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8 2차로 퇴고 및 수정하였습니다.

*상/하로 나뉜 중단편입니다

*예쁜 제목을 지어주신 시타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루, 일어나 


바닷바람이 귓가에 낮게 속살거린다. 그 감촉이 제법 간지러워 게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나무색 눈이 몇 번 깜빡거리며 초점을 잡으려 노력한다.


[일어났어?]

"응... 좋은 아침 사토루."

[좋은 아침!]


나비의 날갯짓이 볼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것인지, 깜찍한 스킨십에 게토는 푸스스- 웃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모습을 정돈하고 나와 아침을 준비했다. 최근 들어 육류를 전혀 섭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덕분에 가볍게 토스트에 샐러드로 배를 채운 후, 캔버스 앞에 다시 앉았다. 어제 작업을 마쳤으니 오늘은 가볍게 그려볼 생각이었다. 


[오늘은 뭘 그릴 거야?]


사토루가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쪼르르 다가와 어깨에 턱을 괴고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속삭인다. 분명 처음에는 이렇게 붙임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단순한 낯가림이었는지, 최근 들어선 꽤 엉겨 붙는 바람에 게토의 심장은 매번 줄넘기하는 기분이었다. 지고한 존재와 접촉하는 것은 여전히 담력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사토루와의 접촉은 도무지 인간과 나누는 것 같지 않은 감각이라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표현하자면 그래, 봄날의 해로 데워진 바닷물이 타고 오르고 곱게 부서진 모래가 어깨 위에 떨어진다. 그러면 무기질적인 차가움도, 그렇다고 인간의 온기도 아닌 온도가 닿은 부분을 스치고 지나가, 심장이 내장을 짓뭉개듯이 떨어지는 것이다. 게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직 깨끗한 손으로 사토루를 밀어낸다.


"사토루, 떨어ㅈ- 윽!"


평소의 말투가 나오자마자 그를 뒤덮는 극심한 두통. 두근두근, 심장이 뇌의 자리를 대신한 듯이 두개골 안에서 박동한다. 마치 누군가 뇌만 쥐어짜고 있는 것 같았다. 말랑말랑한 것을 얇게 저며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뇌가 당장이라도 두개골을 뚫고 달아나는 듯한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는 손에 핏줄이 서고, 흰자위가 붉게 물든다. 게토는 자리에 주저앉아 이를 내리눌러 물었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어. 그러나 위에선 그를 조롱하듯 깔깔거리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버릇이 나빠 스구루. 나한테 그렇게 굴멸 안 되지.]


가쁜 숨을 내쉬는 게토의 모습에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를 가르치듯 속살거린다.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얼굴이 야살스레 웃으며 하고 차가운 손으로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봄날의 온기를 잃은 손길의 감촉은 차가운 비늘로 뒤덮인 뱀의 그것이라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먹잇감을 포착한 뱀이 느릿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듯이 그 손이 어루만지는 감각은 절대적인 포식자의 손아귀에 잡힌 듯이 경종을 울려댄다. 빨리 잘못을 빌어, 내 유일한 신도야. 그게 네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그의 사토루는 때때로 게토를 시험하듯이 손아귀에서 쥐고 흔들곤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게토 스구루는 현대인이었다. 비현실적인 존재에게 굴하기엔 그도 가오와 자존심이라는 게 존재했다. 이 관계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공간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소리쳤다.


"삐,진 것에도, 한계가, 있어! 장난, 치지마 사토루! 어서, 이,걸 풀어!"


그의 위에서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지더니 이윽고 머리를 쥐어 매던 고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와 동시에 핏줄이 터진 흰자위도, 머리를 거세게 부여잡아 점차 붉게 달아오르는 두피도 가라앉는다. 게토는 조여 매던 숨통을 천천히, 조심스레 풀었다.


[흥, 재미없긴.]


