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5

- 미래 날조 多 (45권 이후의 이야기)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를 챙긴 츠키시마가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내부로 이동할 때만 해도 자신이 외국 땅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더니, 진한 스킨십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굉장히 달달한 꿀을 발라놓은 것 같은 대화가 눈에 띄자 그제야 일본이 아닌 곳에 왔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는 바로 옆에서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커플에게 시선 한 줌도 던지지 않기 위해 출구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걸음에 스피드를 붙였다. 남의 애정행각을 빤히 바라보는 게 예의도 아니거니와 그런 달달한 스킨십 장면에는 면역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곧 자신이 입국심사 때 심사관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떠올리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행 목적이 뭐죠?’

‘… 이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심사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재차 물었다. 누가 살고 있으며, 그 사람과 당신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고. 츠키시마는 친구라고 말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작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애인이요.’

 

그러고 보니 자신은 카게야마를 애인이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고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연애 같아 보이지 않는 연애를 알고 있었고 좁은 인간관계의 절반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 그를 ‘애인’이라고 소개할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아니, 아니다. 츠키시마는 다시 걸음을 원래 속도대로 옮기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카게야마를 두고 애인이라는 말을 뱉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상황,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은 있었다.

지이잉─

그 때 츠키시마의 카디건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길게 울렸다. 길게 울리는 걸 보니 문자나 라인이 아니라 전화였다.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내 든 츠키시마가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곤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게야마 미와. 애인의 친누나였다.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앞으로도 너의 곁에서

w. 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데뷔한 카게야마는 데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본가를 나왔다. 슈바이덴 애들러스 측에서는 기숙사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으나 카게야마는 기숙사와 체육관이 걸어서 5분 거리도 안 된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어 거절했다.

요컨대, 너무 가까워서 운동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츠키시마는 그런 이유로 일부러 자취를 선택한 게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그가 그렇게 운동만 해서 근육맨이라도 될 생각이냐며 비꼬려던 순간,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고 그는 반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기숙사는 외부인 출입금지야. 그러면 네가 못 오잖아.’

 

다물 수밖에 없는 엄청난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태연하게 빨대로 오렌지 주스를 쪽쪽 빨고 있었지만 귀 끝이 빨개진 걸로 봐서는 본인이 한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넌 대학이랑 본가랑 가까워서 밖에서 살 생각 없을 거고.’

‘내가 뺀질나게 너네 집 드나들고 자고 간다 그러면 어쩌려고.’

‘그럴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만약에 말이야.’

‘그럼….’

 

카게야마는 다시 입술 사이에 빨대를 끼워놓고 남은 오렌지 주스를 소리 나게 빨아 마셨다. 그리고는 츠키시마를 향해 조금 웃었다. 장난꾸러기처럼, 아주 개구지게 웃었다.

 

‘그냥 같이 살래?’

 

그건 아마 감히 자부하건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표정이리라. 그래서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츠키시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일 뻔했다. 그러자고. 함께 살자고.

지금도 그 때 카게야마의 농담이 반쯤 섞인 제안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며 거절한 것에 아주 약간의 후회는 배어 있지만, 역시 그 때 거절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후회의 위로 덧그려졌다.

카게야마가 이탈리아로의 이적을 선언한 게 그로부터 약 5년 뒤였고, 공식적으로 기사가 나간 날 밤 그는 츠키시마의 집으로 일부러 찾아와 말했다.

 

‘기사 봤지?’

‘네가 작년부터 얘기했던 거잖아.’

 

츠키시마는 쌀쌀한 밤바람에 대비해 걸치고 나온 얇은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말했다. 1년 전에도 카게야마는 이렇게 불쑥 찾아와 통보했다. 이탈리아로 이적할 것이며, 너에게 제일 처음 알리는 거라고. 그 때도 츠키시마는 약간의 자부심 따위를 느꼈다.

 

‘적어도 10년 동안은 일본에서 활동할 생각 없어. 가능하면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 쪽 리그에 있을 생각이야.’

 

그 때의 기분을 서술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시한부를 선고 받은 환자의 기분을 체감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흐름은 좋지 않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삐용 삐용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꼭 이별 직전의 밤 같았다. 이제 곧 카게야마의 입에서 ‘헤어지자.’ 따위의 말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츠키시마의 상상이 현실에 내려온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카게야마를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카게야마에게 가지 말라고 매달릴 이유가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주 많이 아팠다.

 

‘그러니까….’

 

아. 헤어지는구나, 싶었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보이지 않도록 잇몸 안쪽을 자근자근 씹었다. 담벼락 끝 가로등의 불빛이 오늘따라 어두운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기다려.’

‘… 뭐?’

‘기다리라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말한 카게야마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더 검게 물들어 반짝반짝, 마치 밤하늘처럼 빛이 났다.

츠키시마는 힘겹게 삼켰던 숨을 푸하, 하고 한꺼번에 뱉었다. 동시에 웃음이 쏟아져 나와서, 참지 못하고 그만 어린아이처럼 웃어버렸다.

‘그러니까’와 ‘기다려’ 사이의 상관관계보다 ‘그러니까’와 ‘헤어지자’를 연결하는 선이 훨씬 더 튼튼하고 단단할 터인데, 카게야마는 견고함보다 경도를 측정할 수 없는 확신에 건 것이었다. 츠키시마라면 반드시 자신을 기다릴 거라는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별들 사이 한 조각 붉은 확신.

한참을 웃던 츠키시마는 웃음을 멈추고 카게야마의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중학생 애들도 아니면서 아주 살짝 닿았을 뿐인 새끼손가락이 수줍게 흔들렸다. 알겠다는 의미였다. 츠키시마는 혹여 카게야마가 새끼손가락을 얽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까봐 말로도 확인시켜 주었다.

 

‘가서 네가 바람 안 피우면.’

‘너나 잘해.’

 

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었던 건지 카게야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데뷔했던 때처럼 빠르게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의 일이었다.

