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val




잭 디자이너의 연락을 받고 대표는 도형과 규빈을 포함한 소속 모델들의 프로필을 보냈다. 잭은 자신의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있는 규빈과 도형 중에서 피날레를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굴 딱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표는 둘을 테스트라는 이름 아래 런웨이를 걷는 영상을 찍고, 프로필 촬영도 다시 한 것인데 그게 더 선택에 혼란을 주었다. 


테스트의 결과는 50:50 대표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잭과의 긴 통화 끝에 결국은 피날레에 두 사람을 함께 올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제야 한시름 놓긴 했지만 둘의 관계를 모르는 대표는 이것들 또 싸운다거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바락 대들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특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한규빈이. 제발 이번 쇼가 아무 탈 없이 끝나주길 바라며 그들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넣었다. 




"어, 어떻게 됐어? 결과 나왔어?" 

-네, 도형이 형이랑 같이 피날레 오르는 걸로, 그런데‥

"헐, 같이? 그럴 거면 테스트는 왜 했데? 그런데 뭐?" 

-그, 특별 게스트로 김혁이랑… 

"아‥. 어어. 알겠어. 끊어." 


규빈은 통화를 끝내고 아직 통화 중인 도형을 쳐다보았다. 그도 이번 쇼에 대해서 통화를 하는 듯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형도 전화를 끊고는 규빈을 보았다. 


"축하해. 피날레." 

"너도, 뭐야 이게. 허무해." 

"그래도 나는 자기랑 오랜만에 같이 런웨이 서니까 설레는데." 

"그건 나도. 음‥ 근데 들었어? 그 특별‥"

"응, 걱정 마." 


도형은 웃으며 규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규빈의 머리는 시끄러웠다. 김혁이야 뭐 지금은 그냥 형, 동생으로 가끔 안부 따위를 주고받고 있었고, 도형과의 관계도 알고 있으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이었다. 몇 해 전에 배우로 전향해서 지금은 회사가 다른, 3기수 위 선배. 규빈이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 그가 특별 게스트로 같이 무대에 선다고 한다. 


그를 마주한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그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엔 많이 사랑했고, 많이 상처받아서 다시는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선배와 도형의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저와는 죽이니 마니 으르렁 대면서도 말로만 그랬지만 도형과 그 선배는 주먹질을 하면서 싸운 적도 있었으니 혹여나 두 사람이 마주쳐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길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도형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은 웃지 못했다. 그 자식과 규빈이 마주치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예전에 규빈과 그 자식이 만날 때, 그 자식이 바람피우는 걸 도형이 목격했었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지만 그 당시 갓 데뷔해서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아이돌과 다정하게 그 자식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다음 날, 도형을 불러내 입을 함부로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오히려 뻔뻔하게 구는 행동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려버렸었다. 그 일을 규빈은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본 무대가 있기 전날, 리허설을 하기 위해 쇼가 이뤄질 현장을 찾았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규빈의 복잡한 머리를 알고 있다는 듯 규빈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입술에 짧게 촉, 입 맞추었다. 


"성질 죽이고, 응?" 

"자기나 잘해." 

"내가 뭐. 근데 넌 왜 그 선배랑 그렇게 안 좋았던 거야?" 

"그냥, 생긴 거부터 재수 없잖아. 하여간 보는 눈 겁나 없었어. 한규빈." 

"뭐래. 그래, 나 보는 눈 없어서 지금 너 만나고 있다!" 

"나는 빼야지. 나 말곤 다 별로였어." 

"뭔 자신감이야." 

"하하. 내려, 가자." 


차에서 내려 들어간 현장은 아직 어수선했다. 의자들도 한곳에 쌓여 있었고, 조명 선 이라든가 장비들이 아직 정리가 덜 된 상태였다. 무대 뒤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며 본 무대 때 입을 의상들을 체크했다. 


"어? 오빠들 왔어요? 규빈 오빠 의상들은 이쪽, 도형 오빠는 여기."


그때, 듣고 싶지 않았던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그가 보였다.


"오랜만이다."  

"…."

"이제는 선배를 보고도 인사도 안 하냐?" 

"‥ 안녕하세요." 

"우리 규빈이 인물이 더 빛나네. 김도형, 너는 배우 한다더니 입에 본드라도 칠했냐? " 


언제부터 선후배 하며 지냈다고 선배니 뭐니 하며 꼴에 무게 잡고 얘기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헤어진 후 마주쳐도 무시하고 회사를 옮기면서는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던 게 누구였는지 저 나쁜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도형이 규빈의 옆으로 와 곁에 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둘이 못 잡아 먹어 안달이더니 용케 여태 한솥밥 먹고, 아직도 얼굴 맞대고 사나 보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요,  오랜만에 무대에 서시려면 바쁘실 텐데, 예전처럼 무대에서 실수하시면 무슨 망신입니까. 그래도 모델 출신인데." 

