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페온이 꼬라지 부리는 화....




이름을 불러서는 일어나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흔들어 깨워야 했다. 환자에게 무슨 짓이냐던 의사는 공작의 명령이라고 하니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탐탁지 않은 기색은 완전히 지우지 못했고, 일어났으니 이만 가보겠다며 짐을 챙겼다.


메이슨은 눈도 덜 뜬 상태에서 집사의 손에 이끌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대부분 집사의 손을 거쳐야 해서 마치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유모가 씻기고 입히고..."

"네?"

"...네?"


몽롱한 눈이 집사를 향했다. 그리곤 대체 자신이 방금 무어라 했는지 되묻듯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가슴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의 시침이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아갈 때마다 집사는 애가 탔다. 밖에서는 이미 총성이 저택을 뒤흔들고 있었다. 집사는 메이슨의 단추를 대신 채우며 꾸물대는 그를 잡아당겼다. 넘어질 듯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무사히 계단을 내려오고 저택 뒷산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공작님."


알페온이 장전하는 사이, 집사가 메이슨의 도착을 보고했다. 알페온은 장전한 총을 메이슨에게 건넸다. 바깥바람을 쐬며 겨우 잠기운을 몰아낸 메이슨이 길고 무거운 총을 받아 들었다. 시중을 들라고 부른 것은 아닐 테니 자세를 잡고 날아가는 새를 향해 총알을 쏴야 하겠지만, 메이슨은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였다.


"오전에 사격 수업이 있었을 텐데. 자느라 몰랐겠지만."

"예."

"보충 수업이라 생각하고 쏴봐."


메이슨은 허공을 향해 총을 한발 쏘았다. 총성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 날갯짓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반동 때문에 어깨는 주먹으로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아릿했고, 충격이 이어진 등은 어제의 상처가 덧난 듯 화끈거렸다.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고 있는 메이슨 뒤로 알페온이 다가갔다. 아직 다음 한 발을 쏠 준비가 덜 되어있는 메이슨의 사정은 신경 쓰지 않고, 알페온은 그의 어깨를 잡아 자세를 바로 세웠다.


"아직도 허리가 구부정하고 팔은 내려가네. 총 쏘는 게 싫은 건 알겠는데, 자세는 똑바로 해. 자세로는 어디 가서 책잡힐 일 없게."

"제 자세 직접 봐주시려고 자던 사람 깨워서 데리고 나오신 건가요."

"메이슨임!"


집사가 마편을 쥐고 메이슨에게 다가갔다. 알페온은 집사의 앞으로 팔을 뻗어 막아 세웠다.


"대답을 못 들어서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

"대체 왜 나선 거지?"


어제 못다 한 추궁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메이슨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손으로 가리고 한숨을 삼켜 먹었다. 작은 벌레가 들어가서 기어 다니는 듯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 밑 살이 떨렸다. 바깥바람을 쐬고 이제야 잠이 깨나 했는데, 정신적으로 다시금 피곤해졌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겁나서 나서지 못했을 겁니다. 죽을 것 같지 않았고요."

"어떻게 장담했지? 불길이 네가 있는 곳은 덮치지 않겠다고 약속이라도 하던가?"


빈정대며 시비를 건다기엔 그의 표정에 의문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선택의 과정을 더 자세히 설명하자니 이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그냥' 했으니까.


"서커스장에서 그네 탈 때, 가끔 느낌이 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날엔 무조건 떨어졌죠. 그래서 공연 시작 전에 느낌이 안 좋으면 꾀병을 부려서라도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어요. 실전엔 그물이 없어서 떨어지면 그대로 죽거든요. 뭐, 무대 쨌다고 죽기 직전까지 맞기는 했지만 하여튼 이렇게 살았으니 된 거죠. 제 직감은 항상 옳았어요."

"그래서, 어제는 그 직감이 잠잠해서 들어갔다?"

"네. 그래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알페온이 눈 깜짝할 새에 총을 뺏어 들었다. 총구는 메이슨의 이마를 겨냥했다.


"공작님!"


집사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총구 앞으로 뛰어들진 못했다.


"맞춰봐, 메이슨. 그 대단한 직감이 뭐래. 내가 널 쏠 것 같대?"

"...아니요."


타앙-!


천둥같은 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총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질끈 감은 메이슨의 눈 밑이 자르르 떨렸다. 한참 후 천천히 눈을 뜬 그의 발 앞에 몸에 구멍이 뻥 뚫린 새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방금까지 먹이를 찾아 번뜩이고 있었을 눈동자는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새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마주 본 메이슨은 치밀어 오르는 구역감을 참을 수 없었다.


"정답."


철컥-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가 다시금 메이슨에게로 향했다.


"그럼 지금은."


메이슨은 숨을 한 번에 토해내며 구멍 뚫린 고깃덩어리로부터 세발짝 물러났다.


"...후회는 없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눈앞에 생기고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뛰어들 겁니다."


어느새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메이슨이 손등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주먹을 쥐었다. 직감은 말했다. 저 총구에서 총알이 날아와 이마를 관통할 거라고. 뒤통수가 새의 배처럼 뻥 뚫려 몸의 모든 피가 흘러나올 거라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눈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잿빛처럼 어두컴컴한 먹구름일 거라고.


"공작님은. 저 못 쏘십니다."

"그래?"


부들부들 떨면서도, 분한 듯 노려보면서도 메이슨은 제 자리에 서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알페온은 크게 코웃음을 쳤다.


"틀렸어."


알페온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런데."


총구가 스르르 내려갔다.


"총알이 없어서 못 쏘겠네."