역시 그 때 카게야마의 동거 제안을 거절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입국심사관에게 카게야마 토비오를 ‘애인’이라고 말한 걸 부끄러워하면서도 츠키시마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 때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5년을 함께 살고, 그 뒤에 예정대로 그가 이탈리아로 떠났더라면 지금 자신은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토비오하고는 통화 했어?”

 

츠키시마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미와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물었다. 그녀는 츠키시마가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츠키시마 군 나 보여? 나는 츠키시마 군 보이는데.’

 

그녀는 츠키시마의 키가 커서 자신은 그를 발견하기가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쉬웠지만 반대의 경우는 어려울 터라고 덧붙였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츠키시마는 그 말이 명령처럼 들려서 그만 뻣뻣하게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훈련하고 있을지도 몰라서 일단 메시지만 넣어놨습니다. 보면 연락하겠죠.”

“그럼 내가 데리러 오는 것도 몰랐겠구나.”

“아, 아뇨. 그저께 통화하면서 알려줬습니다. 그… 카, 게야마 씨가 공항으로 마중 나오실 거라고.”

 

츠키시마가 미와를 부르는 호칭 사이사이에 어색함이 끼어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츠키시마가 그녀와 만난 건 이게 두 번째였고 첫 번째는 만남이라기보다는 마주침, 혹은 들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애인의 누나와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곤 오소소 돋은 소름을 가라앉히기 위해 팔을 쓸었다.

카게야마는 분명 고개를 갸웃거릴 테지만 츠키시마는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석 달 전이었다.

애들러스 측의 배려 덕분에 카게야마는 떠나기 전 반 년 동안 훈련 강도와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은 출국 준비와 상관없이 평소 페이스대로 움직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해외에서 최소 몇 년은 살 준비라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배구공을 만질 시간도 츠키시마를 만날 시간도, 그 무엇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출국과 팀 이적에 필요한 서류들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데 동의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다음 날이 주말이거나 공휴일, 혹은 운 좋게 츠키시마가 오후에 출근해도 되는 날이면 그에게 자고 가라며 팔을 붙잡았다. 그것도 꼭 맨션 공동 현관에서.

미와와 마주친 것도 그곳이었다. 어김없이 팔을 잡아오는 카게야마에게 츠키시마는 드물게도 단호함을 내비쳤다. 평소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척해도 결국에는 감히 누구의 명령이라고, 카게야마가 하는 말을 거의 다 들어줬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내일 토요일이잖아.’

‘오전에 연습 시합이 있어.’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얘기 없었잖아.’

‘오늘 갑자기 잡힌 거야. 내일 일찍 준비하고 나가봐야 해서 오늘은 안 돼.’

 

카게야마가 입술을 삐죽이며 츠키시마를 잡고 있는 팔에서 스르르 힘을 뺐다. 다른 일도 아니고 배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감추기 싫었다. 마지막으로 츠키시마와 함께 잠든 게 한 달도 더 전이었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팔이 완전히 자신에게서 떨어지기 전에 그의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란 카게야마가 시선을 들어 올려 츠키시마의 눈동자에 갑자기 뭐하는 짓이냐며 항의했다.

 

‘이걸로 참아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낯간지럽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말하자면 키스를 하려던 참이었다. 로맨스 드라마 중에서도 아주 달달한 곳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과 대사였다. 이 맨션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출입할 수 있는 공동현관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키스를 오래 끌 생각은 없었으므로 잠시 무시했다. 그래도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무시했던 게 결국 화근이 되었다.

 

‘토비오?’

 

설마 그의 누나에게 키스 3초 전을 보이게 될 줄도 몰랐고, 그런 식으로 애인의 누나와 만날 줄도 몰랐다. 츠키시마가 돌처럼 굳어 카게야마의 어깨에서 손을 뗄 생각도 못하고 있는 데 비해 카게야마는 태연하게 ‘아, 누나.’ 하고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는 츠키시마에게 휙 시선을 주더니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를 소개했다.

 

‘내 애인. 츠키시마 케이.’

 

카게야마는 이따금, 아니 종종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츠키시마는 바로 그 때가 카게야마 특유의 태연함이 낸 사건 중 가장 엄청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츠키시마는 그녀와 만날 수 없었다. 역시 따로 인사를 해야겠다며 카게야마에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 몇 번이나 말해봤지만 미와도 만만치 않게 바쁜 사람이었고 석 달 후에는 카게야마가 이탈리아로 떠나는 탓에 이도저도 하지 못했다.

거의 3년 만에 만나는 미와는 그 때 일은 잊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츠키시마도 그녀에게서 어른의 여유라는 걸 배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려고 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그녀에 비하면 땅꼬마였고 그건 그가 그녀를 부르는 어색한 호칭에서 이미 들통이 났다. 미와는 유리조각이 부서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않아도 돼. 미와라고 불러줄래?”

“… 그럼 미와… 씨로.”

“그래. 한결 낫네.”

 

미와의 눈꼬리가 반달모양으로 접혔다.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고 입술 끝이 우아하게 올라가는 모양이 카게야마와 닮았다. 장난꾸러기처럼, 개구지게 웃는 모양. 츠키시마는 지금껏 감히 자부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를 따라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탄력 있는 배구공이 체육관 바닥에 내리꽂히듯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튀었다. 떨어질 때의 강도에 비례해 높게 튀어 오른 공은 그대로 체육관 벽면 위쪽에 닿았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부드러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공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때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공은 이미 다른 데로 튀어 찾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곧 자신의 눈꺼풀이 평소보다 무거워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바로 내일이 시합이므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때에 졸음이 찾아온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는 훈련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수건이 손에서 완전히 떨어지자 그는 자신의 눈꺼풀이 왜 그렇게나 무거웠는지를 알 것 같았다. 츠키시마의 머리를 끌어안고 잠에 들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츠키시마의 머리카락도 딱 저렇게 복슬복슬하고 편안했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으면 손가락 사이사이에 금발의 머리카락이 채워졌는데, 카게야마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한 번도 그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 츠키시마.”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작년 여름이었다. 통화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하는 편이었고 이틀 전 츠키시마가 출국하기 전에도 누나의 마중을 알려주기 위해 두 차례나 통화를 나눴다. 그러니 아직 애가 탈 시기는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목소리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애가 타고 있다는 신호였다.

