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타, 비문 무시



종족의 구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개체가 사용하는 능력이며 능력의 근간이 되는 것은 섭취하는 ‘먹이’의 종류이다. 육신을 뜯어먹는 자들일수록 짐승같이 파괴적이고 원초적인 힘을, 영혼을 취하는 자들일수록 강력한 현혹의 힘을 가진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발현하는 능력의 한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개체는 자신의 종족을 확신한다.

언제부터 이런 법칙을 따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난제이다. 악마가 오래전에 읽은 고대 문헌에서는 태초의 신이 빚은 이들은 하나의 모습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시작이 같다고 끝 또한 같을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찾았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 바로 능력을 더욱 강력하게 발현 시킬 수 있는 ‘먹이와 사냥법’을 말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였던 자들은 자신들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개중 ‘악마’라는 이름으로 정의된 자들은 땅 밑 지하로 내쳐진 후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확히는 변덕 심한 신이 그가 가장 마지막까지 공들여 사랑으로 빚은 인간을 ‘먹이’로 내어준 순간부터.

인간은 정신은 육체보다 나약하다. 사랑받기에 연약했고 사랑받았기에 더욱 욕망에 목말라했다. 그렇기에 조금의 구슬림에도 손쉽게 넘어오는 이들은 악마들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사냥감이었다. 욕망을 부추기는 현혹의 힘을 가장 잘 다루는 이들이 악마라는 종족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인간은 자신들의 육체를 단숨에 찢어발기고 뜯어먹는 괴물들보다 악마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영혼을 쥐고 흔드는 악마의 손길은 자신을 좀먹을 뿐만 아니라 그 곁의 사랑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쉬이 뻗어나갔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느 정도의 진실과 상상이 결합한 모든 종류의 성서에서 악마가 언제나 천지 만물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악 그 자체로 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 역시 신의 손에 의해 빚어져 탄생한 가련한 존재들임을 모른 채. 또 그들보다 더욱 경계해야 하고 위험한 존재의 실재를 모른 채.

악마는 자신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자의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카락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세상에 이토록 억울할 수가 있을까. 라고.

주변의 소음이 삼켜져 먹먹한 두 뒤, 한없이 느리게 굴러가는 사고. 그와 반대로 한껏 예민해진 육체의 감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악마는 실소를 속으로 삼켰다. 방금 전 자신이 무엇이라 했더라? 현혹은 악마의 가장 강력한 사냥법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보아라. 그저 목덜미에 이를 박고 피를 마시는 행위만으로 악마의 영혼까지 홀리려는 듯 강력한 현혹의 힘을 쓰는 자는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악마는 흡혈귀라는 종족을 책으로 배웠다. 그들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은밀히 먹잇감을 유인하고 쟁취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고 그저 맹렬한 속도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을 양분으로 삼는 퍽 고상하면서도 독특한 사냥법을 즐기는 이들은 매우 희귀한 종족이었다.

심지어 성향에 따라 혹은 힘의 법칙에 따라 크고 작게 무리를 이루거나 인간과 비슷하게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여타 종족들과 다르게 유달리 독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동족끼리의 교류마저도 드물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보 값 역시 적었다. 활자로 얻을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은 기껏해야 ‘악마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그보다 못한 현혹의 능력’ 정도.

악마가 줄글로 읽어낸 그들은 참으로 애매한 종족들에 불과했다. 허나 지금 몸을 겹치고 있는 이 존재는 책에서 보았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개체였다. 강력한 신체적 능력과 악마의 의식 절반을 앗아갈 정도의 현혹의 힘을 쓸 줄 아는 흡혈귀라니. 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란 말인가. 인간들은 지금 당장 성서 속의 악마의 이름을 파내고 흡혈귀라는 단어를 새겨 넣어야 한다. 만약 모든 흡혈귀가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말이다.

