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건물들의 뒤쪽 틈 사이로 웹슈터를 쏘면서 날아다니는 피터의 입에서 나온 오늘의 첫마디는 욕설이었다. 메이가 베이징에 출장을 가던 날, 지각 안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첫 날부터 지각이라니! 30분에 시작하는데, 지하철로 가면 빨라도 40분에 도착한다. 아침에 씻는 게 아니었어! 아니, 그래도 씻었어야 했는데. 땀에 젖은 채로 창문으로 기어들어와 지쳐 쓰러졌다가 마스크만 겨우 베개 밑에 처박고 그대로 잠들어버린 게 주말을 포함해 어느덧 3일째였다. 얼굴도 답답해졌고 머리에서는, 메이 숙모의 말을 인용하자면, 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고.


 가쁘게 숨을 내쉬며 정문에 뛰어들어오자 시계는 8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분 만에 도착! 후, 정체 들킬 리스크만 각오하면 매일 이렇게 등교해도 좋겠는데? 할 리가 있나. 락커를 향해, 웹슈터를 가방에 쑤셔 넣으면서 달려갔다. 하나 둘씩 무리지어 있던 학생들이 교실로 사라지자 초조함에 배가 아파오고, 그냥 정신이 없어서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오늘 1교시가 뭐였지? 아 체육, 망했다. 운동장도 아니고 체육관! 체육관은 다른 동에 있는데! 수업은 30분에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락커까지, 락커에서 탈의실까지,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체육관까지 전력을 달려도, 이미 그렇게 달리고 있지만, 5분은 걸린다. shit, shit, shit- 늦으면 탈의실 청소시키는데! 그 쏠리는 냄새가 벌써 코끝 언저리를 맴도는 듯했다. 두 번 맡기는 싫다고!


 그래도 전력으로 달려 금세 도착한 탈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외투랑 셔츠를 한꺼번에 벗어 던지고, 바지도 내리려 허리춤을 잡은 피터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아, 맞다. 아침에 씻고 급해서 속옷도 안 입고 나왔지. 쉬는 시간에 입겠다며 가방 속에 던져 넣었던 것까지만 기억 난다. 뭐, 아무도 없잖아. 그렇게 훌떡 내리려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


 악! 

 잔뜩 긴장한 몸이 놀라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데, 바지가 흘러내리면서 다리가 꼬여 착지는 개뿔, 뒤로 넘어졌다. 누가 있었어!? 아픔보다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하체 겸 급소와 쪽팔림, 그리고 다가오는 발소리에 필사적으로 벤치에 벗어둔 셔츠를 끌어 내려 한 부분만 겨우 가리자 때 맞춰 (아니 안 왔으면 싶긴 했지만 어쨌든) 몸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속으로 민망함에 괴성을 외치며 고개를 들자, 앞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토니 스타크!


 쿵쾅대던 심장이, 창피함에 들끓던 피가 한 방에 식어버릴 정도로 예상 외의 인물에 당황스러워 피터는 빳빳하게 몸이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예상치 못한 인물이지만, 이건 너무 예상 외였다. 이 상황에서 학생 200명에서 198명 정도를 예상범위에 넣는다면 이 사람은 2명 중 한 명인 수준인데.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던 스타크는 손으로 눈을 아웅 가리는 시늉을 하며 미소를 흘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 무슨 민망한 상황이란 말인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채로 고맙다고 하며 손을 잡아 일어났다. 엉거주춤한 폼으로 그 애가 나갈 수 있도록 지나가게 길을 틔워주었는데, 스타크는 멈춰 서서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기... 나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는 잠깐 응? 싶은 표정을 짓더니 안 볼게, 하고는 뒤돌아섰다. 왜 안 가는 거야...?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목덜미가 후끈거리는 채로 속옷을 꺼내입고 옷에 몸을 쑤셔 넣자 그제야 머릿속에서 지각을 알리는 경적이 울렸다. 아 망할, 락커에 가방을 던져넣고 급하게 문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잡는데, 뒤에서 옅게 손목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히익, 온몸에 소름이 돋는 바람에 잡고 있던 철제 손잡이를 살짝 구기고 말았다. 우, 미안.


  "넌 수업 어디서 해?"


 장난해? 너 나랑 같은 반이잖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 뭐, 필요 없는 건 기억 안 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체육관인데..."

 "같은 반이구나? 같이 가자."


 "뭐? 싫어!"


 정적이 흘렀다. 나... 지금 생각한 게 아니라, 외쳤나? 피터는 이미 삼킨 말이 너무 많은 데다, 이 어색한 상황에 단둘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피터는 애써 합리화를 했다. 무례하긴 했지만, 의사 표현은 했으니까...? 이 굳어버린 공기에서 빨리 빠져나가야겠어. 그렇게 문손잡이를 돌리려 하는데, 스타크가 손잡이를 잡아 막았다.


 "같이 가도 되는 거지?"


