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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타르>




영혼의 행성인 ‘타르’의 검문소는 인간과 엘프, 그 외에 여러 가지 다른 종족들로 붐볐다. 바삐 움직이는 이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걷고 있는 인간 남성형의 두 명이 눈에 띈다. 한 명은 어두운 파란 색상에 눈썹을 다 덮는 머리였고 다른 한 명은 군데군데 금빛 브리지가 있는 어두운 갈색 머리 장발이었다. 그들의 출중한 외모는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파란 머리에 차분한 분위기를 내뿜는 자가 먼저 입을 뗐다.




“아직인가.”




함께 있던 장발을 한 이에게 질문하면서도 주변을 천천히 두리번거렸다. 장발을 한 이가 갈색 머리칼을 날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섰다.




“그러게- 이렇게 발이 늦어서는 놀아줄 맛이 안 나는데.“




그가 비꼬는 말투로 대답을 하며 빙글- 한 바퀴 돌았다. 언뜻 보면 장난스러운 얼굴이지만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비소 지으면 드러나는 송곳니가 날카로웠다. 파란 머리가 의기양양하게 콧노래를 부르는 동생을 무심하게 쳐다보곤 다시 복잡하게 얽혀서 검문소를 지나는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정하게 굴러가던 눈알이 어느 한 시점에서 멈췄다. 동시에 갈색 머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란 머리의 표정이 섬뜩해졌다.


“아펠리아, 가자.”

“뭐? 온 거야?“

“다음 행선지로.”

“오케이! 아아, 카네스.”


바로 텔레포트를 준비하던 파란 머리의 카네스를 아펠리아가 붙잡았다.


“이렇게 가면 아쉬우니까- 먼저 가 있어.”


만사가 유흥거리인 아펠리아가 흐흥- 하고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런 그가 익숙한 카네스의 얼굴엔 별다른 반응이 없다. 다만 그의 유흥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마. 간다.”


그렇게 카네스는 아펠리아를 남기고 사라졌고 아펠리아의 금빛 눈동자는 흥에 겨워 일렁였다.


“자- 어디 한번 괴롭히러 가볼까. 으흥~”








*








꾀죄죄한 모습의 남성이 검문소 구석에 앉아서 입에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빨아들이면서 불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남자는 놀라 뒤로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아, 미안하게 됐네. 이 행성 검문소에 불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어서.”

“누, 누구십니까..! 왜 거기서…! 왜 내 라이터에서 사람이…!”


찬열이 백현을 안은 채로 라이터 불을 통해 행성 이동을 한 것이다. 백현이 찬열에게 어서 내려 달라며 채근했고 찬열이 백현을 살포시 내려주었다.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자네, 실내에서는 금연인 거 모르나? 아무튼 실례했네.”


찬열이 나자빠진 채로 뒤로 바닥을 짚고 계속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백현은 구겨진 옷을 툭툭- 털었다. 이 상황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백현아 가자.”

“예.”


그렇게 뒤돌아 유유히 떠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자는 여전히 입을 떡- 벌린 채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방까지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붉고 길었던 머리카락이 남자가 눈을 비비자 옅은 주황색에 단정한 짧은 머리로 바뀌었고 그가 입고 있던 신복도 흔한 인간의 복장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술에 빠져 살던 자신이 드디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백현이 행성 글리아의 신관이라는 것과 찬열이 프로테메스라는 것을 검문소 직원에게 증명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검문소를 나올 수 있었다.


“와…”


검문소에서 나오자 보이는 풍경에 백현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빛이 사라지고 프로테메스의 영향으로 온 세상이 붉게 물든 글리아와 달리 이곳 행성 ‘타르’는 모든 생물과 물건들이 각자의 색을 뚜렷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전경에 백현은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백현이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백현은 살면서 처음 지어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타르의 각양각색의 빛들이 비쳐서 반짝였고, 입은 동그랗게 벌어져서는 금방이라도 입꼬리가 활짝 올라갈 것 같았다. 그런 백현을 옆에서 바라보던 찬열은 자신이 보고 있는 다른 전경에 넋을 잃었다.


