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목동재] 어린이날은 싫어.


동재 -


발끝에 힘이 들어가며 슬쩍 뒤꿈치가 들렸다.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듯 살짝 들린 발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보고 있는 척했지만, 온갖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10, 9, 8.. 마음속으로 카운터를 세면서 두근두근하는 심장을 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종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 크게 터져 나오는 소리를 꾹 참더니 벌떡 일어선다. 차려, 선생님께 경례. 맑고 반질거리는 눈 만큼이나 목소리도 까랑까랑했다. 기분이 좋으니 목소리가 더 크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유였다. 다들 오늘 숙제 잊지 말고, 내일 준비물 잘 챙기고,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집에 조심해서 가는 거예요. 교사의 말에 아이들은 참새처럼 짹짹 이며 대답을 했다. 동재는 선생님이 뒤를 돌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축구 경기하러 갈 사람!!”

“야, 오늘 동네에서 놀기로 했잖아!”


친구 하나의 핀잔에도 그랬나? 엉뚱한 표정을 지으며 축구하고 동네 가면 되잖아.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짓는다. 동네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학교에서 노는 건 또 그만의 재미가 있었기에 아이들은 금세 동재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축구공 가져왔어?”

“아니, 오늘 우리 동네 사는 6학년 민석이 형이 축구한다 그러길래 같이 하자 그래야지.”

“야, 형들이 우리 안 끼워주면 어떡해.”

“그럼 같이 할 때까지 시켜달라 그러면 되지.”


동재의 뻔뻔한 대답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하지만 축구가 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갔다. 타이밍 좋게 비슷한 시간에 수업을 마친 형들이 운동장에 서서 편을 가르고 있었다. 동재는 아는 얼굴을 보며 크게 소리 지르며 모여있는 형들에게로 뛰어갔다.


“민석이 형! 안녕! 우리도 축구 시켜줘!!”


동재의 당당한 요구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던 민석이 친구들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축구는 인원이 많아야 재미있긴 한데. 한 학년에 한 반. 많아도 20명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의 학교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끼리 하기엔 인원이 조금 모자라긴 했다. 타결은 굉장히 쉽게 이루어졌다. 팀을 나누는 주문 같은 데 덴찌에 손을 내밀면 됐으니까. 순식간에 손등을 내민 쪽과 손바닥을 내민 쪽으로 편이 갈렸다. 어리바리 손을 내밀던 아이들까지 순식간에 둘로 나누어졌다. 어디서 본건 있어서 6학년 형 하나가 포지션을 정해주었다. 운동장에 적당히 흩어진 아이들 사이로 공이 굴러왔다. 팀에 대장 격인 아이 둘이 가위바위보를 했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재 역시 그 모습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이겼다! 환호가 터지며 분주하게 자기 자리로 뛰어갔다. 여기! 여기! 패스! 동재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엉성하지만 필사적인 경기가 시작됐다.


동재는 반에서 가장 큰 축에 속했다. 팔도 길쭉하고 다리도 길쭉해서 키도 큰 데다가 커다란 눈이며 똘똘한 목소리까지.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얼굴이었다. 체격으로 봤을 땐 6학년 형들이나 동재나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형들 사이에 더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동재는 제 얼굴이 선생님에게서나 어른들에게 잘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미워 보이지 않을 만큼 잘 이용할 줄 아는 어린이였다. 그렇다 보니 동네에선 동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름의 승리욕도 있어 공부도 꽤 열심히 하고 성적도 잘 나오는 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동네 골목대장이 됐다. 동재가 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는데 그렇게 온 동네 골목이며 뒷산을 쑤시고 다니면서도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칼같이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재랑 놀고 있다고 하면 으레 저녁 먹기 전엔 돌아오겠다고 생각했으니.


오늘 동재는 그중에서 제일 열심히 뛰어다닌 축에 속했는데 상대 팀에 축구를 진짜 잘하는 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동재는 온몸을 날려 축구공을 막았지만, 오늘은 운이 좋지 않았는지 7:5로 지고 말았다. 마지막 골이 들어가는 순간 그걸 확인하고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긴 팀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얼싸안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진 팀에 있던 아이 몇도 제가 이긴 척 옆에 갔었지만 금세 넌 우리 팀 아니잖아! 하고 밀어내는 통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운동장 옆에 있는 수돗가로 달려간 아이들은 손이며 얼굴이며 머리까지 물에 적시기 시작했다. 아직 따스한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에 흠뻑 젖은 동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옷으로 젖은 얼굴을 닦았다.


“동네 가서 또 놀 거야?”

“아니, 내일 놀자.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


동재의 말에 아이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개쳐둔 가방을 메고 집에 갈 차림을 하던 형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동재의 인사에 손을 휘휘 젓던 형 중 방향이 같은 형들 몇이 다가왔다. 얼른 가요. 야! 빨리 와! 동재가 소리를 지르자 축구공 주위에 어슬렁거리던 동네 동생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집에 갔다가 학교까지 다시 온 것인지 책가방도 없이 몸만 쭐레쭐레 다가왔다.


“야, 너희 집에 갔다 온 거 맞아?”


동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동재! 이미 저만치 걸어가 동재를 재촉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매일 같이 집으로 가는 셋이 어깨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집에서 학교는 걸어서 30분 정도가 걸린다. 동재네 집은 꽤 먼 편에 속해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편이었다. 하나하나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남은 동재는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다녀왔습니다!!”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간 동재는 제 방으로 가 가방을 던져두고 저녁을 하는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동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반가운 인사도 하기 전에 그대로 멈춰 세우더니 식탁 위에 있는 커다란 접시를 내밀었다.


“우리 동재 밥 먹기 전에 엄마 심부름 좀 하고 오자.”

“심부름이요?”


동재는 제 손에 있던 접시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동재 너 우리 집 뒤쪽에 있는 이층집 알지? 파란색 지붕 집. 거기 며칠 전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는데 거기 아줌마랑 엄마랑 친구 하기로 했거든. 그 집에 이거 엄마가 준다고 하고 드리고 와. 인사도 하고. 거기에 아직 어린 동생이 사는데 동생한테도 인사하고. 아저씨 만나면 아저씨한테도 인사하고.”

“누나는?”

“누나 아직 학교에 있지. 또, 또 가기 싫어서 누나 있으면 누나 시키려고.” 

“아-,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이것만 드리고 오면 되는 거죠?”

“응. 이거 가져다주고 와서 밥 먹자.”

“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와. 가는 길에 사고 치지 말고.”


동재는 커다란 접시 위에 담겨있는 갈비찜 위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나 빼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 사실을 엄마가 알면 등짝을 몇 대를 맞을지 몰라 그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엔 뛰어다니듯 걸어 다녔는데 조심조심 걷다 보니 생각보다 꽤 시간이 걸렸다. 손이 조금씩 저리는 게 잘못하다간 큰일 날 것 같아서 잠깐 바닥에 내려두고 손을 주물렀다. 다시 양손 위에 접시를 조심히 들고 벨을 누르려는데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어 까치발을 들어 턱으로 벨을 눌렀다. 삐리삐리 하면서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달칵- 수화기가 올라가는 소리가 나더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목소리가 들리며 금세 은색 대문이 덜컹 열린다. 동재는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얼마 전부터 새로 짓기 시작하더니 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와 안까지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여기 예쁜 집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살까. 틀림없이 하얀 공주님 같은 애가 사는 집일 거야. 제멋대로 이렇게 생각하니 기대감에 쿵쿵 가슴이 뛰었다. 와- 새로운 것에 정신이 팔려 잠깐 서서 집을 둘러보던 동재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엄마가 이거 가져다드리랬어요.”

“안녕. 반가워. 네가 동재구나. 어머니가 전화 주셔서 기다리고 있었어.”


동재 손에 들린 접시를 건네받으며 인사를 한다. 접시까지 건네주고 나서 다시 정식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서 있는 여자의 다리 뒤에서 흰 얼굴이 빼꼼 내미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엄마가 말했던 그 동생이구나 싶어 안녕.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제 예상대로 하얀 공주님 같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뽀얀 얼굴을 가진 예쁜 남자아이는 맞았다. 동재의 시선을 빤히 쳐다보며 몸을 슬그머니 물리는데 귀여워 웃음이 팍 터졌다.


“잠깐 들어왔다 가렴.”


그래도 제집에 방문해준 어린 손님을 그냥 둘 수 없었던 여자는 걸음을 옮겼다. 동재는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뒤따라 걸었다. 힐끔. 어린 얼굴이 다시 동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히- 일부러 과장된 웃음을 지으니 다시 고개가 팩 돌아갔다. 동재는 제집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집안을 구경했다. 커다란 소파에 앉으라 권하는 여자의 말에 동재는 살짝 걸터앉았다. 작은 아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런 동재를 바라보았다. 분주히 움직이던 여자는 동재에게 음료수 한잔을 내민다. 동재는 이렇게 정식으로 손님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 어색하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다.


“시목아. 이리 와.”


여자의 부름에 작은 아이가 엄마의 무릎 옆에 기대어 선다. 안녕하세요. 형 해야지. 여자의 말에 작은 목소리가 안녕하세요. 입을 우물거리며 인사를 했다. 


“우리 아들 이름은 시목이야. 황시목. 여기는 서동재 형아. 동재야 반가워. 아줌마 이름은 이주연이야. 주연이 아줌마나 이모라고 불러도 되고. 동재 잘생겼다고 소문만 들었는데 정말 잘생겼다.”


동재는 커브 없이 날아오는 직격타에 얼굴이 빨개졌다. 감사합니다. 동재의 인사에 주연이 귀엽다며 동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줌마가 동재한테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여기 집주변에 시목이 또래 친구들이 없어서 아줌마가 조금 걱정했거든. 동재가 시목이를 좀 잘 봐주면 아줌마가 정말 고마울 것 같아.”

“네. 저, 잘 볼 수 있어요.”

“황시목. 이제 동재 형아 보면 꼬박꼬박 인사하고 말도 잘 들어야 해?”


주연의 말에 시목의 고개가 끄덕끄덕 흔들렸다. 동재는 동제 꼬마들을 데리고 노는 일이야 어렵지 않은 데다가 무려 어른인 주연이 저에게 부탁들 하고 있으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숫기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까지 귀여워 보였다. 저보다 한참은 작은 시목이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쳤다.


“잘 부탁해.”


동재가 손을 내밀자 한참 빤히 쳐다보던 시목이 동재가 뻗은 손을 살그머니 잡아 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웃음이 팍 터졌다. 제가 꼭 어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주연이 동재와 시목의 행동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사라졌다. 시목은 어느새 동재에게 성큼 다가와 동재의 옆에서 서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동재는 조금 민망해 친구들끼리 잘하는 웃긴 표정을 지었다. 시목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 못생겨서 싫어하려나? 동재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얼굴을 펴고 시목을 내려다보았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시목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야, 너 내 말 잘 들어라?”


웃으며 말하는 동재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시목이었다. 주연은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빈 접시에 과일을 가득 담아 내왔다. 집에 가서 맛있게 먹어. 주연의 말에 동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동재는 제 앞에 있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벌떡 일어나 접시를 들고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고. 나중에 또 보자? 자주 놀러 와?”


주연의 말에 동재는 네!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 동네에서 이 집에 처음 온 사람인 것 같았다. 다음에도 또 올 수 있다니. 괜히 기대됐다.