지금 그가 만날 수 있는, 그리고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가까이에 있을수록 애가 타다니,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츠키시마에게 이 모순을 물으면 이유를, 혹은 답을 내려줄까.

그는 옛날부터 똑똑했으므로 금방 대답을 해줄지도 모르지만 카게야마는 반대의 가능성에 걸었다. 짜증나리만치 똑똑한 자신의 애인은 사랑 앞에만 서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멍청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귀엽게도. 카게야마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귀여운 애인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었다.

오늘 훈련은 저녁 9시는 넘어서야 끝날 터였다. 누나에게는 츠키시마를 만나 저녁이라도 함께 먹으라고 미리 말을 해 둔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누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었지. 카게야마는 3년 전 어느 날을 떠올리며 키들키들 웃었다. 아직도 기억 한 편에 콱 박혀 있는 것이다. 츠키시마가 돌처럼 굳어 당황했던 보기 드문, 아주 귀여운 모습이.

 

“토비오, 와서 토스 좀 올려줘!”

 

코트 위의 동료가 휴게실을 나선 카게야마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크게 붕붕 휘두른 터라 먼 거리에서도 못 볼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수분을 보충하고 얼른 코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은 츠키시마의 머리를 끌어안고 잘 수 있을까.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츠키시마 군은 가리는 음식 있어?”

“예? 아뇨 딱히….”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능숙하게 택시를 잡은 미와는 기사에게 트렁크를 열어 달라 부탁했다. 츠키시마가 얼떨떨하게 활짝 열린 공간에 짐을 던지듯 캐리어를 집어넣었다. 그 사이에 이미 미와는 뒷좌석에 타고 있어 그는 이번에도 어색한 몸짓으로 그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알고 보니 카게야마의 훈련이 한 시간 정도 늦게 끝나 그녀와 저녁을 먹어야 했던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어떤 알림도 도착해 있지 않은 자신의 핸드폰만 잠깐 노려보았다가 관두었다. 훈련 중에는 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성격이니 노려봐봤자 자신의 눈만 따끔거릴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카게야마의 집을 방문하는 건 작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집이라기보다는 팀에서 마련해준 기숙사에 가까웠다. 애들러스 때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건물 자체가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기 보다는 멀쩡한 아파트 하나를 선수들에게 내어주는 점이었다.

따라서 체육관과도 적당히 거리가 있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어느 정도 통제는 되었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두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호텔 따로 안 잡았지? 같이 자.’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을 홱 끌어당겨 침대에 눕히던 카게야마의 얼굴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츠키시마는 갑작스럽게 들이치는 이후의 기억에 당황하여 헛기침을 뱉었다.

 

“괜찮아? 자, 물.”

“아.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그냥 좀 사레가 들러서.”

 

애인의 누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런 기억이나 꺼내놓다니, 최악이었다. 츠키시마는 파도처럼 들어오는 기억을 다른 것으로 덮기 위해 재빨리 새로운 화제를 만들어냈다.

 

“그러고 보니 카게야마 시합, 내일이었죠?”

 

미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크에 파스타를 돌돌 마는 손동작이 레스토랑 조명을 받아 우아하게 돋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카게야마와 닮았다. 카게야마가 만약 여자로 태어났다면 분명 그녀와 쌍둥이처럼 보였을 터다.

츠키시마는 그녀의 얼굴에서 자꾸만 카게야마를 찾으려는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게 다 이탈리아 땅을 밟은 지 세 시간이 넘었는데 그 예쁘고 바쁘신 애인이 문자에 답장 한 번을 보내지 않은 탓이었다.

 

“내일 오후라고 했으니까 시간 맞춰서 갈게.”

“… 예?”

“아. 잠깐만, 미안. 토비오한테 전화 왔다. 훈련 끝났나봐.”

 

미와가 츠키시마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잠깐.’ 하고 대화를 중지시켰다. 덕분에 츠키시마가 확인하려던 물음은 이름 모를 스테이크 고기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가 동생과 몇 마디를 주고받은 짧은 시간 동안 츠키시마는 포크에 고기를 찍어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시간 맞춰서 갈게.’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입시를 치를 때보다 더 머리를 굴렸다.

작년에야 자신 혼자 이탈리아에 왔으므로 따로 숙소를 잡지 않고 카게야마의 집에 머물렀지만 올해는 달랐다. 츠키시마는 이틀 전 카게야마에게서 미와의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바로 호텔을 예약하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그는 미와의 ‘시간 맞춰서 갈게.’가 자신과 카게야마를 향한 배려가 아니기를 바랐다.

 

“끝났대. 후식까지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는데, 빨리 오라네.”

 

통화를 마친 미와가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웃었다. 핸드폰 너머로 카게야마가 귀여운 투정이라도 부렸는지 그녀의 표정이 온화하게 누그러져 훨씬 더 연상으로 보였다.

 

“츠키시마 군이 보고 싶은가봐. 자기 애인 빨리 데려오래.”

“컥! … 컥, 네, 네? 걔, 걔가 진짜 그런 말을 했어요?”

 

동생만큼이나 태연하게 엄청난 말을 뱉어낸 미와가 연신 콜록거리는 츠키시마 쪽으로 컵을 밀었다. 당황한 츠키시마에게 물을 내미는 건 두 번째였다. 미와가 키들키들 웃었다.

자신도 표현이 풍부한 편은 아니니 할 말은 없지만, 그보다 더 무뚝뚝한 남동생은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그에게 속마음을 들켜 어쩔 수 없이 속을 털어내기도 했으나 그가 떠나고 난 뒤로는 그런 일도 없어졌다.

 

“아니, 거짓말이야.”

 

그랬던 동생이 어느 날 애인을 소개시켜주었다. 그걸 소개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으나, 카게야마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애인, 츠키시마 케이라고.