흡혈귀에게 붙들린 덕에 겨우 버티고 선 채 더듬더듬 생각을 이어 나가던 악마가 순간 비스듬히 고개를 든 흡혈귀와 시선이 맞닿았다. 살짝 떨어진 입술 안쪽이 붉게 물든 입술이 미형의 얼굴과 조화를 이루었다. 스스로 내어준다고 하였으나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피가 빨려 나가는 중에도 아름답다. 라는 멍청한 생각하던 찰나였다. 흡혈귀의 붉은 입술의 한쪽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내.

아!”

하는 탄성이 악마의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내내 악마의 등을 바치고 있던 뜨거운 열기를 품은 손이 한껏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선 허리선을 느리게 쓸며 내려갔다. 떼었던 입술을 다시금 목덜미에 처박으며.

방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아릿함을 넘어선 아픔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이어 단단한 손이 악마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빨려 나가는 혈액의 양과 속도가 비교도 할 수 없이 많고 빨랐다. 실낱같이 남은 이성이 벗어나라며 경고를 해왔지만 흡혈귀에게 붙들린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스스슷. 악마의 귓가에 혈액이 빠르게 빨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에서 시작된 전율이 손끝과 발끝으로 번져나가더니 마지막에서야 머리를 뒤흔들었다. 흡혈을 당하며 느끼는 황홀함이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순간, 악마의 몸이 맥없이 무너지며 몸 전체가 흡혈귀에게로 쏟아졌다.

-

아.”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자 커튼이 걷힌 창문 너머 옅은 안개가 낀 하늘이 보였다. 창문으로 스며든 아침의 이른 해가 방 안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진 조명과 하얗게 질린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방이네.”

꽉 잠긴 목소리에 흠칫하며 헛기침과 동시에 목을 쓸어보았다. 그러다 쇄골과 이어진 부근에 손가락 끝이 닿자 불현듯 방금까지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자신을 닮은 악마와 난생처음 보는 얼굴의 사제복을 입은 흡혈귀. 흡혈귀에게 목덜미를 물어 뜯기던 감각. 그리고 뒤이어 따라온 …부정하고 싶은 쾌감.

불편함이 느껴지는 하반신으로 시선을 내렸다. 슬쩍 들춰본 이불 속 상황은 절로 한숨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무슨 꿈을 꿔도 이런 개꿈을.’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딱히 그런 꿈을 꾸지 않아도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꿈에서 깬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 탓일까. 평소 같으면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다렸겠지만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는 찝찝함에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보는 사람도 없건만 한껏 어색한 걸음걸이로 욕실로 향하던 중 문득 시선이 거실 한복판으로 향했다. 커피 테이블 위 얌전히 놓인 에어컨 리모컨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비스듬히 서 있는 검은 그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도 꿈이었던 건가.”

영하를 웃돌던 차가운 실내의 온도와 온몸에 스며든 한기와 기묘한 기척. 흡사 호러 영화의 예고편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심지어 무척이나 생생한 감각을 동원한. 만약 모든 게 영화와 같은 현실이었다면 자신은 죽었거나 혹은 지금쯤 저 거실 바닥 한 복판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깨어났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정작 눈을 뜬 곳은 거의 10년 가까이 지내온 익숙한 방 침대 위였다.

“에어컨도 멀쩡하고.”

평소 자기 전 습관대로 아주 약하게 틀어둔 에어컨은 이상 없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며 쾌적한 실내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었던 걸까.

멀쩡한 에어컨에 가 있던 시선을 조금 틀어 내리자 벽에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혹시나 문제가 생겼다면 그 원인은 저 그림이겠거니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림은 처음 집에 온 모습 그대로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것일까? 그냥 너무 피로한 나머지 어젯밤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가뜩이나 떨어진 체력에 중노동까지 하고 왔으니 기억과 꿈이 혼재될 수도 있지.

그렇게 좋을 대로 결론을 내리며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정신도 차리고 여전히 빳빳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반신을 가라앉힐 겸 시원한 찬물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협탁 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동의 원인은 최근 뜸했던 단체 대화방이었다. 단체라고 해봤자 자신과 리사 그리고 진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대화의 포문을 연 것은 진이었다.

- 다들 이번 주말 시간 괜찮아?

- 무슨 일인데?

