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독이 든 스프 시나리오의 전개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강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시나리오를 뛰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수프













  벽과 바닥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정육면체의 방에서, 세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여자 하나와, 남자 둘. 셋 모두 본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닌 환자 옷을 닮은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옷은 넝마가 되기 직전으로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한 남자는 한참을 옷만 들여다보다 슬그머니 소매 끝을 매만졌다. 실밥이 뜯어지고 흘러내려 살갗을 간지럽혔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데?"


  "그게… 저도 잘……."


  여자는 화를 내며 상황을 따지고 들었고, 그에 대답하는 남자는 당황하며 할 말을 고르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다른 남자 하나는…….


  "여기 의자 위에 쪽지 두 개가 떨어져 있네."


  여상스러운 말투로 느긋하게 종이를 주워드는 남자, 로제리는 실밥이 뜯어져 헤진 소매를 걷으며 쪽지 하나를 다른 남자, 잭 웨이드에게 건넸다. 그에 온몸, 온 표정으로 불만을 표하던 여자, 스칼렛 로웬이 바닥을 거칠게 차고서 잭에게로 다가와 그 쪽지를 빼앗아 갔다. 두 번 정도 접힌 쪽지를 펼쳐 읽어가던 그의 표정이 잔뜩 구겨져 고운 얼굴이 한껏 험한 기세를 내뿜었다. 


  "이게 뭐야? 한 시간 안에 독 수프를 마셔라?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


  "일단 진정하시지 말입니다. 그게 다입니까?"


  스칼렛은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내뱉고 대답 대신 쪽지를 다시 잭에게 건넸다. 건네지는 쪽지를 받아 읽어내리는 잭의 표정 역시 구김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쪽지의 내용을 갱독하던 그는 그제서야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 넓지 않은 짙은 회색의 정육면체 모양의 방과, 각 벽마다 달려 있는 다른 모양의 문들. 그 재질마저 다 차이가 있었다. 모두 굳게 닫혀 있었지만, 잠금의 여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분간이 어려웠다. 다른 방들과 달리 어느 한 벽에만 쇠창살에 가까운 창문이 붙어 있어 안쪽을 살필 수 있었다. 그에 잭은 창가로 다가가 조심스레 안쪽을 살폈지만, 어두운 탓에 내부를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장님, 다른 쪽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한숨을 삼킨 잭은 방의 중앙으로 돌아오며 로제리를 바라봤지만, 남자는 시선을 위로한 채 전등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선은 분명하게 위를 향하고 있지만, 잭은 그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다고 확신했다. 첫 번째 이유는 여러 번 그와 행동하며 관찰했던 경험이 말해주는 직감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과하다 싶을 만큼 청각이 좋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단 사실이 이를 뒷받침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올려둔 시선을 내리지 않던 남자의 손에서 쪽지의 끝이 가볍게 짓눌려 구겨졌다.


  "대장님?"


  "아, 미안. 다른 쪽지는 이곳의 지도야.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수프 방, 북쪽은 조리실. 남쪽은 예배당. 서쪽은 서재. 동쪽은 하인의 방이라고 하는군." 


  "명령만 내려주시면……."


  "응? 별로 상관없지 않아? 지금 이곳은 능력이 전혀 써지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여기서 내가 제일 약하니까." 


  해맑기까지 한 태도로 웃으며 말한 그는 펼쳤던 쪽지, 아니 방의 작은 지도를 접어 테이블에 올려뒀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수프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수프 그릇을 들어 코를 가까이했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인다 싶더니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골몰하고, 천천히 팔을 더 들어 올려 제 입가에 수프 그릇의 끝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붉은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입술 너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아니 미쳤어?! 그게 뭐라고 벌써 마셔!"