동재가 돌아가고 시목은 다시 주연의 옆으로 와 섰다. 하지만 방문이 못내 아쉬운 듯 현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형아 이름이 뭐야?”

“응. 저 형 이름은 서동재래.”

“서동재는 어떻게 써?”

“알려줄게. 시목이는 저 형이 좋아?”


시목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제가 좋아하는 걸 쓰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던 시목이라 이름을 어떻게 쓰느냐 묻는 걸 보고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주연은 시목을 무릎에 앉혀두고 커다란 연습장에 동재의 이름을 적었다. ㅅ ㅓ ㄷ ㅗ ㅇ ㅈ ㅐ 하나하나 소리를 내 알려주었다. 시목은 꽤 오랫동안 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요즘 동재를 들뜨게 했던 건 엄마와 함께 시목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시목의 방에는 관심을 가질만한 특이한 장난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목은 동재가 저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동재의 옆에 붙어서서 이것저것을 동재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동재가 시목에게 맞춰준답시고 과장해 고맙다고 하면 시목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동재는 처음에 그것이 웃는 얼굴인지 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조금 친해지고 나니 표정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게 보여주는 그 얼굴이 좋아하는 얼굴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어머니들끼리 친구를 하기로 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동재는 꽤 자주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시목과 주연을 마주쳤다. 시목은 첫 만남 이후로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동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 안녕. 버릇처럼 시목의 머리를 헝클면 까만 눈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동재는 시목이 우리 집에 오는 것보다 제가 시목의 집에 가는 걸 더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였다. 시목의 물건은 제가 마음대로 만져도 상관없지만, 시목이 제 물건을 만지는 건 싫었으니까. 동재는 시목이 처음 제 방에 들어온 날 눈을 마주치며 아무거나 만지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 후에 시목이 동재의 물건에 관심만 보였다 하면 안 돼, 하지 마. 하며 제지했는데 시목은 동재의 말대로 딱히 다른 건 건드리지 않았다. 그 대신 동재의 옆에 딱 달라붙어 서 있기 시작했는데 동재는 제 물건을 마음대로 만져 고장 내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해 시목의 행동은 제지하지 않았다.


시목이 점점 동재의 집에 오는 빈도가 늘어났다. 시목의 어머니인 주연이 새롭게 일을 시작하면서 더욱 자주 집에서 마주쳤다. 동재는 동생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누나에게는 제가 뭘 했는지 자랑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는데 시목은 동재가 하는 하나하나를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니 동재의 어깨가 더 높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동재가 기분이 좋은 날은 시목도 기분이 좋았다. 제 무릎에 앉혀두고 게임기나 장난감 자랑을 하기도하고(물론 그 물건에 시목이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공부를 가르쳐준답시고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조금 약은 동재는 그 이유가 시목을 가르쳐준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어른들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칭찬을 받거나 용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목 역시 동재와 함께하는 그 시간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 역시 동재와 비슷했다.


“서동재 할 때 서.”


시목이 글자를 가리키며 아는 체를 했다. “이거는 시목이 시.” 아는 글자를 이야기하면 동재는 와- 형 이름도 찾을 수 있냐며 귀엽다고 칭찬을 듬뿍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동재는 그렇게 시목과 신뢰 관계를 쌓았다. 그런 관계를 반증하듯 시목은 점점 동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동재만 보면 껌딱지처럼 붙어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목이 새로운 사람이었을 땐 시목과 함께 있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시목이 익숙한 사람이 되자 동재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미취학 아동은 점점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재는 조금만 동네 밑을 내려가면 동네 꼬마 중 시목의 또래가 있으니 걔들이랑 놀게 두고 저는 제 친구와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제가 먼저 알게 된 동생을 자랑하듯 데리고 가 신기하게 보는 또래들에게 인사시켜주고 저는 친구들과 놀았다. 한참 정신이 팔려 놀고 있는데 와앙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목의 앞에 어떤 아이 하나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야!! 뭐야! 동재가 소리를 치며 달려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경서(우는 아이)는 시목을 가리키며 쟤가 소꿉놀이하지 않는다며 서럽게 우는 것이 아닌가. 동재는 조금 화가 났지만 참으며 우는 경서부터 달랬다. 시목은 그 자리에 서서 빤히 동재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동재는 새 친구를 소개해줬으면 잘 놀아야지 왜 친구를 울리냐며 시목을 나무랐다. 시목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입술을 조금 삐죽이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우는 친구를 달래 친구들 손을 잡고 집으로 보내고선 시목의 앞에 섰다. 동재의 시선을 피해 한 곳만 응시하던 시목은 동재가 시목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런저런 말을 붙여도 요지부동이었다.


“너, 형아 말 잘 듣기로 했잖아.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마음대로 그랬어? 친구가 울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달래줘야지.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떡해? 어쭈. 황시목 대답 안 해? 너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을 거면 나 혼자 간다?”


동재는 빠른 걸음으로 시목에게서 멀어졌다. 시목은 움찔하며 한 발 내디뎠다 다시 그 자리에 섰다. 한참을 멀어지던 동재가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시목 때문에 악! 소리를 지르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야! 황시목! 동재가 멀리서 불러도 시목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성큼성큼 다가간 동재가 시목의 팔을 잡아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작은 몸이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두세 걸음 정도를 질질 끌던 동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화내는 것 자체가 한심하다고 느껴진 탓이었다. 동재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시목을 쳐다보다 몸통을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동재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던 시목이 떨어질까 봐 동재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동재는 구시렁거리며 말했다.


“너 이뻐서 안고 가는 거 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한번 참고 봐주는 거야. 친구들한테 그러지 마. 같이 놀아야지.”


동재의 허리에 다리까지 감은 시목은 코알라가 매달린 것처럼 동재에게 매달렸다. 동재는 힘에 부치는지 잠깐 서서 시목을 다시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 무거워. 시목은 동재의 말을 들었지만 못 들은 척 매달려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니 동재의 어머니인 희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왜? 무슨 일이야?”

“아- 몰라. 시목이한테 경서랑 지영이 소개해줬는데 같이 안 놀아서 경서 막 울고. 겨우 달래서 보내고 그런데 시목이는 그냥 서 있고, 사과도 안 하고. 집에도 오지 않으려고 하고. 그래서 안고 왔어.”

“우리 시목이가 무슨 일 때문일까. 이모한테 와볼까?”


시목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동재에게 매달려 있다가 희정이 시목을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말해주자 슬그머니 팔을 내밀었다. 희정은 익숙하다는 듯 시목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붙였다.


“이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볼까? 동재 형이 잘못했으면 혼내줄게.”

“아, 엄마! 나 잘못 안 했다니까요!”


희정이 웃고 동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던 시목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잡은 희정은 둘만 아는 비밀이라며 시목을 안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억울해요!!!”


동재가 크게 소리쳤고 방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희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재는 익숙하게 씻고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가방에 있는 숙제 거리를 꺼냈다. 황시목만 아니었어도 더 놀고 올 수 있었는데. 입술을 삐쭉거리던 동재는 아휴. 한숨을 크게 쉬더니 연필을 잡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니 슬그머니 방문이 열렸다. 시목이 문고리를 잡고 안에 있는 동재를 쳐다보았다. 동재는 다시 한숨을 크게 쉬었다. 동재는 숙제를 덮고 밖으로 나갔다. 희정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재가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찰나 집 안에 있는 전화기가 크게 울렸다. 시목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거리는 것을 보며 키득키득 웃던 동재는 전화가 끊어질세라 달려가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의 주인공은 주연이었다. 동재야 안녕,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밝다. 시목을 데리고 집으로 왔어야 했는데 짐이 많아 그냥 오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시목을 데리고 와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동재는 그렇겠다고 대답했다.


“야, 황시목. 엄마가 오래.”


동재의 말을 들은 것인지 희정이 고개를 돌려 시목을 쳐다보았다. 둘이 무엇인가 약속을 했는지 희정이 과장하며 윙크를 하니 시목이 배시시 웃었다. 


“서동재, 시목이 잘 데려다주고 와.”

“하…. 네.”


동재는 시목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눈치를 봤지만, 곧 슬그머니 다가와 내민 손을 잡았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소리로 대꾸한 동재가 시목의 손을 잡고 집에서 나왔다. 흘끔 뒤를 돌아보더니 제 목소리가 집 안에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동재가 시목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었다.


“야, 황시목. 너 한 번만 제멋대로 하면 나 다신 너 데리고 안 놀 거야. 알겠어?”


시목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동재는 본능적으로 그 모습이 고민하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대답. 시목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엔 사실 동재가 조금 편하긴 했다. 씁? 너 이러면 혼자 두고 갈 거야? 하면서 조금만 겁만 줘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는 시목이었으니까.  그 이후론?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이후엔 완전 서동재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 우위를 점하고 나니 호기심 많은 동재는 재미없는 시목보다는 다른 재미있는 친구들을 찾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후 시목은 동재의 껌딱지가 되었다. 뭘 하든지 간에 동재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거다. 친구들이랑 함께 놀라고 동네 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웃 동네 친구들이라도. 시목이 또래 아이들에겐 죄 소개를 했지만, 시목은 기어이 그 아이들을 모두 밀어내고 동재에게 왔다. 발목이 잡힌 것 같은 동재는 마냥 웃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시목을 혹처럼 대롱대롱 매달고 친구들 사이를 누비는 동재는 예전과 비교해 인기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재는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야, 동재 동생 왔다!”

“아, 내 동생 아니야!”

“매일 같이 오고 같이 가고 껌딱지처럼 붙어있으면 동생이지!”


오늘은 동재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시목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학교 마치고 돌아와 시목을 돌봐주기를 안 할 순 없었다.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놀기엔 어머니는 동재의 하교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어머니에게 혼이 나는 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희정은 동재가 나이 차가 좀 나는 막내로 귀염만 받고 자라다 보니 까불까불하기만 했었는데 시목을 계기로 책임감도 길러줄 겸 일부러 더 엄하게 굴었다. 물론 이런 사실까지 동재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집으로 가 가방을 두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며 힐끔 시목을 바라보았다. 집에서 동재 형이 돌아오기만 기다렸을 시목은 동재의 외출을 반기지 않았다. 동재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다 멈추고 시목을 쳐다보았다. 하.. 한숨을 쉰다는 건 포기했다는 뜻이다. 야, 얼른 와. 동재의 말에 시목이 손에 든 책을 바닥에 놓고 다가왔다. 


“밖에 나갈 거니까 엄마가 입혀준 옷 입고 와. 빨리 안 오면 그냥 간다?”

“웅.”


시목은 빠른 걸음으로 겉옷을 챙겨와 동재가 보는 앞에서 급하게 입기 시작했다. 동재는 옷을 입기가 조금 편하도록 양 소매를 시목의 손바닥에 쥐여주어 옷이 말려 올라가지 않게 했다. 신발을 신는 것을 보다가 구겨 신거나 말려 들어간 것이 있으면 빼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몇 번이나 타박했겠지만, 오늘은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시목의 행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목의 채비가 끝나자마자 손을 쥐고 달리다시피 걸어갔는데 친구들은 보자마자 서동재 또 동생 데리고 왔다고 난리가 나는 거다. 동재는 제 동생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잡고 있던 시목의 손을 놓고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이미 다른 학교 친구들까지 모아서 인원을 정해뒀던 터라 동생을 데리고 왔다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 오늘 진 팀이 진짜 떡볶이 사야 하는 거 알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들 돈 가져왔지?”