사람 하나 반쯤 죽여놓을 뻔하고 하는 게, 마치 장난이 통하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말이라니. 게토 스구루는 이마를 짚었다. 눈썹이 축 처진다. 이 천방지축의 아이를 어찌하지. 그의 사토루는 이런 곳에서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드러내곤 했다. 이러한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도 썩 정상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좋은 아침을 맞이한 것치곤 행복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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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첫 대면이야말로 서로가 가장 행복하던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를 인식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의 장르는 인상 깊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피날레였건만, 문제는 그 후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사토루의 말문이 트이면서부터였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던 사토루는 둘이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자, 미친 듯이 책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 나는 명확히 따지자면 사념체에 불과해. 내 본체는 오래전에 소실되었거든. 대지가 품기엔 너무 커서 바다 밑에 가라앉았지. 그중에 작은 조각들이 떠올라서 만들어진 게 네가 들렸던 섬이 아닐까 싶은데. 아 그거? 네가 본 건 내 힘의 남은 흔적일 뿐이야. 일개 인간한테는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제법 치명적이었을 텐데 용케도 살아남았네 스구루. 운이 좋았어. 나랑 파장이 잘 맞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뭐? 억울하다고? 어쩌겠어. 그러길래 누가 외딴 섬에 가래? 슬슬 익숙해지는 게 좋을거야. 우리 앞으로 평생 마주 보면서 살게 될 테니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명랑하게 설명해 주는 것과 달리 내용은 제법 비현실적인 것을 담고 있었다. 바다에서 태어난 거대한 존재가 힘을 뺏기고 다시 바다로 물러나 잠들어, 그 유해에서 부분이 떨어져 나와 수면 위로 올라오니, 그게 바로 게토가 들린 섬이라는 것이었다. 게토가 기절하기 직전에 마주 본 것은 사토루의 힘이었다.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것이라 게토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즉사해 썩어 대지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사토루는 산뜻하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게토가 그린 그림은?


[그러니까, 지금 내 모습은 내 힘을 네 뜻대로 해석한 결과라는 거지. 스구루는 따지자면 그 동굴에서 '나'를 본 게 아니야. 내 힘을 조금 맛봤을 뿐이지. 그걸 스구루의 뜻대로 해석한 모습이 바로 이 '사토루'님이라는 거지! 그게 저 심해에 잠든 내 의식과 통로가 되어서 내가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사토루가 그러니까 감사하도록 해! 하고 종알거리는 건 들리지도 않았다. 이제껏 상대방이 게토를 부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게토가 사토루를 불러왔다니. 무엇보다, 사토루의 말을 재해석해 보자면, 지금 그 모습은 게토의 이상형이나 다름없다는 뜻이 아닌가? 게토는 와하학! 하고 웃어대는 사토루를 힐끔 보다가 마른세수했다. 하아, 게토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제는, 문제가 그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마주해야 했다.


게토와 사토루는 공존해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게토를 흡사 자기 신도 취급하는 사토루는 잘 굽히려 드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더욱 힘들었다. 내가 왜? 날 부른 건 너라고? 너 말이야, 과거엔 너 같은 애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내가 스구루를 봐주는 거라고는 생각 못해? 등등... 사토루의 협박과 으름장과 투덜거림을 넘어서 몇 달의 갖은 고생 후에 둘은 정착점을 찾은 듯... 해 보였으나, 사토루는 간간이 신벌을 내리는 등의 이런 식으로 위험한 장난을 치곤 했다. 게토를 얼어 죽을 듯이 춥다가도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같이 뜨겁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사토루는 당장이라도 그 머리를 깨트려 그 뇌수로 만찬을 즐길 힘이 있었다.

더군다나 변덕스럽기론 고양이 저리 가라 할 정도라 게토는 사토루의 기준점과 선을 구분하는 것에 꽤나 애를 먹었다.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에 있어 사토루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 특히나 게토를 힘들게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껍질을 뒤집어쓴 괴물은 항상 다정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어서 종종 화를 내는 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분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함께 사는 기분은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사방에 지뢰가 깔린 것 같았다. 유리 조각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을 항시 느끼고 있었다. 결국 게토는 스트레스로 한번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건강 빼면 시체인 자신이... 제법 충격이었다. 왠지 사토루와 엮이고 나서는 좋은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사토루의 존재가 곁에 머무는 게 싫지 않은 것이 소름 끼쳤다. 정말,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미간을 짚으며 해결책을 고민하던 차에, 의외의 결론이 나타났다.


[인간이라는 건, 생각보다 약하구나.]


