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거지













배고파요

사주세요

한입만요









박지민의 뇌를 분해한다면 아마 저 네 단어뿐이지 않을까. 언젠가 김남준이 진지하게 분석한 적이 있다. 박지민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 결과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박지민이 대통령 아들인 것도 아니고, 연예인인 것도 아닌데 뇌 구조를 분석씩이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만큼 지민은 과에서 제법 유명인사이긴 했다. 뭘로? 빈대 붙기로.



“아 배고파!!”



저거 봐 또. 과방 문을 열고 들어오며 한다는 말이 ‘배고파’다. 쟤는 프로그래밍이 잘못됐어.



“너 두 시간 전에 김밥 먹지 않았냐?”

“그건 들어가는 순간 소화 됐죠 형님~”

“그렇게 먹는데 넌 왜 살도 안찌고 키도 안 크냐.”



진심으로 신기한다는 듯 남중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지민이 토라진 듯 입을 삐쭉거린다. 그걸 보는 김남준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는 것은, 이 시커먼 남자들 중에 그나마 애교란 걸 가지고 있는 인간이 박지민이기 때문이다. 형이랑 말 안 할 거예요. 궁시렁 대던 지민의 레이더에 타겟이 걸렸다. 금세 눈을 반짝이더니만 소파에 앉아 요플레를 냠냠 먹고 있던 태형의 옆에 폴짝 하고 뛰어든다.



“태태 나 한입만~”



지민이 태형에게 입을 쭉 내민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또 한술 떠서 입에 넣어주고 있는 김태형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남들 보는 앞에서 합숟가락 까지 하고 저게 뭔 추태야. 멀찍이서 맥북을 두드리고 있던 윤기가 못 볼 걸 본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찬다. 얘들아 병균 옮는다- 한심 반 걱정 반인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지민이 숟가락을 쪽 빨곤 헤실헤실 웃었다.



“맛있다.”



박지민이 잘하는 말 또 하나 더 있지. 맛있어. 인간의 미각적 한계를 테스트하기로 유명한 학생식당 밥도 맛있다는 박지민은, 어쩌면 그냥 ‘먹는다’는 사실 자체에 홀릭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건 닭대가리 튀김이 아닌가 싶은 돈가스를 싹싹 긁어먹고도 돌아서면 속이 허전하다며 울상 짓는 놈. 사실 분석해야 할 건 박지민의 뇌가 아니라 위장이다. 넌 그런 무서운 위장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왜 돈이 없냐.



그렇다. 박지민은 돈이 없다. 대부분. 아니, 언제나. 늘. 매일. 365일 가난했다. 형 밥 사주세요. 선배 밥 사주세요.처음엔 그래 이것도 다 신입생의 특권이겠거니, 싹싹한 후배 밥 한 끼 사주지 뭐 하는 마음으로 지민을 식당으로 데려갔지만 그 밥 사달란 말이 반년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록 계속됐을 땐 애교가 아니라 그저 빈대가 되었다. 너 신입생 찬스 끝났다고 임마. 그렇게 아무리 말해줘도 박지민은 배고프단 말 뿐이다. 앵무새냐. 심지어 박지민의 빈대는 동기와 후배를 가리지도 않는다. 태형아 밥 사줘. 윤정아, 너 식권 남는 거 있니? 오빠 한 장만~



“요플레 먹으니까 더 배고프네. 남준이 형...”

“저리 가. 나 약속 있어.”

“그럼 호서기형..”

“나 잔다.....”



깨우면 디지는 거야. 아까부터 다리를 쩍 벌리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호석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역시.



“윤기 형. 전 사실 형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아시죠?”

“모르는데.”

“아이 형님. 제가 저번에 책도 들어드렸잖아요.”

“야. 이백 페이지짜리 그거 한권 들어준 거 가지고.. ”



이게 어디서 민윤기한테 사기를 쳐? 윤기가 지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쳐내는 순간 다시 과방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곤 무거운 책을 학회용 캐비닛에 넣는 정국에게 괜히 윤기가 말을 건다.



“너 요즘 맨날 1학년들 밥 사준다며. 그러지 말구 얘나 좀 구제해줘라.”



전공 책을 억지로 쑤셔 넣던 정국이 윤기의 말에 지민을 빤히 본다. 정국은 지민과 같은 학번이었다. 그리고 ...그게 다다. 같은 숫자의 학번을 달고 있는 것 말고는 더 설명할 것도 없는 관계. 수업을 같이 듣긴 하는데 그 외에 마주친 적은 별로 없다. 태형과는 적당히 알고 지내는 정국이지만 지민과는 특별한 교류가 없었다. 사실 전정국이 학교 열심히 나오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긴 했지. 1학기때 모두가 반수하는 줄 알정도로 출석을 안 하더니 이제서야 학교생활에 좀 재미를 붙였는지 요즘엔 꼬박꼬박 얼굴을 보였다.





“오늘 연수랑 윤정이 밥 사주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그렇게 말하려던 정국의 말이 끊어졌다. 지민이 붙잡고 늘어지던 윤기의 팔을 내팽개치고는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다.



“맞다 과제! 과제해야 되요.”



무슨 과제? 우리 과제가 있었나? 덩달아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한 김태형은 제껴두고 지민이 도망치듯 후다닥 과방을 나가버린다. 뭔가 말하려던 정국만 민망한 상황이 됐다. 선배 동기 후배 안 가리고 빈대 붙기가 주특기인 박지민. 무역과에서 그에게 밥 한 끼, 과자 한 봉 사준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라는 말이 나돌 만큼 유명한 공식 극 빈곤층. 그렇게 사람 안 가리고 궁상 떨기로 유명한 박지민이 가리는 단 한명이 바로 정국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오롯이 당사자인 전정국 뿐이다.