츠키시마의 손이 놓여있던 위치와 두 사람의 밀접한 거리, 그리고 묘한 분위기 등을 빠르게 머릿속에 입력해 조합해보자 자신이 굉장한 타이밍에 나타났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와는 남동생이나 애인에게 엄청난 짓을 했음에 미안해하면서도 동생이 한 말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카게야마는 서둘러 떠나는 츠키시마의 등 뒤를 바라보다가 기승전결도 없이 말했다.

 

‘귀엽지?’

 

그 때 자신은 뭐라고 반응했더라.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닌데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지금 카게야마가 똑같이, 그렇게 말한다면 자신은 제대로 고개를 끄덕여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귀엽네.”

“… 네?”

“이건 거짓말 아니야. 토비오가 말해줬어. 츠키시마 군은 귀엽다고. 응, 거기에 동의해.”

 

미와의 눈꼬리가 다시 반달모양으로 접혔다. 츠키시마의 당혹스러움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개구지게 웃기만 하는 모습이 카게야마 토비오 그 자체였다. 츠키시마는 이번에도 그녀에게서 애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이 멍청한 왕님. 대체 누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어젯밤 저녁을 먹은 뒤에 또 한 차례 엄청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츠키시마의 앞에 섰다. 그는 이 태연자약한 남매 사이에서 자신이 대단히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애인을 빨리 데려오라는 말은 미와의 귀여운 거짓말이었지만 재촉했던 건 사실이었는지 그녀는 후식을 건너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일어난 츠키시마는 아직도 미와가 친 장난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녀의 뒤만 쫄래쫄래 따라 걸었다.

택시에서 내려 카게야마의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길에 그녀는 동생에게서 들은 츠키시마의 이야기를 본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가령, 그의 블로킹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구석이 있어서 짜증이 난다거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든든해서 멋있다거나, 술은 깔루아 밀크만 마실 정도로 약하다거나, 취했을 때 귀엽게 매달려놓고 다음 날만 되면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커피는 반드시 단 것만 마신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츠키시마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어떤 방어 체제도 없이 듣고 있었다. 예의 상 중간 중간 적당한 반응을 끼워 넣어야 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 그, 네…, 네.’ 같은 어색함뿐이었다.

 

‘어, 나와 있네.’

 

미와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츠키시마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시선 끝에 근 1년 만에 보는 애인이 아파트 담벼락에 기대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진짜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츠키시마는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본,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감격스러운 재회에 풍덩 빠져 있던 커플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그는 꼴사납게도 울어버릴 것만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츠키시마.’

 

울 것 같은 때에 이름을 부르면 어떡해. 츠키시마는 다시 한 번 주먹에 힘을 주며 애써 담백한 표정을 연기했다. 울지 않기 위해 재회의 순간에서 시선을 떼어보려는데, 그 때 카게야마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얇은 운동복 하나만 달랑 입고 있었다.

아무리 로마의 9월이 일본보다 훨씬 따뜻하다지만 저녁에는 제법 쌀쌀했다. 츠키시마가 급하게 자신의 카디건을 벗으려고 몸을 움직였다.

 

‘왜 아무것도 안 걸치고 나왔어. 춥, 아.’

 

카게야마의 허전한 팔을 쓸며 입고 있던 카디건에서 팔을 빼려고 몸을 비튼 츠키시마가 순간 아, 하고 뒤를 돌았다. 뒤를 돈 그곳에는 미와가 덤덤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딱히 놀라지도 어쩌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츠키시마는 경직된 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침만 꿀꺽 삼켰다. 신체 중 유일하게 목울대에만 움직임이 허락된 것 같았다.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누나.’

‘그래. 내일 보자.’

‘응.’

 

아, 젠장. 망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마음이 그것이었다. 카게야마는 미와가 뒤를 돌기도 전에 츠키시마의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끼워 넣고는 그를 아파트 안으로 끌었다. 3년 전 그 날처럼 이번에도 츠키시마는 당혹감에 젖어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애인이 추워 보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걸쳐주려고 한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건 츠키시마의 얼굴과 귓불을 달아오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움에 빠져 있는 것도 모르고 카게야마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번호를 하나하나 입력하는 검지에 묘한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츠키시마는 카게야마가 내보인 기묘한 초조함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실 알아차렸다기보다는 카게야마가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벽면으로 밀치고 몸을 밀착시킨 그 순간에 아, 하고 입을 벌리며 받아들인 것에 가까웠다.

 

“이제 곧 시작하겠다.”

“… 네.”

 

미와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츠키시마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곧 카게야마의 시합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츠키시마는 이번에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기억을 꺼낸 게 부끄러워졌다. 누나에게 귀엽다느니 어쩌느니 이상한 말을 한 카게야마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도 카게야마 만큼이나 부끄러운 짓을 하는 남자라는 사실에 얼굴로 열이 쏠렸다.

 

“아. 시작하나보다. 토비오 나온다.”

 

경기장 중앙에 환하게 쏟아지던 조명이 한 단락씩 꺼지자 스피커에서는 오프닝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 나왔다. 경기장 벽면에 부딪친 소리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면서 훨씬 더 웅장하게 울렸다.

상대 팀 선수의 입장이 끝나고 이어 알리 로마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츠키시마는 그가 슈바이덴 애들러스에 소속되어 있을 적부터 그의 경기 영상을 찾아 봤고 이적 후에도 따로 영상을 입수해 보곤 했지만 경기장에서 직접 그를 내려다보는 건 4년 전 V리그 이후 처음이었다.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 사이에서 자신의 박수 소리가 카게야마에게 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넓은 곳에서 그가 자신을 발견하리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이따금 카게야마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표정이나 행동에서 우월감 비슷한 걸 느끼곤 했지만 터무니없는 기대를 감히 품을 정도로 오만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카게야마가 자신을 보고 입가에 호선을 진하게 그린 걸 발견했을 때는 답지 않게, 진짜 우월감에 젖을 뻔했다.

 

“방금 여기 본 것 같은데…. 츠키시마 군을 발견한 걸까?”

