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다 끝나고 책상에 앉아서 유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닦았다. 피곤하네.

우빈이 유하의 눈치를 살살 보며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하야, 미안한데 나 대신 단체 소개팅에 좀 나가 주라.”

“뭔 소리야. 나 그런 거 질색하는 거 알잖아.”

유하는 하기 싫어서 미간을 확 찌푸렸다. 우빈은 과에서 동훈 다음으로 친한 친구다. 우빈은 여자에게 관심이 많아서 자주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하고 소개팅에 자주 나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를 사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번 소개팅 주선자가 본인인데 갑자기 음식을 잘 못 먹어서 배탈이 났다고 했다. 도저히 못 갈 것 같아서 유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우빈이 냉정하게 거절하는 유하에게 두 손을 모아 흔들며 질척거렸다.

“그냥, 자리에만 앉아 있어. 머릿수 채우는 거 말이야. 너 여자 관심 없는 거 알아. 부탁이야. 다른 사람들 다 오늘 따라 바쁘데.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사람이야. 제발.”

우빈은 급기야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유하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소개팅 주선하는 것도 신용이 아주 중요해서 펑크내면 신용도가 하락해서 먹고살기 힘들다고 징징거렸다. 

유하는 너무 나가기 싫었다.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이런저런 온갖 핑계를 다 됐지만 찰거머리 우빈은 떨어지지 않았다. 유하는 평소에 우빈에게 자잘한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결국은 항복하고 들어주기로 했다.

우빈을 흘겨보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뭐…그냥 자리에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지? 나 말주변 없어서 말 별로 잘 못 해.”

“알아.”

우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헤벌쭉 웃었다.

 

*

 

유하는 소개팅을 하기로 한 카페로 나갔다. 나오기는 싫었지만 막상 나오니 가슴이 설렜다. 인생이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여기서 이상형을 만나게 될지도. 

듣던 대로 3대 3 미팅이었고 이미 미대 동기 2명이 와 있었다. 별로 친하지는 않고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우빈은 유하와는 달리 마당발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동기 한 명이 유하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유하야, 내가 이런 자리를 다 오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응. 뭐 그렇게 됐어.”

유하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대충 얼버무리며 구석 자리에 앉았다. 곧 여대생 3명이 들어왔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귓속말을 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며 수줍게 들어왔다. 두 명은 수수하고 평범해 보이는 타입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꽤 예쁘고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두 남자 동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하도 잠깐 시선을 줬다가 재빨리 거뒀다. 귀여운 스타일은 역시 눈이 갔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유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쭉 빨아들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눈치만 살폈다.

곧 동기 2명이 용기를 내서 서로 맞은 편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유하의 맞은 편에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가 앉았다. 유하는 그녀의 맑은 까만 눈을 보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전 한채린 이라고 해요. 국문학과 다녀요.”

“아…저는 미대생이고 김유하입니다.”

유하는 쑥쓰러워하며 인사를 했다. 낯가림이 있어서 처음 만나는 여자랑 인사하기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얼굴이 붉어졌다.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말을 안 걸면 예의 없는 것 같아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할 말을 생각했다. 생각보다 곤혹스럽네. 소개팅이라는 거 괜히 나왔다. 유하는 긴장해서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채린은 처음에는 말을 잘못하다가 곧 유하에게 평범한 질문 몇 가지를 했다. 날씨나 뉴스 이야기였다. 유하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단답형으로 답했다. 대화의 흐림이 계속 끊기고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몇 번 지나갔다.

그러다가 채린이 평소에 그림을 좋아했지만 재능이 없어서 그림을 잘 못 그렸다며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유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유하는 좋아하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라면 밤새도록 할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하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간간이 웃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귀엽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여자를 만나니 유하는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호기심이 잠깐 일었을 뿐이었다. 요즘 하루 종일 남자인 한결과 지내다 보니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렇게 대화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이래서 다들 소개팅을 하는 거구나. 소개팅을 다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유하는 채린이 수줍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

 

한결은 요즘 어렵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격투 게임 고수를 찾아서 기술을 전수 받고 있었다. 당연히 남자 일줄 알았던 고수는 미모의 여자였다. 유하가 고등학교 때 전국 1등을 했다는 말을 동훈에게 듣고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수를 찾은 것이었다. 여자는 꽤 높은 금액을 제시 했지만 한결은 바로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한결은 자존심 때문에 유하에게는 고수에게 과외받는 것을 들키기 싫었다. 몰래 집에서 좀 떨어진 카페에서 만나서 격투 게임의 비기를 전수 받았다. 오늘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한결은 고수의 말에 집중해서 수업을 듣다가 문득 유하가 카페로 들어오는 걸 보았다. 한결은 구석진 자리에 있어서 유하는 보지 못한 듯했다.

유하 선배가 누구 만나러 왔나 보네. 평소 같으면 학교나 집에서 작업을 하거나 소파에 누워서 피곤해 쩔어 자고 있어야 했다. 유하는 평소 부스스한 모습과 달랐다. 머리에 젤을 발라 멋을 내고 얼굴은 로션이라도 바른 듯 반들거렸다. 옷도 신경을 많이 쓴 듯 깔끔했다.

