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는 새 학기를 맞아 산 청재킷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벙벙하게 커다란 사이즈의 옷은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했다고 후회하며 캠퍼스를 빠르게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모르는 얼굴로 가득하다. 웃으며 반갑게 서로를 맞는 얼굴들, 개강 초부터 심각하게 미래를 고민하는 얼굴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신입생의 얼굴들. 그 얼굴들 가운데 아다치가 인사할 만한 얼굴은 없다. 아다치는 한 학번당 200명가량의 학생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영학과다. 당연히 같은 학번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아다치는 대학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경영학과는 인원이 많아 임의로 네 반을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고, 아다치는 A반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A반 학생은 얼추 알긴 해도 인사를 나눌 만큼 살가운 사이는 없다. 오히려 국문학과인 츠게와 연이 있을 정도였다.

삐쭉 나온 옆머리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아다치는 엘리베이터에 낑겨 탔다. 학생을 뱉어내듯 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핸드폰에 있는 시간표의 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303동 대강의실. 3시간짜리 교양 수업이다. 적당히 뒷자리를 잘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의실의 문을 열자 계단식의 좌석이 보였다. 앞에 앉으나 뒤에 앉으나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일 것 같지만, 일단 슬금슬금 뒤에서 세 번째 정도, 그중에서도 눈에 덜 띄는 기둥 뒷자리에 앉았다. 일찍 온 덕에 아직 자리를 잡은 학생이 많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사수했다는 기쁨에 광대가 올라갔다. 아다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책상에 백팩을 올려두고 가볍게 몸을 기댔다. 학교와 거리가 멀어 아침 일찍부터 집에서 나와 사람 사이에 끼어 전철을 타고 왔더니 지칠 만큼 지쳤다. 앞의 전공 수업처럼 첫날부터 수업하지 말고 적당히 오리엔테이션이나 하다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아다치를 누군가 살며시 불렀다.


"아다치?


목소리가 굉장히 좋네. 아다치가 꾸물꾸물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미남이 아다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다치는 짙은 눈썹과 호선을 그리는 눈, 광대에 자리 잡은 보조개로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같은 경영학과 2학년 쿠로사와 유이치였다. 아다치와는 모든 면에서 반대에 있다고 해도 좋을, 인기인 중의 인기인이었고, 엄청난 미남에, 과에서 제일 고백을 많이 받는, 동기라면 동기였다. 그도 그럴 게 쿠로사와는 A반인 아다치와 도통 겹칠 일이 없는 B반인 탓이었다. 작년에도 축제마저 따로 준비했다. 그래봤자 아다치는 축제 준비에 얼굴 한 번 비친 게 다지만.

그런 쿠로사와가 갑작스레 아다치에게 말을 걸자 아다치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렇게 인기 있는 녀석에게는 내성이 없단 말이야. 아다치는 허둥거리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어... 갑자기 자신의 모든 행동이 어색해 보였다. 숨을 쉬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냥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반면에 쿠로사와는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레 아다치에게 말을 걸고, 아다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환하게 웃으며 ‘역시 맞구나’ 하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뒤에서 보니까 아다치가 맞나 긴가민가했어. 같은 교양 듣나 봐.”


뒤에서 바라본 걸로 나인줄 안 거야? 역시 인기인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 아다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치는 이제 곧 쿠로사와가 갈 거라 예상했다. 보통 이렇게 인기 있는 사람은 혼자 강의를 듣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자신의 일행을 찾아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다치의 생각과 반대로 쿠로사와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여기 자리 있어?”


이번에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자 쿠로사와가 예의 그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아다치 옆에 자리 잡았다.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마주친 것만으로도 오늘치 사교성을 다 소진했는데, 쿠로사와가 옆자리에 앉으니 도저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그렇게 인기 있는 쿠로사와가 아다치 같은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아웃사이더 축에 속하는 사람도 기억하고 있는지 몰랐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인기인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아다치는 제법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제 가설을 전개했다. 바로 옆에 쿠로사와가 있다는 사실에 긴장했기 때문에 도피성 사고에 가까웠다.