“내가 거둬줘야지 어쩌겠냐.”



정국이 얼떨떨하게 서있는 사이 성가시다는 듯 윤기가 맥북을 챙겨 일어섰다.



“나중에 과제할 때 겁나 부려먹어야지.”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하시고요. 자긴 박지민이 밥 사주고 귀가 하겠다며 설렁설렁 손을 흔든다. 그렇게 윤기가 과방을 아주 나가버릴 때까지 정국은 캐비닛 문을 붙잡고 서있었다. 이렇게 티 나게 사람을 불편해하는데 말이야.거기에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전정국이 속없는 놈은 아니니까요.





























“나 돈 없는데.. 진짜 가두 돼?”

“응. 괜찮아.”

“갔는데 막 돈 내라구 하는 거 아니냐.”



지민이 태형을 졸졸 따라가면서도 못 믿겠다는 듯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다. 지금 태형과 지민은 동기 모임에 가는 중이었다. 공식적 회비를 내야만 하는 모임에 지민은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 김태형이 돈 꿔준다고 해서 작년에 한번 갔었고, 없구나 그 후론. 확실히 동기들 보다는 형들이 훨씬 편한 게 사실이다.



“전정국이 쏘는 거래.”

“엉?”

“이번에 장학금 받아서 쏜다 했대. 너두 꼭 데려오라던데?”



엥. 벙쪄있는 지민을 끌고서 태형이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봤자 스물한 살 대학생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장학금으로 동기들 밥을 사주고 그러냐. 그 자리에 낀다는 것도 몹시 황송할 정도다. 뭔가 찜찜하고 내키진 않는 지민이었지만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입맛을 자극해오는 고기 냄새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동기 전부는 아니고 남자애들 몇몇이 모인 모임이었다. 지민은 태형의 옆 구석자리에 앉으며 나머지 동기들과 인사했다. 현식이, 명선이, 준희, 정찬이, 민호, 그리고 전정국. 저와 가장 동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는 정국과 눈이 마주칠세라 지민이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니 통장을 털겠다며 엄포를 놓는 놈들 앞에서도 정국은 여유롭기만 했다. 지민은 괜히 앞에 있던 물수건만 만지작거렸다. 태형이 생고기를 불판 위에 올리자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난다. 아... 배고프다. 지민은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점심 때 학식 먹고, 오후 세시에 김밥 두 개 먹은 개 끝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고기야. 반가워서 눈물마저 핑 돌 정도다.

















정국은 아까부터 계속 지민의 테이블을 쳐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고기는 몇 점 입에 넣지도 않았다. 아무리 몇 명 안 모였대도 사내놈들이다보니 불판 위의 고기가 금방금방 동이 났다. 벌써 두 번은 더 추가시킨 것 같다. 심지어 입 짧은 태형마져도 신이 나서 쌈을 싸먹고 있는데, 정국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지민만 아까부터 계속 깨작대는 중이었다. 불판에 탄 마늘 같은 거나 주워 먹고. 정국은 매의 눈으로 지켜보다가 지민이 있는 테이블의 고기가 떨어질라 치면 바로 종업원을 불러 삼겹살을 추가시켰다.



근데 그럼 뭐해. 다 다른 놈들 입으로 들어가는 걸. 엄마한테 카드까지 받아 나왔는데 그 돈이 다 엄한 데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 맛이 없나. 정국은 불판위의 고기를 다시 하나 입에 넣어봤다. ...괜찮은데. 나머지 녀석들이 담배 좀 태우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우고 테이블에 혼자 남겨져 있던 정국은 화장실에 갔다 돌아오는 김에 지민이 있는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태형은 옆에서 통화 중이었고 지민만이 젓가락을 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기 별로 안 좋아해?”



듣기로 박지민은 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아냐! 맛있어, 대박 맛있는데 진짜.”



근데 왜 못 먹어? 정국은 물어보려다 말을 돌렸다. 괜히 체할까 싶어서.



“뭐 음료수 같은 거 마실래? 이모 여기요-”

“괜찮아. 물 마시면 돼!”

“탄산 별론가. 아님 소주 마실래?”

“아니!!”



지민이 얼굴까지 시뻘개져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낄낄대며 통화 중이던 태형마저 돌아볼 정도였다.



“진짜 괜찮은데에...”

“어...”



..그래. 딱히 할 말이 없다. 정국은 민망해져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아무 알림도 없는 폰을 슥슥 만져보다가,담배 냄새 폴폴 풍기며 돌아온 동기들 틈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지민은 남은 고기들을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아까 막 구웠을 때 따듯한 거 먹지. 불판 위에서 이미 다 식어빠진 걸 왜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보 같이.

























2차로 술 마시러 가겠다는 놈들 틈에서 태형과 지민은 쏙 빠져나왔다. 같이 가자며 몇 번이나 붙잡는 녀석들을 뿌리치고 온건 1.김태형이 피곤해서 2.박지민이 돈이 없어서. 아무리 뻔뻔한 박지민이지만 2차까지 얻어먹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태형도 없는 자리에 태형의 돈을 꿔서 갈 수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까지 그 자리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돈 진짜 많이 나왔겠다 그치.”



최소 십오인 분은 더 먹은 것 같은데. 지민이 제 머릿속으로 나름 계산을 해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태형은 버스시간이나 찾아보고 있다.



“카드 긁던데, 막, 엄마한테 혼나는 거 아냐?”

“걔 잘살잖아.”



태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랬지 참. 아버지는 무슨 특허를 내셔서 사업을 하시고 어머니는 교수랬나? 언젠가 새학기 때 술자리에서 흘리듯 들었던 정국의 집안 얘기를 지민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정국이 지갑 사정을 굳이 박지민이 걱정할 게 뭐냐.