“오늘 지면 진짜 와.”


동재가 말을 붙이려 하는 찰나 언제 제게 왔는지 다가온 시목이 동재의 옷깃을 꾹 쥐었다. 야아- 왜 이래. 놔. 동재는 제 발길을 잡는 시목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조막만 한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동재는 순간 마음이 약해서 시목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손을 내팽개친 게 조금 양심에 찔리기도 한 탓이었다. 사실 동재가 시목의 상황이었다면 이미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을 것이다. 제 사촌 형들이 절 두고 놀 때 얼마나 그 근처에서 울었던가.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울지 않는 시목이 조금 대견하기도 했다.


“황시목. 너 그냥 데려가기만 하는 거니까. 나 방해하면 안 돼. 알았어?”


시목은 동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입술이 한 3mm는 더 튀어나온 것 같았다.


“대답 안 하면 안 가. 네 마음대로 해.”


동재 역시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시목을 빤히 내려다보면 그제야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답을 했다. 제 멋대로이긴 하지만 천성이 모질지 못한 동재는 또 그 모습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너 때문에 애들 벌써 저만큼이나 갔잖아. 옷 말고 손잡아.”


동재는 통통하고 말랑말랑한 시목의 볼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서 이야기했다. 한 손을 내밀자 언제 옷깃을 잡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잽싸게 손을 잡아 왔다.


“야! 치사하게 나만 두고 가는 게 어디 있어! 같이 가!”


동재가 왁!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시목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평소 같았으면 귀를 막거나 했을 텐데 그랬다간 동재가 절 두고 갈지 몰라서 그냥 빠른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학교 운동장이었다. 이미 약속한 아이들이 모여있었고 떡볶이가 걸려있다 보니 약간의 긴장감마저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동재가 시목의 손을 놓고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시목은 그런 동재를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동재를 쫓아갔다.


“야- 서동재 오랜만이다?”

“용돈 털릴 준비는 하고 왔냐.”

“아- 뭐래. 쟨 누구야?”


옆 동네로 이사하였던 친구가 동재에게 아는 척을 했다. 동재는 제게 달려오는 시목을 붙잡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 형 말 잘 듣기로 했지? 형 지금 축구 할 거니까 저기 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

“싫어.”


어느새 동재 주변에 몰려온 친구들이 시목을 쳐다보았다. 싫다고 말하는 걸 들은 것인지 한 친구가 까불거리며 그럼 너도 축구 할 수 있어? 시목에게 되묻자 입은 꾹 다물었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야, 서동재 동생이니까 동재네 편에 깍두기 시켜. 그래봤자 공에 발도 못 대서 질걸?”


이미 동재를 따라다니며 형들과 함께한 적이 있던 시목은 그 말은 그 무리에 저를 끼워준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표정이 조금 환해진 시목을 알아챈 동재는 더 엄한 목소리로 시목에게 말했다.


“너 깍두기라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돼? 너 때문에 지면 안 된다고.”


시목의 끄덕거림에 동재는 작게 한숨을 쉬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구들은 시목이 축구공에 발이나 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시목은 동재에게 전력이 아니라 페널티였으니까. 너그러운 척하면서 머리를 팽팽 굴린 결과였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은 그 이후에 터졌는데 형들 틈에 시목이 끼어있는 걸 본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들도 시켜달라고 난리가 난 것이었다. 이미 시목을 동재네 팀 깍두기로 넣은 이상 다른 아이들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게 바뀌면서 내기고 뭐고 물 건너가게 생겼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하기로 한 게임이었으니 시작한다! 소리를 치고 공부터 굴리려는데 그다음부턴…. 상상하지 않더라도 엉망진창이었다.


전략이고 개인기고 패스고 나발이고 모두 필요치 않았다. 공만 굴러가면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그 공에 발이라도 한번 닿기 위해 달리는 것이 다였으니까. 한 명이 드리블로 공을 빼앗아도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아이에게 막혔다.


“패스! 패스!!”


동재는 열심히 옆에 서서 자신에게 몰리는 아이가 없으니 패스를 하라고 외치고 있었고, 축구공은 어디서 뉘어나오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 발에 맞아 운동장 이리 저리를 날아다녔다. 심판을 보기로 했던 친구는 계속 파울이야! 손 닿았잖아! 소리를 치며 아이들을 진정시켰지만,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시목은 그저 동재가 가는 곳마다 뒤늦게 뛰어가서 옆에 서 있기만 했다. 동재를 잡았다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테니 그저 가까이 가는 게 시목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고는 찰나에 일어났다. 오랜만에 제게 패스해서 날아온 공을 발로 받아 아이들이 덜 몰려있는 쪽으로 바꿔 달리려는데 조용히 서 있던 시목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동재가 뒤돌아 달리는 속도 그대로 부딪혔기에 악!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나자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공은 저기로 데굴데굴 굴러갔고, 동재가 다치던 시목이 다치든 상관 없던 아이들은 벌써 굴러간 공으로 모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알아본 친구 한 명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서동재, 괜찮아? 헐! 저기 쟤 피나.”


친구의 말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니 시목이 운동장에 만세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아씨, 나 엄마한테 죽었다. 동재는 팔꿈치며 무릎이며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절뚝거리며 시목에게 다가가 시목을 일으키니 무릎이며 손바닥이며 턱까지 다 갈려서 피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야! 황시목! 넌 거기 서 있으면 어떡해!” 


억울하기도 하고 무릎 쪽 바지가 찢어져 벌겋게 물들인다는 게 아프기도 했다. 무릎 근처를 누르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원망스럽다는 듯 시목을 쳐다보았지만, 저보다 훨씬 더 많이 다친 놈은 피가 맺히다 못해 흐르고 있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동재는 갑자기 아무 말도 않고 울지도 않는 시목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망했네. 집에 가.”


동재는 시목의 다치지 않은 팔꿈치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야! 나, 황시목 다쳐서 집에 간다!”


동재가 크게 소리쳤지만 이미 한쪽 골대에 와글와글 몰려 접전을 벌이고 있던 아이들의 귀에는 동재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누구의 발에 맞아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었는지 골이다 아니다 난장판이 된 걸 보면서 동재는 부러움과 원망에 한숨을 푹 쉬었다.


“황시목, 너 걸을 수 있어?”


시목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래. 가자. 동재가 체념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엄마랑 아줌마한테 혼나겠다. 동재의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듣지 못한 것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동재가 시목을 데리고 몇 걸음 떼는데 말만 걸어갈 수 있다. 한 거지 무릎이랑 손, 팔까지 다 갈린 수로 걸어봤자 얼마나 잘 걸을까. 어기적거리며 겨우 걸음을 떼는 시목을 바라보던 동재가 시목의 앞에 주저앉았다.


“아프니까 업혀. 아니면 그냥 두고 갈 거야.”


동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목이 동재의 등으로 업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울지 않는 것이 용했다. 동재였다면 이미 제 몸에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눈물이 났을 테니까. 7살짜리 동생도 울지 않는데 12살 형이 운다? 이건 동재의 자존심이 절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동재는 시목의 다친 무릎에 뭐가 닿지 않도록 허벅지 밑을 단단하게 받쳐 업었다. 손바닥이 다쳐 손을 잡을 수 없으니 팔을 목에 걸고 손가락 두 개를 엮어 떨어지지 않게 힘을 주어 매달려왔다. 동재는 화끈거리는 무릎을 애써 모른 체하며 시목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히 걸었다.


“야, 황시목 너는 왜 자꾸 날 괴롭히냐? 너만 아니었어도 둘 다 다쳐서 집에 가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골도 한 골도 못 넣고….”


동재의 투덜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그 말을 하자마자 시목은 동재의 목을 더 꽉 죄어왔다.


“야, 아파.”

“나, 형 괴롭히는 거 아니야.”

“하, 나 참. 그럼. 너도 친구들이랑 놀고 나도 친구들이랑 놀았으면 서로 재밌고 집에 갈 때 같이 가고….”

“재미없어.”

“뭐가 재미없어. 숨바꼭질도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런 것도 하고 흙장난도 하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시목은 대답 대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잡은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 동재는 목이 아픈지 조금 캑캑거리더니 허리를 숙이고 다시 시목을 둘러업었다. 둘 다 아픈 다리 때문에 속도는 나지 않았다. 집이 보이자 동재의 걸음은 더 늦어졌다. 가슴이 쿵쾅쿵쾅 팔에 힘이 풀리자 시목이 바동거리며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렸다. 동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시 시목을 추스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동재는 작게 인사를 하고 시목을 업은 상태로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30분 이상을 걸어온 터라 땀 범벅이었지만 이왕 혼나야 할 것이라면 제가 이만큼 노력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동재 다녀왔.. 어머! 시목아!”


희정은 혼비백산 동재의 등에서 시목을 떼어냈다. 동생 잘 보랬더니! 동재의 등짝을 팡팡 때리려고 하는데 엑! 하는 숨이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목이 동재의 목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재는 자기도 아픈 데 서럽기도 하고 목이 졸려 눈물이 찔끔 나오고 희정은 시목의 상태를 봐야 하는데 떨어지지 않는 시목 때문에 당황했다.


“시목아, 동재 형아 놔야지. 그래야 치료도 하고 약도 바르지.”

“… 동재 형아 때리지 마세요.”

“뭐?”


희정은 시목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둘을 붙여둔 보람이 있었다. 친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들 챙기는지. 순간 감동이 차오른 희정은 시목을 달래며 떼어냈다.


“시목아, 얼른 씻고 약 발라야지 계속 동재한테 매달려 있으면 나중에 둘 다 병원 가서 주사 맞아야 한다?”


희정의 말에 동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울지만 않는다뿐이지 병원과 주사를 싫어하는 건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제야 동재가 캑캑거리며 떨어졌고 평소라면 등짝이나 엉덩이를 몇 번이나 맞았겠지만, 오늘은 시목의 부탁에 그나마 별일 없이 지나갔다.


“서동재. 넌 얼른 저기에 가서 손 씻고 약 찾아놔.”


동재는 희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엌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다. 그 사이 시목은 희정과 욕실로 사라졌다. 모래와 피가 엉겨있는 무릎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목이 손.” 손을 내밀이고 해 손바닥에 붙은 흙도 살살 씻어냈다. 


“시목아 안 아팠어? 울지도 않고 잘 있네. 착하네. 우리 동재 같았으면 아프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텐데. 시목이 다 컸네! 벌써 형아네. 형아.”


희정은 시목을 추켜세워주려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어린 시목에겐 너무 크게 와 닿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형은 누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고 형이 된 시목은 누구든 지켜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된 것이라고 말이다.


동재는 손을 씻으며 깨진 무릎도 살살 씻어내고 있었다. “아씨.. 아프다.. 황시목 때문에….” 누구 때문이 아님에도 핑계를 대던 동재는 찔끔 흐르는 눈물을 찍어냈다. 동재가 여유를 부리던 때에 손이 빠른 희정은 시목의 얼굴까지 싹 씻겨 나왔다. 


“약통 두고 얼른 씻고 나와.”