“아다치랑 겨우 같은 수업을 들어보는구나.”

“나, 나랑?”

“응, 1학년 때는 거의 시간표가 겹치지 않았잖아.”


그건 어떻게 아는 거야... 아다치는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쿠로사와도 예의 그 눈부신 미소로 화답했다.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가, 원래 사교성 좋은 녀석들은 일회성으로 쉽게 말을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어느 정도 친밀감이 있는 상대가 아닌 이상 말을 건네본 적이 손에 꼽는 아다치는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그래봤자 전부 자신의 추측이고, 다음 주면 어떤 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다치는 괜히 필통을 만지작거리고 펜을 이것저것 손에 쥐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쿠로사와가 아다치의 필통을 보고 펜이 많다고 관심을 가지자, 아다치는 유일하게 자신이 아는 화제가 나와 열성적으로 펜의 종류와 브랜드마저 소개하고 말았다. 아, 보통 이런 것까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아다치는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쿠로사와가 제법 진지하게 듣고 있어서 문득 그의 열중한 정수리에 놀랐다.


"아다치는 문구에 관심이 많나 봐."

"아? 응, 그런 편이야."

"어쩐지. 저번에 학생회관 문구점에서 본 것 같았는데."


그건 또 어떻게? 아다치는 분명 펜 매대에서 10분 넘게 고민하며 펜을 골랐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내비쳤을 것 같아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쿠로사와는 그런 아다치의 반응을 보지 못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은근 자주 마주쳤어. 인사하려다 놓쳤지만."

"그랬어?"

"응, 사실 1학년 종강 파티 이후로 계속 말을 걸고 싶었어."


응?

아다치는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쿠로사와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아다치가 입을 열기 전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왔고, 지체하지 않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다치는 이름이 앞인 탓에 당황한 채로 대답했고,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기억의 파편을 건드려놓고 태연하게 교수의 호명에 손까지 올리며 명랑하게 답했다. 쿠로사와가 그때를 기억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아다치는 여전히 당황해 쿠로사와를 힐끔 훔쳐보았다. 짙은 선의 옆얼굴은 더는 아다치를 바라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도 아다치는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냥 해본 말일 것이다. 제일 좋아하는 색의 펜으로 교수의 말을 받아 적으며, 아다치는 그저 가볍게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자 쿠로사와는 그럼 다음 주에 봐, 하며 가방을 챙기고 인사했다. 첫날은 오리엔테이션 개념으로 일찍 끝난지라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쿠로사와의 인사를 소심하게 받으며 아다치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쿠로사와가 다음 주에도 과연 자신과 함께 앉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집에 가기 위해 여전히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을 타는 순간 그런 생각쯤은 전부 흩어졌다.


다음 주, 아다치는 어김없이 강의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먼 거리에서 통학하다 보니 아예 일찍 도착하거나 아예 지각하거나 둘 중 하나인 까닭에 차라리 일찍 오는 게 낫겠다 싶어 일찍 도착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다치는 지난주에 앉았던 자리를 찾아 터벅터벅 걸었다. 당연히 비어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이래서야 일찍 온 보람이 없다. 백팩을 멘 어깨가 낮게 처졌다. 비슷한 자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아다치."

"쿠로사와?"


가방의 주인은 쿠로사와였던 모양이다. 그는 말끔한 모습으로 강의실에 걸어들어오더니 아다치에게 캔커피를 하나 건넸다. 얼떨결에 캔커피를 받아든 아다치가 당황해 다시 건네려 하자 쿠로사와는 자기 몫의 캔커피를 흔들어 보였다. 아다치가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자 별것도 아니라며 쿠로사와는 환하게 웃었다. 눈 밑에 보조개가 패는 웃음이었다. 그러더니 쿠로사와는 자신의 가방을 옮겨 옆자리로 옮겼다. 의자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쿠로사와가 말했다.


"여기 앉을래, 아다치?"