퇴원하고 돌아와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게토를 물끄러미 보던 사토루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차마 그걸 이제야 안거야? 라고 할 수 없어서 그저 허허실실 웃으면서 그럼 다음부턴 살살해줘~ 라고 웃어넘기는 것이 다였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 밑이 퀭하니, 파여있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아이러니한 점은 실제로 그게 먹혔다는 것에 있었다. 사토루는 이제 3번 변덕 부릴 것을 1번으로 줄일 줄 안다. 스구루가 입원해서 집이 비면 심심하니까- 라던가 매번 고통에 바닥을 뒹굴던 게토도 이제 사토루식 '벌'에 제법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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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전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게토 씨 작품전은 언제나 인기가 있으니 큰 걱정 없이 작품에만 전념하셔도 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뇨, 그건 저희가 할 말이죠. 이만큼 유명해지셨으면 계약한 업체를 바꿀만한데도..."


플래너의 경쾌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게토는 그게 다소 고통스러워 구겨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펴고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토루와 만나고 나서는 서서히 오감이 예민해져 가는 것 같았다. 범인이던 게토엔 과한 자극이라, 덕분이 팔자에 없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고 있어 이렇게 작품 관리자와 이야기를 따로 해야 할 때만 간간이 나오는 것이 다였다.

건물을 나온 게토는 5월임에도 살갗에 닿는 해가 다소 따갑다고 생각하며 옆 동네 신주쿠에 있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토루의 요구였다. TV에서 봤어, 케이크 맛집이래. 야무지게 메뉴까지 손에 쥐여준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게토의 몸 상태가 어떻든 그것은 어지간히 아픈 게 아니라면 사토루의 고려 대상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외출할 때마다 달콤한 스위츠들을 사 가는 것 또한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게토는 사토루와 함께한 시간을 손가락으로 세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된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만난 관리자도 하하 웃으면서 어째 게토씨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젊어진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마냥 듣기 좋은 소리인 줄 알았는데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게토는 유명한 스위츠 샵에 줄을 서면서 창에 비친 자신을 훑어보았다. 딱히 자기 얼굴을 인식하면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야 자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절대 제 나이대로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단순한 동안을 벗어났다는 의미다. 마치, 시간이 그대로 게토만 피해 간 것 같았다. 이 역시 사토루의 영향일 테지.

게토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있나. 상당히 체념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총 2시간을 기다려 구매한 케이크는 총 세 가지였다. 5월의 제철 과일을 활용한 케이크 집이라 시즌마다 메뉴가 달라진다고 들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다 게토 눈엔 달콤하기만 한 음식들이었다. 노란 망고가 조각나 시트 위에 가볍게 얹어진 망고 시폰케이크, 바삭하게 구워진 과자 위에 슈가 코팅되어 반짝이는 앵두로 장식된 앵두 타르트, 정석적이지만 빵에 찻잎 알갱이들이 콕콕 박힌 딸기 얼그레이 쇼트케이크. 누가 보면 군침을 흘릴만한 외관을 뽐내는 것들이었지만 최근 식욕마저 감퇴한 게토엔 크게 와닿지 않는 비주얼이었다. 후, 한숨을 내쉬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렇게 다양한 조각 케이크를 사 들고 귀가하는 길. 집에 거의 다 다다랐는데, 누군가 자기 어깨를 강하게 치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케이크 상자를 움켜잡아 케이크는 무사했지만, 어깨는 얼얼한 것이 나중에 꽤나 큰 멍이 들 것 같았다. 허 참, 이게 무슨 일이람. 아차, 케이크. 서둘러 상자 안을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내용물엔 충격이 크게 영향을 미치진 못한 듯해 보였다. 게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케이크 상자를 고쳐 안고 발걸음을 마저 움직였다. 이미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은 게토의 뇌리에서 자리를 잃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점점 고개를 떨어트리는 해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음영 졌다. 마치 그 자리에서 고정된 듯.

-혹은, 역행하듯이.


"나 왔어."

[케이크는? 사 왔어? 케이크!]

"이젠 나보다 케이크를 먼저 찾는 거야? 이거 조금 서운한데?"


하나도 서운하지 않은 얼굴로 그와 상반되는 내용을 담으며 안전하게 공수해 온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상자를 받아든 사토루가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케이크~ 케이크~]

"케이크가 그렇게 좋아?"

