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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공과 함께 황태자의 막사를 떠나 대공가의 막사로 왔다. 대공은 사냥 대회를 위하여 사용인의 시중을 받으며 파티션 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 아버지.”

“왜 그러니? 호석아.”

사냥복으로 갈아입고 파티션으로 나온 대공을 불렀다. 내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옷을 정리하는 사용인을 보며 우물쭈물하자 대공은 눈치를 채고 주변을 물렀다.

“편하게 말하렴.”

대공은 내 손을 잡고 의자로 이끌어 앉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며 기다려주었다.

아…… 진짜 이런 다정함이라니. 이 다정함을 생판 남인 내게 쏟지 말고 우리 윤기에게 주면 얼마나 좋겠냐고요.

“아버진 윤기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

아. 지뢰 밟았구나. 대공의 표정이 살벌하게 바뀐 걸 보고 든 생각이었다.

“그놈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애를 죽일 것 같은 기운을 내뿜었다.

“아뇨! 아뇨! 그게 아녜요!”

갑자기 살기등등한 기운을 내지 마시라구요~!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 치며 부정했다. 그러자 대공의 표정이 온화하게 변하더니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그러니?”

“……아버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게 이렇게나 다정하시고 좋은 분이신데…… 윤기에겐 차갑게 대하시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아요. 윤기가 아버지의 피를 이은 진짜 후계자잖아요?”

“……달라졌구나.”

움찔.

나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에 괜히 식은땀이 흐를 거 같아서 침을 꼴깍 삼켰다.

“처음 대공가에 온 날, 널 후계자 삼겠다는 말에 너는 뛸 듯이 기뻐했지. 그리고 누구보다 윤기를 괴롭혔고.”

뜨끔.

빙의 전 민호석은 윤기에게 끔살당할 정도로 괴롭혔는데, 빙의 후에는 180도 변해서 이뻐하고 챙기니 달라졌다고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너와는 너무나 다르구나.”

설마, 날 의심하는 걸까?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지금 이 모습이 더 좋구나.”

“…….”

“호석아, 네게 다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윤기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는 것은…… 녀석을 위해서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윤기를 위해서라니? 아니, 대체 어디가 윤기를 위해서라는 건데?

나는 대공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공의 눈동자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느껴져서,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수긍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대공의 손을 붙잡았다.

“아, 아버지. 모르겠어요. 제게 말씀해주실 수 없나요?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요. 제 나이가 벌써 몇인데.”

대공은 나를 내려다보곤 빈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을 주지 말아야…… 훗날 녀석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

대공의 대답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아…… 그런 거였어.’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대공이 윤기에게 정을 주지 않은 이유를.

대공도 너무나 잘 알고 있겠지. 가문에 흐르는 저주를. 그도 저주 때문에 제 부모를 죽였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아버지를 많이 사랑해주셨나요?”

“……무척이나.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로.”

“!”

사랑받은 기억 때문에 그 일로 더 힘들어했을, 정신을 사로잡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대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 일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무척이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노라고 말하는 듯했다.

대공은 윤기를 일부러 싫어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째서일까? 호석이 네가 알 리가 없을 텐데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

“각하,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막사 밖에서 사용인이 이제 나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대공은 내 손을 놓고 빙그레 웃으며 뒤돌아섰다.

“아버지!”

나는 대공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대공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는, 저는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윤기 저주를 반드시 풀 테니까.

“저와 어머니, 그리고 윤기 두고 절대로 먼저 떠나시면 안 돼요. 반드시 돌아오셔야 해요, 아시겠죠?”

바라건대 제발 오늘 죽지 않기를.

그러나 대공은 나의 걱정을 별거 아닌 것처럼, 투정으로 생각했는지, 마냥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며 웃었다.

이렇게나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저주만 아니었어도 우리 윤기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었을 사람인데. 친부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 윤기는 얼마나 더 사랑스러웠을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부자였을 텐데.

“하하…… 호석아, 오늘은 사냥 대회지 전쟁터에 나가는 게 아니란다.”

전쟁터보다 더 끔찍한 마물이 나와서 오늘 당신 죽는다고요.