“버스 온다, 나 갈게-”

“어엉.. 잘 가. 낼 보자.”



태형이 손을 흔들곤 버스에 냉큼 올랐다. 태형이 탄 버스가 멀어지는 걸 보던 지민이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가 어쩐지 귀티가 나더라니까.’

‘저번에 한번 차도 끌고 오지 않았어? 형 차라고는 하는데 뭐..’

‘걔 신고 있는 운동화 저두 사고 싶어서 알아봤던 건데, 가격 땜에 포기했잖아요.’



그럴 동안도 지민은 젓가락만 쪽쪽 빨며 그 얘기들을 모두 듣고만 있었다. 전정국이라고 하면 입학식 때 스치듯 봤던 얼굴이 기억났다. 남색 코트에 목도리를 하고. 그러고 보니까 수강신청 설명회 때 옆자리에 앉았었구나. 그렇게 귀티가 났나? 잘 모르겠다. 그냥 엄청 잘생겼었단 것밖엔 생각이 안 났다.



‘왕자님이네 왕자님.’



어수선한 대화를 윤기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때 윤기의 말을 들으며 지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배고프다 밥 사달라 소리를 달고 살며 염치는 애초에 달고 태어나지 않은 듯 뻔뻔스러운 박지민이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과 동기며 선후배들이 지민에게 밥을 사주고, 간식을 사주며, 그의 의식주 중 ‘식’을 챙겨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귀엽거든. 졸라.



“하씨.. 내가 이제까지 먹은 초코우유는 초코우유가 아니었다.”



지금도 김태형이 매점에서 사준 신상 초코우유 하나를 먹고는 마치 신세계를 경험한 듯한 격한 리액션 중이다.뭘 사줘도 맛있다고 잘 먹고, 배부르면 기분 좋아 아양까지 떨어주니 박지민의 주위 사람들은 헛돈을 쓰고도 마치 재화를 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어찌 보면 그것도 재주다.



“진짜 대박 맛있어. 어떡해. 아껴 먹을래..”



그렇게 맛있어? 딸기 우유를 산 태형이 궁금하단 듯 입을 쭉 내밀자 지민이 빨대를 물려준다. 오 존맛. 나두 그거 먹을 걸. 태형이 아쉬운 소릴 한다. 그리고 졸지에 과방 한번 들어가려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전정국은 제가 더 민망해져선 굳었다. 뭐 살다보면 빨대랑 숟가락 그런 거 공유할 수도 있긴 한데. 저에겐 말 한번 먼저 건 적 없는 지민이 그런다는 게 좀. 좀 그랬다. 아니, 좀 많이.



“전정국, 심교수님이 너 찾던데. 발표준비 잘 되가냐고.”

“어. 방금 만나고 왔어. ..안녕.”



정국이 태형의 옆에 있던 지민에게 인사를 했다. 빨대만 물고 태형의 뒤로 빠져있던 지민이 깜짝 놀라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런다. 안녕... 존나 무슨 유치원생들이세요. 태형이 정국과 지민을 이상한 듯 보곤 활기차게 말했다.



“어제 잘 먹었어. 담에 커피 쏜다! 물론 매점에서...”



이천원 이하로 골라. 그딴 소리나 하던 태형이 갑작스레 정국의 뒤를 향해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호석이 형 왜 제 게임 초대 씹냐고요- 그러면서 말도 없이 먼저 가버리는 탓에 태형의 뒤에 숨어있던 지민과 정국만 남았다.어, 어? 이대로 그냥 태형을 따라 가버리기엔 몹시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제 박지민도 전정국한테 얻어먹은 게 있고 말이다.



“나두... 어제 진짜 잘 먹었어.”

“잘 못 먹던데.”



박지민에게 단 1,300원어치의 재화를 베풀어도 13만원을 쓴 것만큼의 리액션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과장된 사실만은 아닌데. 어제 전정국은 그보다 더한 돈을 쓰고도 조금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괜히 다른 놈들 배만 불려줬지 뭐. 박지민은 고기 1인분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불판에 불이 다 꺼졌을 때 남은 고기나 주워 먹은 게 전부였지.



“아냐~ 나 디게 많이 먹었는데? 담에 나두 커피 살게!”



아직까지 박지민한테 누가 뭘 얻어먹은 전적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그... 태형이랑 같이.”



그렇게 덧붙이곤 어색하게 실실 웃으며 걸음을 옮겨버린다. 인사도 없이. 정국은 태형을 따라 후다닥 사라지는 지민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남들한텐 잘만 떤다는 헤픈 애교며 과장된 리액션이며 그런 거 사실 전정국도 내심 궁금하긴 한데, 어째 말만 좀 걸려 해도 박지민은 놀란 토끼마냥 도망가 버리고 만다. 정국은 과방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다가 푸욱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싫은가? 이젠 그런 생각이 드는 지경이다. 근데 싫어할 만큼 뭘 한 적도 없는데?

























*











“그거 제가 진짜 좋아하는 과잔데..”



한입만 주세요. 예? 저 지금 배고파서 현기증 난다니까요. 지민이 칭얼대며 호석에게 엉겨붙어왔다. 자기 저혈압인 거 모르냐며 씨알도 안 먹힐 소리까지 해댄다. 그걸 보며 재밌다는 듯 호석과 남준이 지민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해 지민아.”



과자를 줄 것처럼 하더니 자기 입에 넣어버리는 행동에 지민이 더 안달이 나선 방방거렸다. 아 진짜 먹고 싶다고요... 같이 밥 먹어줄(밥 사줄) 태형도 없고, 점심에도 고작 편의점 샌드위치 하나 먹었더니 이깟 과자 한 조각에도 자꾸 집착이 갔다. 사실 안 먹어도 그만인 거긴 한데 호석과 남준이 그걸로 놀려대니 이상한 오기가 생긴다.