선배, 집에서 보던 모습이랑 달리 새롭네. 워낙 동안이라서 상큼한 미소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당연히 카페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은근히 유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바로 앞의 격투 게임 고수도 유하를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한결은 그 시선이 불쾌했다. 사람을 그러게 쳐다보면 무안하잖아요. 아니다. 단지, 여자들이 유하를 쳐다보는 게 싫었다. 저 선배가 저렇게 티 나게 꾸미고 여기 왜 들어온 거야.

설마 여자라도 만나러 온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에 배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한결은 최근 시간을 쪼개서 게임 연습하느라 유하에 대한 감시를 소흘했다. 유하 선배는 조금만…틈 만 줘도…. 어휴. 

한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탁. 탁.”

고수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결이 유하만 쳐다보고 있자 고수가 화를 내며 집중해달라고 말했다. 그래도 한결은 자꾸만 시선이 유하에게로 향했다.

유하는 어처구니없게도 촌스럽게 3대 3 소개팅을 하러 나온 것이었다. 한결은 충격에 멍했다.

뭐야, 여자 별로 관심 없는 듯 굴더니. 소개팅을 하네.

한결은 유하가 그동안 내숭 떤 것 같아서 배신감이 들었다.

게다가 소개팅에 나간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도 못했다. 같이 살면서 그런 말 안 해줘서 은근히 섭섭했다. 소개팅을 나간다고 했다면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든지 말렸을 것이다. 한결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입안이 말라서 차가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유하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마음에 든 듯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거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한결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서 불이 났다. 고수가 한결이 자신의 말에 집중을 안 하자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이 봐요. 한결 씨. 집중 좀 하세요. 이러면 비싼 수업료만 날려요. 시크릿 필살기 버튼 프린트로 정리해 놨으니 집에서 열심히 연습하셔야 해요.”

고수가 프린트를 내밀었다. 한결은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유하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까지 붉히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여자한테 관심 없다는 거 순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했다. 처음 만난 여자한테도 저렇게 푹 빠진 걸 보면. 한결은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한 사람을 보내니…. 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는구나. 에휴.

한결은 도저히 집중해서 수업을 들을 마음이 안 들었다.

“죄…죄송해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수업 여기 까지만 해주세요.”

한결이 고수를 먼저 보냈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결은 안절부절못했다. 불안했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도저히 두 사람을 계속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나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가자…. 여기 있어서 험한 꼴밖에 더 보겠냐.

한결은 한심하게 유하가 여자랑 만나며 히히덕 거리는 걸 보며 질투하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이 들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질투의 감정이 불쑥 들이닥칠지 누가 알았겠는가. 

유하를 작업실로 들였지만 그냥 같이 사는 동거인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유하는 한결이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한결은 눈을 질끈 감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갔다.

한결은 오자마자 소파에 가방을 휙 던지고 냉장고로 갔다. 맥주캔을 하나 꺼내서 벌컥 마셨다. 맥주의 탄산이 식도를 시원하게 자극했다.

“아…진짜 격투 게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네. 유하 선배, 오늘 늦게 들어올지도 모르겠네. 나도 이러고 있지 말고 여자나 사귀어 볼까?”

한결은 거실 창문 앞으로 가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한결을 놀리듯이 맑고 고왔다. 기분이 엿 같았다. 이런 꼴 보려고 유하를 작업실로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뫼뷔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질투의 감정에 지쳤다. 이제는 질투 안 할 만도 한데….

“휴우.”

한결이 한숨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문 앞에는 유하가 서 있었다.

“한결이 일찍 왔네. 오랜만이다. 요즘 주인님 얼굴 보기 힘들더라?”

유하가 기분이 좋은지 해맑게 웃었다. 새하얀 얼굴과 금발 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결은 요즘 그 망할 격투 게임 연습에 유하를 잘 챙기지 못했다. 그래도 기분과는 다르게 유하의 미소를 보면 늘 행복했다.

칫, 오늘도 예쁘네.

“안 그래도 맥주 먹고 싶었는데…. 나도 먹어야지.”

유하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캔을 하나 꺼내서 한결 옆에 앉았다.

“선배, 오늘 참 기분 좋아 보이네요. 좋은 일 있었나 봐요?”

한결이 입꼬리를 한쪽만 씨익 올리며 바람 피고 온 애인을 보는 듯이 싸한 눈빛으로 보았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좀 그럴 일이 있었지. 히힛.”

유하는 금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광대가 볼록 솟았다.

한결은 다 마신 맥주캔을 손에 힘을 줘 찌그러트렸다.

곧바로 냉장고로 가서 맥주캔을 하나 더 꺼내서 벌컥 마셨다. 한결은 유하랑 소개팅 때 만난 여자와 잘 된 것임을 직감했다.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격투 게임이니 뭐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냥 오늘 유하를 쫓아내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쪼들리면 여자 사귈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요즘 한결이 쥐 꼬리 만한 월세를 받고 든든하게 받쳐주니 유하의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걸지도 몰랐다. 치졸한 생각이었다. 최근 안정된 듯한 유하의 미소를 보며 행복했던 한결이었다. 한결도 이랬다 저랬다하는 자신의 마음이 싫었다.

한결은 맥주를 콸콸 마구 입안으로 부었다.

“너 한 번에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유하가 한결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뭐…. 별로.”

시큰둥한 한결이 유하를 쏘아보며 입가에 묻은 노란 액체를 손으로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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