알페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던 집사에게 총을 건넸다.


"다음에도 같은 선택을 한댔나?"

"...네."

"그 잘난 직감 믿고 어디 한번 해봐."

"허락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내 허락이 필요한 문제였나? 네 마음대로 하겠다며."

"...죽을 것 같으면 멈추겠습니다."


비 냄새가 더 짙어졌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무게감이었다.


"하나만 더."


저택으로 들어가던 알페온이 저벅저벅 큰 보폭으로 돌아와 메이슨 앞에 바짝 붙어섰다.


"생판 남이어도 네가 구할 수 있을 것 같고. 죽을 것 같지 않아서 구해왔다는 얘긴데, 아직 이해가 안 가. 정의감, 뭐 그런 건가?"

"그런... 정의감 같은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아기 엄마도, 아기도 불쌍했고... 제가 봤을 땐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은데 다들 손 놓고 보고 있기만 하니까 저라도 나서야겠다 싶었습니다. 말했다시피 제가 들어가기에도 너무 늦었다 싶으면 저도 그냥 지켜만 봤을 겁니다."

"...참."

"왜요. 왜 그렇게 보시는데요."


알페온의 울대를 보고 얘기하던 메이슨이 뒤로 한발 물러나 고개를 들었다. 알페온은 저택에 들어와 함께 지낸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스로를 잘 모르는 편인 것 같은데."

"저요? 저는 제가 제일 잘 알죠.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결같이 바보네."

"아니..."


어이없어 하는 메이슨의 콧잔등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생판 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지. 말 그대로 위험하니까. 남 구하려다가 내가 잘못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말이야. 그런데 가끔 너처럼 앞뒤 재는 것 없이 달려드는 사람도 있긴 한데, 난 그런 인간들이 참 바보 같아.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니 내게 칭찬은 바라지 마."

"예예. 바란 적 없습니다. 비싸게 주고 사셨는데 제가 몸을 함부로 굴렸으니 화가 나실 만도 하지요. 어제 채찍질도 전혀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지. 오히려 너는 반나절이 넘어 가도록 자고 있을게 아니라 제시간에 일어나서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해야 했어. 그게 진정으로 반성하는 자세지. 이때다 싶어 드러누운 채 아프다고 티 내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사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공작님. 이만 들어가시지요."


집사가 우산을 펼쳐 알페온에 씌워주었다. 메이슨도 제 것을 받아 펼쳤다.


"그럼 아침에 깨우시지 뭐 하러 지금까지 기다려주신 겁니까?"

"메이슨 님도 일단 들어가셔서-"

"공작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봤을 때 서커스장에 갇혀서 그네만 탄 제가 후작이 된다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 똑똑한 편도 아닌데 단기간에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려니 정말 미치겠습니다. 벅차요. 저는 그것들을 전부 감당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피곤해 죽겠습니다. 잘 때도 스트레스 때문에 자꾸 깨서 제대로 자는 것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서커스장에서 지냈을 때가 훨씬 편했던 것 같습니다."

"무리고 아니고는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넌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 너 멍청한 거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다고 네 수준에 맞춰서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시간 들여 가르치기엔 너무 오래 걸려. 그네 타는 건 뭐 쉬웠어? 안 봐도 뻔하지. 못하면 맞거나 굶었으니 살려고 뛰었을 거 아니야. 나도 그렇게 해? 진도 못 따라올 때마다 가둬 놓고 팬 다음에 밥도 굶기고 잠도 재우지 말고? 네가 살 만하니까 이런 불평을 하는 거야. 벅차? 당연하지. 네 말대로 서커스장에서 그네나 타던 애가 귀족이, 그것도 후작이 된다는데 하루아침에 되겠어? 네가 바라고 말고, 힘들고 말고는 내가 감안해야 할 문제가 전혀 아니야. 난 내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할 거고 그러려면 넌 죽어라 공부하고 익혀야 해. 못하겠어? 그럼 100델러안에 이때까지 먹고 자고 입은 것 다 계산해서 뱉어내고 꺼져. 영수증은 집사가 발행해줄 거야."

"왜 하필 접니까! 공작님 계획이 바보천치를 후작으로 만드는 거라면 굳이 저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눈도 이 모양이라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저를요! 위험부담이 큰 짓을 하는 건 공작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메이슨님!"


전력을 다한 집사의 외침에 잠깐이나마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산을 써도 비가 안으로 들이치고 있습니다. 두 분 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수많은 빗금 너머로 메이슨이 알페온을 노려보았다. 알페온을 지나쳐가는 동안, 발을 세게 구르며 걸었다. 찰박찰박 흙탕물이 높이 튀어 올랐다.


"말을 해도 꼭... 참나!"


듣거나 말거나, 쏟아지는 빗소리를 철석같이 믿고 중얼거린 메이슨은 큰 돌멩이 하나 없이 잘 정리된 길에 괜히 화풀이하듯 헛발질을 했다. 애꿎은 화풀이를 한 탓일까, 물을 잔뜩 머금은 잡초에 미끄러져 넘어지며 엉덩이부터 쾅, 떨어졌다.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한 메이슨이 우산을 놓친 한손으론 얼얼한 턱을, 한손으론 쪼개질 것 같은 엉덩이를 문질렀다.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누구인지 보나마나였기에 메이슨은 고개를 드는 대신 떨어진 우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


알페온은 잠깐 멈추어 섰던 두 다리를 다시 저벅저벅 움직였다. 그러면서 앞길을 방해하는 메이슨의 우산을 발로 찼다. 코앞에서 멀어진 우산에, 메이슨이 황당해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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