그리고 그 아래에 기다렸다는 듯이 리사의 답이 따라붙은 것을 시작으로 꽤나 많은 양의 대화가 오갔다.

진과 리사의 대화를 요약하자면 요컨대 최근 미치도록 바빴던 진의 일정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니 여유가 생긴 지금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 나도 주말에 시간 괜찮아. 만나자.

뒤늦게 짧은 답을 돌려주자 굳이 나서지 않아도 척척 장소와 시간 등이 정해졌다. 오랜만의 만나는 약속 일정에 그 어느 것 하나 개입하지 않는 모습이 다소 성의가 없어 보일지 모르겠으나 일전 나를 배려한다고 두 사람이 온전히 내게 선택권을 줬을 때,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하루를 보냈던 터라 모두를 위해서 지금의 방식이 최선책이었다.

틈틈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대화에 참여하기를 한참 이윽고 완전히 결정이 난 일정에 다시 한번 알겠다며 답한 후 핸드폰을 껐다. 그러고는 어느새 적당히 마른 머리카락을 인지하고 발라당 침대 위로 쓰러져지듯 드러누웠다. 돈값 하는 폭신한 침구가 기분 좋게 몸에 감겼다.

분명 정신을 차리기 위해 씻고 왔건만 노력이 무색해질 정도로 다시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요 며칠 쉰 걸로는 근 몇 년간의 피로가 전부 풀릴 리가 만무했다. 이번 주말 저녁. 친구들 앞에서 피곤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충분히 피로를 풀어둬야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공복 상태일 위가 조금 걸렸지만 불규칙한 생활패턴 속에서 하루 이틀 끼니를 거른 것은 별일도 아니었기에 지금 당장은 밀려오는 졸음을 해결하고 싶을 뿐이었다.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식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피가 이어진 가족과도 떨어져 나가버린 인간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내가 진과 리사. 이 두사람과 연이 닿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입생 시절로 즉 부모에게 받은 집에 온갖 물건들을 사다 마구잡이로 채워 넣는 기행을 벌이던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충동에 빠지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서클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이렇다 할 취미도 흥미도 없었던 주제에 무턱대고 서클에 가입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집은 물건으로 주변은 사람으로 채우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성인이 되도록 사람과 사람 간의 제대로 된 인용하나 만들지 못한 주제에 말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엉성했다. 가입하고자 하는 서클의 기준조차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그저 가장 먼저 제안을 걸어온 곳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단 하나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어느 누가 자신같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줄는지. 정도.

하지만 우려와 달리 홍보 전단을 받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제법 구슬리기 적당한 얼빠진 신입생 같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홍보지에 프린팅 된 텍스트를 대충 훑고 그길로 곧장 가입을 받는 장소로 갔다. 그리고 제법 규모가 크기로 유명한 체육관 옆 만만치 않게 큰 건물의 지하로 내려간 순간에서야 가입하게 될 서클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문을 열자 느껴지는 찬 공기가 뺨을 어루만지고 컴컴한 내부와 대비되어 유달리 강한 조명이 내리쬐는 중앙의 흰 빙판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지고 말았다. 넋이 나간 채 서 있기를 한참 빙판을 가로지르는 긴 서걱거림과 함께 시작된 소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눈앞에 낯선 이가 서 있었다.

‘신입생? 가입하려고?’

‘아.’

그렇다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남자가 착용한 무지막지한 보호구와 손에든 기다란 하키 스틱에 시선을 빼앗겨 대답 대신 모자란 소리를 내어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네. 맞아요.’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의 존재 덕분이었다. 고개만 돌려 쳐다보니 스포츠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따뜻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내게 시선을 맞춘 채 웃고 있었다.

‘그치?’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하게. 그게 리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리사는 예상대로 운동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서클에 가입을 하게 된 이유는 한 여자애 때문이었다. 리사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가 설렁설렁 대충 해치우고 끝내려는 서클홍보에 혼자 성실하게 발로 뛰어다니며 홍보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나 뭐라나.