“프로테메스님…?

“…”

“프로테메스님!”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백현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미동 없는 찬열을 느낀 백현이 그를 재차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어…어? 그래. 불렀느냐?”

“예. 불렀죠.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으흠! 그래, 네 얼굴에 뭐가 잔뜩 묻어있구나."

“예? 뭐가 잔뜩씩이나..."


찬열의 말에 백현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고 손으로 얼굴 여기저기를 비볐다. 그 모습을 곤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한가득 품은 찬열이 먼저 뒤돌아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랑스러움.”


찬열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퍽 실없는 소리여서 작은 실소를 연발했다.


행성 ‘타르’의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영혼의 강뿐이었다. 겉보기에는 물을 떠 마시고 싶을 정도로 맑고 투명하지만 사실 이 강은 이미 생을 마친 인간의 영혼들이 그 생의 기억을 씻어내기 위해서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에는 이번 우주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모든 영혼의 전생이 담겨 있다.

찬열과 백현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배가 출렁이더니 뱃사공의 노 젓기에 따라 배가 강물에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 타르메스가 신전에 있다더군. 그자들의 행방은 신전에 가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그자들이 아직 이 행성에 있을까요…”

“있기를 바라야지. 없다면 그자들이 있는 곳까지 추적해서 가면 그만이야. 걱정말거라.”

“제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백현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다만 그자들을 찾는 것이 늦어질수록 행성 글리아의 신변이 위태로워 질겁니다..."

"하루도 빼지 않고 근무 태반인 네가 행성 걱정을 다 하는구나."

"지금 비꼬시는 겁니까? 그리고 닷새에 한 번 정도는 업무에 열중합니다!"

"그 닷새에 한 번을 제외한 날에는 레카의 발에 불이 나고 말이지."

"프로테메스님...!"

"하하- 농이다, 농이야. 하지만 행성 걱정은 하지 말아라. 이 몸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지 않느냐."


그의 장난에 백현이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예예- 그래서 걱정이죠. 아무리 어디에나 있으신 전지전능한 신이라곤 하나, 지금은 제한된 힘으로 현신 중이지 않습니까. 제 기력이 부족해서 만에 하나 프로테메스님께 해를 끼치기라도 한다면,"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냐?"


분명 뭔가를 기대하는 찬열의 눈빛을 본 백현은 아차, 싶었다. 말을 돌려야 했다.


"흠흠, 내내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네요."


백현이 배 한켠에 앉았다. 괜히 강을 바라보았다. 배가 투명한 강물을 가르며 물결을 만들어냈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 소리 위에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겹쳐졌다.


"프로테메스님도 앉으세요. 풍경이 참 좋네요."


항상 붉은 빛을 담았던 백현의 눈에 밝은 빛이 맴돌았다.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은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은 소름이 돋았다. 인간에게 있는 심장이 마치 자신에게도 있는 것처럼 가슴이 조여왔다.


"아름답구나."


백현이 살짝 미소 지었다. 느껴본 적 없는 바람과 풍경이 참 좋았다. 온몸의 힘이 풀렸다. 스스로를 옥죄여왔던 감정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늘 그랬듯 프로테메스를 제외한 모든 신은 백현의 불행을 소원하는 걸까. 한시도 백현의 평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윽,!"


갑자기 백현이 머리를 잡으며 통증을 호소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리를 찢고 갉아 먹는 느낌이었다.

찬열이 재빠르게 백현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백현이 눈도 뜨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그러냐 묻기도 전에 백현은 힘없이 찬열의 품으로 쓰러졌다.

찬열이 눈을 감고 신경을 세우니 미세하게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찬열이 온전한 힘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이 정도 흐름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느껴졌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힘의 만분의 일도 사용하지 못하니 신경 쓰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할 만했다.

찬열이 눈을 떴다.


'그자들의 짓인가.'


기운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빠져나왔던 검문소 근처였다. 인파가 몰려있었지만 마력을 내뿜고 있는 자는 단 한 명. 찬열관 눈이 마주치자 그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갈색 장발에 붉은 눈... 분명 그자들 중 하나다.'