“가져가서 먹어 지민아. 마음껏.”



키 차이를 이용해 과자봉지를 높이 치켜드는 남준에게 안될 걸 알면서도 달려들어 폴짝폴짝 뛰었다.



“불쌍하다 지민이. 이제 좀 주자.”

“주고 싶은데 지민이가 너무 작아서 안보여.”

“너무해 진짜!”



키도 큰 데다 팔까지 긴 남준에겐 당연히 닿지도 못할 박지민이다. 그리고 과방 앞을 지나다가 톤 높은 목소리에 혹시나 싶어 들른 정국의 눈에, 꼭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파닥대고 있는 지민이 들어왔다. 아유. 용쓴다 우리 박그지! 아이 기특해! 아 진짜 형들 못됐어여. 토라진 건지 애교인 건지 삐진 듯한 지민을 호석이 뒤통수까지 쓰다듬어하며 마구 귀여워한다. 지민아 형이랑 매점갈래? 호석이 회유책으로 다정히 물어오자, 인상을 쓰고 있던 지민이 금세 방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 진짜 배고파 죽을 거 같아요 형...



그 말을 듣던 정국은 과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리곤 지민의 팔을 잡아챘다.



“잠깐만 데려갈게요.”



그 말 한마디. 그 외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지민을 데리고 나가버리는 정국을, 남준과 호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저기 왜...?”



지민이 정국에게 속 시원히 묻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간 곳은 1층에 있는 커다란 매점이었다. 정국은 들어가자마자 바구니를 하나 빼서는 닥치는 대로 과자들을 담기 시작했다. 봉지 과자, 박스 과자부터 빵, 샌드위치, 음료수들까지.



“이거 좋아해?”

“어? 좋아하긴 하는데...”



다른 말론 싫어하는 게 없긴 한데... 우물쭈물대는 지민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정국은 같은 과자를 아예 싹 다 바구니 안에 쓸어 담았다.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바구니가 꽉 찼을 때야 정국이 카운터로 향했다. 그때까지 쩔쩔매며 옆에 서있던 지민이 화들짝 놀라선 정국을 쫓아갔다.



“너설마 그거 다 사게?”

“응.”



맙소사. 문화 충격 받은 듯 놀라있는 지민 옆에서 정국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카운터 직원이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삑삑삑. 같은 소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봉지에 담기기 시작한 과자가 아주 커다란 봉지로 두 봉지를 꽉 채웠다.



“육만 이천 팔백 원입니다.”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카드를 내밀곤 서명을 한다. 미친. 누가 과자를 육만 원 어치를 사? 밥도 아니고 과자를.돈지랄이 따로 없다. 심지어 엠티 갈 때도 이 정도는 사본 적이 없었다. 지민이 뜨악하고 있거나 말거나, 영수증은 버려달라고 말한 정국이 카드만 챙기고선 양 손에 봉지를 들었다. 먼저 매점을 나가는 정국을 보던 지민은 눈치를 보다가 졸졸 정국의 걸음을 따라갔다. 한산한 로비에 우뚝 멈춰선 정국이 지민의 손에 무거운 봉지를 쥐어준다.



“나 수업가야 돼서.”

“어? 그럼 이거는?”



갑자기 절 왜 데려온 건지도 모르겠고, 이걸 왜 주는지도 모르겠다. 짐꾼으로 쓰려는 건가. 졸지에 양손이 다 묶여선 쩔쩔매고 있는 지민 앞에서 정국은 휴대폰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너 다 먹어.”

“어? 아니 난 괜찮...”



그렇게 남한테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아양도 잘만 떠는 박지민은, 전정국이 뭐라고 해도 아니라고만 한다. 정국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깟 먹을 거 가지고 치사하게 애 하나 놀려먹는 것도 사실은 싫었다. 물론 지민의 반응이 재밌어서 다들 그런 거란 걸 알면서도.. 어쩌면 저에게만 그렇게 반응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심술인지도 모르겠다.



“꼭 혼자 먹어.”



정국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하곤 돌아섰다. 사실 벌써 교양 수업 시작한 뒤다. 계단으로 급한 듯 뛰어 올라가는 정국을 보던 지민의 얼굴이 금방 터질 것처럼 시뻘개졌다.



“대박...”



집까지 들고 가기도 힘들겠다. 다 먹으려면 한 달은 걸리겠는데. 양손에 들린 무게만큼이나 지민의 가슴 속이 묵직해졌다.





























*









지지리 궁상 박지민의 공식적 생일이었다. 자기 생일 상 미리 봐달라고 그 전부터 두어 번은 더 얻어먹고 다닌 박지민인지라 모두가 실제 생일에 큰 의의를 두진 않았지만. 쨌거나 생일은 생일인 거다. 아침부터 남준은 컵라면 한 박스를 지민에게 하사하였으며, 호석은 1회 술자리 상품권을 증정하였다. 민윤기는 이제까지 내가 너 먹인 것만으로도 삼십첩반상은 차리고 남는다며 매정하게 굴었지만 그래놓고 어디 데려가서 뭐라도 사 먹일 민윤기임을 지민도 모르지 않았다. 하. 생일이란 존나 좋은 것.



“지민아 선물 뭐 갖고 싶어?”



강의실에 앉아서 교수님이 들어오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태형이 물었다. 마땅히 그럴듯한 선물을 생각해내지 못한 참이라 그냥 지민이 원하는 걸 사주기로 결정한 후였다. 그렇게 막상 대놓고 물어보니까 뭐라고 말 못하겠다.필요한 게 너무 많기도 하고.



“으아. 못 정하겠어.”

“이때가 기횐데? 나 과외비 받은 거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구 말해.”