당연히 그 여자애는 진이었고, 나와 리사가 별다른 절차 없이 가입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단을 모두 돌린 후 나타난 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리사로 인해 처음 우리 세 사람은 말을 트게 되었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우리가 가입한 서클 ‘페보니우스’는 기본적으로 아이스하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긴 했으나 모두가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 위에 서야 하는 조건은 없는 다소 자유로운 체계를 가진 곳이었다. 그렇기에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빙판에 서는 것은 진뿐이었고 나와 리사는 언제나 벤치에 앉아 진을 응원했다.

아이스하키고 뭐고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취미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고 심지어 전공마저 다른 세 사람이 친해질 수 있게 된 데에는 리사의 공이 컸다. 따로 두면 어색해질 두 사람 사이에서 적절히 대화를 이끌며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노력은 졸업 후에도 끊어지지 않은 ‘친구’ 라는 인연이 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름 일찍 나온다고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걸음이 더뎌진 모양이었다. 멀리 약속 장소 근처에서 이미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늦지는 않았지만 기다렸을 이들을 생각해 걸음을 빨리했다.

“이렇게 모여서 마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 둘 다 너무 바빠서 약속 잡기가 쉽지 않았잖아.”

“하하. 미안.”

일정의 마무리는 역시 술이었다. 오후에 만나 영화와 쇼핑까지 알차게 번화가를 돌아다닌 후 늦은 저녁을 하게 되다 보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오기 전 본격적인 신변잡기가 시작됐다.

“그럼 당분간 한숨 돌리는 거네?”

리사가 진을 향해 물었다.

“응.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이제 얌전히 성과를 기다려야지.”

마른 목을 축이며 대답하는 진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이번이 진이 팀장이 되어 맡은 첫 대형 프로젝트라고 했던가. 아직 그 정도의 프로젝트를 이끌만한 자격이 없다며 부담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성격이라 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결과에 대한 불안감을 쉬이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리사가 무의식적으로 유리잔을 매만지는 진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네가 한 일이니까 분명 잘 될 거야. 너무 잘 된 나머지 모두가 너의 유능함을 깨닫고 지금보다 더 바빠지는 거 아닌가 걱정해야 할 정도로. 특히 네 상사…. 바르카라고 했던가? 그 사람, 지금도 너한테 야금야금 일 떠넘기고 있다며.”

떠넘기는 건 아냐. 그저.”

“그래. 알지 알아. 네 능력을 너무 신뢰해서 ‘믿고 맡기는’ 거잖아.”

“으음. 리사.”

몇 번인가 진의 입을 통해 바르카라는 인물이 언급된 적이 있었다. 확실히 젊은 나이에 회사의 중책을 맡을 정도면 유능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다만 타인의 평가에 후한 진에게 이따금 ‘곤란한’ 얼굴을 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했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다만 진의 말을 해석해서 알게 된 그의 ‘지나친 융통성’ 때문에 종종 진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일이 없잖아 있는 것은 사실 같았다. 그것을 꼬집는 리사의 말에 진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불안감이 드리워진 얼굴이 걷히고 대신 짓궂은 친구의 농담에 지어지는 헛웃음이 피어올랐다.

화제가 금세 진의 상사에게로 넘어갔다.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이 그이며 그에게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고 자신 또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며 말하는 진의 모습은 어느새 평소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는 리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나서질 않길 잘했다며. 때마침 나온 술을 받아 각자의 잔에 따라주며 생각할 때 쯤 한창 상사의 얘기에 열을 올리던 진이 주섬주섬 테이블 아래에 손을 뻗는 행동을 보였다. 이윽고 이곳저곳 다니는 동안 내리 옆에 끼고 있던 큰 가방에서 두 개의 상자를 꺼내 들었다. 정갈한 포장을 보아하니 선물용인 것 같았다.

“이거. 두 사람한테 줄 거.”

“언제 꺼내나 내내 기다렸는데 드디어 꺼내네.”

“아, 그런 줄 알았으면 만나자마자 줄걸 그랬네.”

“농담이야.”

진지하게 농담을 받는 진에게서 상자를 받아 확인하자 옆에서 진이 첨언했다.