 찬열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자를 바짝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찬열은 쓰러진 백현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자들은 기필코 잡아낼 것이다. 관여할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










쓰러진 백현을 데리고 찬열은 번화가에 위치한 가장 한적해 보이는 여관을 찾았다. 침대 두 개가 있는 방을 잡아서 들어갔다. 안고 있던 백현을 침대에 살포시 눕히고 이불도 가지런하게 덮어준 뒤 그 옆에 찬열도 조심스럽게 앉았다. 여전히 창밖은 밝았다. 눈 부신 빛이 백현의 얼굴에 드리웠다. 겨우 괴로움에서 벗어났던 백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찬열은 얼른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어주었고 백현의 표정도 이내 풀렸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쓰러진 이후 백현은 찬열의 품에서 한참 동안 끙끙댔다. 그 탓에 백현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찬열은 손바닥으로 귀엽게 솟아있는 백현의 이마에 채 마르지 못한 땀방울들 닦아 냈다. 차게 식은 수분들이 찬열의 살에 닿았다. 축축하고 차갑고.


'부드러워.'


천천히 꼼꼼하게 이마를 쓸어주고 나니 살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칼이 보였다.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백현을 옭아매고 있는 듯한 머리칼을 세세하게 다 떼어냈다.

한결 백현의 얼굴이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꾹 감고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던 것인지 속 눈썹이 젖어있다. 안쓰러웠다. 찬열이 양손으로 백현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엄지로 백현의 눈을 살살 쓸었다.

차마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찬열에게 백현은. 그를 만지는 이 순간이 참으로 벅찼다. 하지만 그의 괴로움을 핑계 삼아 사욕을 채우고 싶진 않았다. 그를 만질 수 없어도 괜찮다.


"네가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찬열이 말간 백현의 이마에 찬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소리 없는 입맞춤이었다. 그 후에 감고 있어도 예쁜 눈에 입 맞췄다. 왼쪽에 먼저, 그다음 오른쪽.

그제야 힘이 들어갔던 눈이 스르르 풀렸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여전히 가쁜 호흡을 연발하는 백현의 연분홍빛이 맴도는 입술에 닿았다. 조금 벌어져 있던 백현의 입술 덕에 그의 호흡이 찬열의 입안까지 침범했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찬열이 이를 악물었다. 제자리를 찾은 백현의 호흡과 달리 찬열의 감정이 요동쳤다. 여기서 더 이상 그와 함께 있다가는 수습 불가능한 일을 저질러 버릴 것 같았다. 인간들에게 자애로운 신 프로테메스가 유일하게 인내하지 못하는 찰나였다.


평안을 찾은 백현은 티 없이 맑았다.


"미치겠군..."


찬열은 힘들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백현이 덮고 있는 이불을 다시 한번 정리해준 뒤 커텐을 쳤다. 붉은색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방안은 흡사 행성글리아를 연상케 했다.

찬열이 따듯한 열기를 내뿜는 등불을 허공에 띄웠다. 금세 방안에 온기가 돌았다.


"다녀올게."


찬열이 색색- 숨을 쉬며 곤히 자는 백현의 얼굴을 다시 한번 쓸었다. 마지막으로 두 침대 사이에 있는 침병(가리개)까지 펼쳐놓고서야 여관방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행성 타르에서 가장 높은 곳, 신전이었다. 






*







어둡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엄청난 빛이 시야에 스며들었다. 감당하기도 벅찰 만큼 밝은 곳이었다. 모든 빛이 이곳을 관통할 것만 같이.


“날씨가 참 좋다, 백현아. 그치?”


눈이 부신 나머지 나에게 말을 거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뒤로는 푸르른 들판이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내가 답했다.


“이곳의 날씨가 안 좋다면 그것은 곧 우주 멸망의 징조이지. 그러니 날씨가 좋지 않을 순 없어. 물론 '날씨'랄 것도 없는 곳이지만.”

“그런 상투적인 의미 말고 백현아. 너와 있으니 날이 좋다는 의미야.”


