가 알아서 먹고 알아서 잤지만 말이다. 유진은 손을 꿈지럭 거렸다. 어찌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의자에 묶여 있는 걸 보면 단단히 각오해야할 것 같았다.



"그 값은 갚겠습니다."

"어떻게?"

"일단 풀어주시면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내가 뭘 믿고 풀어주겠나."



유진은 성현제가 들리지 않게 꿍얼거렸다. 그거 좀 먹은거 가지고 째째하게 굴기는. 그러나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고, 그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잘생긴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좀팽이라는 둥, 그냥 곱게 보내주면 어련히 은혜 갚으러 오겠지 하던가 젊은 양반이 속이 좁아 어디에 쓰겠냐는 둥의 꿍얼거림이었다.


성현제는 이 모든 상황이 웃기게 다가왔다. 뱀파이어로 살면서 저런 평은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터지는 웃음을 막지 않았고 유진은 그가 왜 웃는지는 모르겠으나 웃는 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가 기회다 싶어 손을 더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어떻게 하다 보면 풀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득 품고서.



"하, 안타깝지만 그 가죽 끈은 내가 풀어주는 것이 아니고서야 풀리지 않을거야."

"다 웃었습니까?"

"그래. 덕분에 즐거웠군."

"즐겁게 해드린 값으로 좀 풀어주시죠?"



성현제는 흔쾌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죽 끈이 스르륵 풀렸다. 뱀파이어도 아니고, 신통방통한 양반일세. 라고 생각했던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슬쩍 걸었다.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사시나요?"

"그렇지."

"와, 그렇군요. 집 구경 잘 하다 갑니다."



유진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잽싸게 튀었다. 연구소에서도 죽어라 뛰었는데 이까짓 탈출 쯤이야 못하겠냐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현관이 가까워졌을 때 그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해졌지만 저의 잽싸게 튀는 모습에 잡을 수 없겠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당연히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나올 수 있는 생각이었다.


손잡이가 손에 잡힌 순간, 유진의 목덜미도 잡혔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손에 저 깊은 곳에서 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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