“사실 직접 산 건 아니고 받은 건데 알다시피 내가 술을 잘 마시지 않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더 좋아할 사람들 에게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어머, 와인이네.”

살짝 상자를 열어본 리사가 내용물을 확인하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뒤따라 상자를 열어보니 확실히 리사의 눈이 크게 뜨일 만큼의 어마어마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어이가 없어 웃으며 진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야? 대체 누가 이런 걸 선물로 줘?”

“그냥 고생했다고 선물이라고 준 거야. 바르카씨가.”

뜻밖의 이름에 리사가 흥미로운 얼굴을 한 채 선물을 보았다.

“흐음. 생각보다 안목은 있는 사람이네. 센스는 좀 부족하지만. 자기 부하직원의 성향도 취향도 고려하지 않은 선물이잖아.”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 분도 좋은 마음에서 선물한 걸 테니까. 나는 그 마음을 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여간 진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그나저나 케이아는 좋겠네? 너 여기 와인 좋아하잖아.”

“맞아. 사실 나도 받고 나서 케이아가 제일 먼저 떠올랐어.”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열어둔 상자 안에 보이는 와인병의 라벨을 훑어보며 웃었다. 확실히 좋아한다. ‘던’의 와인. 특히 중후하게 무게감 있으며 독보적인 균형 잡힌 맛을 자랑하는 레드와인을 좋아했다. 마시고 싶을 때마다 턱턱 사 마시기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자주 마시진 못하지만 가끔 크게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마시면 극한의 황홀감에 빠지는 맛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케이아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 처음 봤어.”

“확실히 비싼 값하는 맛이긴 한데. 와인 한 모금에 그렇게까지. 싶기는 했지.”

언젠가 집에 놀러 온 두 사람을 위해 모셔둔 와인을 내어주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음에도 둘은 마치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처럼 떠들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우려먹을 생각이야.”

놀림 받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한마디 하자 두 사람의 얼굴에 더욱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리사와 닮은 얼굴로 웃는 진의 모습에 결국 허허. 하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창 얘기 중 나온 음식을 접시에 덜어내며 리사가 말했다.

“그나저나 책은 언제 나와?”

음식을 덜어낸 접시를 진에게 건넨 후 자신의 몫을 더는 리사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마도 일정에 차질 없으면 다음 달 정도에 서점에 풀릴 것 같은데.”

“제목이 뭐야? 아, 오해는 말고. 나오면 바로 우리 도서관에 이번 달 추천 도서 리스트에 올려두려는 거니까.”

이공계 교수들의 열렬한 러브콜을 무시한 채 돌연 진로를 바꾸어 도서관 사서가 된 리사가 과거의 교수들이 들었다면 통탄의 눈물을 흘릴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한때 나 역시도 그녀가 저명한 학자가 되어 이름을 떨쳤을, 눈부신 미래를 응원했었던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보다 더 만족스러운 지금을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입 밖을 떠나지 못한 의문을 삼켜야 했지만.

아마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그러니 모두 굳이 묻지 않으려 했고 리사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질문은 그런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음식을 음미하는 리사에게 결국 한숨과 함께 답을 돌려주었다.

“흐음. 민망해서 알려주기 싫었는데. 한권이라도 더 팔아야 하는 절박한 입장이 되다 보니 할 수 없네. ‘영원의 증명’이야.”

책제목을 들은 진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이상한 말이 나오기 전에 덧붙였다.

“참고로 종교 같은 거 안 생겼어.”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제목에서부터 냄새가 풀풀 나는데?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왜 그렇게 지은 거야?”

오해를 받기 전 사전 차단을 한 덕에 불필요한 질문은 피해 갈 수 있었으나 어김없이 따라오는 ‘왜’ 라는 질문을 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답을 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책을 냈을 때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제목의 유래를 밝히는 행위가 무척이나 민망하게 다가왔다.

어물쩡 넘어갈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었으나 불순한 의도 없이 그저 호기심만이 가득 찬, 진의 푸른 눈동자에 결국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톡 쏘는 스파클링 와인이 담긴 잔을 한 모금 크게 들이킨 후 대답했다.