나는 충분히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주 그런 뉘앙스의 말을 해댔으니까.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 인간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좋아한다던데.”

“그럼 인간과 살아. 나에게 이러지 말고.”


나의 단호하다 못해 상처받을 만한 대답에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또 미운 말- 이라며 내 입술을 검지로 톡, 건드릴 뿐이었다.


“뭐, 난 이런 백현이도 사랑하니까.”


시답잖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질겁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렇다고 해서 퉁명스럽게 구는 걸 바란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아 물론! 너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긴 하는데…!”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그가 재밌어서 잔뜩 힘주었던 얼굴을 풀고 푸하하- 웃었다. 활기차게 웃어 재끼는 나를 보고 그는 멋쩍어했고 나는 내내 즐거웠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그랬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아마 나 또한 그를 사랑한다.



그와 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암흑이 나를 덮었다. 빛이 가득한, 너무나도 좋았던 방금의 기억은 과연 역시 환상이었을까.

돌연히 수천, 수만 개의 삶이 내 머릿속을 침투했다.

전부 삶의 형태가 각기 달랐지만, 그 모든 삶의 주인은 단 한 명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과학자, 약제사 그리고 기사 등등... 직업을 가진 삶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분도 집도 없이 거리를 전전하며 빌어먹고 사는 거지 신세였다. 그렇다고 해서 직업을 가졌던 삶이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거지인 삶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가령 잘나가는 공작가의 가주였던 삶에서는 반역죄에 휘말려, 평생을 죽지 못해 연명했다.


그 외롭고 피폐한 삶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관통했다. 작은 벌레들이 뇌를 갉아 먹는 것만 같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벗어나려 할수록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벌레들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히던 삶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점점 곤두서있던 신경이 풀어지고 머릿속이 텅 비고 나서야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시초신들은 자신의 행성을 돌보는 것 이외에도 많은 일을 한다.  불의 신인 프로테메스는 온 우주의 불을 관장하고 창조의 신인 쿠슈모메스는 우주 내 생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파손되고 사라지는 것들을 재창조해낸다. 시초신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신은 각자의 업무가 있다.

그러므로 신계 내에 그 업무를 해결하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고 신들은 주로 그곳에 머문다. 프로테메스의 경우도 신계 내 업무 공간에서 일 처리를 하던 중, 어린 백현의 울음소리를 듣고 행성 글리아에 현신했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신들 거처는 신계이다. 하지만 오직 타르메스만이 우주내에서 업무를 처리한다. 영혼의 강을 자신의 행성에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찬열이 신전에 다다랐다. 이번엔 불을 통해 이동하는 힘을 쓰지 않고 이동했다.  아주 작은 힘이라도 백현에게는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전의 사제들은 곧바로 프로테메스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자신들이 모시는 신께 소식을 전하러 갔다. 찬열은 그를 기다리며 작은 테라스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일전에 백현과 지나왔던 영혼의 강이 보였다.


“영혼들을 곁에 두고 보는 그 고약한 취미는 여전하네…”


말의 대상 없이 허공에 말을 흘린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너의 그 집착도 여전하고 말이지?”


인기척도 없이 타르메스가 찬열의 혼잣말에 대답하며 그의 옆에 나타났다.  찬열은 아주 작게 흠칫 놀랐고 그의 물음엔 날카로운 시선으로 답했다.

그의 체구는 찬열보다 두 뼘쯤 작았다. 부스스한 중장발에 칠흑같이 어두운 흑발을 가진 그는 흡사 미소년으로 보였다. 키 차이 때문에 찬열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영혼의 강을 연상시키는 에메랄드빛으로 반짝 빛났다.


“그토록 대- 단한 사랑꾼이 이 먼 곳까지는 어쩐 일로 납셨을까?”

“심기를 잘도 건드리는 걸 보아하니 넌 타르메스가 맞군. 그 수척한 면상 덕에 타르로 위장한 마수인가 헷갈리던 참인데.”


찬열의 심드렁한 놀림에 타르메스는 발을 구르며 역정을 냈다.