나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오늘 당신 죽으니까 제발 황제 구하겠다고 나서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 말할까?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나는 빙의자라고. 이곳은 소설 속이고, 당신은 소설 속 인물이고, 오늘 사냥터에 마물이 나타나 당신이 황제를 구하고 죽는다는 것을.

김석진에게도 말했잖아. 대공은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다 믿어줄 거야. 그래, 일단 사람 살리고 보자. 다 말하자.

“아, 아, 아으…….”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김석진에게 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했지만, 식도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나오지 않았다.

“호석아? 왜 그러니? 괜찮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말하지 말라는 건가? 이대로 죽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야? 안 돼. 안 된다고.

“약속해 주세요!”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자 다시 말이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 거야. 김석진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럼, 그럼 이렇게 말하는 건 되겠지?

“오늘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로, 절대로 목숨이 위태로운 행동은 하지 않으시겠다고. 내일도 우리 이렇게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기 상점가에 정말 맛있는 스위츠 가게가 있어요. 내일 거기에서 우리 티 타임도 가져요. 윤기가 스위츠 엄청 좋아하거든요. 우리 부자 함께 가서 오붓하게 시간 나눠요. 네? 아버지.”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제겐 그 누구보다 아버지가 더 소중해요. 혹시라도 황가 사람들 때문에 아버지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요.”

진심이었다. 황제든, 황후든, 김남준이든, 그 위대한 황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가족이 중요했다.

이 소설에 너무 이입한 걸까? 정말로 대공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고, 대공은 옅게 미소 지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나도 대공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라고 바랐다. 죽지 말아 달라고.

“약속하마. 반드시 돌아오마.”

따스하고 넓은 품이라 그런가. 눈물이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피폐물 서브 남주가 내게 집착합니다 21

Chapter 3. 내 최애와 함께하는 캠퍼스 라이프 06

written by 휴위






사냥대회는 늘 그랬듯이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연례행사였다.

황실 기사단이 사냥대회가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녹음의 숲을 살피고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사하고 암살을 대비하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니까. 마물은 결계에 갇힌 어비스에만 있었기에, 녹음의 숲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사냥감은 곰, 호랑이, 늑대뿐이었다.

여주는 저 멀리 황제 부처가 앉은 자리에서 황후의 곁에 서서 시중들었고, 김석진은 다음 수업 때문에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나는 홀로 대공가 막사에 설치된 테이블과 의자에서 호위를 맡은 어거스트 기사 두 명과 함께 사냥대회 자리를 지켰다. 지루하지만치 긴 시간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각자의 막사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있었지만, 나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이 자꾸만 뛰어서, 가라앉지를 않았다. 한창 사냥 중에 마물이 튀어나와서 대공이 다칠까 봐.

황제석은 기사단이 지키고 있었으나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원작에선 쟤들로 모자라 대공의 목숨까지 내줬으니까. 그래서 내 시선은 황제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물이 나올 거 같아 경계를 풀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물은 모두 어비스에만 있다고 했는데, 대체 이 숲 어디에서 마물이 나온 걸까? 아무리 살펴도 마물이 나올 구석이 없는 거 같은데. 물론, 고민해도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황후석에서 황후의 시중을 들던 여주가, 머리를 식힐 겸 몸을 조금 움직여 스트레칭하려는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는 대충 인사만 했기에 이제야 그녀를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여주인공답게 예쁜 얼굴에 체구도 자그마해서 남자라면 누구나 보호 본능을 느낄 정도였다.

‘……이렇게 예쁜데 속궁합도 좋았단 말이지.’

큰일이었다. 갑자기 그쪽으로 사고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이었다.

여주는 윤기의 저주로 인한 고통을 완화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19금 소설답게 아주 열심히 찐한 스킨십을 나눴다. 독자였던 난 둘의 정사 장면만 나오면 미친 듯이 환호했지. 윤기의 절륜함과 미친 테크닉에 여주가 녹아내리는 게 너무 좋았으니까. 30만 독자가 만장일치 합의한 ‘미친 테크닉의 절륜남’이란 타이틀은 허언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지금의 난, 내가 환호했던 그 장면들을 대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니 둘이 그런 짓을 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불쾌하고 열받아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 너무 싫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다 윤기 때문이다. 윤기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내 마음도 윤기에게 향하고 있었기에.