“요즘은 덜하지만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동화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이잖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과 같은 비슷비슷한 문장이 이야기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 꽤 오랜 시간 보편화 된 마무리였지. 마치 하나의 법칙처럼. 나는 되도록 다른 방식의 끝맺음을 선택했지만. 지금 당장 즉석에서 동화 하나를 지어보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말걸?”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에 있어서…. 다소 식상했을 뿐. 하지만 식상하다는 것은 그만큼 꽤 오랜 기간 사람들이 그런 엔딩만을 바랐었다는 하나의 방증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그렇게 끝내고 싶었던 거겠지. 근데 그러다 의문이 들었어. 왜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이라는 엔딩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랑했었는지.”

어쩌면 답은.

“사실 모두가 동화 속의 행복한 엔딩이 자신의 엔딩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접시 위에 먹을 만큼 덜어진 음식을 헤집었다. 저항 없이 흐트러지는 조각난 채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궁금해졌어. 과연 이 세상엔 동화 속의 그 영원한 행복이 존재하는지가. 존재한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책은 그런 사소한 호기심을 가진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야.”

먹기 좋게 잘린 채소와 고기를 한 번에 집어 먹었다. 긴 말을 마치고 난 후 바짝 마른입이 소스에 절인 음식으로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은 디어헌터의 음식 맛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맛있었다. 슬슬 입맛이 도는 것을 느낄 때 쯤 리사가 말했다.

“주인공이 너야?”

“완전히 나라고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모티브는 따왔지. 동화가 아닌 글을 써본 건 처음이라 가장 가까운 대상에서 소재를 찾게 되더라고.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너희들 말고 친구가 없으니까.”

자연스레 가장 가까이 있는 ‘나’를 가장 많이 뜯어내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하고 나니 민망함이 몰려와 얼른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입안을 깨끗이 씻어내는 알코올의 청량함이 부끄러움까지 씻어 내주기를 바라며. 하지만 보기보다 짓궂은 편인 친구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 닿는 두 쌍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주인공 꼭 찾았으면 좋겠다. 영원한 행복을.”

“그러게. 증명하고 싶다는 건 누구보다 그걸 원한다는 소리니까.”

결말은 나 말고 책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해줬으면 해.”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회피하자 이내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리사의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기념으로 건배나 할까? 건배사는 그래. ‘케이아의 행복을 위하여.’가 어떨까?”

들뜬 두 사람을 말릴 방법은 없었다. 결국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음료가 차려진 테이블 위에 처음으로 울려 퍼진 건배사는 ‘나의 행복’이었다.

약속은 꽤나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디어헌터에서 식사와 가벼운 반주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프라이버시한 룸이 있는 술집에서 진득하게 사는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적지 않은 주량에 충분히 사리를 분별할 만큼의 취기만이 오른 상태였다.

이대로 잠이 들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때마침 눈에 들어온 것이 진이 선물한 와인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아껴뒀다 더 의미 있는 날에 마실 계획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날이 쉽게 오지는 않을 것 같아 곧장 잔과 병을 챙겨 거실로 향했다. 커튼을 활짝 걷어낸, 오직 창밖의 불빛에 의지한 조명만을 안주 삼아 마시는 와인의 맛은 역시 예상대로 어지러울 만큼 훌륭한 맛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맛있지? 마치 내 입맛에 꼭 맞춘 것처럼.”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던의 모든 레드와인을 마셔본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마셔본 레드와인은 조금의 차이가 있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전부 혀를 매료시키는 맛을 하고 있었다. 마시는 순간 온몸이 반응할 정도의 최상의 맛. 명실상부 최고의 와인이라고 불릴만한 극상의 맛이었다.

고작 한잔을 마신 것뿐인데 방금까지 몇 시간을 내리 마신 것이 우습게도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항상 그랬다. 던의 레드와인만이 온전히 기분 좋은 취기를 가져다주었다. 그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아 연거푸 잔에 와인을 따랐다. 주변에 말리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 병은 빠른 속도로 비어갔다.