“마… 마수? (마계의 괴물) 어찌 그런…! 이 찬란한 외모를 보고 그 끔찍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너와 내가 친의를 다진 벗이라곤 하나, 내 미모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

“도대체 너의 면상이 ‘미모’라고 칭할 만큼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아, 너를 ‘애정의 신’이라고 추켜세우는 이 행성의 창조물들이?”


행성에 해당 시초신이 현신하는 횟수로 ‘창조물을 향한 신들의 애정’이 판가름 된다. 간간이 얼굴을 비치는 신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아예 현신을 거부하는 신도 있다. 행성에 방문하는 일은 퍽, 귀찮고 번거로웠다. 행성이 멸망하지 않도록 관리하기만 하면 현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타르메스는 아예 행성에 기거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물과 자신의 행성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신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것을 타르메스 또한 즐기고 있었다. 자기애가 강한 신이었기에.

찬열의 유일한 벗이자 놀림 대상인 타르메스는 오늘도 찬열의 손에 놀아나는 중이었다. 타르메스는 씩씩대며 소리라도 지르려던 참이었지만 곧 이어지는 찬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과연 그들이 너의 권세를 달가워하기만 할까? 그들에겐 지배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가꾸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텐데 말이야. 인간은 신을 닮았지.”


하지만 역시 창조물의 입장에서는 신의 도움이 필요할 뿐 신의 간섭은 사양이었다. 프로테스만 해도 자신의 행성 프로테에서 도움을 요청할 때 빼고는 그곳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신이 아예 방문을 거부하는 행성은 인간들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서로 땅따먹기를 하며 신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행성을 지켜나가고 있기도 했다.


“신이 군림해있으면, 언젠가 신에게 창조물들이 대적하는 날이 올 거야. 적당히 그들의 입지를 내줘야 해. 타르 너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그들이 대적하는 날엔 이 행성이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찬열의 어투는 제자를 다그치는 스승 같았다. 타르메스는 신계에서 철이 없는 신으로 평가 되고 있긴했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성정은 상상력을 키우기에 좋았고 그런 점이 매번 영혼에게 새 삶을 부여하는 일에 적합했다.


“그만해, 프로테.”


타르메스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런 타르메스의 기죽은 아이같은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달려가 한 품에 안아버릴 것이다.


“흘러간 우주는 잊어야 해. 우린 신이잖아.”

“알아! 안다고! 하지만…!”


처음 우주가 창조 되었을 때의 관리자는 타르메스였다. 그리고 그 우주는 지난 네번의 우주 중에서 가장 빨리 멸망했다. 자신이 관리해야할 우주에 무심 했던 타르메스의 불찰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망쳐놓았던 Tdn… 에서도 나는 영혼들을 관리했어. 이미 소멸되고 없는 그들의 삶과 고통을 나는 다 기억한다고…”

“타르. 창조주인 우리는 창조물에게 사죄할 이유도 사면받을 필요도 없어.”

“그러는 너는! 너도 한 영혼에 매달려서 오늘도 여기에 찾아온 것 아니야?”


찬열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려고 들숨을 쉬었다가 그저 푹- 꺼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타르메스의 시선과 맞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 미안해 타르. 어째 너랑은 매번 말다툼만 하게 되는 것 같다. 내 유일한 벗이 또다시 괴롭지 않길. 괴로워도 아주 잠깐이길 바라는 마음뿐이야.”


그의 사과에 타르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지만 사실상 타르메스는 그가 자신을 해하려던 의도가 아님을 알았기에 풀 기분도 없었다. 이번 우주를 관장하는 신은 찬열이었고 그 때문에 그가 자신의 행성 멸망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했다.

타르메스가 찬열을 비라보던 시선을 획- 돌리며 말했다.

“간만에 만나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타르메스가 테라스를 벗어나 집무 책상에 다리를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 곧 사제들이 기도하러 올 시간이야.”

“그래. 내가 일전에 말했듯이. 행성 글리아가 위험해.”


찬열이 타르메스의 집무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침입자가 있었고 달아났어. 그리고 그자들이 달아난 곳이 바로 이곳, 행성 타르야.”