그런데 만일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윤기와 여주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윤기야, 여주를 만나더라도 나를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줄 자신 있어?

아, 미치겠다. 이런 생각, 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진지하게 대공을 걱정해야 하는데…….

“와아!”

“?”

사람들의 환호에 정신을 차렸다. 저 멀리 사냥대회 참가자들과 귀환하는 대공이 보였다. 수레에는 호랑이와 곰, 그 외 작은 동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다행이다…….’

사냥터에서는 마물이 나타나지 않은 듯했고,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도 다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대공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더 마음 아파서, 나도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사냥대회의 1등은 대공이었고, 김남준도 처음 참가했음에도 수사슴을 잡으며 선방했다. 황제는 아들이 사냥에 성공했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게 황제는 100% 문과라서 집무실에 앉아 일하는 건 잘해도 그 외의 것은 젬병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달리 문무 고루고루 갖춘 남준을 아끼고 좋아하는 건지도 몰랐다.

시상이 끝나고, 황제의 마무리 연설을 하고, 사냥대회가 공식적으로 끝나도 마물은 출현하지 않았다. 설마, 안 나타나는 건가? 원작과 다르게 진행되는 거야? 그러면 너무 다행인데…….

“호석아.”

대공은 반짝이는 1등 황금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내게로 오더니 또다시 번쩍 들어 올려 나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떠니, 이 아빠가 약속 지켰지?”

“……네, 감사해요.”

그 모습에 무척이나 안도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원작과 다르게 진행되는 거겠지? 그렇겠지? 윤기가 날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럼, 너무 다행인데…….

하지만 난 알지 못했다. 이변이란 늘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저게 뭐죠?”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웅성거렸다. 녹음의 숲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흑색 마법진이 하늘에 나타났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뛰었다.

마법진 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며 거대한 마물의 대가리가 튀어나왔다.

“마물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은 기함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흉측하고 기이한 절지동물 같은 형상에, 붉은 안광을 번쩍이는 거대하고 소름 끼치는 마물이었다.

원작에서도 이렇게 큰 마물이었던가? 하늘에서 출현했다고?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마물을 퇴치하라!”

상황 판단이 빠른 황제의 명령에 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사단이 대형을 맞추더니 몸통이 반쯤 빠져나온 마물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늘로 맹렬하게 날아갔으나 마물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마물은 화살이 거슬렸는지 아가리를 크게 벌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포효했다.

근육을 진동시켜 얼어붙게 만든다는 초저주파가 가득한 소리였다. 도망치던 사람들이 일제히 멈추며 공포에 질렸다. 용감하게 나선 기사단들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나는 물론, 대공조차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명뿐이었다.

“호석아, 어서 도망치렴.”

바들바들 떨며 대공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내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대공의 것이었다.

“아, 아버지……?”

대공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러였다. 대공은 나를 의자에 내려놓고는 허리에 찬 소드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잘 벼린 소드의 날이 빛났다.

“아버지!”

망할, 이거 완전 사망 플래그잖아.

나는 재빨리 대공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절대로.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목소리가 흔들리며 눈물이 차올라 대공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제발, 제발…….”

가면 죽는단 말이야.

“역시…… 알고 있는 거구나.”

“!”

알고 있는 거라니. 무슨 소리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설마…… 

“윤기를, 잘 부탁한다. 내 아내도.”

대공이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설마, 대공이 알고 있었어? 내가, 민호석이 아님을? 네 엄마가 아니라 내 아내라고 했어. 나와 심 여사의 선을 그은 거야. 그럼 나, 무슨 말을 해야 해? 지금 이 상황에서?

“아, 아버지…….”

―여기 상점가에 정말 맛있는 스위츠 가게가 있어요. 내일 거기에서 우리 티 타임도 가져요. 

“나 역시 기대했건만,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거 같아 미안하구나.”

“!”

눈물로 젖은 얼굴의 내 얼굴을 다정하게 닦아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소드에 오러를 두르며 용감하게 마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현 북부 대공 민지환.