검붉은 액체가 몸 속 가득히 찬, 그 찰나의 순간만이 오로지 만족스럽게 채워진 공허함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몸이 소파 위로 느른하게 퍼졌다.

그리고 의식이 끊기기 전 가물가물한 시야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창밖 불빛에 의해 희미하게 읽히는 라벨지 위, 멋들어진 필체의 ‘던(dawn)’이었다.

-

“깨어났군.”

눈을 뜨자 보인 강렬한 붉은색에 당혹감을 느낀 것도 잠시 악마는 붉은색의 정체를 깨닫고 왈칵 표정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내가 먼저 제안한 거라고 쳐도 말이지. 사람에게는 정도라는 게 있다고. 그렇게 무식하게 피를 마셔대면!”

“마셔대면?”

기력이 쇠해졌을 몸 상태를 예상하며 벌컥 화를 내려던 악마의 기세가 급격하게 누그러졌다. 더듬더듬 양팔을 교차하며 천천히 몸을 더듬어 상태를 확인한 악마의 얼굴에 짙은 의문이 번져나갔다.

왜 멀쩡하지?”

“그야 내가 마신 건 너의 피뿐이니까.”

아리송한 말에 고개를 기울이던 악마의 머릿속에 수간 번뜩 책에서 읽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흡혈귀의 흡혈 행위는 단순히 혈액만을 취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혈액을 통해 생기. 즉 생명력 자체를 빨아들인다는 문장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자가 부리는 압도적인 힘의 근간을 짐작할 수 있게 된 악마가 의문이 해소된 얼굴로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종족들은 다들 그래?”

악마에게서 더 이상의 불쾌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 나는 나 이외의 흡혈귀를 별로 본 적이 없어서. 다만 장담하건대 나처럼 그걸 구분해서 마실 수 있는 자들은 아마 거의 없을 거다.”

“조금 재수 없는 발언이지만 신뢰하고 싶은 말이네. 당신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수두룩하다면 꽤 무서울 것 같거든.”

저런 존재가 군집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특성을 가진 것은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인간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것으로 채우고 너무 특출 나면 사소한 것에 하자를 둔다. 이 또한 신이 정한 법칙이고 규칙일 것이다. 악마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말이지.”

자칫하다간 다시금 긴 상념에 빠질 수도 있었을 때에 흡혈귀의 무심한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툭 끊어내었다. 골똘히 생각에 빠진 악마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흡혈귀가 말했다.

“너와 나 사이의 거래. 조건을 제대로 세우는 게 좋을 것 같다.”

“거래?”

악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준 대가로 피를 내어주기로 한 것을 거래라고 생각했구나. 악마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흡혈귀가 제공하는 ‘조건’만 완벽하다면야. 표정으로 악마의 생각을 대충 읽어낸 것인지 흡혈귀는 언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잔을 악마에게 내밀며 제안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내가 너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대신 너는 내게 ‘피’와 작은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지.”

“내 피 맛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지? 뭐 어찌 됐든 나쁘지 않은 조건인데 하나 걸리는 게 있어. 그 마지막의 ‘노동’이 정확히 뭐지?”

흡혈귀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든 악마가 내용물을 살피며 대답했다. 은으로 만들어진 잔 안에 검붉은 액체가 들어있었다. 피일지도 모른다고 예측한 것이 무색하도록 액체에서는 비린내 대신 달콤한 과일의 향이 먼저 맡아졌다. 이게 와인인 걸까? 활자가 아닌 실제 인간의 음식을 본적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악마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엉킨 눈으로 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악마의 모습을 흡혈귀가 제법 흥미로운 눈길로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인간 세상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굶는다. 우리들의 경우에는 그래. 사냥이겠군. 하지만 나는 내 영역 안에서 ‘불필요한 사냥’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넌 쉽사리 내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데다가 또 굶어 죽을 생각도 없잖아? 그렇지만 네가 내가 제시한 어떠한 노동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너를 위해 ‘먹이’를 제공할 의향이 있어.”

잔속의 내용물을 빤히 내려다보며 흡혈귀의 말을 듣던 악마가 고개를 들었다. 먹이를 제공한다고?