끄응.. 지민이 한참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운동화가 필요하긴 한데.. 그냥 먹는 걸 사달라구 할까. 인생 최대의 고민에 당면한 지민의 앞으로 우유가 하나 놓였다. 김태형 박지민 자리에 똑같이 초코우유. 그때 박지민이 맛있어 죽겠다고 했던 그 우유다. 오~ 땡큐~! 태형이 이게 웬 횡재냐며 우유를 뜯었다.



“생일이야?”



정국이 앞자리에 앉으며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의 얼굴이 금세 후끈해졌다. 그때 정국이 사준 과자는 먹다먹다 질려서 찬장 속에 고이 보관해두고 있는 채였다. 당분간은 과자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오늘 박짐 생일이야! 우물쭈물대고 있는 지민 대신 태형이 더 신나서 대답했다. 정국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것이 느껴져서, 지민은 왠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축하해.”



오늘만 이십 번은 더 들은 말인 것 같은데, 그게 왜 그렇게 귀에 걸린 것처럼 간지럽고 어색한 건지.



“어어... 고마워.”



지민은 그제야 정국을 보며 실실 웃었다. 여러모로 지민은 정국이 불편했다. 누구하고나 쉽게 잘 어울리는 지민이지만, 뭐랄까 전정국한텐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져 있는 것처럼 다가가기가 참 어렵다. 실은 다가가려고 노력조차 해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꼭 부딪쳐봐야 아나 뭐. 그냥 이렇게 언뜻 보기만 해도 정국은 저와는 참 많이 달랐다.



“선물로 밥 사줄게.”

“아냐 괜찮..”

“생일이라며.”



그 말에는 두 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짐나! 전정국한테 비싼 거 사달라구 해! 속도 모르고 태형이 옆에서 맞장구를 쳐댔다. 지민은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나가는 빈 말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바로 정국과 밥을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저장조차 되어있지 않았던 정국의 번호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문자라면 어떻게 대충 말을 돌리거나 다음을 기약하겠는데 전화가 와선 시간 있냐고 대뜸 묻는 말에 지민은 어쩌지도 못하고 휘말려버렸다. 행거에서 몇 가지 없는 옷을 보며 한참 고민하던 지민이 결국은 매일 입고 다니는 야잠을 걸쳐 입고선 부랴부랴 집을 나왔다. 자취방에서 멀지 않은 정류장으로 갔을 땐 청자켓을 입은 정국이 절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엉?”



어딜 가? 기껏해야 학교 앞에서 고기나 사주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국은 지민이 오자마자 대뜸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택시에 탄 지민은, 저도 모르게 옆에 앉은 정국을 힐끔거렸다. 원래도 언제나 말끔하게 하고 다니는 정국이긴 하지만 오늘 따라 더욱 테가 났다. 괜히 기죽고 그러네. 지민은 택시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약간 우울해졌다.











정국을 따라간 곳은 생전 처음 가보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가족 단위의 고품격 모임을 가질 때나 아니면 선 자리나, 아니면 데이트 할 때나 올 법한 그런 분위기. 지민은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에 약간 질식할 것 같았다. 메뉴판을 보지만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가격도 이상하게 써있어서 당최 못 읽겠는데, 아무튼 비싼 데라는 것만은 알겠다.



“여기 되게 맛있어.”



그때 삼겹살을 앞에 두고 제사 지내듯 했던 게 생각이 나서, 정국은 일부러 여기서 먹어본 맛있는 것들이란 것들은 다 시켰다. 둘이 먹기엔 오바다 싶을 만큼 많은 양이긴 했지만 뭐가 입에 맞을지 알아야지. 고작 박지민 하나 맛있게 먹는 거 보겠다고 이 생쇼를 할 정도인가? 그런 생각조차 못할 만큼 정국은 지민이 궁금했다.



“하하. 내가 이런 걸 다 먹어보네.”



맛있다고 열심히 포크질은 하고 있는데 얼굴은 당장 체할 것 같은 표정이다. 정국은 무슨 이 레스토랑 셰프라도 된 것마냥 지민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선배들이 말로는 미각이 없다고 회자될 만큼 뭐든 잘 먹는 박지민이라는데 지금 전정국 앞에 앉아있는 박지민은 딴 사람인가 보다. 여기도 입에 안 맞나. 아니면, 내가 안 맞는 건가?



“목마르면 와인 한잔 할래?”

“아니!!”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하곤 주위의 눈치를 봤다.



“나 진짜 이거면 돼.”



고급 글라스에 나와서 그런지 물도 그냥 물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



“이런 데 온 거 알면 김태형이 완전 부러워하겠다. 아.. 학교가면 자랑해야지.”



존나 누가 봐도 너무 립서비스인 걸. 지민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환장하고 먹었을 음식들 앞에서도 당최 이게 무슨 맛인지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일단은 전정국과 단 둘이 겸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으며, 먹는 제 모습이 너무 어색해보이진 않을는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걱정들만 앞서서 이미 체한 기분이다.



“태형이랑은 작년부터 친했어?”

“응. 계속 같이 다녔지. 넌 작년에 학교 잘 안 나왔지? 나는 너.. 반수하는 줄 알았어.”

“작년에 학교를 제대로 안다녔더니, 아직 애들이랑 좀 어색해.”

“애들도 너 잘 몰라서 그럴걸. 친해지는 거 별로 안 어려운데.”

“밥 혼자 먹는 것도 좀 외롭더라. 그래서 맨날 후배들 밥 사주는데.”

“아...”



뒤에서 왕자님이라 불리는 전정국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긴 했구나 싶어서 지민은 어떤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래 사람이란 자고로 모두가 결핍이 있는 법이다. 그게 지구의 크기로 치면 이 쪼그만 한반도만큼의 모자람인지, 아니면 지구에서 바다를 다 합친 것만큼의 모자람인지 그런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인 거지.