희정이 말하자 동재는 얼른 약통을 두고 욕실로 쏙 들어갔다. 이런 날은 엄마의 말을 어기면 그 호통이 전부 제게 오기에 납작 엎드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거다. 여기에서까지 여유를 부리면 정말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최대한 빠르게 씻고 달려 나갔다. 물이 쫙쫙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이 열리자마자 희정이 앞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양 무릎과 손바닥에 하얀 거즈를 덧댄 시목이 동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재는 마음이 쪼그라들어 눈치를 보며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머리카락 끝을 잡고 눈치를 봤다.


“서동재. 얼른 와.”


희정은 동재가 제 앞에 앉자마자 다리를 쭉 당겨오더니 무릎에 왈칵 소독약을 부었다. 악!


“엄마! 아파요!”


동재는 부글부글 끓는 과산화 수소 때문에 원치 않아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게. 누가 다치고 들어오래?”

“씨이.. 이거 다 시목이가….”


동재의 입에서 시목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시목의 몸이 움찔 반응했다. 시목은 조금 억울했다. 저는 동재 때문에 다쳤다고 일러바치지 않았는데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지만 제가 희정의 말대로 동재 형보다 더 형이 된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거라고.


시목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정은 동재의 등짝을 팡 때리며 잠잠해진 다리에 빨간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다 큰 놈 누구 때문에 다치긴 누구 때문에 다쳐! 동생 간수 못 한 형아 때문에 다친 거지! 그렇지 시목아?”


시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으나 그러면 다시 형이 되지 못할까 봐 애꿎은 희정만 노려보았다. 제게 했던 것과 같이 후후 불고 있으라고 하더니 똑같이 거즈를 덧대고 반창고까지 붙여주었다. 희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두 놈다 똑같이 다쳐 있는 모습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어딘가. 아이들은 다치면서 크는 거지. 희정은 주연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엄마 밥마저 하고 올 테니까. 동재는 시목이 잘 보고 있어. 너 숙제는 다 했어?”


집에 오자마자 밖으로 간 동재가 숙제하고 나갔을 리는 없었지만, 으레 하는 질문이었다. 동재는 희정의 눈치를 살피며 가방에서 숙제를 찾아 꺼냈다. 시목은 다시 동재의 옆에 와 동재가 하는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동재는 전용 앉은뱅이책상을 꺼내 숙제를 펼쳐두었다. 동재는 얼른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인 동재의 누나 은재는 제 방과 제 책상까지 가지고 있는데 동재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게 부러웠다.


동재가 숙제 거리를 다 펴두고 앉자 맞은편에 시목이 그게 원래 제 자리인 양 자연스럽게 앉았다. 동재는 순간 시목이 절 감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넌 할 거 없으면 이거나 봐. 난 숙제 해야 하니까.”

“응.”


시목은 그런 동재의 행동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따라붙었다. 동재가 책을 펴면 시목도 책을 펴고 동재가 연필로 글씨를 쓰면 시목도 펜을 잡았다. 실제 쓸 수 있는 글자는 자신이 아는 몇 단어와 사람들 이름뿐이었지만 그 사이에 동재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받고 싶은 선물을 은근하게 내비치며 기대감을 표현하던 동재는 그 전날은 기대감에 잠을 설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은재는 아직 어려서 그렇다며 핀잔을 주었고 동재는 누나는 이제 어린이가 아니니까 부러워서 그런 거라며 말대꾸를 하다 한대 얻어맞았다. 체. 저도 어린이날 놀아서 좋다고 했으면서. 동재의 구시렁거림을 들었다면 누나와 동생의 2차 전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재는 최근 다시 저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온 참이었다. 시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매일 아침 세 가족이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시목을 데리고 퇴근을 한다고 했다.


옆에서 껌딱지처럼 붙어 다닐 땐 귀찮기만 하더니 없으니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 주말 만나 시간을 보내는 희정과 주연 때문에 자연히 시목을 보는 건 동재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더욱 흥미가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지난주에 봤을 때 어린이날이라 놀이동산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부럽긴 했지만, 친구들과 동네 뒷산에 놀러 가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에 동재는 애써 부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을 뜨자마자 어린이날이라고 선물도 받고 엄마에게 용돈도 받는 동재는 얼른 약속한 시각이 오길 기다렸다. 오전부터 걸려온 전화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은 주연이었다. 시목의 아버지와 저, 모두 회사에 일이 생겨 시목을 급하게 맡길 곳이 필요하다는 전화였다. 희정은 당연히 데리고 오라며 동재가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고 대답했다. 동재는 희정의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 말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망했다.’ 그냥 동네에서 시시하게 놀 생각이었다면 신경 쓸 일도 아니었지만 무려! 동네 뒷산에! 가기로 한 것이 아닌가. 가파르거나 위험하진 않았지만, 학교도 안 들어간 꼬맹이를 데려가기엔 위험했다. 아, 어쩌지. 동재는 울상을 했다. 요즘에 다시 친구들과 몰려다니기 시작했는데 또 황시목같은 혹을 달고 나가면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동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언니 미안해요. 동재도 미안해. 오늘 어린이날인데. 이건 용돈. 시목이랑 맛있는 거 사서 먹고 나중에 같이 놀이공원 가자.”


동재는 제 손에 쥐어지는 만 원짜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본 희정이 이렇게 큰돈을 주면 어떡하냐고. 오백 원이나 천 원이면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동재의 손에는 새파란 만 원짜리가 쥐어진 후였다. “가.. 감사합니다.” 동재는 어안이 벙벙했다. 시목이 집으로 돌아오고 희정은 동재를 바라보았다. 동재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만 원짜리를 희정에게 내밀었다. 그래. 오늘 어린이날이라고 용돈도 받았는데 이렇게 큰돈을 제게 순순히 줄 리 없지. 동재는 한숨을 쉬었다. 제 앞에 다가와 빤히 저를 쳐다보는 시목이 원망스러웠다. 안 왔으면 이런 기대도 없었을 것이고 저도 혹을 붙이지 않아도 됐을 테니.


동재가 친구들 사이에 나타나자 눈에 띄게 실망하는 얼굴이 보였다.


“서동재 동생 또 왔네.”

“미안. 부모님이 바쁘시대.”

“어쩔 수 없지 뭐.”


동재는 친구들에게 미안해 시목에게 더 주의를 주었다.


“너 거치적거리면 진짜 가만 안 둬. 말 잘 듣기로 약속한 거 알지?”


시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재의 손을 잡았다. 시목의 입장에선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뒷산 산책로를 따라 길을 걷던 아이들은 시냇물 가로 다가갔다. 물놀이와 고기 잡기! 생각만 해도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던 아이들은 근처에 신발을 벗고 물로 풍덩 풍덩 들어가기 시작했다.


“야! 고기 다 도망가겠다!”

“도망가봤자 내가 잡으면 되지!!”

“서동재 빨리 와!”


저를 부르는 친구들의 부름에 마음이 급해졌다. 동재는 무릎을 꿇고 시목과 눈을 마주쳤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들어오면 안 되고, 어디 가지 말고 잘 있어야 해. 나 왔을 때 너 없으면 혼자 그냥 갈 거야.”

“응. 알겠어.”


동재는 시목을 흘끔 쳐다보다 신고 온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바지까지 둘둘 말아서 걷고 물로 들어가니 이미 아이들은 물고기를 몬다며 정신이 없었다. 동재고 금세 아이들과 섞여 물고기 잡기 대열에 합류했다. 한참 물고기를 몰다가 물이 튀어서 “야!!” 소리를 지르는 순간 물싸움이 됐다. 질세라 손을 휘저으며 물을 퍼부었다. 몸을 날려 쓰러뜨리기도 하고 기습 공격을 하려다 제가 되레 물에 빠지기도 했다. 한참을 물놀이를 하고 나와 넓은 바위 위에 몸을 말리러 올라갔다. 신발을 벗어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높은 곳이었기에 아래쪽에 벗어둔 신발과 그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에 집중하는 시목의 모습이 보였다.


“야! 황시목! 너 어디 가면 안 돼!”


동재의 목소리가 윙윙 메아리처럼 울렸다.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벌떡 일어난 시목이 두리번거리며 동재를 찾았다. 야! 여기!! 동재가 손을 휘휘 흔들어 제가 있는 위치를 알렸다. 시목이 동재를 본 것인지 빤히 저를 쳐다보기에 여기라고!! 봤으면 손을 흔들어야지!! 하니 시목이 한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그 모습이 웃겨 파하하 웃음을 터뜨리자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슬그머니 손이 내려갔다. 동재는 한참 웃긴다고 배를 잡고 웃었다.


“귀찮게 동생은 왜 데려왔냐?”

“쟤 친구 없어서 안 돼…. 누군 뭐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온 줄 아냐?”

“감기 걸려. 옷 말리고 우리 풍뎅이 잡으러 가자.”


친구의 말에 동재는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옷을 짜 벗어두고 쭈그리고 앉았다. 한참 몸을 말리던 아이들은 심심했는지 제로 게임이나 하자고 했고, 모두 공평하게 속옷 차림이니 벌칙은 인디언 밥으로 했다. 비글 같은 초딩들의 인디언 밥의 위력은 대단했다. 두어 바퀴 정도를 돌았을 뿐인데 네 아이 모두 등짝이 시뻘겠다. 동재는 약삭빠르게 대처해 많이 걸리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게 친구들의 승리욕을 불태워 한번 걸리자마자 풀파워로 때리는 바람에 동재는 한참을 등짝을 부여잡고 바위 위를 뒹굴었다. 한참을 시간을 보내다 옷이 대부분 마른 것을 확인하고 신발을 벗어둔 아래로 내려갔다. 신발은 있는데 시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덜컥 걱정된 동재는 야! 황시목!! 소리를 질렀다. 동재의 표정을 본 친구 하나가 혼자 심심하니까 내려간 거 아냐? 물었다. 그런가…. 동재는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계속 저만 빼고 놀았으니 심심해서 동네로 내려간 거겠거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큰 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야! 황시목! 나 풍뎅이 잡으러 갈 거니까! 다시 왔을 때 없으면 진짜 그냥 간다!!”


시목이 제 목소리를 들었다면 다시 여기에 와서 기다릴 거로 생각한 동재는 친구들과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걱정이 됐지만, 시간이 지나니 제 눈앞에 있는 것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시목의 생각은 동재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졌다.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산속을 헤집고 다니던 동재와 친구들은 이제 내려가야겠다는 것에 의견을 맞추었다. 다시 계곡으로 갔을 때도 시목은 없었다.


“황시목!”


크게 동재가 불렀지만, 목소리만 웅웅 울리고 시목의 인기척이 없었다. 야, 가자. 친구들의 말에 동재는 걸음을 옮겼다. 친구들과 하나둘 헤어지고 집 앞에 섰을 땐 이미 노을이 내려앉은 후였다.


“다녀왔습니다.”


동재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 희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시목인?”

“어?”


동제는 그제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동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희정이 동재에게 다가왔다. 


“시목이…. 시목이 집에 온 거 아녜요?”

“어머! 너랑 같이 나갔는데 시목이가 혼자 왜 와!”


동재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처음에 없었을 때, 그때부터 찾았어야 했는데. 동재가 다시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서동재!! 희정이 동재의 손을 붙잡았다. 


