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릭스에게 고백을 한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그건 반쯤은 계획이었고 반쯤은 충동이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고백해야지. 이 십 대의 마지막 가을이 끝나기 전에. 그런 다짐을 하고선 단풍나무 밑에서 책을 읽던 걔한테 무작정 고백했었다.


-나 너 좋아해. 네가 괜찮다면 나랑 사귀지 않을래?


살면서 했던 고백 중에 제일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었다. 국어책이냐? 제가 뱉고도 아차 싶었다. 이필릭스는 멋대가리라곤 요만큼도 없는 고백에 멍하니 저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가만히. 한참이나 민망할 정도로 아무 미동이 없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가타부타 말이라도 해달라 하려는 순간에, 딱 그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그럼 너, 나랑 섹스하고 싶어?


그 말을 하던 순간의 이필릭스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순수함의 아이콘 입에서 그런 타이밍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해봤는데. 그런데 더 웃긴 건 황현진 저 자신이었다.


-어, 어? 응….


응이라고. 그렇게 답싹 대답해버렸다. 그때의 감정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다. 쟤랑 섹스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 정작 쟤 입에서 섹스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충격을 받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모순도 그런 모순이 어디 있어. 제가 생각해도 엉터리 같은 감정이었다. 그래도 거기에서 끝났다면 지금 제 형편이 조금 더 나았을 터다.


-형.

-어어, 들었어.


고백이 본격적으로 망한 이유는 이필릭스의 남자친구가 그 단풍나무 위에 있었다는 거였다. 아니, 지가 원숭이야 뭐야. 왜 거기 올라가서 숨죽이고 남의 고백이나 엿듣고 그래. 제가 앞뒤 살피지 않고 무작정 고백한 건 뒷전이었다. 그래도 황현진은 진짜 몰랐다. 이필릭스에게 이민호라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대체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그' 이필릭스가 여자친구도 아니고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그 남자친구랑 장소 불문하고 밤낮없이 붙어먹는다는 것을. 그 취향이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라는 것을.


-얘는 내꺼라서 사귀는 건 좀 그렇고…. 섹스는 괜찮은데 섹스라도 할래?


그 높이에서 펄쩍 뛰어내린 이민호는 이필릭스의 옆에 어깨동무를 하고 앉으며 제게 물었다. 사귀는 건 안 돼도 섹스하는 건 괜찮다고. 대체 저게 무슨 개소린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난데없이 십 초를 주겠다며 카운트하는  목소리에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홀린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당시의 황현진은 다급했다고. 할래요! 아마도 퍽 절박한 목소리였을 것이다. 이민호는 낮게 웃으면서 이필릭스의 목덜미에 진하게 입을 맞췄고 이필릭스는, …그때까지도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황현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정신을 차린 다음 순간에는 교실 안에 앉아있었다. 손에 쥔 핸드폰에는 학교 끝나고 음악실로 오라는 문자가 담긴 채였다. 하. 아까야 하도 정신없으니 헛소리도 마구 했지만, 지금도 아까 같을 줄 아냐. 웃기지 마.


-…….


웃기지 마. 정말 웃기지 마, 황현진. 왜 당연하다는 듯이 음악실에 온 거냐고! 황현진은 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호되게 욕도 했다. 그럼 이제 정신 차리고 집에만 가면 끝날 일이다. 후-. 심호흡을 했다. 미친 짓 하지 말자. 후회할 짓 하지 말자. 주문처럼 외면서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했는데, 그 순간에 듣고 말았다. 형,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와 달뜬 신음. 목소리만으로 잔뜩 흥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거. 꼭 저 들으라는 듯이 점점 커지는 것도 같았다. 커지는 것은 이필릭스의 신음만이 아니었다. 황현진은 제 밑을 내려다봤다. 건강한 신체가 지금보다 원망스러울 수 있을까. 결국 황현진은 음악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눈앞에는 거의 다 벗은 이필릭스와 바지 지퍼랑 속옷만 겨우 내린 이민호가 한창 붙어먹고 있었다. 이필릭스는 뚜껑을 덮은 피아노 위에 엎드려 제 쪽을 보고 있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어주는 여유까지. 그리고는, 뭐랬더라. 어서 와. 늦었네. 신음이 반은 섞인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다. 의외로 이민호는 한참 집중했는지 제 쪽 한번 거들떠도 안봤다. 황현진은 결국 음악실 문을 닫았다. 돌아버린 첫 섹스였다.




