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겨누어진 총구를 보며 피식 실소를 흘린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밌어, 자기? 부드럽게 목덜미를 움켜쥐어오는 듯한 목소리에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건성으로 넘기며 입꼬리만 잔잔히 끌어올렸다 만다. 밤은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들의 친구이니, 골목길에 외로이 붙박혀 순교자처럼 고개를 늘어뜨린 가로등만이 해후의 증인 역을 자처한다. 그림자에 거의 녹아들 정도로 검은 제 머리보다는 조금 밝은 축에 속하는, 해의 영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밤하늘에 비기는 쪽빛 머리카락을 슬쩍 손가락으로 매만져본다. 쥐어서 잡아당겨, 머리를 꺾고, 부드러운 이마를 쓰다듬고, 어깨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쇄골 언저리에 입맞추고, 숨통을 쥐고, 떨리는 눈꺼풀을 손으로 더듬고, 손목을 부러뜨리고, 무릎을 꿇리고, 화를 내고 싶다. 어째서 나를 속였느냐고. 비난하고 욕하고 싶다. 그러나 총알은 언제나 모든 말과 모든 행동보다 빠르다. 그의 손목을 차서 총을 떨어뜨리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백업도 없이 저를 찾아왔을 리는 없으니 그랬다간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마에 총알이 박힐 것이다.

깨진 술병과 잔뜩 해진 비닐 따위가 굴러다니는 골목에 사늘하게 바람이 불고, 가로등이 미약하게 삐걱거리고, 이 밤을 탄원하는 유일한 광원이 흔들림에 따라 그림자도 덩달아 삐걱거린다. 약간의 기시감과 함께 그 그림자에서 슬그머니 팔을 뻗는 용마를 발견하고 가볍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덩달아 가까워지는 총구에도 아랑곳 않고. 왜 계속 나를 찾아와? 악당과의 밀회 같은 거 별로 즐기지 않는데. 그는 여전히 눈도 깜박이지 않고 단숨에 답한다. 너 놀려먹는 게 재밌으니까. 유명하신 왕의 측근, 초랭이탈. 놀리듯 도홍색으로 반짝이는 눈과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가 슬쩍 휘어지더니 예쁘게도 눈웃음을 친다. 짧은 비소로 받아치며 빛이란 빛은 죄다 집어삼킬 듯 새까만 눈동자로 그를 가만히 응시한다.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자기. 밤은 무르익고 가로등은 또 삐걱거린다. 웃음만 남기고 무영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사르르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검은 자취에 침을 뱉으려다 그만둔다. 얕은 한숨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흩어졌을 뿐이다.





한쪽 감각이 좋으면 다른 감각은 필연적으로 조금씩 무뎌지기 마련이다.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으니, 꾸준히 훈련하거나 의식해서 신경쓰지 않으면 선별 과정에서 몇몇 감각 정보들이 무심코 누락된다. 그는 종종 그 둔해지는 정도가 심해서, 음식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냄새보다도 연기로 알아차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무영은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의 후각적 둔함을 위해 그런 변명을 속으로 읊조려본다. 어차피 들을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는 변명이었지만. 머스크. 시더우드. 앰버노트. 파출리. 사향과 제라늄에서는 조금 고민한다. 생각 끝에 사이프러스에도 체크 표시를 한다.

그는 대체로 하늘이나 바다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각적인 면이 불러일으킨 이미지였다. 무영은 특히나 시각에 많이 의지하는 이였으니 그 희고 푸른 풍경화 같은 회상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곰곰히 떠올려보면 그는 하늘과도 바다와도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체향 역시도, 바다보다는 숲에 가까웠고, 묘하게 도회적인 느낌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 어쨌든 바다는 아니었지. 앰버노트는 마지막 미련이라 치고, 무영은 과감히 바다소금과 세이지, 자몽을 항목에서 지웠다. 시트러스도 아니었어. 망설임 끝에 라임도 지웠다.

덜컥 주문을 맡겼지만 막상 도착한 향수의 향을 맡자 기묘한 두려움이 앞섰다. 왜 이런 걸 만드는지는 생각 않고 집요하게 기억부터 더듬어 만든 미련의 응축이 섬뜩하리만치 그의 체향과 닮아서 처음에는 서랍장 깊숙한 곳에 박아놓고 꺼내보지도 못했다. 실제로 향수를 뿌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년은 더 지난 뒤였다. 이제 정말로 괜찮아. 응. 어설프게 그리움을 달래는 게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거니까. 눈을 꾹 감고, 늘 바쁘게 일하는 시력을 아예 가려버리고, 거실에, 침대맡에, 발코니에 서 있는 그를 향으로 떠올려본다. 그래. 너는 여기에 그렇게 서서, 그런 얼굴로, 그런 눈빛으로, 그런 말을 했었지. 아주 미약한 미소가 녹아 사라지기 직전의 얼음처럼 위태히 그려진다. 그래. 그랬었지.