“불쌍하지. 그러니까 같이 먹어줘 나랑도.”

“어? 근데 우리 거의 학식만 먹는데..”



허구언날 옷 산다고 용돈 탕진하고 거지로 사는 건 김태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지민보다 조금 나은 거지일 뿐이지 거지는 거지다. 정국이 자긴 상관없다면서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왕자와 학식이라니, 졸라 가당치도 않은데 말이야.





















그 후론 좀 편안해져서 밥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주로 지민이 학과 얘기를 하면 정국이 신기해하면서 이것저것 물어오는 식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후식은 뭘로 준비할까요 하고 묻는 웨이트리스에게 정국은 괜찮다고 하곤 지민을 데리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근처 가까운 곳에 있는 조용한 카페로 들어가서야, 지민은 제가 지갑을 열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커피 산다고 말도 했으니까... 근데 뭔 아메리카노 한잔이 만원에 육박하는지 모를 일이다. 과연 잔액이 얼마 남았을지 모를 체크카드를 긁으며 지민은 조마조마 했다. 잔액 없다고 뜨면 어쩌지? 다행히도 결제가 완료되고 영수증이 뽑혀 나왔다. 지민은 무려 두 잔에 이만 원 가까이 하는 아메리카노를 보며 단 한모금도 남기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정국은 테라스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비싼 데면 직접 가져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트레이를 들고 옮기던 지민의 시야에 정국이 담겼다. 잘생겼고, 성격도 좋고, 돈도 많구. 그러고 보니까 1학년 애들이 정국선배 정국선배 입에 달고 다니던 것도 생각이 났다. 박지민도 1학년 해봐서 아는데, 그리고 여전히 그렇기도 한데, 역시 밥 잘 사주고 잘 베푸는 선배가 짱인 것이다. 에이. 존나 비현실적이야.



“잘 마실게.”

“아냐...”



고작 구천 원짜리 아메리카노인데 뭐...



“아 맞다. 이거.”



도대체 학교에서 파는 천오백 원짜리 커피랑 차이를 모르겠는데..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지민의 앞에 정국이 가방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딱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포장지.



“풀어봐.”



아이씨. 이거 선물이지. 그치. 지민은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도 같았다. 존나 황송한 식사 대접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인데 선물이라니요. 지민이 정국의 눈치를 살피곤 포장지를 아주 조심조심 뜯었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하얀색 후드티다. 지금 딱 입기 좋은. 근데 이거 되게 비싼 거 아닌가. 직수입으로만 구할 수 있는 해외 브랜드라서 구하기 힘든데다, 겁나 비싸다고 태형이 찡찡댔던 게 생각이 났다.



“이건...”



겁나 부담스럽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냥 길가다 옷가게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브랜드도 아닌데 언제 이걸 구했나 싶어 식은땀마저 삐질 흐른다. 왠지 이거 받으면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태형이 주면 부담이고 뭐고 덥석 받겠는데, 아직까지도 많이 낯선 정국이라 지민은 더 내키지가 않았다.



“나 오늘 밥 사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고 진짜 괜찮거든..”

“........”

“그, 그냥 너 입어. 얼추 사이즈 맞을 거 같은데..?”

“나랑 안 어울려. 그리고 너 주려고 산 건데.”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듯 정국이 말한다. 그 앞에서 지민은 또 괜히 위축이 됐다. 그리고 한편으론 혼란이 오는 것이다. 전정국이 굳이 잘 보이고 로비해야 할 만큼 제가 뭐나 되는 위치도 아니고, 그럴 만큼 전정국이 아쉬운 입장인 것도 아닌데. 얘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지?



“정국아... 너 원래 이렇게 아무한테 잘 해주고 잘 사주고 그래?”



지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 전정국이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살아온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무슨 석유 부자 아들도 아니고 이건희 손주도 아닌데. 아무한테나 비싼 밥 사주고 비싼 선물 해줄 만큼 돈이 썩어나진 않는다. 정국이 이렇게까지 뭔갈 사주고 해주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했던 적은 지난 과거를 샅샅이 뒤져봐도 없었다.



“난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 말이 그 순간 자연스레 나오지 못했던 건, 눈에 띄게 어두워진 지민의 얼굴빛 때문이었다. 밥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 하느라 많이 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달랐다.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던 지민이, 정국은 다시 너무 어려워졌다. 말문이 턱 막힌 정국을 보며 지민이 애써 웃는다.



“그럼.... 나 거지인 거 불쌍해서 그래?”

“무슨 말이 그래.”

“아님 신기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뭐 그런 건가. 박거지 박거지 거리니까 진짜 거지인 줄 알고 도와주고 싶었나?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 근육이 아파올 때 쯔음 지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안다. 자격지심인 거. 전정국은 이해조차 못할 열등감인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냥 친구한테 밥 좀 사주고 선물 좀 해주는 게 뭐라고 이렇게 까칠하게 굴 일인가. 근데 박지민이 그만큼 모자라고 결핍된 인간인걸, 제가 이따위 궁상맞은 인간인 걸 어쩌겠는가. 순수한 선의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꼬인 인간인 걸.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울대가 따갑게 아파왔다.



“학교에서 보자.”

“.......”

“아, 밥 잘 먹었어. 선물은.. 받은 걸로 칠게.”



지민은 정국이 잡기도 전에 후다닥 돌아섰다. 이제껏 열심히 도망 다닌 것처럼 다시 그렇게. 아이씨.. 구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그거 몇 모금 밖에 못 마셨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걸 아까워하는 제 자신이 참 싫다.