  너무도 갑작스러웠으나, 너무도 자연스럽던 그 모습에 스칼렛이 뒤늦게 로제리의 멱살을 잡으며 뒤로 잡아당겼다. 일순 거칠었던 몸짓에 수프 그릇의 붉은 액체가 흘러넘쳐 바닥을 적시고, 들뜬 몇 방울이 허공에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다 하얀 옷들에 별처럼 수놓아졌다. 물론, 그 모습은 별보다는 추상화의 한 장르와 닮아 있었지만… 남자는 이끌린 시선을 눈꺼풀 뒤에 감추며 입에 들어온 것을 음미했다. 숨었던 흑백이 다시 자리했을 때에는 웃음기를 띠고 있었으며 그릇 안에 담긴 것과 닮은 붉은색이 아랫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지금 수프에는 독이 들어있지 않아.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독인 것 같군." 


  "그걸 왜 먹어서 확인해?" 


  "가장 빠르잖아? 어차피 먹어야 하는 건 독 수프니까, 독이 들어있다고 하면 더 좋고? 들어있지 않아도 상관할 필요는 없지. 아직은 따뜻하군. 시간이 더 경과하기 전에 독을 찾아볼까?"


  스칼렛은 잡은 멱살은 놓지 않은 채 기가 막히다는 듯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대체 뭐지? 뭐가 그리 좋다고 이렇게 실실 웃는 낯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혀를 차고서 밀듯이 남자의 멱살을 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릇이 또 흔들렸고, 남자는 수프를 더 흘리지 않으려 두 손을 이용해 그릇을 잡고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타고난 감각으로 수월하게 균형을 잡은 남자에게서 태연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안위가 아닌 수프에 대한 걱정을 읊었다. 뒤따라 오는 조리실에 예비용이 있을 것 같으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는 식의 말은 또다시 스칼렛의 신경을 긁어놨으나, 이미 남자의 성격에 적응을 마친 그는 화를 내는 대신 혀만 차고 조리실의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갔다. 사이에 낀 잭만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봤다. 


  로제리는 수프 그릇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전등을 올려다봤다. 잭 역시 그 시선을 따라 전등을 올려다봤으나 광원으로 인해 눈이 따가워 금세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시선은 느릿하게 떨어지고, 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칼렛이 들어간 방보다 왼쪽에 위치한 문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서재를 조사해 볼게. 이런 말을 하면 소령이 또 화를 내겠지만… 솔직히 지금 좀 흥미롭거든. 소령한테는 비밀이야. 대위는 하인의 방이란 것에 다녀와줄래?" 


  "네, 알겠습니다."


  잭은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눌러 참고, 등을 돌려 동쪽 벽에 위치한 문을 바라봤다. 철문으로 보이지만, 녹이 슬어있어 그다지 견고해 보이진 않았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정보만을 받아들여 내린 결론이었기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을 때에는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게 잠겨 있어 문은 열릴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힘으로 열어야 할 것 같은데… 잠시 뒤를 돌아 서재로 들어가는 로제리를 일별한 잭은 한 번 숨을 들이켜고 손에 힘을 줘 부술 듯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고,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내었다. 그에 잭은 또다시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까지 물에 잠긴 채로 숨을 쉬는 듯한 갑갑한 기분이었다. 


  신중하게 경계하듯 안쪽을 훔쳐보던 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눈썹 끝을 올리며 인상을 썼다. 가진 것이 없어 앞을 비출 수 없으니 막막했다. 결국 참았던 한숨을 내쉰 그는 망가진 문을 끌어당겨 대충 닫아두고, 서재의 방으로 향했다. 다른 곳에 불빛을 비출 만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선택지에는 조리실도 있었지만… 화가 난 스칼렛은 로제리보다 비위를 맞추기 몹시 지난해 꺼려졌다. 서재의 문은 하인의 방과는 달리 잠겨있지 않은 나무 문이었는지 활짝 열려 있었다. 예상대로 안쪽에서는 작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장님. 하인의 방은 빛이 조금도 없어서 안쪽을 살피기 어렵습니다. 뭔가 비출 게 필요해서……."


  서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불빛을 등지고 수많은 책장 아래에서 책 하나를 들고 있는 로제리의 모습이었다. 남자는 한 손에 들린 책이 아닌 자신의 다른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에는 뭔가가 묻어 있었는데,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인 건지 몹시도 까맣게 보였다. 


