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도 일어날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내겐 네가 그랬다.


다가오는 이별을 모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점점 화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늘었고, 대화는 줄었다. 소리를 지르고 싸우다가 나는 화가 나서, 너는 서러워서 울었다. 지친 네 눈은 내 눈을 닮아있었다. 그저 시간 문제 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느린 이별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난 차가웠고, 넌 뜨거웠다. 우리는 미지근한 타협점을 찾지 못해 헤어졌다.

그래. 우리 참, 징했지.

술에 취해 석민을 찾은 날. 그가 그러더라. 사랑은 지극히 주관적인 거라서, 아무리 네 방식대로 사랑해줘도 상대방이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닌거야, 라고. 

넌 날. 사랑이라고 느꼈으려나.


 -


난 네가 떠나고 헤어진 연인들이 무릇 그렇듯 집 정리를 했다.  네가 기념일 마다 서툴게 건넸던 편지들. 생일날 선물해준 스웨터. 가끔 기분 내킬 때 사다줬던 마른 장미들을 버렸다. 반지도 빼냈다. 테두리 안쪽에 박아넣은 문구가 닳아 희미해져 있었다.


[ 그래도 사랑해 ]


우리는 반지를 맞추던 날에도 다퉜다. 하지만 사랑했다. 이제는 의미 없는 쇳덩이가 되어버린 반지. 

쓰레기를 한번 비우고 와선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폈다. 유리문은 군데군데 손가락으로 얼룩덜룩 했다. 


" 이거 봐, 민규야. 하트. "


유리문에 바싹 붙어,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너는 입김을 불더니 하얗게 김이 선 곳 위에 하트를 그려냈다. 가끔은 입술을 찍어내기도 했다. 그럼 나는 웃으며 입모양으로 사랑해. 라고 속삭였다.


" ... 사랑해. "


그 자국들을 천천히 매만지며 허공에 나직이 뱉어보다 쓴웃음이 터졌다. 담배를 지져끄면서는 유리문도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건조대 위 빨래를 걷어 갰다. 집안일엔 영 아니였던 너를 이끌고선 빨래 개는 법을 알려주던게 엊그제 같은데.


" 그렇게 개는게 아니라니까요 형... 팔을 안으로 접어야죠... "

" 니가 다 해줄건데 내가 알아서 뭐해. "


쌓인 설거지에도,


"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설거지 하자. "

" 싫어요 형 가위바위보 잘하잖아요. "


뚜껑이 잘 안 닫힌 치약에도,


" 아 형!!!!!!! 또 치약 뚜껑 막 닫았죠!!!!!!! 형은 세균 묻은 치약으로 양치하고 싶어요??? "


베란다에서도,

거실 소파 앞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침대 위에서도.


" ... 이지훈. "


나즈막이 널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 참지 못하고 양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준 물건은 모두 정리 했는데, 넌 아직 이곳에 가득했다. 우리가 가득한 이곳에 넌 날 혼자 두고 가버렸다. 집안 곳곳 너와의 기억은 참 징했고, 진했다. 


난 아직까지 추억 한가운데 있었다.



-

Fin.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 난 나침반 처럼 흔들렸다. | 정수경, 슬픔의 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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