[아무렴, 인간들도 참 대단하다니까? 어떻게 그 작고 하찮은 사탕수수에서 이런 걸 만들어내는지. 비루먹은 돼지고기보단 달디단 케이크가 낫지.]


이젠 제법 집안 물건의 위치도 외운 사토루가 스스로 천장에서 접시와 포크를 꺼내왔다. 처음에는 평소에 게토가 해주는 음식들은 입에 대지 않으면서 케이크는 꼭 먹어보는 것이 서운했건만 이젠 그저 행복한 표정으로 무언갈 먹는 사토루가 기쁘기만 하다. 예리하게 찔러들어오는 해를 헤쳐 나가 케이크를 사 온 노력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사토루는 마저 먹어."


눈을 은근하게 흘기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느끼면 조금 곤란한 걸까. 게토는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 포도는 안 사 왔네?]


접시를 꺼내고 각 케이크를 나열하다가 발견한 케이크의 부재에 사토루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포도 케이크 기대했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함께.


"하지만 사토루, 포도 싫어하잖니."

[내가 포도를 싫어해?]


아닌가? 게토는 최근 사토루에게 먹인 케이크들의 기억을 잠시 되짚어보았다. 맞는데.


"내가 지금까지 사 온 케이크 중에서 유일하게 다 먹지 않은 건 포도뿐이라서 그런 줄 알았어. 미안해 혹시 나중에 다시 사 올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게토는 혹시나 삐진 건 아닌지 사토루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발견한 것이라곤, 그의 어리광쟁이는 사실 삐진 게 아니라는 사실과 왠지 모르게 생각에 잠겨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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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구루~ 우리도 여행가자!]


최근 들어 사토루의 칭얼거림이 늘었다. 티비에서 바다를 본 이후로 자꾸 바다에 가자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자꾸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말릴 힘이 게토에겐 없었다. 외관적으론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게토는 이 관계에 있어 철저한 약자였다. 그것이 육체적이던, 심리적이던.

하지만 관계의 주도권에서 벗어나, 사토루가 무릎 위에 몸을 길게 늘어트리고 그 혜성이 빛나는 벽안을 반짝거리면 게토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상대를 이렇게 매혹하는 얼굴이 살아 움직이면서 종알거리면 당해낼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피그말리온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게토는 한숨을 삼켜냈다.

딱히 연애하는데 상대방 얼굴이 큰 영향을 주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토루의 살짝 내리뜬 벽안과 슬적 자기주장을 하듯 삐져나온 하는 연분홍빛 입술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이성이 있었다. 저 얼굴에 홀려 'Mirage' 시리즈를 그려온 것도 몇 년이다. 밀려오는 인터뷰 앞에서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도 몇 년. 이쯤 되면 얼굴에 익숙해질 법도한데 게토는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는 대체 왜 가고 싶은 건데? "

[비~밀!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게토는 사토루의 씨익 웃는 모습에서 바다를 찾는다. 짭조롬한 바다의 내음과 귓가를 매우는 시원한 소리, 그리고 쏟아진 유리 파편처럼 빛나는 해변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하고 게토 앞에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생각."


꺄르르, 낭창하게 울리는 소리가 방 안을 휘젓는다. 조각상이 살아움직이는 것 같이 이질감이 들면서도 주체하지 못하는 생동력이 느껴진다.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던 게토는 문득 깔깔 웃어대는 사토루의 눈에서 다정이 엿보인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그 자아낸 표정이 아니라, 애정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어느새 웃음이 멎은 사토루에게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서운함과 허전함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스구루는 가끔보면 말을 참 예쁘게 할 때가 있어. 그래도 이번엔 못 넘어가줘.]


따스한 오후의 햇빛이 들던 거실이 단숨에 냉각하기 시작했다. 사토루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게토는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사토루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지 코끝을 간질이던 바다 내음이 단숨에 후각을 치고 들어왔다. 거친 파도 소리가 게토를 짓누른다. 일개 필멸자 앞에서 신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성이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인간, 날 바다에 대려가도록 해.]