아다치는 짧은 순간에도 이번 주 역시 쿠로사와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러나 그보다 이 자리가 소중했다. 아다치에게 있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주는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다치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며 백팩을 앞으로 안고, 고맙다고 짧게 말했다. 쿠로사와는 정말 여러모로 좋은 녀석이었다. 안 그래도 피곤했는데 캔커피까지 받고 역시 인기인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다음 주에는 보답해야 하나? 자리마저 양보했는데 캔커피 말고 제대로 된 음료라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역시 이건 좀 이상했다. 어느덧 아다치는 쿠로사와와 함께 다니는 일이 부쩍 늘었다. 시작은 아다치가 자리를 양보한 것에 보답한다는 이유로 음료를 사주겠다고 말했을 때였다. 쿠로사와는 대신 밥은 어떻냐고 물었고, 3시간짜리 강의가 끝난지라 아다치도 허기졌던 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학생 식당으로 갔더니 어쩐지 학생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듯했다. 역시 인기인 중 인기인과 다니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쭈뼛거리던 아다치와 달리 쿠로사와는 능숙하게 식권을 결제하더니─아다치가 결제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한 장을 아다치에게 쥐여주기까지 했다. 아다치는 뒤늦게 당황해서 지갑을 꺼내 들려 했지만, 쿠로사와가 식판마저 쥐여주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럼 음료라도 사겠다고 눅눅한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다치는 인기인의 삶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며 쿠로사와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마치 드라마나 연극을 보듯이 심정적으로 멀리서 바라보았다. 밥을 먹으면서 힐끔힐끔 쿠로사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무수히 많았다. 자신은 이번 한 번뿐인데도 벌써 지치고 불편해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쿠로사와는 그런 아다치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입에 안 맞아? 입에 안 맡기는, 아다치는 거의 매일 학생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츠게와 먹거나 했다. 그래도 밥을 먹기 거북할 정도로 시선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쿠로사와도 제법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아다치는 되려 활기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쿠로사와. 고마워. 괜히 환하게 웃어 보이자 쿠로사와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음료를 사주겠다고 벼르고 벼른 아다치는 일부러 학내 카페가 아니라 학교 앞 한적한 카페를 골랐다. 커피는 맛있지만, 값이 비싸고 앉을 자리도 별로 없어 학생들은 자주 가지 않는 카페였다. 쿠로사와가 학식을 얻어먹은 것에 비해 너무 비싼 것 아니냐 물었지만 아다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자리 양보해주고 캔커피도 준 것에 보답하려 했는데 쿠로사와가 모두 샀는걸... 쿠로사와가 고맙다고 웃으며 커피를 받아들자 뿌듯했다. 아다치는 살면서 자신이 이런 경험을 얼마나 해보겠냐 싶었기에 더욱 용기가 난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일회성 이벤트처럼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츠게, 이번 과제까지 쿠로사와랑 같이 하게 되었어."


아다치가 유일하게 친한 친구인 츠게에게 고민 상담을 하게 된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교 제일의 인기인과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라는 마치 요즘 나오는 라이트노벨 제목 같은 일이 아다치에게 일어났다. 보통 그게 뭐가 문제냐 묻겠지만, 츠게는 아다치처럼 그늘에 속한 사람의 심정이 무엇인지 알기에 아다치의 이상한 신음에 동조하며 함께 머리를 쥐어뜯을 수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아다치. 대체 어디서 쿠로사와와 엮인 거야?"

"어?"

"쿠로사와가 널 자주 봤다며. 게다가 종강 파티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왜 쿠로사와가 널 기억하지?"


아다치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1학년 종강 파티라면 그 많은 경영학과가 한 번에 모인 날이었다. 원래 그런 자리에 절대 가지 않는 아다치였지만, 선배인 우라베에게 잡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석했던 자리였다. 맨 끝자리에서 안주나 축내다가 적당히 집에 들어갔던 거로 기억하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쿠로사와는 아다치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일까. 아다치는 곰곰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시끄럽고 사람으로 가득 차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기운이 쭉쭉 빠지던 날이라 뚜렷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에이, 설마."