  "대장님?"


  "아, 대위. 뭐라고 했지?"


  "불빛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 이 양초를 들고 가."


  "그럼 이곳은요? 책을 읽으려면 불빛이 필요할 텐데 다 읽으셨습니까? 그리고… 손에 뭔가가 묻으셨는데."


  남자는 몸을 외틀어 들고 있던 책을 탁상 위에 올려뒀다. 그러고 다시 자신의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그리 새삼스럽지 않았던 잭은 잠시 뒷짐을 진 채 그가 마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자주 그랬다. 곧잘 자신만의 생각에 잠겼고, 침잠했으며,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얼마 안 있어 평상시와 같은 낯으로 웃으며 말을 걸어오곤 했다. 골몰한 후에 꺼내어지는 말들은 주로 그가 머릿속으로 정리한 내용들을 포함했지만, 그것이 남자의 모든 속내는 아닐 거라고, 잭은 짐작했다. 


  "달콤한 냄새가 나. 꽃의 꿀 같은 향… 검은 연꽃인 것 같군."


  "검은 연꽃? 꽃의 종류입니까?"


  "맹독이지." 


  그 말에 잭은 흠칫하며 뒷짐을 풀고 급하게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거리낌 없는 손길로 남자의 팔목을 붙잡고 맹독이 묻은 손을 그에게서 조금 떨어뜨렸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행동이었던 건지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행실을 자각하고 죄송합니다, 라고 소리 내어 내뱉었으나 팔목을 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평상시의 신중함과 달리 무작정 수프를 마셨던 것처럼 이 독 역시도 바로 입으로 가져가버릴까 노심초사한 것이었다. 상대가 생각이 미숙한 어린아이가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알지 못할 불안감이었고 제동 걸지 못할 조건적 반사였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닌데?"


  "아니, 그… 죄송합니다."


  "후후… 자네도 제법 웃기단 말이야. 양초를 들고 가." 


  뻣뻣한 몸짓으로 주춤, 남자의 팔목을 놓은 잭은 머쓱한 듯 시선만 좌우로 굴리고 양초를 집어 들었다. 독을 찾았으니, 어쨌든 첫 번째 목표는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남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로제리는 손에 묻은 검은 액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탁상에 손을 문질러 액체를 닦아내었다. 그에 의문을 가지고 쳐다만 보고 있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대답이나 해명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남자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고, 뭐라 할 말을 고르지 못했기에 잭 역시 무어라 반응하지 못한 채 양초를 들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저 남자는 대하기에 너무도 거북했다. 


  서재에서 나온 잭은 양초를 들고 다시 하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직 자신에게 내려진 부탁에 가까운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희미한 빛은 방 안쪽을 전부 밝혀줄 수는 없었지만 한 치의 앞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몇 걸음 정도 앞으로 걸어간 잭은 잠시 멈춰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자신의 발걸음 사이로 다른 소리가 섞여 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있었다. 자신의 발소리보다 조금 더 작았으며, 소리 사이의 간격이 더 잦았다. 보폭이 작은 것을 미루어보아 키가 훨씬 작은 아이로 추정되는 발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차 자신과 가까워져 잭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바로 코앞까지 왔다고 생각할 때쯤, 불빛 사이로 작고 하얀 발이 보였다.


  "……."


  나이는 한… 십 대 후반 정도는 되었을까, 무엇도 먹지 못한 듯 수척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마냥 동정하기엔 자신과 같은 옷이 분명함에도 붉은 것에 젖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저 색을 본다면 분명 피였다. 피에 젖은 옷이야 그는 너무도 익숙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녀의 한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너는… 누구지?"


  "……."


  "…말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하지 않는 거야?"