“너, 오늘 어디서 놀았어?”

“저기…. 동네 뒷산이요…. 중간중간 확인했었는데 밝을 때부터 없어서 혼자 간 줄 알았어요….”


희정은 동재의 상태를 살피더니 혼을 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 한 것인지 집으로 달려가 쉬고 있었던 아버지와 방에서 공부하던 것인지, 놀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동재의 누나인 은재까지 데리고 나왔다.


“당신이랑 나는 동재 데리고 시목이 찾으러 가고. 은재 너는 안방 두 번째 문갑에 보면 시목이네 엄마 아빠 회사 전화번호 있어. 얼른 전화하고. 통장님 집에 가서 시목이 없어졌다고 찾으러 같이 가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집에 있어. 알겠어?”

“동재야 괜찮아. 울지 말고. 얼른 가자.”


동재의 아버지가 놀라 울고 있는 동재의 얼굴을 벅벅 손으로 닦아주더니 찾으면 된다고 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서 놀았고 어디서 마지막에 봤어?”


동재는 친구들과 뒷산 중간에 있는 계곡에서 놀았고, 시목이 계속 거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동재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컴컴한 산으로 돌아갔다. 아직 노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산어귀로 들어가자마자 어두워졌다. 동재는 친구들과 갔던 계곡으로 갔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 근사한 놀이터처럼 보이던 공간이 순간 캄캄하게 사람을 집어삼키는 공포로 밀려왔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봤어?”

“네…. 그리고 산…. 올라 가기 전에, 풍뎅이 잡으러 갈 거니까…. 여기 안 있으면 그냥 가겠다고….”


동재는 죄책감에 헐떡이며 겨우 말을 이었다. 주위는 분초가 다르게 점점 어두워졌다.


“우선 이 근처부터 찾아보자.”


먼저 몸을 움직인 건 동재였다. 위험하니까 아빠 옆에!! 희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려간 동재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시목을 부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 큰 돌을 들추어 보기도 했고, 나무가 있으면 뒤에 숨은 건 아닌지 직접 가보기도 했다. 떨리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동재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크게 시목의 이름을 불렀다.


“시목아, 형이 잘못했어. 얼른 나와.”


한참을 산을 헤매고 있는데 부탁했던 사람들이 온 것인지 산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플래시로 위치를 알리며 이쪽은 찾고 있으니 다른 쪽을 찾아봐야겠다고 하자 대답이 들리더니 흩어졌다. 동네 통장은 동재네 가족에게 다가와서 어린 애가 찾기는 위험하니 희정과 동재는 내려가 있으란다. 동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걔 성격 더러워서 제가 안 부르면 안 나올 거예요. 제가 꼭 찾을게요.”


동재가 줄줄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희정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언니! 주연은 생각보다 차분한 상태였다. 주연을 확인한 동재의 울음만 더 커졌을 뿐이었다.


“시목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죄송합니다.”


동재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제가 왜 시목을 귀찮아했을까. 물에서 노는 게 그게 뭐라고. 조금 귀찮은 거였지 못할 건 아니었는데. 옆에서 잘 봐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동재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시목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제가 꼭 찾아내고 말 거라고 다짐하며 말이다.


시목아, 시목아. 동재가 한참 시목의 이름을 부르는데 산속 저기 어디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목이야?”


동재는 시목아- 이름을 부르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른들이었다면 산짐승은 아닌지 시목이 맞는지 확인 먼저 했겠지만, 동재는 그런 걸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시목아!! 시목이라 확신한 동재는 그대로 달렸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바스락거림이었다. 뭔가 검고 빠르고.. 동재는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주춤, 뒤로 걸어가려 하는데 검은 물체는 빠르게 다가왔다. 악!! 비명을 질렀다. 검은 물체가 그대로 동재를 덮쳤다. 동재는 제게 다가오는 것을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형아.”


그 물체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더 심하게 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동재는 그제야 제 위에 엎어진 게 시목이라는 걸 알아챘다. 꾀죄죄 하고 옷에는 온갖 낙엽과 오물이 붙어있었다. 깔끔한 척하는 동재였다면 냄새나니 저리 가라. 씻고 오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찾았다는 안도감만 들 뿐이었다.


“시모가아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토끼가 보여서 따라갔는데….”

“미안해….”


동재의 비명을 들은 어른들이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을 때 펼쳐진 광경은 정말 가관이었다. 커다란 비명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으나 동재는 낙엽 밭에 뒹군 것 같은 시목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시목아!!”


주연이 다가와 시목을 끌어안았다. 덩달아 동재까지 끌어 안겨졌다. 동재가 흠칫 놀라 몸을 물리려 했지만 한바탕 눈물바다가 되고 난 후에야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손을 꼭 붙들고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말해도 시목은 동재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목은 동재의 집에서 하루 재우고 보내기로 했다.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로 꾀죄죄한 둘이 집으로 들어오자 팔짱을 이거 한숨을 쉬던 은재가 비아냥거렸다.


“잘한다. 동생 하나 간수 못 해서 어린이날에 이 사단을 만들고.”

“씨이….”


동재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라 분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동재 인생에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게 할 것이라 다짐했다.


동재는 생각보다 크게 혼나진 않았다. 저녁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쭉쭉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서동재, 형이 돼서 동생도 하나 못 지키면 어떻게 할 거야. 시목이한테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해.”

“… 미안….”


동재는 또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흐어어엉 집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아 있단 시목이 동재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긴장이 풀린 희정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했다.


“시목이는 의젓해서 울지도 않는데. 우리 시목이 진짜 다 컸네. 동재가 형이라고 불러야겠네.”

“이제부터 제가 형 안 놓치고 잘 따라다닐게요.”

“어이구- 고마워라. 시목이가 동재 형 따라다녀 주면 아줌마가 더 고맙지.”


희정은 시목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몇 시간을 울던 동재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주연이 시목의 방에서 가져다준 베개까지 옆에 두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손을 꼭 쥔 상태였다. 동재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어린이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 흑역사와 잘못까지 모두 깨끗하게 사라지길 바라며 말이다.


동재 이야기 끝.



시목 -


시목은 감정적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아이였다. 발달도 느리고 말도 느린 아이라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건 다른 발달에 장애가 있다기보다 제가 필요치 않아 그런다는 걸 알고 나서야 시목의 부모님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갑작스레 이사를 결정한 건 시목이 주위 소음이나 상황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걸 알고 난 후였다. 도시에서 떨어진 외곽. 경치가 예쁜 작은 마을에 집을 지었다. 또래 친구가 없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친구가 필요하다면 충분히 사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행히 시목은 조용한 집이 좋다고 했다. 이사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근처 가장 가까운 집에 인사했고, 이미 고등학교 1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있는 희정을 알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호탕한 성격의 희정 때문에 시목은 특유의 낯을 가림도 없이 친해지게 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시목의 집에는 낯설지만 익숙한 손님 하나다 방문했는데, 그 일은 시목의 인생에 가장 큰 흔적을 남겼다.


사람에게 호기심을 잘 보이지 않는 시목이었으나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문을 열고 나가는 엄마 주연의 뒤를 따랐다. 손에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난 손님은 시목과 눈이 마주치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팩 돌렸다. 하지만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시목은 동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했다. 저의 머리를 헤집으며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때 느꼈던 제 감정에 동재가 예쁘다는 것과 그런 서동재를 좋아한다를 붙인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회고를 한다면 저는 동재에게 첫눈에 반했고, 동재와 떨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시목은 동재가 궁금했다.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건 그 시기 시목의 세계에 동재가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게 동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시목은 하루하루가 기대됐다. 그땐 한참 주연이 희정과 시간을 보내던 때였기 때문에 매일 동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목의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던 것과는 다르게 동재의 흥미는 빠르게 식어갔는데 매일 저와 놀아주던 동재가 약속이 있다고 나간다고 했을 땐 시목은 배신감까지 느껴야 했다. 그런 기분에 동재의 손을 잡고 또래 친구들을 만나러 갔으니 그 친구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제가 그 친구들과 친해진다면 동재 역시 제 친구들과 논다고 저를 버리고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시목의 세상엔 온통 서동재 뿐이었다. 책을 읽어도, 밥을 먹어도 매일 생각 나고 보고 싶던 때였으니. 고집을 부리며 일부러 미운 행동만 골라 하기도 했다. 마음에서 원치 않는 행동이라 하지 않는 것이 맞았지만. 하지만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 했던가. 시목은 동재의 변한 행동에 맞추어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쯤 시목은 거의 동재의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재가 노는 틈에는 다 끼어 놀았는데, 동재는 시목의 정신을 딴 데 팔게 하고 도망가기도 했고, 마지못해 끼워서 놀아주기도 했다. 시목은 그럴 때마다 동재의 표정을 제 마음에 꾹꾹 담았는데 조금 분했던 건 저와 있을 때 보다 친구들과 있을 때 더 많이 웃는다는 것이었다. 동재의 예쁜 웃은 모습을 보기 위해선 다른 사람 여럿과 함께 있는 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야, 황시목 넌 왜 자꾸 나를 괴롭히냐?”


시목은 동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제 행동이 동재를 괴롭히는 것이었다니! 물론 축구에 관심도 없으면서 학교 운동장에서 동재의 뒤만 졸졸 쫓아다닌 건 조금은  미안했지만 그건 전부 동재가 축구보다 저를 신경을 써주길 바라서 그랬던 것뿐이지 누구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동재에게 업힌 팔에 힘이 들어갔다. 피가 줄줄 흐르는 무릎보다 가슴이 더 시큰하게 아파져 왔다.


“나, 형 괴롭히는 거 아니야.”

“하, 나 참. 그럼. 너도 친구들이랑 놀고 나도 친구들이랑 놀았으면 서로 재밌고 집에 갈 때 같이 가고….”

“재미없어.”

“뭐가 재미없어. 숨바꼭질도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런 것도 하고 흙장난도 하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형이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어. 형이랑 있는 게 제일 좋아. 시목은 마지막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캑캑대던 동재는 시목을 추슬러 업고 계속 걸어갔다. 동재가 저런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프지만 업혀있는 건 너무 좋았다. 시목은 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날 희정이 해준 말은 시목의 가슴에 깊이 박혔는데 그 말은 제가 어른 만큼이나 의젓한 어린이이고 동재에 비교했을 때 동재보다도 더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아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이었지만 그런 결심이 없었다면 제 인생에 서동재는 없었으리라.


“엄마,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어른이 되고 싶어? 그럼 우리 시목이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도 잘 사귀면 어른이 되지?”

“그럼 동재 형보다 더 어른이 되는 거예요?”

“어….”


주연의 머뭇거림에 시목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마, 시목이보다는 빨리 어른이 되겠지? 하지만 어른스럽다는 건 꼭 나이로 판단하는 건 아니니까. 언젠간 시목이가 동재보다 더 어른스러워질 날이 있지 않을까?”


애매한 답이었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아예 못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목은 동재가 저보다 가지고 더 가지고 있는 어른스러움을 따라잡기 위해 유치원에 가기로 했다. 동재는 매일매일 학교에 가는데 시목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재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몹시 슬픈 일이었지만 어른은 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제가 원하는 것만 할 수 없었다. 시목은 어린이였지만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실 어린이날은 시목보다는 부모님이 더 기대하고 좋아하는 날이었다. 이번엔 세 가족 모두 놀이공원에 가 즐겁게 놀기도 하고 사진도 많이 찍자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어린이날 아침 급한 전화를 받고 실망한 건 시목이 아니었다.