결국 이렇게 궁상맞고 찌질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그렇게 도망 다녔던 건데. 애석하게도 망해버렸구나. 박거지한테는 짝사랑 그것도 사치라는 걸, 잊지 말았어야 했다. 고급 상점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지민은 찔끔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울지 말자. 울 일이 뭐가 있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中



































*

















“박지민 진짜 밥 안 먹어?”

“.........”

“사준다니까? 놀부 부대찌개 가자. 너가 좋아하는 거.”

“....됐어요.”



야 들었냐. 지금 박지민이 됐다고 했지?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쟤 열나나 봐봐. 윤기의 지시에 호석이 달려들어 지민의 이마에 열을 체크한다. 그것조차 맥없이 엎드려 가만히 받아내던 지민이 푸욱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과방 책상 한구석을 차지하곤 엎드려서 하루 종일 저 상태다. 열은 없는데.



“저 좀 내버려 두라고요.”



대꾸하던 지민은 목소리가 떨려와 말을 끊었다. 흐이씨. 코를 훌쩍이고 있는 지민을 남겨두곤 곧 윤기와 호석이 눈치를 보며 밥을 먹겠다고 나간다. 지민아 진짜 안 먹어? 빵이라도 사다줄까? 나가기 전 호석이 물어오는 말에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그지 아니거든. 그런 오기였다. 그렇게 사주세요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이 없던 박지민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저를 따라다니던 빈곤은 어느새 성격의 일부처럼 되어버렸달까. 가난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지! 그 말을 신조처럼 여기고 살아온 건 아니어도, 어차피 떨쳐낼 수 없다면 적응하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조금 뻔뻔하고 염치없으면 어때?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게 짱인 거지.



그런 박지민의 일상이 흔들리는 것은 전정국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있는지조차 몰랐던 박지민의 자존심 혹은 자존감을 뒤흔드는 웬 녀석. 이래서 애초부터 다가가기가 무서웠던 거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거지. 전정국이랑 조금만 가까워졌다간 박지민이 이렇게 폭망할 거란 걸. 전정국만 아니었어도 지금 박지민은 민윤기한테 놀부 부대찌개 얻어먹으면서 아양이나 떨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의식주 외에 사치스러운 감정이 끼어들면 인생이 고달파지는 법이다.



이 와중에도 배는 고픈 게 더 짜증나네.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짐나 어디야?]

[과방ㅜ.ㅜ]

[밥 머겄어?]

[아닝..배고파 나 죽어...]

[ㅇㅇㅋ갈게 기둘려]

[빨리와...ㅠㅠ]



태형에가 답장을 하고서 지민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태형이 오면 뭐라도 간단히 먹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김밥천국이나 갈까. 아님 맥도날드? 학교 앞에 중국집 가서 짬뽕 먹을까. 아냐, 밥을 먹어야겠다. 속으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음식을 꼽고 있는데 벌컥 과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태형이 왔구나 싶어 발딱 몸을 일으킨 지민의 눈에 정국이 들어왔다. 하얀색 후드를 입은.



정국과 지민의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어... 어... 여기서 안녕이라고 말하면 좀 늦은 타이밍인가. 흔들리던 지민의 눈이 정국이 입고 있는 후드로 향했다. 어제 선물이라고 내밀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거봐. 안 어울리지.”



정국이 말했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사이즈만 조금 컸으면 됐을 건데 그런데 좀... 작긴 하네.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모두가 귀엽다고 이뻐하는 박지민이 저한테만 거리를 두는 게 억울하기도 해서 나름 노력이란 걸 해본 건데, 그게 기분이 나빴다면 아마 제 방식이 잘못된 걸 거다. 정국은 순순히 인정했다. 누구한테 자연스레 다가가고 그런 거 사실은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라서 그저 할 수 있는 건 물량공세 뿐인 걸. 이미 박지민 이뻐해주는 사람은 차고 넘치는데 그 중에서 튈려면 더 격렬하게 잘해주는 방법이 최고라 생각했던 판단 미스였다. 어젯밤 머리가 터지게 고민하고 허공에 발차기를 날린 결과로, 정국은 이제 좀 알 것도 같았다. 이십만 원 어치의 선물을 준다고 이십만 원 어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웃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랬어. 나한텐 안 그러니까.”

“........”

“나만 보면 불편해 하길래. 너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

“아 혹시 진짜 싫어하는 거면...”



정국이 말을 멈추었다. 그럼 전정국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민은 발가락 끝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정 반대다. 너무 다르니까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도망친 건데. 그렇게 빙 돌아서 내달린 곳은 원점이었다. 전정국을 두고 동그란 트랙을 허둥지둥 달려온 셈이다. 역시 지지리 궁상맞은 인생에 필수 요소는, 지질한 짝사랑 아니겠는가.



“아냐, 안 싫어! 나도.. 어제 화난 거 아닌데.”



니가 너무 잘나서, 상대적으로 내가 너무 초라해서, 어울리지 않을 걸 알아서. 튕겨내는 척 사실은 튕겨져 나온 거지. 전정국 앞에서 만은 박거지가 아니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사주세요, 한입만요, 배고파요 그런 말은 누구 앞에서도 불쑥불쑥 잘만하면서도 위장 깊숙이 어딘가에 꽁꽁 숨겨져 있던 그 한마디 말은 뱉어내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도 지민은 용기란 것을 내봤다. 박지민 뻔뻔하니까. 염치도 없으니까.



“사실 내가 너 좋아해서 피한...”



지민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정국이 지민을 확 끌어안았다. 순간 지민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아.. 밥을 못 먹어서 이런 건가.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정줄 놓고 멍하니 정국에게 안겨있던 지민이 어리둥절한 채 정국을 올려다봤다.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구나 너. 정국이 지민을 빤히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지민을 아주 꽈악 끌어안는다. 정국의 후드에서 싸한 새 옷 냄새가 났다.



“정국아...”

“........”