  던져진 질문에도 소녀는 잭을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차라리 확연한 악의가 더 나았다. 무언가 반응을 보인다면 그에 맞는 대처를 할 텐데. 올곧게 박히는 감정 없는 시선에 삐질, 땀이 흘렀다. 이런 상대는 거북했다. 시각적으로는 나이와 상태를 제외하면 굉장히 위협적인데, 제외했던 나이와 상태가 그것을 희석시켰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니, 바깥쪽이 말소리로 시끄러워진다. 스칼렛과 로제리가 무어라 대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 더 높은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스칼렛이 로제리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잭은 그 말소리를 듣고 있다가 한숨을 쉬고는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에 따라 소녀는 한 발자국씩 가까워져 따라오는 모습을 보였다. 


  "……?"


  위협적이진 않지만 알 수 없는 행동 양상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던 잭은 소녀에게 등을 보이지 않은 채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시선을 흘겨 중앙을 바라보자, 예상대로 두 사람이 일방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충 내용은 스칼렛이 조리실에서 시체를 찾았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그것도… 냄비에 들어있는 토막 난 시체를. 수프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되자 머리가 띵했다.


  "아, 진짜 뭐가 그렇게 태평해? 어? 나갈 생각이 있는 거야?" 


  "소령은 조금 더 진정하는 편이 좋겠어. 고혈압이 걱정되는군. 돌아가면 검사를 받아보는 건?"


  "아 없어, 그런 거!"


  그다지 유의미한 대화는 아니었다. 잭은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의 이목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 소녀를 가리켰다. 


  "그, 여기 좀 보시죠."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잭에게로 꽂혔다. 그건 그거대로 곤혹스러웠지만, 애써 목뒤로 삼켜 넘기며 잭은 자신이 확인한 사항을 말로써 전달하기 시작했다. 스칼렛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졌고, 로제리의 얼굴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잭의 근처에 붙어있을 뿐이었다. 손에 있는 권총의 총구가 누군가를 향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떨어질 기미 역시 보이지 않았다. 


  "아주 좋은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 좋은 걸 갖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저 총인가?"


  "그래, 총이 좋기는 하지. 일반인의 마법의 지팡이라고. 근데 그러면 뭐해? 쟤가 가지고 있잖아."


  "방의 이름이 하인의 방인 걸 보면, 저 아이는 우리의 말을 그대로 들어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내가 어떻게 알아?"


  남자는 웃으며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소녀의 키에 맞춰 몸을 낮춘 남자는 잠시 소녀를 빤히 바라봤다. 수척한 얼굴과 몸의 상태, 옷에 묻은 피의 양, 핏자국으로 유추되는 시간의 경과, 손에 들린 권총의 종류 따위를 살펴보던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에 들린 권총을 제게 주실 수 있나요?"


  다정한 음색이 끝나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스칼렛은 뭐야? 뭔데? 하는 소리와 함께 기웃거리며 소녀에게로 다가와 살폈고, 잭 역시 당황스럽다는 듯 소녀를 내려다봤다. 로제리만이 여유롭게 총을 받아들어 탄창을 열고 안에 든 총알의 개수를 확인했다. 6연발의 더블액션 리볼버로 총알은 쓰인 것 없이 모두 들어있었다. 


  "총을 쓴 것 같지는 않군. 그럼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방 하나인가."


  "… 아까 창으로 들여다봤을 땐 마찬가지로 어두워서 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이 잠겨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잠들어 있다는군. 그리고 독에 대한 자료도 함께. 문지기가 있는데 그는 싱싱한 것을 먹어야 없어진다고 했어."


  "뭐야, 그 말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소리잖아?"


  스칼렛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내리꽂혔다. 간단한 생각이었다. 제물이 필요한 방과,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정체 모를 소녀 하나. 소녀를 이용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심지어 총을 건네줄 정도로 복종적인 것으로 보면, 소녀의 자기 의사는 없는 것과 흡사할 만큼 흐릿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었다. 소녀를 제물로 바쳐 문지기를 없애고, 독에 대한 자료를 얻고 이곳에서 나간다. 짧고 간결하게 생각을 마친 스칼렛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소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 행동에 깜짝 놀란 잭이 이번에도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의 팔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다만, 성질이 나쁜 스칼렛은 로제리와 달리 바로 눈을 치뜨며 위협적으로 잭을 올려다봤다.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차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뭐, 정체도 모를 이 여자애를 동정하기라도 해? 얼른 이 상황을 정리하고 빠져나가야 할 것 아냐?" 