그의 조상은 아르카디아 대륙 초대 황제의 형제였다. 인마대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기에 그의 후손은 대대로 대공의 직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드루이드 여왕의 저주 때문에 각 대에서 장남은 성년이 되면 광증이 나타나 부모를 죽이게 된다. 이 저주는 오직 민가만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민씨 성을 지닌 마지막 황제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단명하였다. 황위 계승 1순위였던 대공가는 저주 때문에 북부에 은둔하느라 황위를 포기하였고, 그로 인해 방계들은 가문의 기사단을 내세워 황위를 건 치열한 쟁탈전을 치렀다.

길어질 것 같았던 쟁탈전은 탁월한 책략가인 김씨 가문이 승리하며 막을 내렸다. 쟁탈전에서 패한 방계들은 전원 숙청되었으나, 대공가만은 황제에게 ‘북부의 수호자’로 인정받아 대를 이어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민지환의 모친은 잦은 유산으로 인해 아들 하나만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외둥이로 자랐고, 양친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부친이 들려준 가문의 저주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성년이 되기 전에 북부를 떠났다. 하지만 저주는 강력했고, 제 의지와 관계없이 부모를 죽이고 말았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었다.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컸던 만큼 죄책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을 자책하고 학대하며 오랫동안 방황하며 결심했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대공이 되겠다. 저주받은 가문의 대를 끊겠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제의 탄신 연회에 참석하고자 황성에 들른 곳에서 만나고 말았다. 자작 가문의 여리고 사랑스러운 한 여인을. 운명처럼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끌렸고,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결심이 무색하리만치 정해진 수순처럼 여인의 배에는 사랑의 결실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여인은 아이를 낳기에 몸이 약했다. 의사는 말했다. 해산하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아내를 살려야 했다. 낳지 않아야 했다. 태어나지 못하도록 배 속의 아이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여인은 아내이기보다 어머니이기를 선택했다.

―이 아이는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는 소중한 증거예요. 그러니 난 꼭 낳을 거예요.

그녀에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가문에 흐르는 저주를. 우리가 사랑한 결실이 우리를 죽이게 될 거라고.

여인은 아이를 열 달이라는 긴 시간을 힘들어했지만, 매우 소중하게 품고 사랑했다.

―아들이라면 윤기, 딸이라면 윤지로 할래요. 아들이라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되길, 딸이라면 자기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거든요.

결국, 여인은 소중한 아들이 태어난 감격의 순간을 만끽하고 품에 꼬옥 안은 채 숨을 거뒀다.

아들을 품에 안은 지환은 결정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소중히 품다 낳은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부디, 이 아이가 저처럼은 되지 않기를.

나중에 제 손으로 아비를 죽일지라도, 그것은 저주 때문이니 절대로 죄책감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방황하지 않기를. 사랑받지 못한다면, 아니 오히려 미움받는다면 저를 죽이더라도 죄책감이 덜할 테지. 어차피 피가 섞인 타인에 불과할 테니까.

그래서 사용인들에게 명령했다. 없는 듯 취급하라고. 학대하라고. 오랫동안 대공가를 섬긴 그들이었기에 대공가의 저주를 알고 있었다. 다만 철저하게 함구하여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을 뿐.

그렇게 윤기는 하인보다 못한 처지의 외톨이가 되었고, 자랄수록 아비를 닮아갔다. 참 다행이었다. 제 어미를 닮았다면 더욱 안쓰러워서 참지 못하고 품에 꼭 끌어안고 토닥이고 말았을 테니까.

언제쯤 저주에 대해 말해줄까, 아직 어리니까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그러니 더 크면 말해주자. 조금만 더 크면, 내년엔 꼭, 다음엔 꼭.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말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수도를 방문했을 때 남성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교클럽에서 떠드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말았다. 시골의 한미한 남작 가문 주제에 콧대 높은 아름다운 미망인과 그녀가 아끼는 미모의 아들에 관하여.

그녀를 만나는 건 우연이었다. 수도의 한 후작 가문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연회였다. 정확히는 으슥한 정원 구석에서 다른 귀족 남성이 그녀에게 추근거리는 장면이었다.

―제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해주신다면 이 한 몸 기꺼이 드리겠어요.

그녀는 당당하게 아들의 직위를 요구했다. 자신의 직위나 안위보다 아들을 우선시하는 그 모습에서 죽은 아내가 겹쳐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어떤 귀족이라 할지라도 정실이 아닌 첩이나 정부의 아들을 후계로 삼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남자도 그랬다. 그래서 그자는 그녀를 완력으로 취하려고 했다. 정의의 용사처럼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은 가문의 저주를, 어째서인지 그녀에게는 말할 정도로.