 

‘설마… 말도 안 돼.’ 같은 생각은 미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개구지게 웃자 산화되어 흩어졌다.

 

“그럴, 리가요.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미와는 츠키시마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입술 부근을 가리고 있는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미처 가려지지 못한 입술의 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었다.

남동생이 자주 말하는 ‘츠키시마는 귀여워.’라는 감상이 콩깍지의 산물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내 동생이야. 미와가 자랑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내렸다.

 


 


 



“토비오~!”

 

벤치에 앉아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카게야마에게로 알리 로마 소속의 센터가 다가왔다. 유니폼 환복을 마친 그는 카게야마의 옆자리에 앉아 어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에 시동을 걸었다.

 

“어제 왔다던 애인 오늘 관중석에 있는 거지?”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천재 세터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은 알리 로마 소속의 감독과 코치부터 선수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어 그리 큰 비밀이 아닌데도 그는 극비 임무를 설명하는 어느 국가 기관의 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은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카게야마는 ‘네, 왔습니다.’라며 여느 때처럼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오늘따라 유독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펴주며 근육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있던 카게야마가 돌연 스트레칭을 멈추었다. 오늘따라 유독. 다른 이에게는 자신이 그렇게 보이는 걸까.

1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애인이 휴가를 내고 이탈리아로 왔다. 비록 휴가로 받은 일주일 중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나흘뿐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자신의 눈이 닿는 거리, 그리고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카게야마를 들뜨게 하면서도 동시에 굶주림을 가져왔다.

그래. 딱 그 느낌이었다. 굶주림, 배고픔. 허기. 뱃속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

어젯밤 카게야마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츠키시마를 벽에 밀치고 입술을 부딪쳤다. 미와와 함께 저 멀리에서 걸어올 때부터 카게야마는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에서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가며, 마치 상큼한 과일을 베어 물듯 깨물었다. 처음에는 벽에까지 밀쳐져 당황하던 츠키시마도 곧 카게야마의 혀가 움직이는 길을 따르며 키스에 응해 주었다.

그에게 닿는 게 무려 1년 만이었다. 일본에 있을 때도 바빠 좀처럼 서로를 겹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지금보다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으므로 그런대로 20대의 젊은 피를 누를 수는 있었다. 어찌되었든 폭주는 막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 갑자기 뭐야.’

‘인사.’

 

츠키시마가 황당하다는 듯 작게 입을 벌렸다. 카게야마는 그 벌어진 입술이 황당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키스해도 좋다는 허락처럼 느껴져 다시 입맛을 다셨다. 맹수가 먹이를 앞에 두고 보일 것 같은 행동에 츠키시마가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물리려고 했지만 벽에 가로 막혀 실패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2년씩이나 살더니 키스가 인사가 되었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싫지 않았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여전했다. 물론 츠키시마답다면 츠키시마다운 반응이기는 했다.

카게야마가 츠키시마의 멱살을 잡고 아래로 살짝 끌어내렸다. 벌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서로의 숨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아, 젠장. 결국 먼저 백기를 들어 올린 건 츠키시마였다. 그는 양손으로 카게야마의 볼을 잡고 달려들었다. 그 새 애인에게 옮았는지 먹이를 낚아채는 짐승 같은 속도였다. 그의 하얀 티셔츠를 주름이 지도록 잡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이 허리로 내려갔다.

 

‘읏…, 하아.’

 

이번에는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막다른 곳으로 몰 차례였다. 그는 조금씩 몸을 앞으로 기울여 카게야마가 뒷걸음질 치도록 뒤로, 뒤로 밀어냈다. 카게야마의 등이 신발장에 닿아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츠키시마는 계속 맞부딪치고 있던 입술을 떼고 숨을 깊게 내뱉었다. 카게야마의 청회색 눈동자 안으로 츠키시마의 밝은 호박색이 들어왔다. 두 색을 섞으면 어떤 색깔이 될까,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게 약간은 두려워져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무슨 생각해. 시작은 네가 먼저 했어. 여기나 잡아.’

 

기껏 유혹에 성실하게 응해 주고 있는데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츠키시마의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가며 짜증을 만들어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시키는 대로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엉덩이를 받치는 손길이 다가오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을 들어 올릴 모양이었다.

곧 카게야마의 예상대로 츠키시마가 그를 들어올렸다. 자기보다 무거운 상대를 들어 올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도 그는 카게야마의 몸을 공중에 붕 띄웠다.

 

‘츠키시마.’

‘왜.’

‘소파로 가.’

‘야, 너 진짜….’

 

카게야마가 츠키시마의 목을 꽉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침실이 아니라 소파로 가자는 게 어떤 의미인지, 츠키시마는 모르지 않았다. 이 고고하고 오만한 제왕께서는 대체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지.

그는 자신이 서민에서 신하로 신분이 상승했던 때를 떠올렸다.

리포트 제출 마감이 다가와 모처럼 카게야마가 집에 놀러 왔는데도 츠키시마는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노트북 자판을 맹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며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교양서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폴짝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겨우 제출 시간에 맞춰 리포트 작성을 끝낸 츠키시마는 파일을 온라인 강의실에 업로드하자마자 노트북을 덮고 그 위에 쓰러졌다. 끝났음을 직감한 카게야마도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옆에 얌전히 놓았다.

책이 덮이는 소리에 곧바로 츠키시마가 고개를 들고 몸을 틀었다. 카게야마가 두 팔을 벌리고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따라 웃으며 그 품에 달려들었다. 나름대로 꽤 힘껏 달려들었으므로 카게야마가 뒤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허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어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츠키시마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수고했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기분이 들뜬 츠키시마가 오랜만에 왕과 서민 호칭을 들먹이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다소 과장시켜 받아쳤다. 잠시 동안 아무 말 않던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머리 위에서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너 이제 서민 아니야, 신하 해.’라며 츠키시마의 신분을 한 번에 상승시켜주었다. 다소 생뚱맞은 소리에 당황한 그의 눈에 방금 전까지 카게야마가 읽고 있던 자신의 교양서적이 들어왔다. 표지에 이탤릭체로 The Kingmaker라고 쓰여 있었다.