  스칼렛의 기세에 눌린 잭은 제대로 변명조차 하지 못했지만 잡은 팔목만은 놓지 않았다. 능력을 제외하고서, 순수한 근력으로만 따지자면 단연 잭이 셋 중 가장 우세했다. 다만 직급이 가장 아래였기에, 명령이 떨어진다면 그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 아득할 뿐이었다. 이것이 옳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단순한 도덕과 윤리에 기대기에는 자신의 발언권은 큰 힘을 가지지 못했으며, 정당한 사유가 되지도 못했다. 옳지 않다는 건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합의한 인간들의 법일 뿐이었기에.


  "뭐 다른 방법이 있어서 지금 이러는 거야? 아니면, 너를 집어넣어 줄까? 네가 들어갈래?"


  "…그건……."


  "못하지? 그럼 이거 놔. 명령 불복종으로 치부하기 전에." 


  명령이란 단어에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한탄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에 질려버렸다. 눈을 감으며 힘이 들어가는 턱관절에 안쪽에서 피 맛이 느껴질 때쯤, 그만. 하는 소리가 울렸다. 슬며시 눈을 떠 소리의 출처를 확인하자 한 손을 들어 올린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로제리는 웃는 낯으로 들어 올린 손을 움직여 리볼버의 총알을 하나씩 빼내어 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청량한 쇳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쓰다듬고 퍼져나갔다. 그중 하나가 바닥의 모난 부분에 걸렸는지 높게 튀어 올라 소녀가 있던 방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잠시 빼앗겼던 시선을 되돌리면 남자는 여전히 웃는 채였다. 


  "선택지가 있다는 건 괜찮은 일이야.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지.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정적인 범위에서 결론을 내리게 만들어." 


  모든 총알이 본래의 위치를 빠져나와 바닥을 굴러다녔고, 리볼버는 텅 비었다. 탄창이 결합되는 소리가 허공을 울리고 로제리는 다시 결합된 리볼버를 돌려보다 한차례 소녀에게 겨냥했다. 그리고 다음은 잭 웨이드. 그다음은 스칼렛 로웬. 총구가 차례대로 사람들을 향해 겨누어졌지만, 그 누구도 두렵다는 반응을 내비치진 않았다. 한 톨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남자의 의중과는 대조적으로 총 안에 탄창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켰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은 느릿하게 자신의 머리를 한 번 겨냥하는가 싶더니 팔을 내렸다. 태평하게 웃는 낯은 남자의 저의를 가렸다. 


  "말을 잘 듣는 하인과, 제물이 필요한 제단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둘을 연결 지을 거야. 누군가는 그것을 기껍게 받아들일 테고, 누군가는 도덕심에 제동이 걸리겠지. 지금 상황으로는 전자는 소령이고 후자는 대위야. 그렇지?"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근데 그래서 뭐?"


  로제리는 등을 돌려 가운데의 테이블 앞에 섰다. 아까보다 식었는지, 수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김은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수프 그릇 끝을 훑던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느 쪽도 잘못된 건 아냐… 상황은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흐리게 만들고, 절대적인 선이나 악은 애초에 없는 거니까. 하지만, 그 죄책감까지 굳이 우리가 짊어질 필요는 없지." 


  "그게 무슨……."


  "소령이 저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면, 대위는 분명 죄책감을 가질 거야. 우리가 살기 위해 상관도 없는 여자아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하지만, 우리가 저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면 저 아이를 제물로 준비해둔 자는? 상황을 만든 이는 따로 있는데 그에 따른 행동의 결과와 감정을 왜 우리가 떠맡아야 하지? 이런 소모적이기만 한 싸움까지 감내하면서 말이야." 