"짚이는 거라도 있는 거야?"

"아, 음. 그렇긴 한데, 아니, 아닐 거야. 설마."


그날 쿠로사와는 뭇 학생의 목표물이 되었다. 쿠로사와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쿠로사와를 마시는지 모를 정도로 잔뜩 들이부었을 때 쿠로사와의 눈이 느슨하게 풀렸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아다치가 쿠로사와를 아는 사이일 뿐이었다. 워낙 유명인이었으니, 종강 파티에서도 단연 많은 이의 눈에 띄었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쿠로사와가 선배가 주는 술을 손으로 쳐냈고, 그게 선배의 바지를 적셨다. 죄송하다고 꼬이는 혀로 쿠로사와가 사과했을 때 그 선배는 짜증을 냈지만, 옆에서 좋게 넘어가자고 웃었다. 직후 쿠로사와가 잠시 바람을 쐬러 간 사이 몇몇은 쿠로사와에 관해 험담하기도 했다. 얼굴 잘생긴 거 믿고 가끔 버릇없게 굴지 않냐, 은근히 냉정하다는 둥.

쿠로사와가 그걸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다치는 그게 듣기 거북했고, 그러므로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벗어나던 아다치는 약간은 오른 술기운에 혼자 중얼중얼거린 것이다. 그 쿠로사와 얼굴에 홀린 게 누군데. 그리고 열심히 받아마시더니만. 뭐가 냉정하고 어쩌고. 냉정하면 뭐 어때. 눅눅한 여름밤 공기를 폐에 잔뜩 들이마시며 밖을 나서던 아다치는 들어오는 쿠로사와와 가볍게 부딪혔다.


"엇, 미안."

"아니, 괜찮아. ...혹시 취했어?"

"응? 아니, 아니야."


방금까지 입에 담고 있던 화제의 쿠로사와가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물어왔다. 자기도 많이 마셨으면서 친절하게... 아다치는 자신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느린 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하는 아다치의 뒷모습을 쿠로사와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다치는 제 뒷모습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 시선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애써 기억에서 밀어냈던 술자리가 불현듯 떠오른 것은 왜일까. 초식동물의 감이라고 봐도 좋을 그것을 아다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다치는 종종 인생이 드라마 촬영과도 같아서, 이 씬을 다시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색하거나 별로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아다치는 학교 최고의 인기인 쿠로사와와 학교 주변 카페에서 머리를 맞대고 과제를 하는 중에 간절히 그런 기도를 했다. 아다치는 별것이 다 신경 쓰였다. 자신의 목소리, 억양, 톤, 사소한 제스처, 입은 옷까지도. 물 흐르듯 아다치를 이끌고 과제를 위한 약속을 잡고 근처 카페로 장소를 정하고 자리를 잡아 이곳에 이르기까지, 아다치는 어쩐지 학기 초의 재현 같다고 느꼈다. 쿠로사와는 성큼성큼 아다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만이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NG 테이크를 내고 있을 뿐.

사실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다치는 시키는 건 잘하는 타입이었고, 그런 게 여러모로 편해서, 혹은 같은 경영학과라는 공통점이 있어 자신과 과제를 하자고 권한 것일 수도 있었다. 과한 생각은 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배려와 다정이 눈에 보여 도저히 몸 둘 바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감전된 듯 과하게 튀어 올라도 쿠로사와는 잠시 1보 후퇴했다가 2보 전진하는 사나이였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감당할 수 없어! 허용치 초과야! 아다치의 머리에 빨간 불이 번쩍번쩍 들어왔다. 그것이 무엇의 경고인지 몰라도 그랬다.


"아다치, 어디 아파?"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은데..."

"않은데?"


아다치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쿠로사와의 눈매가 몽글몽글했다. 크레페 크림처럼 부드러운 웃음, 그게 오롯이 자신을 향했다. 자꾸 착각하게 된단 말이야. 아다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쿠로사와는 다정해서 나 같은 인기 없는 애한테도 잘해주는데, 어쩌면 불쌍해서 그럴지도? 아다치는 약간 자학적인 생각까지 서슴지 않았다. 쿠로사와도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른다. 아다치가 과방에 자주 가지 않게 된 것도, 누군가와 사귀어 본 적 없다니 조금 기분 나쁘다는 험담 때문이었으니 정말로 불쌍해서...