어떤 문장을 읽은 건지는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신분 상승이 순수하게 기뻤다. 카게야마는 ‘이제 신하니까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헤아려야 해.’라고 덧붙이며 두 다리로 츠키시마의 등을 포박했다. 그러고는 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넘어갔다. 츠키시마는 아아, 하고 중얼거리며 감히 제왕의 위를 점령했다.

그 날 이후로 츠키시마는 건방진 서민에서 충실한 신하로 타이틀을 바꾸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못하는 성격 덕분에 제왕의 신호를 알아차리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는 카게야마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었다고 생각했다. 확신과 자신감에 기대 카게야마를 번쩍 안아 들고 현관을 지나 소파로 직진했다. 카게야마의 등이 조심스럽게 소파에 닿았고 츠키시마는 그 위에 엎드리듯 자리했다.

 

‘츠키시마.’

‘왜.’

‘나 내일 시합 있어.’

‘뭐? 아.’

 

츠키시마가 황당해하며 묻고는 곧바로 아, 하며 현실로 돌아왔다. 스스로 걸어서 현실로 복귀했다기보다는 카게야마의 한 마디에 목덜미를 잡혀 끌려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현관에서부터 소파까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어놓고는 갑자기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츠키시마는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리며 카게야마의 위에서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덕분에 츠키시마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카게야마의 다리가 어정쩡하게 한 쪽은 츠키시마의 등 뒤로, 다른 한 쪽은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너 대체… 어떻게, 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츠키시마 스스로도 머리와 심장 주변을 맴도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갈무리하지 못해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어느새 팔 뒤꿈치를 지지대 삼아 상체를 일으키고 낙담한 츠키시마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괜한 기대를 품게 한 것 같다는 미안함은 들었다. 하지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잔뜩 실망해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아주 못된 애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카게야마는 그가 내일 일정을 잊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에 있을 때도 시합이 가까워지면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관계를 피했으므로 이번에도 츠키시마가 적당한 타이밍에 멈추리라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소파로 가자는 말은 도발이나 유혹이 아니라 백퍼센트 장난이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내일 일정을 잊고 덤벼들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순수하게 마음이 들떴다. 이제는 아예 고개까지 푹 숙인 채 상심하고 있는 모습도 귀여웠다. 정말로 못된 애인이 된 것 같았다.

 

‘말했잖아. 인사라고.’

‘인사를 그렇게…! 그, 그렇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츠키시마가 부끄러움에 잠겨 차마 자신들이 현관에서부터 나눈 키스를 설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과일을 베어 물듯 입술을 깨물고 고개의 각도를 꺾어가며 그저 서로의 숨을 탐하기 바빴던 키스는 노골적이다 못해 외설적이었으므로.

그런데 지금 그 키스가 인사였다고? 츠키시마는 어이가 없었다.

 

‘너…. 밖에서도 아까처럼 인사할 수 있어?’

 

츠키시마가 일부러 ‘인사’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어 물었다.

 

‘너 괜찮겠어?’

 

아, 맞다. 잊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입을 떡 벌리며 카게야마에 대해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상기시켰다. 카게야마는 미와에게 키스 3초 전을 들키고도 태연하게 자신을 애인이라고 소개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이제는 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엄청난 말을 뱉는 데에도 익숙해져야 할 터인데, 츠키시마는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번 소스라치게 놀라기만 하는 자신이 갑자기 억울해졌다.

그 때 카게야마가 폴짝 튀어 올라 츠키시마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내렸다. 그의 몸을 가운데에 두고 어정쩡하게 있던 다리가 이번에는 확실하게 그의 허리를 감았다.

 

‘이번에는 또 뭐하자는 거야.’

‘이걸로 참아줘.’

‘뭐?’

 

카게야마가 양손으로 츠키시마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츠키시마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네 흉내 내는 거잖아.’

‘… 이게 어떻게 내 흉내야. 난 이런 식으로 네 위에서 사람 미치게 한 적 없어.’

‘기억 안 나? 미와 누나랑 만났을 때 네가 그랬잖아.’

 

그제야 츠키시마는 카게야마가 어떤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3년 전 미와에게 키스 3초 전을 들켰던 그 때였다. 갑자기 잡힌 시합 일정 때문에 카게야마의 집에서 머물다 갈 수 없었고, 입술을 삐죽 내미는 그를 달래기 위해 어깨를 잡고 키스를 하려고 했었다.

설마 이거 그 때의 복수인가. 불퉁스럽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츠키시마가 한 손으로 카게야마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등을 사선으로 끌어안은 채 양팔에 힘을 꽉 주었다. 순식간에 카게야마의 몸이 균형을 잃으며 츠키시마 쪽으로 쏟아졌다.

 

‘야, 잠… 잠깐! 뭐하는….’

 

츠키시마는 바싹 다가온 카게야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비 오는 날 쫄딱 젖은 강아지라도 되려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와 눈을 마주쳤다. 이 바보 같은 제왕께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모르면 할 수 없다. 알려주는 수밖에.

 

‘오늘은 누구 올 사람 없으니까, 내가 내일까지 얌전히 참을 수 있도록 자알 부탁드려요.’

 

다시 보니 쫄딱 젖은 강아지가 아니라 기회를 엿보고 있던 여우였다. 카게야마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래도 상관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영악한 여우의 볼을 바짝 위로 들고 자신의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곧 저희 입장해요. 와, 사람들 진짜 많네요.”

 

카게야마의 등 뒤에 선 후배 세터가 등장 전부터 들리는 입장 음악과 관중의 환호성 소리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게야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내리치며 긴장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후배에게는 그렇게 조언했으면서 카게야마야말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경기장으로 입장하면서도 어딘가에 앉아 있을 츠키시마를 찾느라 관중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었다.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는 것도 잊으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린 보람은 있었다. 기적처럼 츠키시마가 관중석에 앉아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게야마가 입가에 진한 호선을 그렸다.