 이 나긋한 목소리. 얼핏 들으면 부탁같지만, 이건 매달리는 게 아니다...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스타크는 온몸으로 내가. 잘못. 들었나? 라 말하고 있었다. 손의 은근한 악력이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였다. 피터는 그 눈빛에 고양이도 아닌, 사자 앞 생쥐가 된 기분이 들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쥐구멍도 앞발로 막아버린 사자. 비굴하게도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응, 이 한마디조차 막지 못했다. 원하는 고깃덩어리를 갖다 바치자, 그제야 표정을 푼 스타크는 다시 온화하게 웃더니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응? 손잡이가 원래 이랬나? 그...그러게. 피터는 흘러내리는 식은 땀을 스타크가 볼 새라 급히 훔쳤다.



-



 뚜벅, 뚜벅, 뚜벅

 터벅터벅


 이미 종이 친 복도에는 두 사람의 발걸음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체육관하고 탈의실의 거리가 원래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무한하게 느껴진다. 사실 지금 뛰어야 하는데... 스타크는 좀 처럼 뛸 생각이 없는 듯했고, 뛰자는 말도 못 하겠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빠르게 발을 옮기는 것 뿐이었다. 빨리 가기는 이미 포기했고,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소리 없는 발악에 가까웠다. 아까 전 부터 후끈거리는 목덜미는 좀채 식지를 않았다. 학교 중 누구와도 전라 상태로 마주친 적은 없다, 아니 가족을 빼고는, 그것도 아기 때 빼고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하필 그 상대가 토니 스타크라니! 첫 만남이 이따위라니! 만남에 대한 기대도 없었지만, 있어도 이런 상황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토니, 토니 스타크. 나랑 같은 학년에 마주친 적도 없다. 보여도 항상 멀리서 형체만 보여서 사실상 얼굴도 뉴스로 봤고, 스타크의 논문, 발명들을 제외하고는 관심도 없었기에 알아보지도 않았다. 내가 토니 스타크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나이 같은 기본 프로필, 나와 겹치는 수업, 그리고 돌아다니는 가십들로 들은 정보따위들. 그 정보 들은 걸러야 하는 게 더 많았지만, 확실한 건 돈, 재능, 인기 모두 많은 존재라는 거다. 인생에 다다익선이라는 말을 새기고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 이미 MIT에 입학 초대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자만하지 말라면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했다고 하는 말도 있다. 진짜라면, 도대체 이런 소문들은 어떻게 흘러나오는 걸까.


 스타크는 모르지만, 피터는 아는 (흔치 않은)사실 중 하나로는 둘이 겹치는 수업이 꽤나 많다는 사실이다. MSST에 다닌지 2년 째, 그동안 3번 시간표가 바뀌었는데, 세 번 다 9개의 과목 중에 6개가 겹쳤다. Home room도 같은 방이었지만, 토니는 홈룸에는 연구를 이유로 출석 하지 않았으므로 가깝게 만날 일도 없었고, 가끔 수업에 비는 사람이 있다면 주로 스타크였다. 최근에는 스타크 인더스트리를 바쁘게 인수인계 중이라는 기사도 읽었던 것 같다.


 수업...수업 중에는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자거나 누군가한테 눈빛을 보내는 중이거나, 교탁 밑에서 핸드폰을 하는 모습밖에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수행 필기 실기 모두 항상 만점. 나도 공부로는 지지 않았다. 진다는 개념조차도 없던 게, 겨우 학교 아닌가. 하지만 스타크는 학교 밖의 일에서 나를 월등하게 앞서갔다. 항상 그의 과학적 업적들을 존경하는 동시에 약한 열등감도 느껴왔다. 동시에 출발해도 나는 녹초가 되어 안나푸르나에 쓰러져있다면, 그는 이미 안나푸르나를 찍고 에베레스트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뒷산만 올라도 숨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분한 건 분한 거다.


 뒤를 흘겨보자 우연인지 고의인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움찔하는 저를 보고 10에 10은 넘어갈 듯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질겁해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얘 왜 이래? 아니, 원래 이런 애라고 듣기는 했지만, 왜 나한테? 플러팅 많이 한다는 게, 그게 아무한테나 한다는 뜻이었나? 아니, 그보다 이게 플러팅이야? 받아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나랑은 남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럼 고양이한테도 하나? 그렇게 산으로 가던 사고는 발걸음 소리에 깨졌다.


 뒤에서 일정하게 따라오던 발소리는 느닷없이 속도를 높이더니 옆으로 다가온 후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 훌쩍 다가온 스타크를 흘깃 쳐다보자, 또 눈이 마주쳤다. 고의구나. 100% 고의야. 눈높이도 거의 같아서 더욱이 스타크 쪽으로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걷고 있기는 한지. 대놓고 느껴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멀리 보이는 체육관 문에 눈을 고정하고는 다리를 제대로 옮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고요가 꽤 오래간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원래 팬티 안 입고 다녀?"

 딸꾹,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진 앙증맞은 소리에 피터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작게 실소를 터뜨리는 스타크를 향해 피터가 다급하게 반박했다.

 "뭐!? 아니!! 그건-"

 "농담이야."