“우리 시목이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약속했는데 못 지켜서 미안해.”

“괜찮아요.”

“그래도 희정 이모랑 동재 형아가 시목이 봐준대.”

“좋아요.”


시목은 되려 기대감에 차 있었다. 이번에 못 보면 다음 주 주말에나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일정이 당겨진 것만으로 기분이 들떴다.


“언니 미안해요. 동재도 미안해. 오늘 어린이날인데. 이건 용돈. 시목이랑 맛있는 거 사서 먹고 나중에 같이 놀이공원 가자.”


시목은 주연의 옆에 서서 동재를 지켜보았다. 환히 밝아지는 얼굴 부끄러운 미소. 서동재는 돈을 좋아한다. 새로운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됐다. 시목은 그것만으로 즐거웠다. 시목이 동재의 기분을 기민하게 눈치챘던 건 그만큼 오래 관찰을 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걸 이모에게 빼앗겼을 때부터 급격히 나빠진 얼굴은 시목을 데리고 나가야 하지 더욱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단 시목은 동재를 괴롭히지 않는 선에서 타협했다.


힘들게 올라간 뒷산 계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들어오면 안 되고, 어디 가지 말고 잘 있어야 해. 나 왔을 때 너 없으면 혼자 그냥 갈 거야.”

“응. 알겠어.”


시목은 언제쯤 저도 동재와 같이 놀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내가 동재 형만큼 더 크면 될까. 동재 형보다 더 커야 할까. 시목은 동재보다 길쭉해진 다리로 동재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했다. ‘시목이 형 같이 놀아요.’ 슬쩍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빈약한 상상은 눈에 띄는 예쁜 돌멩이 하나에 사라졌다. 시목은 쭈그리고 앉아 그 돌멩이를 살폈다. 볕에 비추니 반짝하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서동재가 좋아할까. 시목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참을 지켜보다 슬그머니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었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 동재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눈에 박혔다. 시목은 조금 자리를 옮겨 동재가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동재는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더니 저기 큰 바위 뒤로 사라졌다. 이리저리 소리치는 목소리만 들렸다. 시목은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예쁜 돌멩이를 주웠던 근처로 가자 돌멩이 위를 돌아다니는 개미 한 마리가 보였다. 쭈그리고 앉아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았다. 개미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다 보니 반쯤 녹은 사탕 위에 개미들이 바글바글했다. 한참이나 정신이 팔렸는데 퍼뜩 저를 부르는 동재의 목소리가 들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황시목! 너 어디 가면 안 돼!”


소리만 들리고 동재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니 야! 여기!! 하고 소리를 쳐왔다. 저 끝에서 붕붕 저를 위해 손을 흔드는 동재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라고!! 봤으면 손을 흔들어야지!!”


동재의 말에 팔을 번쩍 들으니 만족스럽다는 듯 동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환하게 웃는 동재의 얼굴은 한눈에 들어왔다. 시목은 동재가 저를 보며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미 동재는 커다란 바위 뒤로 사라진 후였다. 시목은 동재가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다시 깔깔거리며 웃는 목소리가 들리고 동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목이 다시 개미를 확인하려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목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채기도 전 그림책에서만 본 적이 있던 토끼의 얼굴이 뿅 나타났다. 시목은 쿵쿵 가슴이 뛰었다. 하얗고 보들보들하게 생긴 게 동재가 좋아할 것 같았다.


“토끼야.”


시목이 토끼를 불렀다. 하지만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야생의 토끼는 시목을 자신을 공격하려는 포식자로 인식했고 그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토끼야. 시목은 뭐에 홀린 듯 깡충깡충 뛰는 토끼 뒤를 쫓기 시작했다. 7세 어린이가 상대하기엔 토끼는 너무 빠른 상대였다. 하지만 시목의 집착도 그만큼 강했다. 시목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토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시목은 제가 이미 산 깊은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낯선 나무뿐이었다. 시목은 덜컥 겁이 나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산은 어린 시목을 곱게 보내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목은 젖은 낙엽을 밟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가볍기에 그 정도로 끝났지 성인이었다면…. 시목은 식은땀이 나며 오한이 들었다. 그나마 따뜻해 보이는 나무 밑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시목은 덜컥 겁이 났다. 동재의 말대로 그 자리 그대로 있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는 어린 시목에게 견디기 힘든 이명을 일으켰다. 귓속에서 뇌를 뒤흔드는 소음을 느끼며 시목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산속에서 체온이 많이 떨어져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시목은 제 잘못으로 저를 스스로 고난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분하기까지 했다. 이동하기에도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작은 몸을 더 웅크렸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작은 돌을 만지작거리기 위해 손을 넣었지만 언제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목은 크게 실망했다.


얼마나 시건이 흐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시목아! 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목아. 시목아. 분명히 동재의 목소리였다. 시목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시목이야?”


저냐고 묻는 목소리는 언제 어디에서 듣더라도 찾아낼 수 있었다. 시목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목이 성급히 움직이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렸다. 또다시 몇 번이나 굴렀다. 하지만 다행이었던 건 시목을 부르는 동재의 목소리가 더 가까이서 들렸기 때문이었다. 시목이 다시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다시 푹 꺼지는 구덩이를 밟고 우당탕, 그런데도 목표가 있으니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동재가 들고 있는 플래시 빛이 보였다. 마음이 급해진 시목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몇 번이나 구르며 동재에게 달려갔다. 나중엔 내리막길 가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재에게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지만.


동재는 제가 시목을 찾았는지도 모르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직 이명의 여파가 남아있던 시목은 한쪽 귀를 막으며 동재를 불렀다.


“형아.”


그제야 동재는 눈을 떴고 눈앞에 있는 게 시목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와락 끌어안았다.


“시목아,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토끼가 보여서 따라갔는데….”

“미안해….”


토끼를 보며 예쁘게 웃는 동재의 모습을 상상했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시목은 미안한 마음에 동재를 더 꼭 끌어안았다. 동재의 비명에 사람들이 모였고 주연까지 나타났다. 주연은 시목을 발견하자마자 아이 둘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엄마, 미안해요.”


시목의 말을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주연은 꽤 오랫동안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동재는 아직 흐느낌이 잦아들지 않은 호흡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목의 손을 꼭 틀어잡았다. 시목 역시 그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시목아 이제 동재 형아는 보내주고 집에 가야지.”


시목은 동재를 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고개를 살살 흔드니 주연이 울상을 했다. 희정이 둘 다 우리 집에서 재우고 내일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집에서 옷이랑 베개 좀 가지고 올게요. 애착 베개라서 그거 없으면 잠을 못 자요….


결국 저녁은 아이들 때문에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기로 했다. 동재는 거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시목은 그 옆에서 밥을 꾹꾹 밀어 삼켰는데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건 아니었다. 밥을 많이 먹어야 많이 큰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목은 동재가 걱정됐지만 표현할 줄을 몰랐다. 기어이 동재가 울음을 터뜨렸다. 시목은 동재에게 다가가 절 꼭 끌어안아 줬던 것처럼 똑같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희정은 시목이 동재보다 더 의젓하다며 동재더러 시목에게 형이라 부르라며 놀려댔다.


“이제부터 제가 형 안 놓치고 잘 따라다닐게요.”


시목은 정말 진지했다. 더는 동재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그날은 둘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시목은 매일 함께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목의 이야기 끝.



에필로그


시목은 제품을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동재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였다. 이미 10년도 더 된 버릇이었다. 동재는 옆에 사람의 체온이 없으면 잘 잠들지 못했다. 시목의 첫사랑은 동재의 트라우마와 함께 컸고, 시목은 그런 동재의 품을 쉽게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의도를 한 건 아니었다. 시목이 산을 헤맸던 어린이날 이후 동재는 시목을 과하게 싸고돌았다. 친구에게 핀잔을 받는 일이 있어도 시목을 데리고 다니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래와의 관계가 중요하던 때 시목만 싸고돌던 동재는 어느 순간 학교가 마치고 난 후 시간은 시목에게 할애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 트라우마는 강제로 시목과 동재를 옭아매는 매개체가 되었다. 크게 덴 트라우마가 있는 동재와 워낙 조용했던 시목의 방과 후는 이따금 게임이나 티브이 시청 이런 걸 제외하면 대부분 공부였다. 할 일이 없으니 공부를 하는 게 가장 나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목은 동재와 보내는 시간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시목의 첫 고백은 동재가 스무 살이 되든 해 어린이날이었다. 이미 어른이 된 동재와 사춘기가 찾아왔던 시목은 그날도 동재의 방(동재의 누나 은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취를 시작했기에 자연히 그 방은 동재 차지가 되었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학금을 노린다며 지방대 법대로 진학한 동재는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까지 받았기에 집에선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동재는 대학교에 가니 전부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투덜댔지만, 시목은 알았다. 시목을 알고 난 후 고등학교 졸업을 하기 전까지 교우관계를 모두 포기했던 동재가 대학 생활을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동재는 제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지 않았고 시목은 그런 동재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챘다. 시목은 그것이 동재가 저와 거리를 벌리는 첫 번째 단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10대 시절을 단단히 죄고 있던 트라우마를 벗어나고 싶은 것이라는 걸.


“나, 형 좋아해.”

“어- 우리 시목이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어. 그래서 형이랑 결혼하려고.”

“하…. 뭐? 그럼 누가 얼씨구나 감사합니다. 하고 해준 대냐.”


동재는 시목의 고백을 장난으로 웃어넘겼고, 그게 시목의 승리욕을 자극했다는 걸 동재는 몰랐다.


“진짜 누구랑 하는지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래. 그래.”


동재는 침대에 누워 제가 보고 있던 만화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시목이 휙 고개를 돌렸다. 만화책을 슬쩍 들던 동재가 왜, 뭐? 할 말 있어? 입만 벙긋거리며 되물었다. 시목은 하.. 한숨을 내 쉬었다.


시목의 고백이 실패로 돌아갔던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론 동재가 집에 오는 발길이 유난히 뜸해졌기 때문이었다. 시목은 그게 제 고백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제 겨우 과거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제가 다시 그곳으로 동재를 끌어당긴 것이다. 얼마나 자주 오지 않았는지 거의 명절 때나 한두 번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자주 얼굴을 봤던 시기는 동재가 군대에 갔던 시기였는데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나오면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목은 제 고백이 성급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목의 목표는 이미 서동재였으므로 동재가 법대를 진학한 이상 시목 역시 법대를 목표로 공부했다. 시목이 대학에 진학할 때쯤 동재는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타이밍 좋게 서울에 집을 구해 함께 살 게 됐다. 동재는 끝까지 피해 주지 않겠다며 혼자 살겠다고 주장했지만, 그 의견은 서울의 무시무시한 집값 때문에 제대로 펼칠 수도 없었다. 고시원에 살면 된다, 누나 집에서 살면 된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는 걸 시목은 알고 있었다.


“야, 고맙다. 네 덕에 집 걱정 안 하고 편하게 공부하겠네.”

“서동재. 형. 내가 불편해?”

“뭐?”


시목의 물음에 동재는 당황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내 가면을 쓰고 너스레를 떨며 주제를 흩트렸다.