“그래. 그건 이미 서면으로 보고 했잖아. 나는 네가 이렇게 안달복달하는 이유를 듣고 싶은데? 이번에도... 역시 그 인간 때문인거지?”

“내 마법사가 불씨인 건 맞아. 한데, 그보다…”


찬열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행성 글리아가 멸망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 멸망은 우주 멸망의 시작일지도 모르고.”

“…?!”







*






타르메스와 긴 대화를 마친 찬열은 백현이 있을 여관을 향할 걸었다. 바깥에 나오니, 날이 어느새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의 찬열은타르메스와의 이야기를 회상했다.


'우선 그자들은 지금 이 행성에 없어.'

'과연...'

'알고 있던 거야?'

'검문소에서 나의 마법사가 공격을 당한 듯해. 그 힘의 줄기를 따라가 보니 마력이 느껴지는 자가 있었어.'

'그 때 잡지 않고 뭘한거야, 넌?'


쓰러졌던 백현의 모습을 떠올린 찬열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구겼다. 타르메스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앗 뜨거!- 라며 몸을 움츠렸다.


'아아- 알만하니 그만둬. 이러다가 내 귀한 사제들이 쓰러지겠어.'

'그자들의 행적은 찾을 수 있나?'

'그럼 그럼. 그 멍청한 자들이 친히 흔적을 남기고 갔지 뭐야.'

'부디 실수이길 바랐지만 역시. 그자들은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긴 거야. 글리아를침범했을 때도 위치 추적이 용이했지. 그자들은... 도대체 우릴 어디로 몰고 갈 셈이지?'

'흠... 하지만 그자들이 무얼 계획했든, 당할 프로테메스가 아니잖아? 시초신 중에서도 이인자인 너를 감히 누가,'

'마왕. 마계의 왕이라면 우주를 충분히 멸망시키고도 남지.'

'마왕?! 힘을 나누어 가진 신들과 달리, 힘을 나누지 않고 혼자서 전부 가진 마왕 놈이라면 가능한 가설이긴 하지만... 이미 자신의 마계 하나도 관리하기 벅찰 텐데... 게다가 그놈은 나사 하나 빠진 놈이라고 신계에 소문이 자자 하다고! 특히나 요즘엔 무슨 일인지 말없이 우주로 넘어오더니 어디 행성에 박혀서 뭘하는지 모르겠...! 아...! 그렇구나!'


타르메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서야 추악한 본능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지. 네 말대로 마계의 왕이 행성 한 곳에 그리 오랫동안 머문 일도 전례엔 없던 것이니까. 뭐, 어찌 되었건 나는 이제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나의 마법사가 깨어날 때가 됐어.'


찬열은 그대로 신전을 벗어났고 그런 찬열의 뒷모습을 보며 타르메스가 중얼거렸다.


'나사 하나 빠진 놈은 저기 있었네. 으휴-'


그렇게 타르메스와의 대화를 회상하다 보니 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것도 모르고 걷던 찬열은 곧 여관에 도착했다. 당장이라도 마왕을 죽이러 갈 기세인 찬열을 길에서 마주친 아이들이 엉엉 울어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생각에 몰두한 채로.

작은 여관에 들어서서 백현을 눕혀 놓았던 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건물이 온통 나무 재질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삐걱 소리가 나기에 발걸음도 조심해야 했다. 등치에 안 맞게 뒤꿈치를 올리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침병이 쳐져 있어서 백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으리라 예상한 찬열이 침병을 거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침병은 찬열의 손이 닿기도 전에 제쳐졌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주범이었다.


"오셨습니까."


눈을 감고 있는 백현을 마주하려던 찰나에도 기대감에 부풀었었는데. 정작 자신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는 그를 보게 되니, 이런저런 고민으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붕 떠올라서는 여기저기 뛰어댔다.


"깨어 있었느냐...!"

"예. 이제 막 정신이 들던 참입니다. 그자들의 행적은 알아내셨습니까?"