  몸을 돌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로제리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그는 편안한 자세로 또다시 수프 그릇 끝을 훑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유려히 손을 움직였다. 그 모양새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잭은 뒤늦게 자신이 아직도 스칼렛의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느릿하게 손을 떼어내며 사과를 읊조렸다. 숙여지는 고개 사이로 혀를 차는 스칼렛의 얼굴이 엿보였으나 애써 시선을 돌리며 뒷짐을 졌다. 소녀의 팔은 여전히 스칼렛에게 잡혀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겁에 질려 있었다.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자가 따로 있는데, 굳이 그 책임을 떠맡을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무언가를 희생하면서까지 얻을 지식도 없어."


  "아앙? 그럼 뭐 어쩌자고? 여기서 살 거야?"


  "우선은… 그 팔을 놔, 소령. 겁먹었잖아."


  그제야 스칼렛의 시선이 소녀의 얼굴에 닿았다. 겁을 집어먹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기분이 더럽다는 듯 소녀의 팔을 내던지듯 쳐내었다. 소녀는 벌벌 떨며 잭의 뒤로 가 작은 몸을 숨겼다. 잭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심장이 옥죄는 느낌을 받았으나 무어라 할 말은 없었다. 자신 역시 떳떳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모습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지 남자는 앉아있던 의자에 올라서며 한참을 바라보던 전등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전구를 잡아 돌렸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전구가 전등에서 떨어져 나오고 양초 끝에 매달린 불을 제외한 빛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스칼렛이 눈썹을 찡그리며 불만의 목소리를 내었다. 


  "뭐 하는 거야?"


  "여기, 이걸 봐."


  사뿐히 의자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온 로제리는 전구를 든 채로 잭과 스칼렛에게로 다가왔다. 양초의 불빛을 가까이하며 전구를 바라보자 안에 든 검은 액체가 확인되었다. 그것은 아까 남자의 손에 묻었던 것과 몹시 흡사해 보인다고, 잭은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흡사한 것이 맞을 것이었다. 전구를 좌우로 흔들며 액체를 기울이던 남자는 싱긋 웃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잖아? 그저 상황이 흥미로워서 늦장을 부렸을 뿐이야. 모처럼의 경험인데, 그냥 흘려버리긴 아깝잖아."


  "야. 한 대만 쳐도 되냐?"


  "곤란한데… 소령의 주먹은 너무 아파." 


  분을 삭이는 스칼렛의 작은 신음이 들렸다. 정말로 제 상관의 얼굴을 쳐버릴 수는 없었기에 힘이 들어간 주먹만 가련했다. 굳이 그것을 지적한 로제리는 스칼렛의 짜증을 뒤로하고 전구 안에 든 검은 액체를 수프에 흘려 넣었다. 붉은 액체에 검은 액체가 스며들고, 천천히 섞여 들었다. 아직 층을 만들며 서로를 탐색하던 액체들의 사교성을 격려하듯 남자는 그릇을 잡고 빙글, 돌렸고 몇 번 부대끼던 액체가 이내 완전히 혼합되며 짙어져갔다. 검붉은색이 되어 이제는 독 수프라고 칭해야 할 수프는 조금 식어 미적지근했다. 그릇을 든 채로 두 사람을 돌아본 남자가 말을 잇는다. 


  "자아… 그럼 내가 먼저 마셔 볼테니, 두 사람도 죽을 각오로 이 수프를 마셔. 알겠지?"


  "죽을 각오가 아니라 죽는 거 아냐?"


  "이론적으론 그렇지. 맹독이니까."


  "그냥 죽기만 하고 끝나면?"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지."


  나쁘거든!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왔다. 남자는 웃으며 수프를 마실 뿐이었다. 입술 새로 스며드는 검붉은색이 아까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남자를 제외한 두 사람은 그가 어떻게 저리 쉽게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만한 자기 확신이 있는 걸까? 웃음을 제외하고서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아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남자. 그가 독 수프를 마셨다. 


  어쨌든, 그다음은 두 사람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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