그는 꿈속에서 하얀 나비를 본다. 도심지 한복판에 맥락 없이 날개를 하늘거리는 나비는 어떤 곤충의 종류라기보단 빛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얀 나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던데. 그는 무심코 손을 뻗는다. 자석의 극이 이끌리듯, 당연스럽게 손가락에 내려앉는 나비를 보며 그는 이것이 꿈이라고 자각한다. 손가락 위에서 나비는 날개를 편안히 늘어뜨린다. 누가 죽었니. 너는 누구의 영혼이니. 짐짓 침울한 모양새로 더듬이를 기울어뜨린 나비는 사르륵 빛가루를 뿌리고 홀연히 날아가버린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나비를 잠시 올려다보다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이가 있다.

"머리 길렀네."

그 긴 세월의 풍파에도 해지지 않는 무의식에 조금은 감탄한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그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씩 웃는 것이 조금 얄미워 부러 딱딱한 얼굴을 한다. 질리도록 본 환각이다. 달리 반응을 보여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다. 요즘은 좀 어떠냐. 자윤은 여전히 고생길이야? 초이는? 뭐, 마음 고생은 하겠지만 그 녀석들은 대체로 괜찮으니까. 고타야는? 호 녀석은 아직도 인격 갈라진 거 그대로고? 렉스는 건강하냐? 무영은 모든 질문에 짤막하게 대답하고, 그는 태연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한다. 무영은 듣지 못한다. 노이즈가 심해진다. 덜컥 손목이 붙잡혀 보니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전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섯 글자. 입 모양으로 내용을 짐작해낸다. 눈을 꾹 닫는다.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뜨자 그는 없다. 무영은 까만 나비 하나가 불규칙하게 사선을 그리며 나는 것을 바라본다. 검은 나비는 죽음과 환생의 환각이라던데. 출처조차 불분명한 정보가 문득 떠올라 힘없이 웃는다. 뭐, 환각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하얀 것도 검은 것도 죽음의 은유라면 나는 어떻게 검은 옷을 입고 죽음을 추모하며 살아있나 의아한데, 꿈속의 환각은 그런 말이나 하고. 옛날에 이 나라에서 하얀 나비는 상복을 연상시켜 불길함의 상징했다지. 그해 봄 가장 먼저 본 나비의 색깔이 하얀색이면 재수가 없을라니 하고 말았다지. 하얀 나비와 검은 나비, 죽음과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맞닿아 있어서, 하얀 너는 그렇게 빨리 새까만 심연으로 돌아갔니. 자석의 극에 이끌리듯. 성큼성큼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걸음을 옮겨서는.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인다. 날개짓이 미풍을 일으켜 태풍을 불러와 꿈을 허물어뜨릴 때까지, 계속.





펜촉이 하얀 종이의 서명란 위를 누비는 사각거림이나 노트북 자판의 딸칵거림 외에는 본래 정적이 지배적이던 공간이지만, 새벽께에 방을 뒤덮은 정적은 이제까지와는 조금 질감이 달랐다. 그는 안락의자에 파묻혀 커피를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중이다. 하얗고 묵직한 중량감이 있는 머그잔은 안정적인 느낌이 있어 좋아하는 편이다. 그는 평소보다도 독하게 우린 커피를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잘도 마신다. 그의 반대편 의자에 대충 기대앉은 남자는 같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불편함을 숨길 기색도 없이 잔은 물린다. 독살하려는 셈입니까? 피곤해 보여서 잠 깨라고 준 건데. 보통 피곤해 보이면 쉬라고 하지 카페인 엑기스 같은 걸 대접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가? 그럼 나가서 쉬고 내일 오든가. 목소리의 높낮이도 빠르기도 평이하기 짝이 없는 건조한 대화가 몇 번 오간다.

너 갈 데는 있냐. 원래도 딱히 정해진 거처 없이 살았습니다. 신경 끄시죠. 진이랑 살 때는 안 그랬잖아. 유진 님 따라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 잠시 침묵. 머그잔이 컵받침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번, 이후 정적이 구두코까지 고인다. 그저 그런 대화가 토막으로 이어지다가 방향을 잃으면 톡 끊어진다. 정적은 차차 두께를 더해가지만 그들은 그다지 어색해하는 기색도 아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무영이 먼저 빈 잔을 내려놓는다. 고타야도 첫 한 모금 이후로 거의 입도 대지 않은 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표연히 걸음을 돌린다. 무영은 기다란 장복의 끄트머리가 펄럭이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정적은 평소와 같은 것으로 돌아오고 방에는 열린 창문과 주인 없는 머그잔만 남는다. 무영은 가만히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온 바람이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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