그는 그새 고압적인 얼굴을 만들어냈다. 권태와 권위가 그을음처럼 사토루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게토의 거대한 존재는 당장이라도 게토와 함께 늙어갈 것 같은 남자의 모습을 하다가, 신의 얼굴을 뒤집어쓴다. 그것은 둘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 격차가 무척이나 숨 막히게 다가왔다. 그것은 너는 그와 영원히 평행한 직선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 내리는 선고였다. 결국 게토 스구루는, 해변가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모래사장 속 알갱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불안과 슬픔이 흔들 다리처럼 휘청인다.


"지금까지 나가고 싶다는 말은 한 적 없었잖아. 왜 지금에서야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 거야?"

[...울지마 스구루. 이유는 너도 알고 있잖아.]


TV에서 봤어. 인간들은 위로를 이렇게 한다지? Kiss to make it better!


살풋 눈을 내리 깐 사토루가 물을 손에 담듯, 게토의 얼굴을 감쌌다. 행위를 인지하기도 전에 이마에 부드러운 게 살짝 내려앉는다. 그것은 아기새의 어설픈 날갯짓과 비슷한 향을 풍겼다. 찡긋, 윙크하는 사토루는 다시 필멸자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도 도로 다정의 색을 띤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발톱을 숨기는 맹수처럼, 신의 권위는 그 흔적을 감췄다.

게토는 식도로부터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뇌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이성이 오작동을 일으키고 흘러넘치는 감정이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흔들리는 이성과 넘쳐나는 감정 속에서 게토는 속절없이 휩쓸렸다. 오감이 펭글펭글 돌아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토루와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서로의 점막을 부대끼고, 혀를 뒤섞는다. 사랑이라는 정열적인 색보다는 조금 더 삭막하고 드라이한 키스였다. 더, 더 원해. 욕망이 단숨에 불어났다. 그러나 게토는 무미건조한 사토루의 표정에 배 속에서 들끓는 탐욕을 식혀야 했다. 이 입맞춤은 오직 게토만을 위한 사토루의 작은 배려였기 때문에...

매정하게 타액 하나 흘리지 않고 두 입술이 떨어졌다. 얄쌍한 관용에 입술을 살포시 누른 후 게토는 서글프게 속삭였다.


"나를 어디까지 봐줄 셈인 거야 사토루."


이러면 자꾸 선을 넘게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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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둘은 새벽 열차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사토루는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게토는 혼자서 두 명분의 자리를 차지한 놈팡이가 되어야 했다. 기차 특유의 무게감 있는 공기가 둘을 감쌌다. 버건디 색의 가죽으로 마감 처리가 된 의자에 앉아 보자기로 곱게 싼 사토루의 그림을 옆에 세워뒀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열차 속, 사토루는 게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바다 거품 같은 백색의 머리카락이 사르륵사르륵 게토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새벽이라 아무도 없는 기차간에서 단둘이 앉아있는 기분은, 실로 황홀했다. 봐, 사토루, 세상에 우리 둘밖에 남지 않은 거 같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스구루.


실실 웃다가, 창밖을 내다봤다. 도란도란 주고받던 그의 눈에 비치는 건 게토 스구루, 자신뿐이었다. 숨이 턱 막힌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에게 혼나길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무형의 추로 배가 꾹, 하고 짓눌렸다. 천 마리의 나비가 게토의 내장을 마구 휘젓는다. 당장이라도 피를 쏟을 것 같은 감각에 그가 입을 짓이겼다. 게토의 내면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열차에 단둘이 앉아있다는 사실만으로 현실에서도 도피하려는 그의 태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현실을 직시해 게토 스구루, 지금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지. 넌 언제나 해냈잖아. 그의 이성이 소리쳤다. 무릎을 꿇고 빌어볼까, 눈물이라도 짜내볼까, 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면 들어는 줄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걘 잡혀줄 것 같지 않아. 그의 감정이 비명 지르듯 반론한다. 그 애는 도무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고운 모래를 아무리 쥐어봐도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과 같다. 사토루는 내 곁에 '머물러주는' 것이지, 내가 사토루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니니까.

울컥 올라오는 한숨을 한탄을 용매 삼아 삼켜낸다. 게토 스크루의 바다는 바로 옆에 있는데 너는 대체 어딜 간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토와 사토루가 탄 열차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조금만 천천히, 우회해서 가지, 쓸데없이 빠르기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게토는 애꿎은 기차의 올곧음을 탓했다.