봤을까, 아니면 너무 멀어서 보지 못했으려나. 보지 못했어도 상관없다. 그 순간 보지 못했어도, 경기가 시작되면 그는 자신만 볼 터였다.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경기를 시작하는 휘슬소리가 장내를 떠도는 잡음을 밀어냈다. 알리 로마 소속의 우수한 리베로가 상대 팀의 점프 서브를 여유롭게 받아 올렸다. ‘토비오!’ 하고 카게야마의 이름이 불려졌다.

 

‘어제 왔다던 애인 오늘 관중석에 있는 거지?’

 

대기실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다가온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사실은 그 때도 자신은 상당히 들뜬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따라 유독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건가?’

 

동료의 말이 맞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던 뱃속 상태를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카게야마의 손끝에 탱탱한 배구공의 표면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오늘 뱃속 상태는, 완벽하다.

 

 



 



주문서에 차례대로 메뉴를 적은 점원이 물러나자 테이블 위에 다소 어색한 정적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유니폼만 갈아입고 가겠다던 카게야마는 아무래도 늦어질 것 같으니 먼저 가 있으라며 자신이 예약한 식당 주소를 츠키시마의 핸드폰으로 보내주었다.

다행히 미와가 길을 알고 있어 헤매지 않고 쉽게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맞다. 토비오가 새로 산 침대 어때? 나랑 같이 골랐는데.”

“… 네?”

 

미와는 이탈리아에 처음 도착한 날,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잔뜩 졸린 눈을 하고도 남동생의 손에 이끌려 가구점 세 군데를 돌아다녔다고 덧붙였다. 카게야마가 무조건 킹사이즈의 침대여야만 한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고 그녀 자신도 밀려오는 수마睡魔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일단은 동생에게 어울려주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핸드폰에 동생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오후에 가구점 직원이 침대를 설치해주러 올 터인데 자신은 훈련 때문에 집에 없으니 대신 좀 봐달라는 내용이었다.

좀처럼 자신에게 부탁이나 요구를 하지 않은 동생이 어제부터 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지만 불현 듯 얼굴 하나가 떠올라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 침대에 집착하나 했더니, 역시 츠키시마 군이랑 같이 쓰려고 그런 거였더라고.”

 

그랬더니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카게야마가 먼저 말했다.

 

‘츠키시마랑 같이 자기에 충분하겠지?’

 

츠키시마가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어때?’라고 물어도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 소파에서 한 바탕 소동을 벌인 뒤 씻고 나왔더니 카게야마가 소파에 이불을 깔고 있었다. 그 의미를 모를 정도로 츠키시마는 둔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감이 틀리기를 바랐다.

 

‘… 설마, 아니지?’

‘오늘은 소파에서 자.’

‘뭐? 같은 침대도 안 돼?’

‘응. 안 돼.’

 

카게야마는 손가락으로 이불에 잡힌 주름을 펴며 말했다. 작은 침대로 변한 소파 끄트머리에는 하얀 베개까지 놓여 있었다.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츠키시마는 욕실로 들어가려는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 세웠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후련한 얼굴의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너 내일 시합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래?’

‘아니.’

 

카게야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츠키시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렇다면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덮칠까봐 그래.’

 

그 한 마디에 카게야마를 붙잡고 있던 팔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눈동자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을 발견했다. 현관에서부터 자신에게 입술을 부딪쳐온 기세를 생각하면 카게야마의 ‘내가 덮칠까봐 그래.’라는 말은 진심일 터였다.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번뜩이는 애인의 눈동자에 몸을 움츠리는 한편, 그는 카게야마가 자신에게 쏟는 간절함이 기뻐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한 때는 카게야마의 무신경함과 둔함, 그리고 특유의 뻔뻔함이 싫었다. 카게야마가 직접 만들어준 작은 침대에 누운 츠키시마는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날, 그의 얼굴을 처음 마주했던 날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작게 웃었다.

아직도 자신은 무신경하고 둔하고 이상하리만치 뻔뻔한 사람을 싫어했다. 또래보다 빠르게 요령을 터득하는 본능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형을 파악해 ‘싫다’는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츠키시마를 보호하기 위해 작용해 온 이 메커니즘은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만 예외를 두기 시작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낯부끄러워지는 사랑은 예외를 두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것이 특별함에, 또 소중함에 맞닿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나. 츠키시마는 아마 헤아려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실은… 궁금했어.”

 

츠키시마가 침대에 대한 감상을 바로 내놓지 않자 그 이유가 부끄러움에 있다고 생각한 미와는 푸스스 웃으며 좀 더 솔직한, 사실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로 겨우 세 번 만난 동생의 애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까, 하는 망설임이 그녀의 입술을 떨리게 했다.

무엇이 궁금하다는 것일까. 츠키시마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나는 토비오가 츠키시마 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만, 츠키시마 군이 우리 토비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모르잖아.”

 

카게야마는 미와를 만나면 곧잘 츠키시마에 대해 재잘거렸다. 말수가 많지 않은 동생이 배구가 아닌 다른 주제로 신나게 입을 열거나 웃는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쏟는 만큼의 애정을 츠키시마에게서 돌려받고 있지 못할까봐.

미와는 동생이 말을 마치면 그 때마다 묻고 싶었던 것을 억지로 삼키곤 했다. 츠키시마 군도 너를 그만큼 사랑해? 다소 직설적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묻지 못했던 건 아니라는 답을 들었을 때 생길 안타까움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그가 자신이 던진 물음표로 인해 최악의 경우를 인지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츠키시마를 만나고 싶었다. 스치듯, 혹은 도망치듯 떠나는 뒷모습이 아니라 제대로 동생의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침대가 설치된 뒤에도 주변을 서성거리며 입술을 삐죽이던 카게야마가 이틀 뒤 츠키시마가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아, 하고 조금 웃었다.

그 때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분명하게 자신은 웃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경기장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열심히 중얼거리거나 웃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자신은 분명하게 그를 따라 웃고 있었다.

 

“고마워.”