“설마 아랫마을의 노인들?”

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흡혈귀에게 되물었다.

“그럴 리가.”

흡혈귀는 악마가 품은 의혹을 단칼에 잘라내며 몸을 일으켜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낡은 창문 밖으로 빼곡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흡혈귀가 말을 이었다.

“이 숲에는 종종 내가 싫어하는 ‘불필요한 사냥’을 하러 오는 불청객들이 있어. 그놈들은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숲을 찾는 이들과 달라. 그리고 나는 탐욕으로 물든 눈과 날카로운 무기로 내 영역을 더럽히는 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

가장 뜨거운 색을 한 눈이 한없이 차갑게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는 흡혈귀의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에 희미하게 비친 악마의 모습을 확인한 흡혈귀가 숲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노동이라고 해봐야 어렵지 않은 일들뿐이야. 하나는 날 도와서 성당을 관리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을을 지키는 순찰자가 되는 것. 기간은 쇠락한 마을이 완전한 안식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만 해준다면 나는 숲을 찾은 불청객들을 너의 먹이로 던져줄 거다. 어때? 제법 나쁘지 않은 조건 같은데.”

악마는 흡혈귀의 목소리에서 제법 자신만만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당연히 저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꼽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악마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흡혈귀가 창가에 기댄 몸을 떼어내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향했다. 특별한 의식도 없이, 그저 악마의 고갯짓 하나로 거래가 성립된 순간이었다. 악마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흡혈귀는 할 말을 모두 마친 듯 방문을 나서려 했다.

“마을 사람들한테는 내가 미리 말해두도록 하지. 그럼.”

“잠깐만.”

악마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돌아선 흡혈귀가 용건이 더 있냐는 듯 쳐다보았다. 악마는 쥐고 있는 잔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사람들한테 나를 뭐라고 설명할 거야?”

“둘러댈 말은 넘쳐나. 그에 대해서는 네가 특별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케이.”

대뜸 튀어나온 이름에 흡혈귀의 하얀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악마가 뒷말을 이었다.

“내 이름이야. 당연히 진명은 아니고. 어쨌든 나를 남들한테 소개한다는데 이름 정도는 내가 마음에 드는 걸로 하고 싶어서.”

“뭐 좋아. 그리고 또 더 원하는 게 있나?”

흔쾌히 제안을 받아 든 흡혈귀가 물었다. 악마는 흡혈귀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나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 진명을 알려달라는 게 아냐. 좋으나 싫으나 이제 같이 지내야 하는데 계속 그쪽, 당신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그렇잖아. 안 그래?”

여유를 찾아서일까. 악마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미소에 그쪽이나 당신이나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 말하려던 흡혈귀의 마음이 바뀌었다. 잠시 입을 다물며 흡혈귀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곤 이내 결정을 한 듯 악마를 향해 말했다.

“던.”

“음, 좋은 이름이네. 그럼 앞으로 그렇게 부르도록 할게. 던.”

“흥.”

악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을 칭하는 낯선 이름.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은 감각이라고 흡혈귀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흡혈귀는 조금의 선의를 베풀기로 했다. 악마의 손에 내도록 들려있는 잔. 아마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않고 처리할 생각이었을 테지.

“손에 든 그거.”

“이거?”

악마가 잔을 흔들며 물었다. 흡혈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마셔봐. 맘에 들 거야. 물론 거북하다면 대충 창밖으로 흘려보내던지 하고.”

“흠. 알겠어.”

 

악마의 대답을 끝으로 문을 흡혈귀가 방을 나섰다. 이윽고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하지만 흡혈귀는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 듯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악마가 잔에 입을 대는 것을.

 

악마. 그러니까 케이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이곳의 방음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나 사제들이 머물던 방은 그들의 청렴함과 고결함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방음에 열악했다. 얇은 나무 문은 방 안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예상대로 오래 지나지 않아 문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맛있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감탄에 흡혈귀, ‘던’의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겉으로 보면 큰 변화가 없었지만 분명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만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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