조금 더 백현과 일상적이고 심심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수척한 얼굴로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백현에게 지금 말을 돌렸다간 다신 자신을 안 볼 것 같았다. 그에 찬열도 본론부터 하자는 의미를 담아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알아냈지."

"아직 이 행성에 있습니까?"


찬열을 보자마자 '그자들'의 행적부터 물어본 것에 비해 백현의 목소리와 태도는 차분했다. 아마 그들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이미 느낀 것 같았다. 찬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제가 쓰러진 일에 그자들이 관여되어 있습니까? 대마법사인 제가 당할 정도라면 꽤 강한 자들인 것 같은데."

"그자들은 마인인 듯싶다. 너는 그자들의 정신공격에 당했고."

"마인이면... 마계에서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마계가... 존재하는 곳이었군요... "

"그래. 우리 신들은 마계와 우주가 얽히는 걸 원하지 않기에 마계에 대한 정보를 차단했지. 그러니 당연하게 백현이 너에겐 마계에 대한 지식도, 내성도 없고. 해서, 네가 쉽게 공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거야."


신이 관장하는 우주의 인간들에게 마법이란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다. 마계인과 계약을 맺어서 어둠의 마법을 쓰는 이들도 간혹 있지만 그자들은 이단으로 취급되어 발각 즉시 사형된다. 신들이 만든 우주에서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추앙한다는 것은 금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당초 마계의 존재를 가르치지 않는다. 


"애초에... 제가 당해낼 자들이 아니었군요..."


백현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본적 없던 어둠의 힘을 쓰기에 신의 가호를 받는 자들이 아닐 것이란 건 예상 하고 있었지만... 마계의 존재라니... 기력도 점점 바닥나는 제가 무슨 수로 그들을..."


쉽게 절망하던 백현이 아니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받아들인 사실이었고, 그들의 강력한 힘은 각오하고 출발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공격으로 인해 정신 상태가 심히 빈약해져 있었다. 아니, 그 일을 차치하고서도 그가 이제서야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몇십 년간 그 누구의 도움도 사랑도 받지 않고 거부해가며 홀로 강해지기만을 수련했으니까. 켜켜이 쌓였던 두려움이 오늘 무너진 것뿐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의 모습에 찬열은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분명 통각이 없는 신임에도.

찬열은 되레 활짝 웃어 보였다. 말을 돌릴만한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잘 알고 있군! 그대의 기력이 나를 이곳에 유지하기엔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말이야."

"... 예. 너무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곡을 찌르는 찬열의 말에 백현은 한층 더 어두운 얼굴을 했고 그런 그의 손을 찬열이 잡아채며 우렁차게 말했다.


"나가서 아주 맛있는 저녁을 해야겠구나!"

"예?"


백현이 당황한 얼굴로 찬열을 쳐다봤다.


"기력 회복엔 식사가 제격이지! 어서 나가자!"

"아, 아니! 갑자기 무슨...!"


찬열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백현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앞장 선 찬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그런 말도 안되게 밝은 그의 모습을 본 백현은 어이없으면서도 '참 그답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백현의 마음 한구석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언제나 참 신기한 존재였다.


"하루 세끼는 무조건 잘 먹이겠다 약조했건만 점심도 거르고 벌써 저녁이구나..."


저녁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시끌벅적한 저녁 거리를 걷던 찬열이 썩 아쉬워 하며 말했다.


"언제 누구와 그런 약조를 하셨습니까? 우선 저는 아닌데요."

"너와...! 약조를 하고 싶었던 나와 했다! 나 자신과!"

"그러시군요... 한데 저희 이렇게 계속 걸어야하나요? 아까일 때문인지 아직 피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여전히 찬열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손을 백현이 위로 들어올렸다.


"이 손이. 조금 불편해서요."

"...!"


찬열의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그리곤 미, 미리 말을 하지 그랬느냐...! 라고 하며 금세 손을 놓아주었다.


"뭐, 나름 좋았습니다."