"...아다치?"

"어? 어, 미안."

"혹시 집중이 안 돼서 그러는 거면 다음에 할까?"

"으응, 아냐. 정말 괜찮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다시 집중하기 위해 노트북 화면을 향해 고개를 박았다. 쿠로사와는 잠시 갸웃거리더니 그런 아다치를 보고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설령 불쌍해서 그렇다고 해도, 쿠로사와의 이 다정은 진짜니까 소중히 하자는 아다치의 마음은 아마 꿈에도 모른 채 둥글둥글한 아다치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는 쿠로사와였다. 몇 번이고 올라갈 뻔한 손을 자제하느라 고생했다.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빛이 나는 외모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명료하게 발표를 진행하는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피피티를 발로 만들었다 해도 최고점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둘의 루틴인 수업 후 학생 식당에서 밥 먹기를 위해 대강의실을 빠져나오는데 쿠로사와가 오늘은 발표도 끝난 겸 학교 근처 괜찮은 식당에서 밥을 먹자 제안했고 아다치도 동의했다. 내심 자신이 밥을 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자료조사를 함께하고 피피티는 아다치가, 발표는 쿠로사와가 하기로 했으나 아다치가 생각하기에 발표가 심적인 부담이 더 컸고, 쿠로사와의 발표는 심지어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가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 쿠로사와─심지어 발표를 위해 차려입어서 그림 같이 어울리는─와 스트라이프 카라 티를 입고 쭈뼛쭈뼛 뒤따라가는 아다치는 많이도 달랐다.


"발표, 수고 많았어."

"아다치가 피피티를 잘 만들어서 다들 그것만 보던걸."

"쿠로사와도 은근 거짓말을 잘하네."

"나 아무한테나 빈말하는 거 아닌데."


쿠로사와의 눈빛이 아다치를 곧게 향했다. 아다치는 평소처럼 웃어넘기려는데, 쿠로사와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항상 갑옷이라도 되는 듯 은은하게 깔려있던 미소가 사라진 쿠로사와의 눈매는 생각보다 짙고 깊었다. 아다치가 당황해 눈을 굴리기 시작하자 쿠로사와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아다치가 안 믿는 눈치길래. 그러면서 자연스레 물잔을 들어 마시는데 아다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쿠로사와의 새카만 눈에 자신만 비치는데,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롯이 한 사람의 눈에 담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심장 떨리는 일이었다. 아다치는 이제 막 나온 파스타를 어설프게 말아 입에 넣었다. 솔직히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아다치, 7주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기다렸어."

"응?"

"네가 날 그렇게 봐주기를."


꿀꺽. 아다치가 파스타를 넘기는 소리만 크게 나는 듯했다. 달그락 작게 소리를 내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쿠로사와는 파스타에 손을 대지 않고 양손으로 턱을 괴며 아다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아, 또 조금 무서운 눈. 까만 눈에는 아다치만이 비쳤다. 아다치는 영화나 드라마도 아닌데 이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쿠로사와의 눈이 아다치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다치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무섭게도 올곧은 시선의 뒤에 열망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다.


"쿠로...사와?"

"솔직히 말해도 돼?"


아다치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라도 있는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쿠로사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나, 너를 좋아해."

"이전부터 계속, 그랬어."

"이런 내가, 싫어졌어?"


짙은 눈썹을 살풋 찡그리며 말하는 쿠로사와는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은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이지만 아다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다치는 그 눈빛에서 희미한 불안마저 느낀다. 그럼에도 말을 꺼내놓고 마는, 결연한 마음도. 아다치의 대답은 이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선인 쿠로사와와 달리 돌아왔지만, 쿠로사와와 같은 곳을 향한 대답이었다.


"아니, 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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