 

역시 귀국 일정을 이틀이나 미루고 츠키시마를 직접 만나서 다행이었다. 미와는 자신이 경기장에서 느낀 감격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사전을 펼쳤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말을 준비해 두는 게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조금 미안해졌다.

 

“츠키시마 군이 토비오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미와의 눈동자 아래에 순간, 파도가 들이쳤다. 카게야마와 똑같은 청회색 눈동자에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츠키시마는 그녀가 울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분명하게,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고마워. 그것은 미와가 츠키시마에게 기울이는 신뢰였다.

 

“… 아뇨, 그런…. 그런 게….”

 

어느 날 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찾아왔다. 츠키시마는 그 날 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의 기분을 겪었던 것도,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렸던 것도, 카게야마에게 억지를 부릴 수 없어 아팠던 것도 전부 기억 한 편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 옆에 모아두었다.

바람피우지 마. 너나 잘해.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장난스럽게 주고받았던 말이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6000마일이 넘는 거리가 주는 불안함을 굳건하게 견딜 만큼, 츠키시마는 무디지도 못했고 단단하지도 않았다. 1년에 겨우 한두 번 만날 수 있는 연애가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카게야마의 한결같은 모습에 안도했다. 카게야마가 떠나기 전 보여주었던 눈동자 속에는 노란별들 사이 한 조각 붉은 확신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아, 일행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 카게야마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점원이 그에게 다가섰다. 츠키시마는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두었던 양손을 겹쳐 잡았다. 미와의 고맙다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웅웅 때리고 있었다.

내가 언제 일본으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해도 너는 나를 기다릴 거야, 그렇지? 그 날 카게야마의 청회색 눈동자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확신을 손에 꽉 쥔 주제에 ‘그렇지?’ 하고 묻는 듯한 눈동자가 영악하게 느껴졌던 것을, 츠키시마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카게야마의 태연자약함에 익숙해지지 못해 그 때마다 당황하고 어쩌면 할 말을 잃거나 경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카게야마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기에 이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줄곧 테이블 아래에 있던 츠키시마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곧 테이블로 다가오는 카게야마를 향해 길게 뻗어졌다.

미와는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의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

 

“카게야마가 제 곁에 있어주는 겁니다.”

 

길게 뻗어진 손끝에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닿았다. 츠키시마의 손을 잡은 카게야마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내가 왜?”

“오늘 잘 했다고 얘기하는 중이었어.”

 

츠키시마의 말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지 카게야마가 묻자 미와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대답해주었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쉽게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때맞추어 음식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자 삐죽 튀어나왔던 입술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맞잡았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그런데도 전혀 외롭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테이블 아래로 벌어진 자신과 카게야마 사이의 거리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카게야마는 한결 같이 태연한 얼굴로 엄청난 일들을 저지르고 자신은 그의 한결 같은 모습에 안도한다. 그저 카게야마가 주는 안도에 기대는 것이다.

그리고 손을 뻗었을 뿐이다.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식사 내내 떨어져 있던 손은 식사가 끝나고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다시 서로를 찾아 헤매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등이 스치는 것에도 깜짝 놀랐던 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을 덥석 잡은 건 츠키시마였다.

카게야마는 계산을 하고 있는 미와를 힐끔 바라 보다 다시 츠키시마의 옆얼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목이 새빨개져 있었지만 손을 놓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카게야마도 지지 않고 강하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츠키시마는 미와와 헤어지고 카게야마의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카게야마의 입꼬리는 그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계속 올라가 있었다.

 

“… 잠깐, 무슨…! 츠키시마!”

 

줄곧 올라가 있던 카게야마의 입꼬리가 순간 놀람과 당혹감으로 내려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츠키시마가 자신의 몸을 껴안고 번쩍 안아든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번 작게 휘청거리던 츠키시마는 곧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카게야마의 청회색 눈동자에 자신의 밝은 호박색이 섞여 들어갔다.

 

“아까 누나랑 무슨 얘기 했어? 시합 얘기 아닌 거 알아.”

 

여유를 조금 되찾은 카게야마가 츠키시마의 목에 팔을 둘렀다. 다리는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안아 들고 옮기기 편하도록 그의 허리에 단단히 감았다. 현관에 달린 자동 센서가 한동안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자 자동으로 불을 껐다. 어두운 곳에서도 카게야마의 청회색 눈동자는 밝기만 했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물음에 영원히 노코멘트로 대응하리라 마음먹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너의 누나는 내가 네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내가 거기에 대고 사실은 반대라고 말했다는 것을.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 거라고 말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그는 카게야마를 한 번 세게 끌어안은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현관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등이 침실 문에 쿵 하고 닿았을 때 현관은 언제 밝았냐는 듯 다시 어두워졌다.

 

“미와 씨랑 같이 침대 골랐다며. 그 얘기 했어.”

 

카게야마가 풋 하고 가볍게 웃으며 츠키시마의 양 볼을 잡았다. 츠키시마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예상한 대로 카게야마가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얼굴이었다. 신하는 제왕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속을 헤아려야 한다고 했던가.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따라 가볍게 미소 지었다.

 

“궁금해. 날 위해 얼마나 큰 침대로 샀는지. 보고 싶어.”

 

츠키시마의 눈이 둥근 곡선을 그리며 예쁘게 접혔다. 과거의 카게야마가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금은 그저 귀엽기만 한 눈웃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을 안고 있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츠키시마를 대신에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몇 번을 더듬거리자 곧 문고리가 왼손에 잡혔다. 츠키시마는 벌써부터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누가 제왕이고 누가 신하인지 모르겠다. 다시 서민으로 강등시켜 버릴까. 카게야마가 다시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마도 이 눈앞의 남자, 츠키시마 케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변하지 않으리라. 서민으로 강등시키든, 다른 신분을 손에 쥐어주든 한결 같이 자신을 도발하고 유혹하고, 때로는 귀여운 반응을 보이며 자신을 즐겁게 해주리라. 그렇지? 츠키시마. 줄곧 손 안에 쥐고 있던 확신이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 하고 침실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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