 여유롭게 웃음을 짓는 토니에 비해 피터는 여러 의미로 단시간에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체육관 문에 손을 뻗으면서 생각했다. 아주 잠깐 이었지만, 스타크의 눈은 소문보다 아름답구나. 짙은 쌍꺼풀과 속눈썹. 올리브색이 섞인 갈색의 홍채. 눈싸움이라도 하면 시작하자마자 내가 질 게 확실하다.



-



 윽,

 조심스럽게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게 쏠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뒤에 잇따라 들어온 스타크에게 옮겨가는 것도. 벤치에 앉아있는 무리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출석을 부르고 있었나 보다. 오늘따라 빠르게 부르네. 농구라도 하고 있으면 몰래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젠장. 시계는 벌써 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터덜터덜 뛰어가는데, 뒤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뭐야? 스타크는 나를 부드럽게 막으면서 자신의 뒤로 보냈다. 뭔데? 그러고는 좀 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걸 때와는 다른, 뭐라고 해야 할까. 모범생같이 야무진 걸음걸이와 목소리로 선생님을 부르며 다가갔다. 나는 바삐 옮기던 발의 속도를 늦추다 결국 선생님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섰다. 이 어찌나 빠른 태세전환인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들은 적 있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었나 싶다. 고개를 끄덕이는 피터였지만, 이어진 스타크의 말에는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탈의실에서 스무디를 쏟았는데, 쟤는 제가 치우는 걸 도와줘서 늦은 거예요. 끈적거리는 스무디를 학교 기물에 묻힐 수는 없잖아요."


 스무디? 능청스럽게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문장을 뱉어낸 스타크는 나를 흘깃 보더니 뒷짐을 쥐던 손으로 몇 번 지퍼를 채우는 제스쳐를 보냈다. 뭐지? 아,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 온 다음부터 머리가 온통 의문점으로 가득하다. 감싸준 건가? 선생님은 잠시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이번만 봐 준다며 이름 옆에 있던 지각표시에 빗금을 죽죽 그어 없앴다. 예이! 메이 저 지각 안 했어요! 스타크에게 고맙다고 하려 다가가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자리에 앉는 모습에 머쓱해져 피터는 저도 몸을 틀어 네드의 옆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걱정했다고. 미안. 자리에 앉자마자 누가 뒤에서 머리를 쥐어박았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짧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보자 역시나, 플래쉬. 오늘은 또 뭐야.


 "토니한테 점수 따려는 거냐? 재수 없게 굴지마."

 "너는 쟤랑 대화할 때는 스타크라 부르면서 지금은 토니라 부르네. 내적 친밀감 엄청난가 봐?"


 훠우. 속 시원한 반격의 출처는 건너 자리의 미쉘이었다. 꿀이라도 입에 문듯 입을 닥친 플래쉬를 향해 네드는 지적당하기 전까지 소리 없이 환호하는 몸짓을 했다. 미쉘의 인간 관찰은 이럴 때 빛을 보는 것인가.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인가보다 생각하다가, 꼭 이런 생각하면 운 달아나지. 싶어서 머리를 내젓는 피터였다. 참으로 쓸모없는 고민이로다.


 수업은 개인 멀리뛰기 5번씩, 그 후에는 자유시간이었다. 원래대로 했다면 아마 4m는 가볍게 뛰었겠지만, 몇 달 전에, 작년에 그 일 이 벌어지고 힘이 세지기 전까지 피터는 비실비실파, 즉 체육을 못 하는 축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A- 정도로 맞춰 뛰어야 했다. 후딱 끝내고 나서는 네드와 구석의 벤치에 앉아서 네드가 못 마친 숙제를 도왔다. 뭐, 정확히는 네드가 헐떡거리는 동안 심심해서 내가 풀었지만. 그리고 이따금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는데, 딱히 누가 보이지는 않았다. 호-옥시라도 스타크인가 싶었지만, 스타크도 볼 때마다 다른 인기 많은 애들이랑 떠들고 있었고.


 몇 번째 시선을 쫓던 중, 숨을 다 고른 네드가 말을 건냈다. 피터, 너 진짜로 스타크를 도와준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피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니...티났어? 역시나, 너 입 벌어지는 걸 쌤이 못 봐서 다행이지. 네드는 제 표정을 따라 하는 것인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인지 모를 얼굴을 만들어냈다. 야,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냐, 그랬어. 내 표정이 그렇게 드라마틱하진 않거든? 맞거든. 짧은 실랑이는 피터가 먼저 끊었다. 늦잠 잤는데, 탈의실에서...마주쳐서 같이 왔어. 네드는 그 잠깐의 공백을 눈치챌 정도로 싹싹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멋지다, 살면서 토니 스타크랑 대화할 일이 몇 번이나 있겠어. 그러게, 피터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이었다. 자기만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문만큼 밥맛은 아니더라."







원할 때마다 이어집니다. 가볍게 쓰니까 행복하네요! 아냐 내 인생은 우울해...

러브 코미디만 찍고 다녀. 제발...뿌드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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