“야, 너 형아, 형아 하더니 이제 컸다고 바로 맞먹냐.”


동재의 반응을 살피던 시목은 그제야 동재가 여태껏 일부러 저를 피했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 수 있었다.


“나 버리지 마. 난 형밖에 없는데.”


시목은 동재를 느슨하게 풀어주기엔 상대방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목의 약간의 상처받는 표정에도 동재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동재 형.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잖아.”

“어? ….”

“내가 형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것이 책임감이든 의무감이든 몇 년을 시목의 옆에 붙어 있던 동재였다. 성인이 되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곤 해도 그 존재가 평생 옆에 없는 상태를 상상해보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자신의 애정을 갈구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질게 떼어낼 수 있는 성정은 아니었으니.


“아니,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시목은 동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동재 역시 책임감 만으론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건 이미 진작 알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시목에 대한 제 감정을 깨닫는지가 중요했다. 시목은 제가 터뜨리지 않으면 그 감정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동재의 안에서 사라질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후로 1년은 폭풍 전야였다. 시목은 더는 동재를 자극하지 않았고 동재는 놀라울 정도로 공부에만 매달렸으니. 시목은 1학년 기말고사를 끝내자마자 군대에 입대했다. 그 시기 동재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는데 제가 거리를 두는 것은 경험이 있어도 시목이 저와 거리를 두는 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목은 동재가 그랬던 것처럼 일부러 더 거리를 두었다. 휴가를 나오더라도 본가로 갔지 동재가 있는 서울엔 걸음을 하지 않았다. 동재는 항상 뒤늦게 시목의 휴가 소식을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또 1년이 흘렀다. 먼저 나타난 건 동재였다.


“잘 지냈어?”

“여기까지 웬일입니까.”

“그냥, 얼굴 못 본 지도 오래됐고. 매번 부모님들만 보고 간다는데 섭섭하기도 하고. 말투가 그게 뭐냐? 우리 사이에 이정도밖에 안 되냐.”

“그쪽이 말하는 우리 사이가 뭡니까.”


시목의 직접적인 물음에 동재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다른 것보다는 이제는 형도, 서동재도 아닌 그쪽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시답잖은 소식과 집에서 들은 부모님들의 소식을 조금 전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군대란 곳은 여전히 형편없는지. 여러 가지가 궁금했지만, 그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목은 먼저 가보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격답게 정확한 각이 잡힌 군복. 누구보다도 딱딱한 군대식 말투. 군인이 다 됐네. 시목의 뒷모습을 보던 동재는 아쉬운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목이 군대에 있던 사이 동재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집안의 경사라며 주연이 연락해 왔기에 그 소식은 빠르게 시목에게까지 도착했다. 연수원에 가야 했으니 시목이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엔 동재는 더는 그 집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었다. 시목은 혀끝이 씁쓸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시목은 언제쯤 저와 동재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강제적으로 함께했던 시간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동재의 기억 일부분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저 같은 동네 살던 어린 꼬마. 정도로 평생 동재의 뒤만 쫓으며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6년이란 시간은 시목이 동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말 숨이 가쁘게 거리를 좁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원한 시간이었다.




시목은 철컥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방에서 나와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강도나 도둑이라면 때려서라도 제압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어? 집에 있었네? 여긴 언제 왔어. 잘 지냈냐? 시목아.”


반질반질한 양복을 차려입은 동재였다. 연수원에 들어갔으니 더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계기를 만들어 다시 서동재를 잡아 오기까지 더 오랜 기간이 소요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동재는 시목의 예상 밖 인물이었다.


“너는 어떻게 법대생이라는 놈이 이 형님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데 축하 한마디가 없냐. 진짜 섭섭하다 섭섭해.”


당황한 쪽은 시목이었다. 동재가 이런저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까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도 제대 축하해. 진짜 좆같았을 텐데. 그때 보니 군인이 다 됐더니. 이제는 복학했다고 그 물 좀 빠졌나 몰라. 한 번만 안아보자.”


동재는 시목이 있는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시목은 가까이 다가오는 동재를 저지했다.


“아무 뜻 없이 이러는 거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저는 이제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와, 아직 안 빠졌네. 아무 뜻 없는 거 아니라면?”


동재는 다시 시목과 거리를 좁혔다. 


“그럼 무슨 뜻인데?”


시목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동재는 살짝 입술을 씹었다. 시목은 혼란했다. 여태껏 쌓은 동재의 데이터베이스 안에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절체절명 일생에 한 번 뿐인 기회라는 사실을.


“후회할 거라면 넌 여기 와선 안 됐어.”

“누가 후회한다고 했는데?”


시목은 제 앞에 동재를 끌어당겼다. 시목은 동재의 뒷덜미를 잡아채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동재가 그대로 시목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시목은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현실감 없다고 생각했다. 한참 입을 맞추다 천천히 몸을 물렸다. 시목을 끌어안고 서 있던 동재가 고개를 숙여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 많이 컸다. 진짜. 그런데 키스는 연습 좀 해야겠다.”


시목은 자존심이 건드려져 키득거리며 웃는 동재를 보며 한소리 쏴댈 요량이었지만 그럴 수 없게 했다. 동재가 시목을 더 꾹 끌어안았다. 사랑해. 시목의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황시목, 네가 하고 싶었던 말 이거 맞지?”

“글쎄.”

“약은 새끼.”

“몰랐던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쪽팔림을 무릅쓰고. 그 새끼 잡으러.”


시목은 동재를 끌어안은 그대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시목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동재를 밀어붙였다. 아!


“야, 황시목. 넌 왜 이렇게 날 못살게 괴롭히냐?”

“괴롭히는 거 아닌데.”

“그럼?”

“사랑한다며. 네가 말했잖아.”

“내가?”


시목이 다시 동재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번엔 조금 여유롭게. 동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시목은 제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동재의 모습을 뇌리에 새기고 있었다. 제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시목의 꿈이 이루어진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다시 제품을 파고드는 동재의 등을 두드리는 시목의 손길이 익숙했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며칠째 동재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시목과 연인이 되면서 사라졌던 트라우마는 결혼하고 둘 사이 아이가 생기면서 다시 나타났는데 이제 한창 뛰어다닐 나이인지라 더욱더 심하게 나타냈다. 활동적인 건 동재를 닮았는지 한시를 가만히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총기 넘치는 눈. 넘치는 호기심을 담은 그 눈은 세상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원아, 아빠가 사람 많은 데 가면 꼭 잘 보고 손 놓치지 않게 다니랬지.”

“잘 보고 다녔는데? 쩌기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


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말간 눈빛으로 동재를 쳐다보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켰다. 그러면 동재는 다시 그 눈에 단단했던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시목과 동재. 둘은 동거 10년째. 결혼 7년 차. 5세 여아를 둔 부부가 되었다. 자녀의 이름은 황서원. 동재는 무조건 제 성을 붙이겠다 주장했지만 그렇다면 제 성도 넣어달라는 시목의 부탁에 울며 겨자 먹기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원은 이번 어린이날에 놀이공원을 가자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친구들이 대부분 이번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놀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였다.


“그날은 온 세상 어린이들이 다 나오는 날이라서 자칫 잘못하면 아빠들 둘 다 잃어버리는 수가 있어. 원이 누가 데려가면 어떡해. 아빠는 생각만 해도 너무 슬픈걸?”


동재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가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 원을 품에 안고 도닥이며 왜 내키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내가 아빠 손 잘 잡고 있으면 되잖아. 시목 아빠 손이랑 동재 아빠 손잡고. 누가 데려가려고 하면 우리 아빠 검찰이에요. 하면 된댔잖아.”


동재는 원이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말발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 데다 한번 알려준 건 잊지도 않았다. 게다가 누구 고집을 닮은 것인지 답이 없다. 정말. 동재는 시목에게 도움의 눈빛을 갈구했다. 시목은 동재의 옆에 앉아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원의 통통한 볼을 툭 건드렸다. 가슴팍에 묻었던 얼굴이 살짝 고개를 돌려 시목과 눈이 마주쳤다.


“어린이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원이를 많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원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그건 또 아닌지 입술을 삐쭉인다. 원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어린이집 친구들이 모두 다 간다고 하는 그 놀이 공원에 가고 싶은 것뿐이었다. 원의 표정이 다시 울상이 됐다.


“다은이도, 주환이도. 도율이랑 형주까지 원이 친구들은 다 놀이공원에 가는데 왜 원이는 가지 못해? 아빠는 원이를 사랑하지 않아?”


또다시 으앙 울음을 터뜨린다. 시목은 동재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했고 동재는 급기야 일어서서 원을 이리저리 흔들며 달래기 시작했다.


“원이 그런 말 하면 아빠 마음이 아픈데. 그러는 원이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동재의 말은 원의 울음을 더 부추기는 꼴이 됐다. 아빠 미워! 하며 다리를 버둥거리는 딸내미 때문에 동재는 떨어지지 않게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목이 얼른 다가가 원을 부르자 아빠아- 하며 시목에게 안겨 왔다.


“제가 달래볼 테니까 들어가서 좀 누워 계세요. 이러다 몸살 나겠습니다.”


동재는 시목의 말대로 두 부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방으로 들어갔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와 침대에 걸터앉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하…. 쉬운 게 없네. 동재는 손을 뻗어 제 얼굴을 가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시목이 들어왔다. 동재의 옆에 앉은 시목은 팔을 뻗어 동재의 이마와 목덜미를 만져보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 오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나 한 번만 안아주라.”


방을 나가려는 시목의 팔을 잡으며 동재가 몸을 일으켰다. 시목은 동재를 품에 안고 원에게 했던 것처럼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동재가 엷게 한숨을 쉬었다. 


“고 계집애. 죽어도 제 뜻대로 한다지?”

“네….”

“그렇지. 누구 고집을 물려받았는데 그렇게 쉽게 물러나겠어.”

“제가 더 조심히 보겠습니다.”

“진짜 어렵다. 거기 가봤자 사람들만 바글바글하고 하나도 재미없을 텐데.”

“그래도 제 친구들이 모두 간다니까 소풍처럼 거기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가 그렇게 좋을까.”

“그건 누굴 닮았는데요.”

“한마디도 안 지지. 하.. 어디 못 가게 끈이라도 매야 할까.”


시목은 동재의 말에 공주 같은 옷을 입은 원의 어깨에 긴 줄이 달린 가방을 메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 중 제일 심하게 말릴 것 같은 사람이 동재라는 사실은 저만 모르는 모양이었다.


결국 밤새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동재 때문에 시목 역시 선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놀이공원에 가기로 한 날부터 원은 다른 의미로 기대했는데 어린이날 역시 제일 일찍 일어난 사람도 원이었다. 시목이 새벽녘 겨우 잠든 동재가 깨지 않게 조심히 밖으로 나갔다. 아빠! 부르며 달려오는 원에게 쉿.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똑같이 따라 하며 목소리를 죽인다.


“아빠, 내가 오늘 입을 옷을 골라 봤는데 어때? 예쁘죠?”


레이스가 많이 달린 흰 드레스. 흰 타이츠. 예쁜 큐빅이 박혀 반짝이는 머리핀까지. 시목은 원을 안아 들며 예쁘네. 대답했다.


“우리는 언제 가요?”