질질 끌리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기차역 밖으로 나오니 겨울 바다의 매서운 바람이 게토를 강타했다. 한여름의 그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맡던 그 바다 내음이 느껴지지 않아 게토는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곧바로 쿨럭이며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 제법 바보 같은 짓이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사토루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


게토의 이런 애절한 마음에 대해서 무지한 얼굴로 사토루는 그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척척, 그의 발걸음에 망설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게토 스구루의 유일한 신을 지상에 묶어둘 수 있는 끈은 어디로 갔는가? 애절한 신도의 마음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들려도 무시하는 것인지, 긴장과 결의로 빛나는 벽안이 바다를 담았다. 세상이 게토 스구루와 사토루를 두고 유리되기 시작한다. 배경에서 파도치는 바다가 흐릿해진다. 파도 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무대 위에는 게토와 고죠, 단둘만이 남아 이 촌극을 이어간다. 간다고 할 때 시원하게 놔주면 되는 것을, 구질구질하게 붙잡고자 애쓰고 있었다. 


"가지 마."


파리하게 질린 게토가 외쳤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도무지 나오지 않아서, 결국 내뱉은 말은 '가지 마' 이 한 단어뿐이었다. 다양한 우울함이 공존한다. 애원이 아직 동이 트기 전의 바다에서 음울하게 메아리쳤다. 그 후로 봇물이 터지듯 말이 두서없이 나왔다. 슬픔의 바다가 범람하여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있잖아, 나 너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난 아직도 네가 포도 케이크를 좋아하는지도,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제발 알려줘 사토루. 우리는 왜 이렇게 끝나야 하는 거야? 이게 최선이었니?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게 어디 있어. 반칙이야 사토루, 정말 반칙이야. 넌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어. 그럴 바에... 차라리, 차라리,

-나도 데려가. 나도 데려가 줘.


불현듯 깨닫는다. 아, 사토루가 내게 와줬듯이, 나도 사토루를 따라가면 되는 거구나.


오래된 목재를 담은 눈이 크게 뜨인다. 자리에 묶여 움직일 수 없던 몸이 그제야 다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가죽 부츠 아래 모래가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그제야 들려왔다. 싸아- 파도 소리가 그를 부추긴다. 어서! 그를 쫓아가! 붙잡아! 그리고 절망에 빠져버리라지! 그러거나 말거나 게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보폭으로 걸아가 사토루의 손을 쥐었다.


"나도 데려가."


동이 트기 시작한다.


푸르죽죽한 해변을 정열의 색으로 덧칠한다. 다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것을 느꼈다.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되어 있던 사토루의 얼굴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빙산 속, 파묻혀있던 애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게토 스구루가 익히 아는 사토루의 얼굴이었다. 


[그러지 마.]


제발, 이라는 뒷말을 삼켜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은 제 속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더욱이 확신을 가지고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데려가. 강인하지만 부드럽게.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와 같은 다정함이다. 너라면, 그 어디라도 좋아. 나를 데려가 줘. 

인간들이란! 이 얼마나 아둔하고 사랑스러운 자태인지. 사토루는 눈을 내리깔며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 위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는 인간도, 신도 알고 있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해. 내가 지금 스구루에게 어떤 선의를 베풀어주고 있는지 너는 모르고 있어.]

"몰라도 돼. 괜찮아."

[분명히 후회할 거야.]

"후회하지 않아. 분명히, 사토루와 함께라면."

[정말 바보 같아...]


마침내, 통이 튼다. 슬픔, 비애, 절망과 상실로 점철된 바다가 그 어둠을 씻어냈다. 바다 내음이 다시 게토의 후각을 살랑이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부풀어 오른다. 행복과 경애를 담아, 게토는 하얗고 둥그런 이마에 진득하게 입술을 붙였다. 


-그러게, 너와 함께 있으면 정말 내가 바보 천지라도 되는 느낌이야.





<사람을 찾습니다>

성 명: 게토 스구루 - 夏油 傑 (37)

인상착의: 185에 키가 크고 근육이 있는 체형임.

20XX년 12월 24일 새벽 3시 이후, XX역 근처 오키나와 해변에서 실종되었습니다. 

사건해결에 결정적인 제보나 역할을 해주시는 분께는 사례를 약속합니다. 

연락처: X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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