아무튼 언제고 몇 번이고 되돌아봐도 어느 한 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 남자친구를 머리 위에 두고 다른 사람한테 자기랑 섹스하고 싶냐고 묻는 이필릭스나, 제 남자친구와 섹스하고 싶다고 고백한 인간한테 셋이 섹스하자고 제안한 이민호나. 그래도 제일 문제인 건 역시 그걸 또 진짜로 받아들인 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 침대 헤드에 기대고 앉은 이민호와, 이민호 주니어를 열심히 빠는 이필릭스와, 그 골반을 붙잡고 정신없이 허릿짓을 하는 황현진. 이런 미친 관계에서 발도 못빼고.


섹스가 끝나고 나면 소위 '현타' 이외의 단어로는 표현 안 될 감정만이 남으면서도.




언젠가 한 번은 그런 걸 물었었다. 그 미친 관계가 시작되고 나서 한 달쯤 지났나. 격정의 섹스를 끝낸 후 곯아떨어진 이필릭스를 사이에 두고 했던 질문이다.


-이런 적, 또 있어요?


이런 적. 당연히 다른 사람 끼워서 섹스하는 걸 물어본 거였다. 이민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엉. 두 번 정도.


두 번. 그럼 제가 세 번째란 소리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요? 묻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이미 제가 가능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잖아.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다 필릭스한테 고백했던 사람들이었어요?

-엉.

-왜요?

-어?

-형한테 고백했던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어. 근데 나는 나 좋다는 사람한텐 못된 짓 못하겠더라.


그 말에는 코웃음쳤다. 이게 못된 건 줄은 알아? 근데 왜 해.


-형이 필릭스 꼬셨죠. 얘 성격에 누가 사탕발림한 게 아닌 이상 이럴 리가 없는데.


이번에는 이민호가 코웃음쳤다. 넌 아무것도 모르네.


-얜 그게 못된 건지 몰라.

-네?


그러니까 이런 짓을 하지. 이필릭스 성격에. 얜 저 좋다는 사람한테 몸 주면 다 준 거로 생각해서 이게 못된 짓이라는 거 자각 못 해. 왜 아니겠어. 다 줬는데 못된 짓일 리가 없잖아. 저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문제지만. 사실 그게 제일 못 됐는데. 몸만 주고 다른 건 하나도 안 주면서. 알맹이를 원하는 사람한테 껍데기만 던져주고 희망고문 한다는 걸 얘는 몰라.


-그러니까 이른 시일 내에 관둬라.


나니까 버티지, 넌 절대 못 버텨.


이민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이터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황현진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문득 그때의 생각이 난 것은 오늘이 꼭 그날과 비슷한 밤이었기 때문일까. 섹스를 끝내자 마자 곯아떨어진 이필릭스를 사이에 두고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이민호와 침대 헤드에 나란히 기대앉은 가을밤.


"그래도 오래 버티네, 너."


그리고 그건 이민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대번에 이해되니 말이다. 황현진은 대충 대꾸했다.


"그러게요."


답하고 보니 정말 그렇긴 하다. 이전 두 놈은 반년 안돼서 미쳤다며 도망갔다고 했는데, 저는 일 년을 이러고 있다. 하하. 웃음이 터졌다. 이걸 버텨서 대체 어디에 쓸 거냐고. 대학 갈 때 원서에 쓰면 되나? 짝사랑하는 애랑 그 애 남자친구 끼워서 섹스했음. 벌써 한숨이 푹푹 나왔다. 섹스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아주 단단히 잘못 끼웠다. 아주 엉망이야. 저는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잘 먹고 잘사는 두 놈이 문득 얄미웠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 인간들은 몇 명이랑 섹스를 해봤길래 이러고 살고 있는지.


"형은 섹스 많이 해봤죠."