“어. 놀이 공원은 더 오래 있어야 문을 열어서 이 시계가 10이 되면 나갈 거예요. 원이 숫자 셀 줄 알죠?”

“네!”


원은 참새 같은 목소리로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시목은 아이의 통통한 볼에 쪽- 입을 맞추었다. 


동재는 외출 시간이 다 되어 혼비백산하며 일어났다. 이미 시목이 원에게 아침을 챙겨 먹인 뒤라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오늘 활동이 많을 테니 편하게 입으세요.”

“어. 수고했어. 나 깨우지 왜 혼자 했어.”

“어제 거의 못 주무셨잖아요.”

“나 때문에 너도 못 잤어? 미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괜찮습니다. 원이가 많이 기다리니 빨리 가시죠.”


시목은 동재의 볼에도 짧게 입을 맞추었다. 어? 어. 동재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아빠 뽀뽀했어? 시목의 행동을 묻는 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아침에 일어났을 때 원이도 해줬지? 또 해죠. 쪽, 또 해죠. 까르르 웃는 목소리와 쪽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많다요. 다들 원이처럼 소풍나온거다요. 오늘 원이 친구들도 놀이공원 온다고 했다요.”


자동차 뒷좌석 어린이용 카 시트에 앉아 있던 원이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창밖을 정신없이 내다봤다. 어디에서 옮겨붙은 말투인지 원이 한마디 할 때마다 동재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리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기분도 오래가지 않았는데 벌써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입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2시가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동재는 이미 들어가기 전부터 지쳤다.


“여기서 원이 친구들을 볼 수 있을까?”

“친군데 당연히 볼 수 있지.”

“황서원. 너 아빠 손 꼭 잡고 다녀야 한댔어. 오늘 놀이 공원 올 때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웅! 원이 기억하고 있찌이. 자 아빠 손.”


원은 동재에게 제 손을 내밀었고 동재는 그 손을 잡으면서도 불안했다. 그냥 안고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원은 동재를 끌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커다란 솜사탕을 파는 가게 앞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단건 안 돼. 단호하게 말했겠지만, 오늘은 어린이날이지 않은가. 시목이 원의 다른 쪽 옆에 있다가 원이 손가락으로 콕 찍은 캐릭터를 얼른 계산했다.


“감사합니다.”

“감샤합니당.”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둡니다.”


시목의 말을 영혼 없이 따라 한 원은 얼른 제 것을 달라 손을 내밀었다. 시목은 제 손을 잡고 있던 왼손에 커다란 솜사탕 막대를 쥐여주었다. 동재는 괜히 더 긴장되어 원을 쥔 손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빠르게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고 따끈한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빠, 저기이 저기.”


사람이 바글거리는 대 관람 차를 솜사탕으로 가리키며 동재의 팔을 잡아당겼다. 동재는 작은 아이의 이끎에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처음엔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해갔지만, 키가 큰 동재가 빠져나가기엔 무리가 많았다.


“천천히, 조심조심.”


아이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고 아이의 이끌림에도 사람 벽에 멈춰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를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동재는 사람 벽을 살살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빽빽이 몰려 있던 구간을 지나가자 조금 여유가 생긴다. 이왕 기다릴 거 그냥 힘들어도 안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원아, 팔을 당기는데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동재의 손을 잡고 있었다. 동재는 소스라치게 놀라 잡은 팔을 놓고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너, 언제부터 아저씨 손 잡고 있었어? 부모님은? 네 어깨 정도 오는 여자아이는 못 봤어? 하얀 드레스에 양 갈래 머리를 하고.. 한 손에 솜사탕을 들고….”


동재는 묻던 것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 인파에서 시목이 겨우 빠져나와 동재를 찾고 있었다.


“시목아!”


동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목에게 다가갔다. 시목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원이가, 원이가….”


시목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작달막한 아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목은 빠르게 아이에게 다가가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호흡하시고요. 찾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손을 잡고 있었는데, 놓치는 느낌도 없었는데, 누가 데려간 거면 어떡하지? 어? 어쩌지 시목아? 못 찾으면?”


동재의 눈에서 또 눈물이 주룩주룩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아, 시목아 우리 원이…. 동재를 잡은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시목은 무너지는 동재를 끌어안으며 괜찮다고 속삭였다. 


“얼른 찾아야 해. 황서원!”


동재는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이 근처에 있는 여자아이 보지 못하셨을까요? 키는 1m 정도로 작고 흰 원피스에 양 갈래머리. 그리고 솜사탕을 들고 있습니다. 이름은 황서원이고요.”


동재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원을 보지 못했느냐 묻기 시작했다. 시목은 황서원! 크게 소리를 치며 주위를 살폈다.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대부분 앞으로만 가기 때문에 원도 비슷하게 앞으로 나아갔다면 목적지에 먼저 도착했을 확률이 높다.


“서 검사님은 이쪽 근처를 찾아보시고요. 저는 원이가 가고 싶어 했던 대 관람차 근처 찾아보겠습니다. 찾아보고 안되면 바로 신고하시죠.”


동재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재는 인파를 조금 더 헤매 보기로 했다. 시목이 대 관람차 앞으로 뛰어갔을 때도 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혼자 있는 조그만 여자아이를 보지 못하셨을까요? 키는 1m 조금 넘고 흰 원피스에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솜사탕을 들고 있거나 먹고 있을 확률이 높고요.”

“거참 딱하네요. 여기 주위를 한 번 살펴보세요. 대부분 아이 옷과 비슷합니다. 아예 미아 찾기 방송을 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시목은 아.. 한탄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시목은 대관람차 매표소로 다가가 작은 창구 유리문을 두드렸다. 줄 서 있는 사람을 헤치고 들어간 거라 뒤에선 사람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혹시, 방송 가능합니까?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이름은 황서원 아이를 데리고 있거나 방송을 듣는다면 이 앞으로 올 수 있게요.”

“이건 여기 근처만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어서 어렵고요. 미아 보호센터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네, 어린아이 한 명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이?”

“황서원이요. 나이는 5살 키는 1m 4㎝. 흰색 원피스. 흰색 머리띠. 검정 구두. 솜사탕을 들고 있습니다.”

“네….”


창구에 있는 직원은 시목이 해주는 말은 그대로 읊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연락이 오거나 아이를 데려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시목이 돌아서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신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동재를 찾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인파 속에서도 키가 큰 편인 동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신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목은 동재를 보며 차분히 말을 건넸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지 머릿속은 복잡했다. 애써 나쁜 생각은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동재는 모두 다 제 탓이라고 하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시목아, 어떡해? 이거 다 나 때문이야. 그냥 싫고 나쁜 아빠 됐어도 여기 오면 안 됐는데. 내가 딱 잘라 거절했어야 하는데. 아니야, 왔으면 내가 안고 다니면 될 문제를 왜.. 왜…. 다 나 때문이야….”


흐르는 눈물도 닦지 못한 채였다. 시목은 이러다 동재까지 잘못될까 봐 동재를 추슬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원이에게 별일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동재는 차마 제가 상상해 뱉는 말이 현실이 될까 말도 하지 못했다. 경찰, 미아보호센터.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 아이가 보호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름은 황서원. 보호자의 이름은 서동재, 황시목 이라고 합니다. 아이를 잃어버리신 분은..

- 아빠! 나 여기 있어! 얼른 데리러 와!


갑작스러운 아이의 목소리가 울리자 주변이 웅성웅성했다. 이미 동재는 스피커 쪽으로 걸음을 옮긴 후였다.


-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장소는 놀이공원 센터 광장 옆에 있는 미아보호센터입니다. 아이를 알고 있으시거나 방송을 들은 보호자는 얼른 이곳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동재는 장소가 나오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시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재가 달려가는 동안 비슷한 방송이 몇 번 더 나왔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제 눈으로 직접 아이를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동재는 미아보호센터 문을 쾅 열며 들어갔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군데로 모였다.


“아빠아!”

“황서원!”


동재가 도착했을 땐 세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의아했던 건 울고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건데, 그중 제 딸이 제일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는 게 동재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이었다. 동재는 빠르게 다가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빠, 원이가 미안해. 내가 솜사탕이 떨어져 가지구우 그걸 잡으려고 했는데 아빠 손이 없어진 거야. 솜사탕도 없어지구. 그래서 지나가는 언니들한테 부탁해서 여기에 찾아왔어. 아빠 울어?”

“아니야, 안 울어.”

“어? 시목이 아빠!”


시목 역시 숨을 몰아쉬며 장소에 도착했다. 


“얘들아, 나 아빠 왔다. 먼저 갈게.”


걱정이 없는 건 제 딸 하나뿐이었다. 원은 앉아있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제 자리 앞에 있던 야쿠르트를 집은 후 바닥이 보이게 쪽쪽 빨아먹은 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재가 그 안에 있던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에이, 아이가 먼저 찾아왔는걸요. 아이 데려와 주신 저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시목은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상황 판단을 했다. 원을 데리고 와 준 세 명의 여학생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빨리 찾아서 다행이에요. 아이가 똑똑해서 울지도 않고 저희는 여기까지 데리고 와 달라고 해서 온 거예요.  오는 김에 혼자 있는 아이들 몇 데리고 왔고요. 걱정 많으셨죠.”

“정말 감사합니다.”

“언니들 안녕!”

“서원이 잘 가.”


원을 놓칠세라 끌어안은 동재까지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 정신에 다른 아이 부모님들까지 올 텐데 그 안에 있어 소란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빠르게 빠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동재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원이 돌봐주신 분들인데. 사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미 명함 드렸습니다. 필요할 때 연락 달라고요.”

“아, 미안. 나 때문이야….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서동재.”

“어?”


평소 동재였다면 예의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하늘 같은 선배이자 서방님에게 반말을 하냐며 핀잔을 줬었겠지만 지금은 그걸 판단할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다, 네 잘못 아니고. 이런 일은 100% 한 사람의 잘못이란 건 없는 거야. 네가 원이 버렸어?”

“야, 어떻게 너는!”

“원이도 잘못했찌이. 동재 아빠 원이 버린 거 아니지이.”

“황서원 어린이. 어린이도 혼나야 합니다. 이리로 와.”

“싫어.”


원은 동재의 목을 끌어안으며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텼고 시목은 그런 원을 떼어내기 위해 허리를 간질간질 간지럽혔다. 퉁퉁 부은 눈을 하던 동재가 시목을 저지시키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냥, 내가 안고 있을게. 불안해서 그래.”


원은 제가 이겼다는 듯 시목에게 메롱, 작은 혀를 내밀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시죠. 누구 때문에 얼마나 뛰었는지 더 있을 체력도 없을 것 같고요.”


승기는 이미 시목에게 기울었다. 원이 휙 고개를 돌려 대관람차를 바라보았다. 저기 시선 끝에 걸리는 회전목마도. 금세 울상이 되었지만, 시목은 단호했다.


“오늘은 그냥 가야 해. 나중에 따로 오는 건 괜찮아.”


시목의 말에도 원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는지 동재의 가슴팍에 얼굴을 팍 묻고 또 속상하다는 티를 냈다. 시목은 정신이 반쯤 빠져있는 동재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동재는 언제쯤, 이 악몽 같은 어린이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확장해 고민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우선은 제 보물을,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어린이날은 싫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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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치채신분이 있었을까 궁금😝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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