―가여운 사람…….

그녀는 그저 그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위로해주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해소하지 못했던 과거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많이 지치고 힘들었던 그는 여인의 품에서 그제야 비로소 아이처럼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약점을 고스란히 내보일 정도로, 그녀는 그에게 마지막 완전한 사랑이었다.

―그럼 우린 동맹이 되는군요.

그녀는 지환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윤기에게 절대로 정을 주지 않기로. 그 대가로 호석은 대공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은 저주로 윤기가 성년이 되는 날 죽게 될 거라고. 그 전에 가문의 저주에 관해 이야기할 거라고. 저주는 막을 수 없고, 반드시 실현될 것이기에, 자신이 윤기 손에 죽게 된다면 당신은 아들과 함께 안전하게 대공가에서 살면 된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당신이 없는 저택은 싫을 거 같아요. 그러니 저도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그것이 설령 빈말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래서 맹세를 받았다.

내가 없더라도, 절대로 대공가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대공가에서 저를 기억해달라는, 그런 이기심 말이다.

―맹세할게요. 절대로 대공가를 떠나지 않을게요.

그녀는 제게 맹세했다. 그러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공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공가에서 윤기와 호석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되겠지.

―사랑해요.

‘나 역시 사랑해…….’

지환은 이것이 죽기 직전에 본다는 주마등이구나 싶었다.

북부의 혼돈의 숲에서도 이 정도로 강한 마물은 본 적이 없었다. 소드 마스터임에도 너무나도 벅찬 상대였다. 격렬한 싸움 끝에 겨우 마물을 처치했으나 그만큼 부상이 심각했다.

제 삶은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곧 다가올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만 저를 안아주며 사랑을 속삭여주던 아름다운 아내가, 저를 걱정해주는 호석이, 그리고 단 한 번도 사랑해주지 못한 외톨이 윤기가 눈에 밟혔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 말 것을…….’

결국 후회를 남기는구나.

“아버지!”

멀어져가는 의식 사이로 제게 달려오는 호석의 발소리와 눈물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로 저를 내려다보며 엉망이 된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우는 얼굴이 보였다. 무척이나 그녀를 닮았다.

어쩐지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기묘한 아이였다.

―마법 같은 거로 영혼이, 바뀔 수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그런 마법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마법이 위대하긴 하지만, 영혼이 바뀌게 하는 마법이라…… 글쎄. 신전에 한번 문의해 보는 게 어때?

―신전?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신에게 받은 힘으로 온갖 기적을 일으키는 곳이니까. 그러니 영혼을 바꾸는 것도 어쩌면 할 수 있지 않을까?

―…….

―왜? 공자의 영혼이 바뀐 거 같아? 다른 사람으로?

호석의 침실에 들렸다가 우연히 윤기와 마법사가 나눈 이야기에, 그날 당장 신전으로 떠났다.

영혼이 바뀔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신관에게 답변을 얻었다. 그런 경우는 아주 흔치 않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절대자이신 아오아이님의 뜻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정확히는 낙마 후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변한 거 같다고 수안이 말했다. 저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태도와 애교를 부리면서도 익숙하지 않아 얼굴이 새빨개지는 모습에, 이전과 너무나 다른 태도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녀가 사랑했던 ‘진짜’ 아들이 아니라, 저를 대신해서 윤기를 마음껏 아끼고 사랑해주는 지금 이 호석이.

“아버지! 죽지 마세요! 제발! 죽지 말아요!”

이렇게 다정하고, 착한 아이가, 윤기의 형이라서, 많이 아껴주어서.

‘네가 누군지는 상관없단다. 윤기를 사랑해주어서 고맙구나…… 앞으로도 나 대신 윤기를 아끼고 사랑해다오…….’ 

지환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호석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이이이!”

비통에 찬 울음 섞인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같은 날, 마물의 공격으로 황제를 포함한 기사단과 귀족 130명이 사망하게 되고, 황태자도 중상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수업을 마무리하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석진은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 남준의 중상에 극도로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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