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황궁물입니다. 


방에서 떠밀린 아이는 기나긴 복도를 지났다. 굳게 닫힌 창에 쏟아지는 햇살이 밝아 아이의 발끝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복도를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험한 상상을 빗나간 응접실이었다. 코끝을 맴도는 단내와 귓가에 부서지듯 흩어지는 웃음소리에 아이는 주춤했다. 아이가 뒤로 물러서자 아이를 안내하던 이가 눈을 부라렸다. 아이는 또 위축되었다. 물러선 걸음을 다시 내딛어 바짝 다가서자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것을 데려왔습니다.”

아이를 지칭할 적당한 말이 없어 잠시 망설이더니, 물건을 취급하듯 말을 뱉었다. 그 목소리에 안쪽에서 흩어지듯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다시 이어졌다. 안쪽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없어 아이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아이의 고개가 점점 땅을 향했다. 몇 십 분이 지나고,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그 짧은 말에 문이 열렸다. 쭈뼛대며 들어선 아이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저보다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와, 그 앞의 단 과자와 차였다. 아이를 스치는 남자의 눈은 분노가 형형했다. 아이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몸이 덜덜 떨렸다. 남자가 황제라는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이를 안아든 손이, 저를 내려다보는 분노가 가득한 눈이 제 부모와 식솔들이 죽은 날 밤 보았던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손과 눈이 다시금 제 앞에 있었다. 아이는 턱턱 막히는 숨을 억지로 내뱉고 삼켰다. 황제가 별다른 말이 없자 아이는 그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숙인 허리에 힘이 부치고, 모은 손이 저릴 즈음,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아이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아직 죽지도 않고 살았구나. 이리 끈질긴 것을 보니 버러지의 핏줄이 맞긴 하군.”

아이는 모은 손을 꽉 쥐었다. 분노와 수치, 서러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귀 끝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가는 시큰거렸다.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그래야 했다. 살아야 했으니. 황제는 아이에게 향하던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는 축객령을 받지 못해 그 자리에 계속 서있어야 했다. 한참이 지나고, 황제는 시종을 불렀다.

“쇼.”

예, 하고 나서는 목소리는 저를 방에서 옷을 입히던 목소리였다. 황제는 시종을 불러 놓고서 한참 후에야 명을 내렸다.

“치우도록.”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스쳐지나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는 그제야 숨통이 풀리는 듯 경직되어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쇼는 아이의 옆에 서서 다과상을 치우도록 명령했다. 약간의 분주함이 지나고 나서 쇼는 모든 이들을 물리고 아이와 단 둘이 남았다.

“무서웠니?”

아이에게 묻는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의 손이 닿아 아이의 숙였던 허리가 펴졌다. 쇼는 감정을 담지 않은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황제폐하는 자애롭지만 무서운 분이시다. 너는,”

쇼는 아이의 무릎을 꿇렸다. 어깨를 아프게 짓누르는 손엔 무거운 힘이 실려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아이의 뒤를 향했다.

“오만방자하게도 폐하의 앞에서 무례를 저질렀다. 네가 아직도 귀한 도련님인줄 아느냐.”

매섭게 소리치는 것보다, 조곤조곤 묻는 편이 더 아이를 공포로 몰았다. 아이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쇼는 여전히 아이의 뒤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그리 네게 주의를 주었건만”

쇼는 작게 혀를 찼다. 손을 들어 아이의 뺨을 내리쳤다.

“이래서야 널 다시 교육시키는 수밖에 없구나.”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살짝 열려있던 문이 닫히고서야 쇼는 표정을 풀었다. 제가 내리친 아이의 뺨을 부여잡고 물었다.

“…괜찮으니.”

아이는 혼란스럽다는 듯 쇼를 올려다보았다. 붉게 부은 뺨을 어루만져주며 쇼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이해해주렴. 황제의 눈과 귀가 없는 곳이 없으니.”

쇼의 눈에 안타까움이 얼핏 스쳐갔다.

“잘못하지 않아도 네 잘못이 되고, 옳은 행동을 해도 너는 맞게 된다. 그럼에도 너는 억울해 해서는 안 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그럼 저는 죽게 될 테니까요?”

“그래. 살아서 복수하기 위해 너는 너를 버려야 하고, 너여서는 안 돼.”

쇼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작아졌다. 바로 앞에서 말하는데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진 목소리가 속삭였다.

“황제를 속이기 위해 너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쇼는 입매를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많은 것을 포기한 너는 되려, 황제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게 되겠지.”

열둘의 나이는 많은 것을 깨닫기에 부족하지 않은 나이였다. 아이는 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저와 몇 살 차이가 난다고 당신은 벌써부터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매에 호선을 그린 쇼가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이 걸려서라도 상관없었다. 맞는 것이 무엇이 대수인가. 굴욕을 당하고, 수치스러워지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인가. 진창에 몇 번이고 구르더라도, 황제의 등이 나를 향하게 된다면. 그래, 너와 나의, 그리고 모두의 복수를 위하여.



사토시른(카즈사토, 사쿠사토위주) 인장은 우엥엥님!

래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