“나 배고파.”



진심으로 배고프다. 지민은 그 말을 하며 정국의 목에 매달렸다. 몸을 지탱하고 있기가 힘들어서라고 속으로 핑계를 대긴 했지만. 맞닿은 가슴팍이 하도 쿵쾅쿵쾅 뛰어서 실은 배가 고파서인지 심장이 떨려서인지도 분간을 못하겠다. 아마 둘 다겠지만.































*







“아아아 한 입만요.”

“이거 한입 먹으면 끝나거든?”

“저 현기증나요 형. 어제 병원 갔더니 빈혈이래요. 불쌍하지 않아요?”

“야, 난 영양실조야.”



민윤기가 그렇게 말하니까 웃을 수가 없다. 지민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신다. 결국엔 윤기가 픽 웃으며 지민의 입에 남은 떡을 넣어주었다. 민윤기는 박지민이 떡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걸 재밌단 듯 보고 있다. 그리고 박지민이 떡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걸 재밌단 듯 보는 민윤기를 노려보는 전정국이 있다. 그리고 박지민이 떡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걸 재밌단 듯 보는 민윤기를 노려보는 전정국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김태형이 있다. 네. 개판이구요.



“가자, 박지민. 접때 생일 그냥 넘어간 거 밥으로 때울게.”



오늘따라 민윤기님은 왜 이리 자비로우신 건지. 윤기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크게 쏘시기로 마음먹은 듯싶다. 우와 진짜요? 신나선 벌떡 일어나는 박지민은 아마 눈치가 죽어라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전정국이랑 그렇게 삽질을 했겠지. 마치 꼬리 흔들며 개껌 따라가는 멍멍이마냥 홀려있는 지민의 팔을 정국의 손이 잡아챘다.



“오늘 나랑 과제해야 되잖아.”

“.....어?”



과제 없는데? 난 모르는데? 지민이 제가 기억 못하는 과제가 있는지 기억을 뒤질 동안 정국은 태연자약하게 가방을 챙기며 지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저희 오늘 밤새도 간당간당해서요. 밥은 담에 사주세요 형.”

“뭐야. 다음은 없다 박지민.”

“안 돼요 형님.. 담에 꼭!!”

“가자.”



정국이 지민을 힘주어 당기며 질질 끌고 나간다. 니들은 무슨 과제가 맨날 있냐? 묻는 윤기에게 태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전정국이랑 박지민 둘만의 과제가 있는 모양이죠 뭐.



























“지민아.”

“응?”



와씨 치즈 대박! 이건 찍어야 돼. 두꺼운 치즈 돈가스를 찰칵찰칵 휴대폰으로 촬영하던 지민이 그제야 정국을 본다. 박지민을 보는 전정국의 표정은 아주 진지하다. 눈앞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돈가스 따위는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고, 물론 아까 말했던 과제 그딴 것도 없다.



“한입만 그거 안 하면 안 돼?”

“으으응?”



지민이 못 알아들은 척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밥 사달라고 그것도 안하면 안 되나.”



그냥 멍청한 표정이나 지으면 넘어가줄 줄 알았는데 전정국은 완고하다. 뭔가 엄청 눈치 주는 듯한 느낌에 지민은 당황스러웠다. 20년이 넘게 그러고 살았는데 그걸 어떻게 안 해.. 이쯤 되면 이건 생계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다.



“내가 다 사주잖아.”

“아니이.. 너한테 맨날 얻어먹기도 그렇고..”



전정국한테 맨날 얻어먹기 그렇다고 남한테도 얻어먹겠다는 박지민은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그냥 내 간이고 쓸개고 다 빼먹으라고, 할 수만 있다면 정국은 제 카드라도 지민에게 주고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박지민 자존심 다칠까 조심스러운 것뿐이다. 궁상이면 궁상 자존심이면 자존심 둘 중 하나만 해주면 안 되나요.



밥 사달라고 애교 부리고, 사람들은 좋다고 재밌어하고, 가끔은 밥 사준단 미끼로 지민을 데리고 노는 것도 엄청나게 거슬렸다. 그것도 모르고 박지민은 먹을 거만 주면 좋다고 꼬리나 흔들지. 그리고 남들이 먹던 빨대랑 숟가락으로 덥석덥석 먹고 그런 것도 진짜 싫다. 간접키스 아닌가 그거. 이건 전정국과 박지민이 사귀기 훨씬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포인트다. 물론 정국은 거기까진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중 가장 엄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

“아, 안할게. 안 해볼게...”



결국 그 눈빛에 깨갱하고 마는 박지민이다. 그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렇게 맨날 배고파?”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입에 돈가스를 넣는 지민에게 정국이 물었다. 지민은 입에서 사르르 녹는 치즈에 금세 황홀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걸. 정말 그렇게 먹을 거에 집착하면서도 살이 찌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아마 박지민 몸 안에 결핍이 많은 탓이라.



“나도 그래.”



정국이 지민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전정국도 마찬가지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안고 있어도 안고 싶고,가져도 갖고 싶고. 그게 어떤 기분인지를 정국은 최근 들어 뼈저리게 알아가는 중이었다. 전에는 박지민이 자기한테서 도망만 안 가도 좋겠다 싶었는데, 제 옆에 완전히 꽉 잡아두고 난 뒤에도 뭔가 부족하고 더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 박지민을 꼭꼭 씹어 삼킨다고 해도 배가 고플 걸 정국도 잘 알았다.







극도의 빈곤 속에서든, 넘치는 풍요 속에서든 자꾸 허기가 지는 것은 아마 박지민도 전정국도 피 끓는 청춘이기 때문이라.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사랑한다고 가난을 모르겠는가. 청춘이기에, 청춘이므로, 청춘이라서.전정국 박지민은 언제나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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