"뭐?" 


도형이 예전 그의 실수를 들먹거리며 조소를 흘리며 말하자 발끈해서는 주먹을 쥘 때, 김혁이 규빈과 도형의 가운데 서며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뭐해요, 형들?" 

"손 안 내리냐?" 

" 거 좀, 언제까지 저한테 날 세울 거예요? 규빈 형, 나 무서워."

"분위기 파악 좀 하지?" 

"왜? 무슨 일 있어? 근데 이 분은 누구?" 


모델 때도, 연기자로서도 딱히 내놓으라는 작품 없이 잔잔하게 얼굴만 알리고 활동을 하는 그를 보면서 김혁은 그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인상을 쓰며 화를 누르는 목소리로 규빈에게 툭 한마디 던지고서는 돌아섰다. 


"너 나중에 나 좀 보자, 오랜만에 회포 풀어야지?" 

"오늘 규빈 형은 나랑 놀 건데, 대기표 뽑고 줄 서요. 순서가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에 말하고는 재밌다는 듯 웃는 김혁의 손을 '탁' 쳐냈다. 


"너한테도 돌아갈 순서 없다." 

"에이, 그래도 옛정이 있지. 그쵸? " 

"장례식장 예약해두고 까부는 거냐?" 

"혀엉, 나 좀 살려줘." 


김혁은 규빈의 뒤로 가 연하답게 칭얼대듯 애교를 부리자 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죽어. 너도, 너도, 저 새끼도 셋 다 꺼져 버려."

"거기에 나는 왜 끼는 거지?"

"아, 몰라. 다 꺼져버려. 머리 아파." 


규빈은 다 귀찮다는 듯 둘을 남겨두고 무대를 보기 위해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는 남은 두 사람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지고 규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저 새낀 뭔데 규빈 형한테 보자는 거예요?" 

"있어, 쓰레기 새끼. 잘 감시해라. 한규빈 근처도 못 가게." 

"흐음, 그건 어렵지 않은데, 언제부터 저한테 반말을?" 

"너도 한대 패 주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 그만 까불고."

"에이, 진짜 저한텐 인제 그만 날 세우셔도 되는데. 와- 지난번 촬영 땐 저 얼굴 뚫리는 줄 알고 지릴뻔했어요." 

"꺼져. 노닥거릴 시간 있으면 가서 연습이나 해." 


도형은 김혁을 지나쳐 규빈이 간 곳으로 향했다. 무대 위, 뒤 꼼꼼하게 살피고 있는 규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도형도 무대를 살폈다.


"흐음, 생각보다 동선이 기네." 

"응, 옷 갈아입을 때 정신없겠다." 

"무슨 걱정이야, 탑모델 한규빈이." 

"그건 뭐 그렇지만." 

"잘 할 거면서 걱정은, 그나저나 자기랑 같이 런웨이를 걷는 게 이게 마지막이려나. 이젠 후배들한테 물러줘야 할 때니." 

"그럴 수 있겠네. 너는 연기생활로 바빠질 거고 나는 뭐 먹고 사냐 이제." 

"자기는 내 사랑 먹고 살아. 오빠 능력 있다? 우리 자기 먹여 살릴 능력 있다고." 

"나 많이 먹을 건데? 모델 관두면 그동안 못 먹은 거 다 먹을 건데?" 

"얼마든지, 오빠만 믿어." 

"크흡, 받아주니까 신났지? 어? 진짜 끝도 모르네. 1절만 해라, 1절만." 


규빈이 팔을 접어 팔꿈치로 도형의 복근을 푹 찌르자 배를 감싸 으윽, 하며 엄살을 부리면서 상체를 접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규빈은 도형을 두고 돌아서 의상이 있는 곳으로 가 처음 입을 의상을 갈아입었다. 리허설도 대충 하는 법이 없는 규빈은 실전처럼 의상을 갈아입으면서 시간을 체크하고, 동선을 체크했다. 도형의 말마따나 어쩌면 이런 런웨이를 또 걸을 일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신경 써서 체크했다. 도형은 그런 규빈을 보며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규빈도, 저도, 남들보다 두 배, 세배 더 노력해서 올라온 자리, 도형도 연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모델이란 직업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모델계 탑의 자리에서 서로 1, 2위를 다투며 올라온 자리.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이 노력하는 저 모습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신의 동선뿐만 아니라, 김혁과 후배들의 동선까지 챙겨 알려주고 워킹 자세를 잡아주는 규빈은 정말 뼛속까지 모델이고 본인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도형은 규빈을 보면서도 그 개자식 또한 주시했다. 혹여나 규빈의 그림자라도 밟으려 하면 그 다리를 분질러 버릴 기세로, 저 자식이 올 줄 알았더라면 아쉽긴 해도 애초에 안 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개수작만 부려봐. 어디. 진짜 두 번 다시는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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