이번엔 찬열의 낯빛이 아주 진하게 붉어졌다. '백현이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왔어...!' 따위의 감탄사를 속으로 줄줄이 읊어댔다. 그도그럴것이 백현은 어린시절 이후론 찬열의 행동에 '좋다'라는 말은 물론, 긍정의 표시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열이 어버버 하며 멈춰선 채로 입을 틀어막고 몸둘바를 몰라하던 사이에 백현은 어느새 열걸음이나 앞서가고 있었다. 옆에서 사라진 백현에, 정신이 든 찬열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며 외쳤다.


"뭐가 좋았다는 것이냐!? 왜 좋았다는 것이야?! 그래서 내가 좋다는 말인가??!"


앞서 가던 백현의 얼굴엔 이제 절망이 많이 거둬져있었다. 작게 웃기도 하는 모습이 그의 어린 시절과 겹쳐보였다.










*








"어디- 이곳 음식이 입에 맞느냐?"

"예. "

"다행이구나. 이 몸이 특별히 신전 사제들에게 이 행성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점을 알아내었지."

"예. "


찬열이 고개를 치켜들고 백현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찬열의 말에도 백현은 버섯 수프를 먹다 못해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고개를 박고선 들지 않았다. 거기다, 백현이 대화 맥락에 상관없이 '예'라고만 대답한다는 것은 이 상황이 심히 불편하다는 의미였다. 찬열은 그가 왜 그런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한데 맛있는 동시에 아주 유명하기도 한가보구나. "

"예."

"파리 새끼들이 무리 지어 윙윙대는 걸 보니 말이야."


찬열과 백현이 식사하고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 식탁으로 찬열이 시선을 돌렸다. 험상궂게 생긴 사내 한 명과 비실거려 보이는 남성 여럿이 술을 마시며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조금 전에 무리 중 한 명이 꼬마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온 이후부터는 백현이 고개를 전혀 들지 않았다.

꼬마 아이의 행색은 보잘것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상·하의는 그의 말라비틀어진 몸조차 겨우 가려주고 있었다. 이 행성 타르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먼지에 절여져 색이 바래 보였다. 멍들고 까져 성한 곳이 없는 피부는 새하얬다.


"야, 이름이 뭐냐?"

"..."

"이름 뭐냐고 새끼야. 어른이 물어보면 재깍재깍 대답해야지?"


험상궂게 생긴, 무리의 우두머리쯤 돼 보이는 남자가 꼬마에게 얼굴을 들이대면서 말했다. 꼬마는 대답하기는커녕 독기 품은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꼬마의 눈동자는 새빨간 핏빛이었다.


"씨발 어디 그 더러운 눈깔을 놀려."


남자가 꼬마의 눈에 침을 뱉었다. 꼬마는 굴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의 눈에 살의가 보였다. 그 눈빛에 아주 잠시 위축된 사내는 씩씩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역시 천한 것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가 꼬마의 얼굴을 향해 손을 세차게 내렸다. 꼬마도 이번엔 반사적으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얼굴에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 어-?!???"


꼬마를 타격했어야 할 그의 손이 그의 부하로 보이는 비실비실한 이에게 향했다. 그리곤 그대로 뺨을 갈겼다.

그 광경은 백현도 보고 있었다. 백현이 놀란 눈으로 찬열에게 작게 언질했다.


"프로테메스님...!"


찬열은 그런 백현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권선징악 아니더냐. 저놈은 악에 속할 것이 분명하니 선하디 선한 이 몸이 나서서 징벌을 내려줘야지."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혹여 프로테메스님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걱정 마라 저놈 하나 처리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니."


찬열이 백현에게 왼쪽 눈을 깜빡- 하고 윙크로 자신만 믿으라 신호를 보냈다. 백현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이내 찬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사실 제가 그자들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부러 시선을 주지 않은 것인데... 프로테메스님께서 나서 주신다면 죽이진 않을 수 있겠죠."

"역시 나의 마법사... 무섭군. 앞으로 내가 더 잘해야겠어..."

"대신 제가 저 우락부락한 놈을 맡겠습니다. 신께서는 그 앞에 비실한 놈으로 하시죠."


그렇게 찬열과 백현의, 아니. 우락부락한 놈과 비실거린 놈의 타의적 대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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