"…? 당연하지. 네가 아는 것만 손에 꼽지 못할 정돈데."

"아니, 횟수 말고…. 몇 명이랑 해봤냐고요."

"나…, 얘 한 명."

"네?"

"필릭 한 명이라고."

"거짓말하지 마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황현진의 말투에 얼척이 없는 쪽은 이민호였다. 야, 네가 뭘 알아. 나 셋이서 뒹굴면서도 필릭 말고 딴 놈한테는 키스고 애무고 암것도 한 적 없어. 내가 언제 너한테 저리 가랄 때 빼고 손댄 적 있냐? 어?


"나도 얘가 처음이었거든?"


그리고 이민호의 그 말은 진짜였다. 심지어 고백도 이필릭스가 먼저 했다. 형, 저 형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랑 섹스 한 번만 하면 안 돼요? 다짜고짜 그러는데 이민호도 얼마나 놀랐는지. 제가 아는 이필릭스가 맞나 몇 번을 확인했다. 그때 얼마나 놀랐으면 돗대를 다 떨어뜨렸을까.


어쨌든 애가 섹스하자는데, 솔직히 이민호도 좀 눈독 들이고 있었고, 그래서 했다. 그게 처음이었다. 그랬는데, 어? 황현진 네가 뭘 알어. 괜히 울컥하네. 아무튼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했다. 이민호는 그래서 제가 이필릭스랑 사귀는구나 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들었고, 섹스도 몇 번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이필릭스가 옥상에서 웬 놈이랑 뒹구는 걸 목격했을 때의 심정이란. …말로 할 수 없다. 그저 정신 놓고 달려들어서 웬 놈을 온 힘 다해 쥐어 팼다. 이필릭스가 형 갑자기 왜 그러냐며 울면서 뜯어말리지 않았으면 인생에 빨간 줄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이민호는 결국 웬 놈을 그냥 쫓아 보내고 이필릭스에게 너 대체 뭐하냐 물었다.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웬놈이 저 좋다기에 섹스해줬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제가 대체 무슨 반응을 했으면 좋았을까. 이민호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이민호는 그냥, …그냥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필릭스를 쳐다만 봤다. 담배 물고, 빤히 쳐다만 보니까 이필릭스가 물었다. 형은 왜 그랬어요? 저를 더러. 저를 더러 왜 그랬냬.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제가 아무 대꾸도 없으니 이필릭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도 제가 좋아한다고 해서 저랑 섹스한 거잖아요. 저도 그래요. 저 좋다니까 섹스한 거라고. 그러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쟤 머릿속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섹스로 연결되게 된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뭣보다 그때는, 이필릭스한테 우리 관계가 뭐냐고 묻는 게 더 우선이었으니까. 이제 와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라도 그 이유를 알았으면 지금 우리가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물었다. 우리 사귀는 거 아니냐고. 이필릭스는 우리가 언제부터 사귀었냐고 그랬다. 환장하지. 저를 좋아한다고, 섹스 한 번 해달라는 게 고백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일 줄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문제는 이민호가 그런 말을 듣고도 이필릭스와의 관계를 못 놓겠더란 거였다. 대체 저런 정신 나간 소리 하는 놈 어디가 좋다고. 사귀자는 말은 한 적 없잖아요. 저는 형이랑 사귀는 것까진 필요 없는데 형은 저랑 사귀고 싶냐고 묻는 놈 어디가 좋아 사귀자 했는지. 심지어 앞으로 누가 너 좋아한다고 섹스할 거면 나랑 너랑 걔랑 같이하자는 말도 제 입으로 했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였냐고는 스스로도 묻지 않았다. 그걸 알면 이러고 안 살지.


"아무튼, 인생 저당 잡히지 않게 조심해라. 난 널 뜯어말리고 그러진 않을 거야."


네가 돌아버리든, 말라버리든. 신경 써줄 여유 없다고, 이민호는 그런 말을 충고랍시고 했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황현진은 그냥, 이번에도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이미 돌아버렸고 이미 말라버린 것 같은데. 하하. 웃음이 났다. 그래서 옆에 누운 이필릭스의 숨소리를 비지엠 삼아 웃었다. 정신 나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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